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동병상련2021.07.15.
“여기 있었구나, 필리아.”
“……아빠?”
필리아는 반사적으로 상대의 손을 비틀려다가, 그 상대가 세이크린 후작인 걸 깨닫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후작의 눈이 어딘가 묘하게 초점이 나가 있는 듯 보여 고개를 갸웃했다.
‘술을 많이 드셨나?’
세이크린 후작이 필리아의 목덜미에 소름이 끼칠 만큼 인자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아, 아니 그게.”
“이럴 게 아니라 무도회가 끝나기 전에 공작님과 춤이라도 한 곡 추거라.”
“네? 제가 왜……!”
“뭘 그리 멀뚱히 서 있어. 어서 가자!”
“아빠?”
세이크린 후작은 필리아가 질색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끌고 사람들 사이를 지나쳤다. 필리아는 란델을 향해서 거침없이 나아가는 그의 뒷모습에 대고 의아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대체 왜 저러시는 거지? 아무리 술을 많이 드셔도 이런 적은 없었는데…….’
세이크린 후작은 란델과 필리아가 서로 본체만체하는, 사심 한 점 없는 소꿉친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그는 필리아의 손목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있건 말건, 어떻게든 그녀를 공작과 춤추게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한 것처럼 굴었다. 필리아는 혼란에 잠긴 채 후작에게 끌려갔다. 후작은 단상 위에 서 있는 공작 부부에게 다가가 살갑게 인사했다.
“간만에 얼굴을 뵙습니다, 공작님, 공작 부인. 제 딸 필리아가 인사는 올렸는지요?”
그 말에 란델과 실비아가 고개를 돌렸다. 란델이 반가운 기색으로 그를 맞이했다.
“아, 세이크린 후작. 필리아도 왔군.”
“제 여식이 불민하여 인사도 올리지 않은 모양이군요. 대신하여 사과드립니다.”
“아니, 새삼 뭐…….”
란델은 떨떠름히 말끝을 흐리며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아직도 필리아에게 화가 나 있는 건가.’
필리아는 란델과 워낙 어렸을 적부터 함께한 소꿉친구였기에, 이런 연회가 있을 때 딱히 서로 인사를 주고받지 않는 편이었다. 란델 또한 엎드려 절 받는 식의 인사를 굳이 받고 싶지 않았고, 필리아는 그가 공작이라는 이유로 그에게 고개 숙이기를 싫어했으니까. 세이크린 후작도 그것을 잘 알고 있기에 늘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차곤 했지만 이렇듯 직접적으로 면박을 주지는 않았다. 란델이 후작의 태도에 의구심을 품는 사이. 세이크린 후작이 활짝 웃으며 필리아의 등을 떠밀었다.
“그보다 제 딸이 아직 춤을 한 곡도 추지 않아서 말입니다. 공작님께서 함께해주시면 무척 감사할 것 같습니다.”
“아빠, 나 진짜 필요 없는…….”
“조용히 하거라. 공작님 앞이다.”
후작이 엄한 목소리를 내자 필리아가 입을 꾹 다물며 눈을 굴렸다. 란델은 후작이 이렇게까지 부탁하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에 필리아와 춤을 춰야, 하나 싶었지만. 적어도 실비아가 있는 자리에서는 그녀가 아닌 이성과 어울리고 싶지 않아 망설였다. 그때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실비아가 방긋 웃었다.
“다녀오세요. 이 이상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듯한데.”
그 웃음이 어딘지 스산했다. 란델은 난감하게 후작과 실비아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좋은 시간 보내고 와요. 세이크린 후작 영애도.”
“……예, 공작 부인.”
실비아의 부드러운 인사에 필리아는 얼굴을 구기지 않으려 노력하며 란델의 손을 잡았다. 란델 또한 최대한 필리아와 손을 마주 대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아! 방금 손바닥 닿았어, 기분 나빠.”
“나도 마찬가지야.”
두 사람은 미묘하게 얼굴을 굳힌 채로 속닥거림을 주고받으며 플로어로 나갔다.
“…….”
실비아는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미세하게 눈매를 구긴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제 곁에서 싱글벙글 웃고 있는 세이크린 후작의 얼굴이 보였다. 실비아가 미소 띤 얼굴로 혀에 날을 세웠다.
“기분이 그렇게 좋나, 후작? 그러다가 입이 찢어지지는 않을지 걱정이 될 정도인데.”
“하하, 자식이 언제나 가장 좋은 것을 가지길 바라는 것은 모든 부모의 바람이 아니겠습니까. 이리 보니 참으로 잘 어울리는군요.”
하지만 세이크린 후작은 다소 해맑게 보일 정도로 환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도발하는 건가?’
실비아는 심각하게 고민해보았다. 일전의 연회에서 란델과 함께 있던 세이크린 후작은 조금 더 진중한 모습이었던 것 같은데. 란델과 필리아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꼴을 보자니 아닌 것 같았다. 실비아는 우선 무도회장에서 멀어져 마음을 다스리기로 했다.
“나는 잠시 바람을 쐬고 오겠네. 실례하지.”
“예, 살펴 가십시오.”
세이크린 후작은 여전히 란델과 필리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건성으로 예를 갖추었다. 그녀는 이질감을 느낀 듯 잠시간 후작을 빤히 응시하다가 이내 몸을 돌려 테라스 쪽으로 사라졌다. 그로부터 얼마 후.
“……윽!”
세이크린 후작이 돌연 인상을 쓰며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머릿속을 통째로 재조립하는 것 같은 통증에 한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하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통증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던 것만큼이나 빠르게 물러갔다. 그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가 방금 뭘…… 하고 있었지?”
누군가 기억의 한 부분을 문질러 놓은 듯 머리가 온통 흐릿한 느낌이었다. 후작은 이후로도 한동안 길 잃은 아이처럼 고개를 두리번거렸으나, 그에게 상황을 설명해줄 만한 사람은 주변에 남아 있지 않았다.
“착각인가? 그보다 필리아 저 녀석은 웬일로 공작님과 춤을 다 추고 있는 건지……. 사윗감이나 좀 데려오면 좋겠구먼.”
하여 그는 찜찜한 기분을 애써 지워내고는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 * * 란델과 필리아는 음악이 끝나자마자 질색하며 거리를 벌렸다.
“다시 한번 느낀 거지만 너랑 나는 정말 안 맞아.”
“동감이다.”
필리아는 란델의 손이 잠시나마 닿았던 곳을 탁탁 털어내며 툴툴거렸다. 란델은 재킷에 은근슬쩍 손바닥을 닦아냈다. 두 사람의 춤은 조화로움과는 영 거리가 멀었다. 란델도 필리아도 춤 솜씨가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성격이 지독하게도 맞지 않을 뿐. 춤이란 자고로 상대방과의 합을 맞춰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란델과 필리아는 성격도, 춤을 이어가는 방식도 완전히 달랐다. 다른 사람들처럼 그러한 차이를 연습으로 극복해내려는 노력도 일절 하지 않았다. 그러니 필연적으로 관리하지 않은 문처럼 삐걱거림이 생길 수밖에. 란델은 별다르게 합을 맞춰보지 않았음에도 부드럽게 이어지던 실비아와의 춤을 상기했다. 그러자 어쩔 수 없이 조금 전의 춤이 한결 더 끔찍하게 느껴졌다.
‘밟혔으면 뼈가 나갔겠지.’
란델이 어깨를 부르르 떨며 필리아의 구두에 발등이 찍힐 뻔한 기억을 털어낼 때, 그녀가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우리 아빠가 오늘 대체 왜 저러는 거지? 미치셨나?”
“필리아, 아무리 그래도 부친께 그런 말은.”
“너도 그렇게 생각하잖아. 발뺌할 생각은 마라.”
“…….”
필리아가 으름장을 놓았다. 란델은 제 속내를 정확히 지적하는 그녀의 말에 잠자코 입을 다무는 것을 택했다. 이 일을 항의하려 후작을 찾던 필리아가 다시 발끈했다.
“그나저나 저것들은 아직도 저기에 붙어 있네.”
“무슨 소리야?”
란델이 필리아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몸을 돌리며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필리아는 그에 답하지 않고 눈을 세모꼴로 뜬 채 제프리를 노려보다가 불쑥 입을 달싹였다.
“야.”
“왜.”
“너 저 여자애들이랑도 춤 좀 춰주면 안 돼? 아무래도 떨굴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필리아가 손가락으로 제프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영애들을 가리켰다. 란델이 제프리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제프리 주위에 있는 영애들을 말하는 건가?”
“응.”
“왜?”
“좋아하니까.”
“그렇군, 아무튼 싫어. ……아니, 잠깐.”
단호히 거절부터 내뱉었던 란델이 멈칫했다. 그가 뒤늦게 눈을 크게 떴다.
“필리아 네가 저 영애들을 좋아한다고?”
“미쳤냐? 제프리 말이야!”
“아, 제프리를 말하는 거였군. 뭐?”
란델은 한 번 더 당황했다. 필리아는 역시 애가 어딘가 좀 모자란 것 같다며 측은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란델은 그제야 필리아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했다.
“무, 무슨. 대체 어떻게 된…….”
“그것까지는 알 거 없고. 아무튼 조금만 도와주라. 응? 별일 아니잖아.”
필리아가 간곡하게 부탁했으나 란델은 이내 충격을 갈무리하고는 서늘한 얼굴을 했다.
“안 돼.”
“왜!”
“이미 임자가 있는 몸이라서.”
그 말에 필리아는 드러내놓고 코웃음 쳤다.
“정략혼, 그것도 왕이 억지로 밀어붙인 결혼인데 임자는 무슨.”
“말조심해, 필리아 세이크린. 사정이 어찌 되었건 실비아는 이미 내 아내이자 벨포르 공작 부인이야. 네가 함부로 대할 상대가 아니라는 뜻이다.”
란델이 한순간 살기마저 내비치며 싸늘하게 일갈했다. 필리아는 그에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그녀는 평소 란델을 떠돌이 강아지 정도로 여기긴 했지만, 이럴 때는 그가 영주라는 것을 절감하곤 했다. 필리아는 조금 전 자신이 란델의 ‘선’을 건드렸음을 눈치채고 입을 다물었다. 란델은 그러한 기색을 읽고는 한숨을 삼켰다. 필리아에게 악의가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는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비스듬히 고개를 튼 채 덧붙였다.
“……그리고 이젠 내가 진심이라서.”
“……허.”
필리아는 황당함에 입을 벌렸다. 물론 란델이 실비아를 마음에 담았다는 것쯤은 진작 눈치채고 있었지만. 그것을 자각하고도 그런 행동을 계속하고 있었던 줄은 몰랐다. 그녀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너, 일단 국왕 측 사람을 경계해야 한다는 영주의 의무는 차치하고. 저 여자…… 공작 부인은 너를 좋아한대?”
필리아의 물음에 란델이 망설이다가 자그맣게 답했다.
“……차였어.”
“뭐? 이미 고백도 했어? 이거 순 사랑에 미친놈 아니야?”
“말이 좀 심한데.”
“아, 미안. 너무 놀라서. 그건 그렇고 차였으면 단념을 해야지. 왜 아직도 그러고 있어.”
“그러는 너는. 내가 자세한 사정을 모른다지만 제프리에게 차인 거나 다름없는 상태 아닌가? 그래서 직접 다가가지 못하고 내게 영애들을 치워 달라 부탁하는 거고.”
“…….”
“…….”
정곡을 찔린 필리아가 입을 다물었다. 란델도 말이 없었기에 두 사람은 잠시 동병상련의 침묵을 나누었다.
한동안 실연의 아픔을 다스리던 필리아가 불현듯 머리를 스친 생각에 눈을 반짝였다.
“그러면 어차피 차였으니 더 잃을 것도 없잖아. 우리끼리 협력해서 질투라도 유발해 보는 건 어때?”
“미쳤나?”
“사랑을 쟁취하는 데 이 정도 고난과 역경, 어려움과 수치는 있어야 하는 법이지. 너도 공작 부인이 널 좋아했으면 좋겠다며.”
란델은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곧 허허로운 웃음을 내비친 그가 단호히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서 억지로 좋아하는 마음을 끌어내고 싶지는 않아.”
“…….”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 할 일은 꾸준히 진심을 표하는 것밖에 없는 것 같군.”
“진심…….”
“간다.”
란델은 필리아의 어깨를 한번 툭 치고는 실비아를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말에서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그 자리에 서 있던 필리아가 이윽고 고개를 당당히 치켜들었다.
“그래, 도덕적인 선을 지키면서 포기하지 않고 구애하는 건 나쁜 일이 아니지. 아직 제대로 차인 것도 아니면서 혼자서 청승을 떨 이유도 없고.”
그리 중얼거린 필리아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제프리는 영애들에게 둘러싸인 채 난감한 웃음을 띠고 있다가 다가오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직후 벼락을 맞은 것처럼 굳어졌다.
“어쩐지 곤란해 보이시네요, 신사분.”
필리아는 자신을 알아보고 주춤 물러서는 영애들을 향해 의미심장한 시선을 던지고 제프리를 빤히 응시했다.
‘아, 오랜만에 얼굴 보니까 좋다.’
질투로 성을 냈던 것이 까마득한 옛날인 것처럼 마음이 사르르 풀어졌다. 필리아는 기분 좋게 미소 지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으시다면 저와 한 곡 추시겠어요?”
그 말에, 제프리는 한순간 눈부신 것을 바라보듯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야, 너희! 덩치 큰 놈들이 어린애 하나 둘러싸고 뭐 하냐! 부끄러움도 없어?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린 어린 시절, 그리고 지금. 분명 다른 시간대임에도 한결같이 그가 곤란한 순간에 영웅처럼 등장하는 그 모습에. 제프리는 차마 제게 내밀어진 손을 거절하지 못하고 맞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