30. 뒤바뀐 거래의 주체2021.07.12.
메리벨 고아원의 시찰이 끝난 건 땅거미가 질 무렵이었다. 아이들은 공작 일행이 떠나는 것을 무척 아쉬워했다.
“다음에 또 오셔야 해요!”
“꼭이요!”
아이들은 란델과 오스턴보다도 오늘 처음 본 실비아에게 더욱 매달렸다. 그 모습을 본 오스턴이 황당하다는 듯 혀를 찼지만, 실비아는 설핏 웃고는 알았다고 답해주었다. 아이들에게는 상대적으로 거부감이 덜했다. 물론 아이들도 인간인 이상 어느 정도의 이기심을 지닌 건 어쩔 수 없지만. 적어도 아직은 그 이기심 탓에 누군가를 해치려 드는 눈을 하고 있지 않아서였다. 아이들과 인사를 나눈 이후 일행은 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차에 올랐다. 란델과 실비아를 태운 마차는 조용한 숲길을 가로질렀다. 다각거리는 말발굽 소리만 울리던 와중, 란델이 심호흡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실비아.”
“네.”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뭔데요?”
왜인지, 지난 며칠간 서먹하게 굴던 실비아는 다시 전처럼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그것이 제 자는 얼굴 덕인 줄 모르는 란델은 의아함을 느꼈지만, 곧 상념을 갈무리하고 말했다.
“아이는 안 된다고 했었죠.”
그렇게 내뱉는 순간 거짓말처럼 실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것을 본 란델은 가슴 한구석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으나 마음을 애써 다잡았다.
“후계자가 필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저…….”
“…….”
“당신은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 듣고 싶습니다. 꼭 아이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도, 당신의 이야기라면 무엇이든.”
“…….”
“알고 싶습니다.”
란델은 언뜻 애원하듯 말을 맺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처럼 애처로운 눈빛에, 실비아는 찰나 숨을 멈추었다.
‘……또.’
란델이 저런 눈으로 자신을 볼 때마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이었다. 실비아는 입 안쪽 살을 짓씹어 이성을 되찾고는 그림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의 미소는 완벽했으나 온기가 없었다.
“란델.”
“예.”
“우리에게는 지금의 이 정도 거리가 적당해요.”
분명 지난번에 선을 그어두었던 것으로 꽤 상심했을 줄 알았는데. 란델은 의외라고 느껴질 만큼 금방 실망을 갈무리하고 또다시 거리를 좁히려 들었다.
‘하긴, 글레버 후작의 일도 그랬으니.’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에, 새삼 란델이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여실히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그 강인함을 꺾어야 했다. 실비아는 란델과 자신의 좌석을 눈짓하며 부드럽게 입매를 늘였다.
“지금처럼 마주 본 채로, 닿지는 않고. 서로 간간이 장난도 쳐 가면서 가볍게 웃을 수 있는.”
“…….”
“당신과 나는 딱 그런 관계가 어울려요.”
신의 눈에 띌 만큼 멀어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가까워지지도 않고. 우연히 가는 길이 겹쳐 만나게 된 여행객처럼. 함께 있을 때는 웃고 떠들며 장난치는 사이이지만. 언젠가 서로의 목적지를 향해 떠나야 할 순간이 오면 홀가분하게 헤어질 수 있게. 우리 사이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란델은 그녀의 말뜻을 알아듣고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실비아.”
“무도회 준비로도 바쁜데 종일 바깥에 나와 있었더니 조금 피곤하네요. 실례할게요.”
실비아는 무언가 더 이야기하려는 란델의 말을 막고는 눈을 감아버렸다. 이대로 그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다가는 또다시 말려들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
란델은 무릎 위로 주먹을 세게 그러쥐었다. 그 힘에 손등의 핏줄이 불거질 정도였다.
-우리에게는 지금의 이 정도 거리가 적당해요.
조금 전 실비아의 말은 명백한 거절이었다. 좁은 마차 안, 가깝고도 멀게 마주 앉아 있는 지금처럼. 자신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은 채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이 좋다는 거절. 란델 역시 실비아의 영역을 강제로 침범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외려 평소의 그였다면 상대가 다가오지 말라는 말을 내뱉자마자 곧장 뒤로 열 걸음쯤을 물렸을 것이다. 하지만…….
“…….”
란델은 눈을 감고 있는 실비아를 가만히 응시했다. 처음에는 자는 척이었지만, 이내 피로로 인해 잠든 것인지 차츰 숨소리가 깊고 고르게 퍼졌다. 마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그녀의 머리가 벽에 가볍게 부딪혔다. 란델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 그녀의 머리를 제게 기대게 했다.
“음…….”
실비아는 마차의 벽과 달리 흔들림 없고 단단한 그의 어깨가 마음에 든 것인지 기분 좋은 한숨을 내쉬고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란델은 그녀의 얼굴 위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조심히 넘겨주며 중얼거렸다.
“그런 말을 들었는데도 도저히 포기가 안 되면.”
“…….”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애초에 답을 구하고자 던진 물음이 아니었으니 돌아오는 것은 정적뿐이었다. 란델은 자꾸만 실비아의 얼굴 주위를 배회하는 손을 가까스로 거두어들였다.
가라앉은 기색의 연녹색 눈이 그녀의 얼굴을 시야에 가득 담았다.
‘실비아가 바라는, 내가 가진 것이 몸뿐이라면…….’
애초에 거절당할 것을 각오하고 꺼낸 말이었기 때문에 란델은 금세 마음을 갈무리했다. 처음에는 분명 마음 없이 저와 잠자리를 가지려는 실비아의 태도가 속상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실비아가 제 몸이라도 원한다는 것이 다행으로 느껴졌다. 그녀가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지는 않다는 뜻이니까. 그가 결연한 얼굴로 다짐했다.
‘그것이라도 이용해서, 노력해야겠지.’
자신의 몸을 건 거래를 통해서 실비아를 유혹해보는 수밖에. 그리고 란델은 그것이 본인의 예상보다도 극적인 효과를 내는 방법이었다는 걸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되었다. * * * 며칠 후. 마침내 데뷔탕트 무도회 당일이었다. 실비아는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성을 둘러보고, 그 이후로는 무도회의 시작 직전까지 치장에 매진했다. 오늘 무도회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처음으로 사교계에 데뷔하는 어린 영애, 영식들이었다. 데뷔탕트를 치르는 이들을 배려하기 위해, 다른 참석자들은 되도록 눈에 띄지 않는 예복을 착용하는 것이 예의였다. 하여 실비아 또한 연한 노란색의 드레스를 갖춰 입고, 머리카락을 말아 목덜미 위쪽에 동그랗게 고정했다. 평소보다 한층 단아한 모습이 된 그녀가 무도회 시간에 맞추어 방을 나섰다. 미리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던 란델이 그녀를 무도회장까지 에스코트했다. 그 또한 데뷔탕트를 위해서 머리를 빗어 넘기고 차분한 남색의 예복 재킷을 걸친 채였다. 란델은 무도회장으로 들어설 때 실비아에게 작게 속삭였다.
“그 드레스, 잘 어울립니다.”
“고마워요. 당신도 남색이 잘 어울리네요. 물론 제일 어울리는 건…….”
“부인.”
“지금 옷인 것 같다고요. 이 말도 하면 안 되는 거였나?”
란델이 질책하듯 목소리를 낮추자 실비아는 장난스럽게 말을 바꾸었다. 그는 그 모습에 결국 픽 웃어버렸다. 두 사람은 암묵적으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편안한 웃음을 띤 채로 무도회장 가운데로 향했다. 무도회의 주최자인 공작 부부가 축하를 겸한 첫 춤을 추고 나면, 본격적으로 데뷔탕트가 시작된다. 실비아와 란델은 간만에 마주 보고 서서 서로의 허리와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윽고 음악이 시작되고, 그들은 익숙한 몸짓으로 발을 떼었다. 춤이 이어짐에 따라 남빛 재킷과 연한 노란색의 드레스 자락이 부드럽게 퍼지며 꽃잎 같은 곡선을 그려냈다. 데뷔탕트는 사교 시즌, 즉, 결혼 시장의 개업을 알리는 첫 행사였다. 마냥 마음 놓고 즐길 수 없고 어느 정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란델과 실비아의 모습은 그러한 사실을 잠시나마 잊게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란델은 따뜻한 눈으로 실비아를 바라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실비아.”
“네?”
“혹시 당신이 결혼식 다음 날에 제안했던 거래, 아직 유효합니까?”
실비아는 그 말에 멈칫하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거래?’
그녀가 결혼식 다음 날 제안한 거래라면.
-제가 원할 때 손을 잡을 수 있는 조건으로, 그때마다 당신이 원하는 한 가지를 들어줄게요.
실비아가 란델에게 닿게 해주는 조건으로, 그가 원하는 것을 하나씩 들어주기로 했던 것일 텐데.
‘지금에 와서는 유명무실해지긴 했지만.’
그조차 란델이 실비아에게 진심이 된 이후로는 아예 머릿속에서 지워내다시피 했던 일이었다. 실비아에게 필요한 것은 사이좋게 지내는 듯 보이는 ‘겉모습’뿐이지, 그의 마음이 아니었으니까.
‘뭘 하려는 거지.’
어쩐지 란델이 요 며칠 이상할 만큼 잠잠하다 싶더니. 뭔가 꿍꿍이라도 꾸민 걸까. 실비아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렇죠.”
“그렇다면.”
란델은 선뜻 말을 꺼내기가 어려운 것인지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이윽고 크나큰 결심을 한 듯한 얼굴로, 그가 진지하게 말문을 뗐다.
“나중에 5분 동안 저를…… 만질 수 있게 해드릴 테니 하루만 제게 시간을 내어주십시오.”
“콜록.”
실비아는 사레 들렀다. 그 바람에 휘청거리는 그녀를 란델이 급하게 지탱했다. 그녀는 그들이 무도회장의 중심에 있음을 상기하며 필사적으로 숨을 가다듬으려 했으나 당황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 콜록, 잠깐만요. 뭐라고요?”
“5분 동안 제 몸을 내어드릴 테니 하루를 내어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요. 갑자기 왜 그, 몸을…….”
실비아는 그간 마음이 없으면 안 된다며 저를 막던 란델의 모습을 기억했기에 황망히 중얼거리다가 멈칫했다. 그녀는 제게 시선이 고정된, 선명한 연녹색 눈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역시 아직…… 포기한 게 아니었구나.’
란델의 눈에서는 미처 꺼지지 못한 불씨 같은 감정이 잔잔히 일렁이고 있었다. 그 감정이 달갑지 않기도, 이상하게 울컥하기도 했다. 실비아는 한발 늦게 평정을 되찾고 미간을 좁혔다.
‘받아들여야 하나.’
아무래도 란델은 실비아가 제게 마음을 열게 하려고 노력하는 듯했다. 그간 자신이 정상적인 부부처럼 보이기 위해 초야와 스킨십에 집착했으니, 그것을 조건으로 내거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한 것이겠지. 실비아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힐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화려한 샹들리에 너머로 신의 엄중한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어차피 내게 필요한 건 겉모습이고, 내가 란델과 같은 마음이 될 일은 없을 테니까.’
어차피 이 거래는 실비아가 죽는 순간 끝난다. 자꾸만 심심찮은 사건이 벌어지고, 또 인간 행색을 한 마족까지 나타난 걸 보면 죽음이 머지않아 보였다. 그러니 그때까지, 원만해 보이는 부부관계를 위해서 잠시 어울려 주는 것쯤은 상관없겠지.
‘물론 가끔은…… 조금 혹하긴 하지만.’
실비아도 사람인지라, 가끔 란델의 몸에 본능적으로 끌릴 때가 있기는 했으나. 자신에 비해 새파랗게 어린 저 청년에게 마음까지는 내어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머릿속으로 치열하게 계산을 끝마친 실비아가 고개를 들었다. 정작 패기 넘치게 거래를 제안한 란델은 초조한 얼굴이었다. 그것이 가소롭고도 귀엽게 느껴져서 실비아는 설핏 미소했다.
“좋아요.”
그녀의 대답을 들은 란델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피어났다. 거래의 주체가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
“염병.”
고상한 무도회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욕설에, 무도회에 참석했던 영식이 흠칫하며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금방이라도 누구 하나를 물어뜯을 것처럼 사나운 얼굴을 한 필리아가 있었다. 이글거리는 푸른 시선은 무도회장 저편, 갓 데뷔한 영애들에게 둘러싸인 제프리를 향해 있었다. 영애 중 한 사람이 제프리에게 수줍은 얼굴로 무어라 말을 건넸다.
“얼씨구.”
제프리는 정중한 미소를 띠고는 그에 답했다.
“절씨구?”
필리아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애써 다스리며 그 광경을 노려보았다.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테이블 위에 놓인 샴페인 잔을 들어 술을 벌컥 들이켰다.
‘쟨 왜 일일이 답을 해주고 있어? 저렇게 상냥하게 대해주면 없던 마음도 생기겠다.’
벨포르 기사단 중에는 준남작, 혹은 귀족 가문의 자제 출신인 청년들이 꽤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툭하면 마물과 마족을 상대하러 다니느라 바빠 제대로 된 약혼자조차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다시 말하자면, 갓 사교계에 데뷔한 영애들에게는 가장 탐나는 신랑감이라는 소리였다. 란델이 주군인 만큼 어느 정도의 인품이 보장되어 있으며, 기사로서의 명예와 신분까지 갖췄으니 인기가 없을 수가 없었다. 그래, 분명 머리로는 아는 사실인데.
‘왜! 다른 놈들 놔두고! 하필 제프리한테만! 몰리냐고!’
필리아는 결국 분을 이기지 못하고 잔을 쾅 내려놓았다. 그녀가 형형한 눈으로 제프리를 향해 발을 떼려는 순간,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