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똑같은 사람들2021.07.19.
“실비아.”
란델은 무도회장을 헤맨 끝에 실비아가 있는 테라스에 발을 들였다. 그녀를 발견한 그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아, 왔어요?”
실비아는 난간에 몸을 기댄 채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란델은 그녀의 어깨에 제 재킷을 벗어 둘러주었다.
“바람이 찬데 왜 나와 계십니까.”
“찬 공기를 좀 쐬려고요. 세이크린 후작 영애는요?”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며 사라지더군요.”
다시 생각해보아도 충격적이었기에 란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설마하니 필리아가 제프리를 좋아할 줄이야.’
일전에 필리아가 북부로 돌아왔던 날, 제 목에 팔을 휘감고 웃으라고 강요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던 듯했다. 당시에는 그녀가 뭘 잘못 먹었나 싶었는데.
‘대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기억을 되짚어 보아도 딱히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란델이 어쩔 수 없이 의구심을 한쪽으로 밀어놓는 사이, 실비아는 커튼 사이로 비치는 무도회의 전경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이 서 있는 테라스로 무도회장의 불빛이 흐리게 비쳐들었다. 불빛, 사람들, 그들의 옷에 달린 장식 등이 만들어내는 반짝거림이 마치 별 같아 시선을 끌었다. 란델은 자연스럽게 실비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가 그 모습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문득 떠오른 기억에 그가 물었다.
“아쉽지는 않으십니까?”
“뭐가요?”
“데뷔탕트 무도회 말입니다. 치르지 않으셨다고 알고 있는데.”
란델은 실비아가 스물두 해 동안 데뷔탕트조차 치르지 않고 저택, 아니 침대에서만 지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선천적으로 몸이 약하다는 이유를 들어 데뷔탕트에 불참했다지. 그 이후 그녀는 란델과 결혼했고, 곧장 공작 부인으로서 가신들의 환영 연회에 참석해야 했다. 일생에 단 한 번뿐이라는 데뷔탕트를 경험할 기회를 놓친 것이다. 란델은 그것이 신경 쓰였다. 실비아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차피 무도회야 지금도 질리도록 겪고 있는걸요. 굳이 데뷔탕트 무도회까지 더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녀는 진심이었다. 이 이상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면 란델과 사이좋게 보여야 하건 말건 침대에 몸을 던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 실비아는 멈칫했다.
“하지만 그때의 그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감정도 있는 법이니까요.”
잔잔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실비아는 그 목소리에 홀린 듯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자신을 보며 애틋하게 웃음 짓는 얼굴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저는 당신이 인생에서 빛나는 순간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
란델이 진심을 가득 담아 나직이 건넨 말에, 실비아는 일순 말을 잃었다.
‘저런 낯간지러운 말을 잘도…….’
꾸밈이라고는 일절 없는 말이었기에 그 안에 담긴 마음이 더더욱 묵직하게 와닿았다. 란델의 말에 짧게 덜컥인 심장이 반 박자 늦게 제자리를 찾았다. 어쩐지 볼이 달아오르는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태연한 척 슬쩍 뺨에 손등을 가져다 대니 열기가 느껴졌다. 실비아는 란델이 자신을 당황하게 했다는 것이 자존심 상해 물음을 되돌렸다.
“……그러는 당신은요?”
“예?”
“데뷔탕트 무도회, 치렀어요?”
“…….”
란델은 찰나 낭패한 얼굴을 했다. 이내 표정을 갈무리한 그가 별것 아니라는 듯 머쓱하게 제 뒷덜미를 쓸었다.
“그때의 저는 갓 작위를 승계받았던지라, 이런저런 일들에 익숙해지는 게 급선무였으니까요. 그 덕에 영민들이 이만큼이라도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는 열심히 말을 이었지만 결국 변명뿐이었다. 실비아가 짓궂게 그 사실을 지적했다.
“당신도 마찬가지네요, 뭐.”
“으음.”
할 말이 없어진 란델이 낮게 침음을 흘렸다. 반박할 말을 찾듯 잠시 고민에 잠겼던 그가 눈을 크게 뜨며 탄성을 뱉었다.
“아.”
그리고 의뭉스러운 미소를 띤 채로 실비아에게 한 발자국 다가섰다.
“그러면 똑같은 사람들끼리라도 기념할까요?”
“……네?”
실비아가 의아하게 눈을 깜박였다. 란델은 말없이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올리고, 오른발을 뒤로 살짝 물려 무릎을 굽히며 예를 갖췄다.
“처음 뵙겠습니다, 플로레트 영애.”
“…….”
“란델 벨포르입니다.”
마치 처음 만난 사람을 대하듯 정중한 태도였다. 그에 란델이 지금 이 자리에서 그들의 데뷔탕트 무도회를 흉내 내고 있음을 깨달은 실비아가 막을 새도 없이 웃음을 흘렸다. 분명 몸을 움직이고, 누군가와 대화를 주고받는 것은 그녀에게 귀찮은 일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란델이라서 그런 것인지, 저 반짝거리는 마음이 탐이 나서 그러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싫지 않네.’
신기하게도 이 우스운 연극에 동참하고 싶어졌다. 달빛이 아름다워 생긴 순간의 변덕일지라도, 적어도 지금만큼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띤 실비아 또한 그에게 완벽하게 예를 갖추어 보였다.
“실비아 플로레트입니다, 벨포르 공자님.”
익숙하지 않은 호칭에 란델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실비아는 결국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그의 손을 맞잡았다.
“본인이 먼저 시작해놓고 어색해하면 어떻게 해요.”
“크흠. 8살 이후로는 들어본 적이 없는 호칭이라…….”
란델은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가까스로 평정을 되찾은 그가 실비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제가 당신께 첫 춤을 청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공자님의 첫 춤도 제가 기꺼이 가져가도록 하죠.”
실비아는 능청스럽게 응수하며 란델의 손을 잡고 그의 어깨에 반대쪽 손을 올렸다. 란델 또한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두 사람은 문틈으로 흘러드는 희미한 불빛과 음악에 의존해 발을 맞춰 움직였다. 사위에 어둠이 깔려 있었음에도 그들의 춤은 물 흐르듯 이어졌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을 읽어내듯 움직인다. 방향, 거리, 호흡마저 한 사람의 것처럼 차츰 닮아간다. 이윽고 음악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그들은 어느새 소년과 소녀로 돌아간 것처럼 즐거이 웃음을 나누고 있었다.
* * *
“글레버 백작님, 저와 춤을…….”
“미안하네, 조금 피곤해서.”
루베아는 벌써 열 번째로 제게 춤을 신청하는 귀족 영식을 싸늘히 쳐내고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얼굴에는 미미한 짜증이 깃들어 있었다.
‘귀찮네.’
루베아는 쏟아지는 업무에 치여 허덕이다가 뒤늦게 데뷔탕트 무도회에 참석했다. 무도회장에 들어서는 순간까지도 그녀의 머릿속은 미처 처리하지 못한 서류로 가득했다. 그래서일까. 루베아는 지금의 본인이 미혼의, 작위를 가진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사실을 깜박 망각했다. 데뷔탕트는 결혼 시장의 시작을 알리는 행사. 아직 약혼자조차 없는 루베아는, 마찬가지로 짝을 찾지 못한 남자들에게 탐나는 신붓감일 것이다.
‘공작 부인은 어딜 간 거람.’
루베아는 한숨을 삼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공작도, 공작 부인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인파에 파묻혀도 눈에 띌 것 같은 사람들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잠시 휴게실에라도 간 건가 싶었다.
‘기다렸다가 인사만 하고 바로 돌아가야겠어.’
파티의 주최자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고 떠나기는 예의에 어긋난다. 루베아는 란델과 실비아가 돌아오면 곧장 인사만 나누고 백작령으로 돌아가리라 다짐하고 그동안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만한 곳을 찾았다. 무도회장은 대체로 밝았지만, 이따금 빛이 미치지 않아 어두운 곳이 있었다. 지금은 음식과 잔이 놓여 있는 테이블 옆, 굵은 기둥 뒤가 그러했다. 루베아는 기둥 뒤를 향해서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마침 춤이 막 시작한 참이라 사람들의 시선이 플로어에 쏠려 있었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며 기둥의 그림자에 한 발을 들여놓던 루베아가 한 인영을 발견하고는 멈칫했다.
“……쯧.”
그녀는 불만스럽게 혀를 차며 제 생각을 정정했다. 저 남자를 여기서 만나다니 운이 지독히도 없는 하루였다.
“승냥이 떼를 피해서 오신 거라면 다른 자리를 찾아보시는 게 어떠십니까. 여긴 이미 제가 차지했거든요.”
오스턴 역시 루베아를 만난 것이 달갑지 않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채 빈정거렸다. 루베아는 매끄럽게 입꼬리를 올린 채 응수했다.
“1골드 드리죠. 꺼지세요.”
“제 몸값이 그보다는 비싸서요. 5골드는 어떠십니까?”
“하여간 천박하게 돈만 밝히는 그 습성은 여전하시군요.”
“싫으면 나가시든가.”
“이곳에 사람의 예를 갖출 줄도 모르는 금수가 있었을 줄이야. 기사를 불러 끌어내기 전에 제 발로 사라지는 편이 좋을 텐데.”
루베아가 싸늘한 눈으로 일갈했다. 보랏빛 눈에 혐오가 어렸다. 오스턴은 지지 않겠다는 듯 그녀를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하여간 저 눈.’
오스턴은 루베아 글레버가 지독히도 싫었다. 여전히 자신이 밑바닥에서 구르던 고아인 양 착각하게 되는 듯한 저 고아한 시선, 우아한 행동, 발걸음마저도 거슬린다. 루베아는 오스턴이 경멸하는 완벽한 ‘귀족’ 그 자체인 여자였다.
‘건방진…….’
한편, 루베아 역시 오스턴을 경멸했다. 그녀에게 오스턴 도슬러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루베아는 귀족으로서 그에 따르는 의무와 명예를 중요시했다. 높은 지위, 뛰어난 재능 등에는 그만한 책임이 따른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가진 게 많을수록 그것을 나누어야 한다는 것은 그녀에게 당연한 상식과도 같았다. 하지만 오스턴에게는 그런 책임 따위 없었다. 그저 본인에게 돈을 주는 사람을 따르고, 돈을 주지 않으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의지로 행동할 줄 모르고 돈에 따라 행동하는 저 행태가 대체 짐승과 다를 게 무엇인가? 저만한 능력의 마법사가 돈에 영혼까지 팔 만큼 수전노라는 사실은 인간의 크나큰 손실이었다. 루베아와 오스턴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팽팽하게 서로를 노려보았다.
“제가 소리를 지르기 전에 눈앞에서 사라지시는 게 어떨까요, 도슬러 님?”
“그렇게 되면 저보다 곤란한 건 글레버 백작님 아니십니까? 무도회장의 온 영식이 백작께 춤을 청하려 몰려들 텐데요.”
“제가 당신보다 사람들에게 호감인 건 당연한 일이죠. 하지만 공작님 직속의 마법사라는 점은 충분히 이목을 끌만하다 생각되네요.”
“같이 죽자는 겁니까? 백작과 함께하는 죽음이라면 정중히 사양하죠.”
“죽는 사람은 하나일 거고, 그건 제가 아니랍니다.”
“망상까지 아주 골고루 갖추셨군. 걸작이시네.”
두 사람이 입에 칼을 문 듯 날 선 말을 주고받고 있을 때였다.
“어머, 글레버 백작님! 도슬러 님도 여기 계셨군요!”
호들갑스러운 목소리가 그들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루베아와 오스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들에게 다가오는 것은 북부에서 가장 수다스럽기로 유명한 세레이드 백작 부인이었다.
“호호, 아까부터 계속 찾았는데. 이런 구석진 곳에 계셔서 미처 못 알아봤네요. 이쪽은 제 딸과 아들이랍니다. 딸아이는 이번에 데뷔탕트를 치렀지요.”
백작 부인은 루베아와 오스턴이 자리를 뜰 새도 없이 그 앞을 가로막고 제 딸과 아들을 소개했다. 그녀의 눈은 먹잇감을 발견한 듯 희번덕 빛나고 있었다.
“……글레버 백작님?”
“도슬러 님도 저기 계시네.”
세레이드 백작 부인의 목소리를 들은 다른 사람들이 하나둘 그들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저 사람들에게 한번 붙잡히면, 적어도 동이 틀 때까지는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위협을 느낀 루베아와 오스턴이 힐끔 시선을 교환했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재빨리 손을 맞잡고 싱긋 웃어 보였다.
“이런. 애석하게도 제가 조금 전 백작님과 춤을 함께하기로 약조를 나눈지라.”
“미안하게 됐네, 세레이드 백작 부인.”
“가시죠, 백작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도슬러 님.”
“저기, 잠깐만……!”
두 사람은 세레이드 백작 부인의 다급한 부름을 못 들은 척하며 플로어로 나섰다. 제각기 입꼬리를 끌어 올린 채 주변을 살피자, 세레이드 백작 부인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이 그들의 춤이 끝나는 순간을 노리겠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오스턴은 유혹을 느낀 듯 중얼거렸다.
“……이동 마법을 사용하면.”
“그랬다가는 당장 내일 온 거리에 소문이 쫙 깔리겠죠. 미혼의 백작과 마법사가 사랑의 도피를 했다고.”
“…….”
“…….”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모두가 돌아갈 때까지 눈앞의 사람과 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한 두 사람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그 표정이 굉장히 닮아 있었으나, 서로는 그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 채 소름이 돋은 손을 맞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