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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처음은 험난한 법 (33/118)

33. 처음은 험난한 법2021.07.22.

실비아는 데뷔탕트 무도회 이후 며칠 동안 침대를 벗어나지 않았다. 절반은 자의였고, 절반은 허약한 몸뚱이의 파업 탓이었다.

16558811008948.jpg‘하긴. 그동안 움직인 걸 생각하면 아직도 몸살조차 나지 않은 게 이상했지.’

그나마 앓아눕지 않고 가벼운 몸살 정도로 그친 건 란델이 열심히 먹인 보양식 덕이 아닐까.

16558811008948.jpg‘그냥 이대로 쭉 쉬고 싶다…….’

실비아는 오랜만에 맛본 휴식이 너무 달콤해 한숨을 내쉬었다. 영원한 안식을 위해서 안식 없는 생활을 이어가야 한다니. 이만한 모순이 또 없었다. 그녀는 두 번은 못 할 일이라 생각하며 혀를 끌끌 찼다. 그렇게 내리 며칠을 잠들었던 실비아는 사용인들의 기척에 간신히 정신을 되찾았다.

16558811008948.jpg‘뭐지?’

지난 며칠간 사용인들은 잠든 실비아를 깨우지 않기 위해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방을 정돈한 후 사라지곤 했다. 하지만 오늘따라 사용인들의 분위기가 굉장히 어수선했다. 실비아는 부스스 상체를 일으키고는 잠기운에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16558811008948.jpg“다들 왜 이리 들떠 있어?”

그 말에 사용인들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실비아가 눈을 뜬 것을 보고는 황급히 침대 옆으로 달려왔다.

16558811008967.jpg“핫, 마님! 일어나셨네요? 저희가 너무 시끄러웠죠, 죄송합니다.”

16558811008967.jpg“죄송합니다!”

16558811008948.jpg“아니, 괜찮아. 그보다 무슨 일이기에 그래?”

16558811008967.jpg“그게…….”

오늘 실비아의 방 청소를 맡은 하녀의 대부분은 나이가 어렸다. 그녀들은 ‘마님께 이런 쓸데없는 얘기를 전해도 되려나’ 싶어 시선을 주고받다가, 입이 근질거렸는지 결국 참았던 말을 다다다 터트렸다.

16558811008967.jpg“글레버 백작님과 오스턴 님께서 사랑을 하고 계신대요! 꺅!”

16558811008948.jpg“……뭐? 누가?”

16558811008967.jpg“이 잡지에서요!”

하녀들은 실비아가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자 신이 나서 꺅꺅대며 종이 하나를 건네주었다. 아마도 길거리의 가십지인 듯한 종이를 받아들자마자 앞면에 커다랗게 적힌 글이 눈에 들어왔다. 「루베아 글레버 백작과 오스턴 도슬러, 열다섯 곡 동안 한 번도 파트너를 바꾸지 않고 춤을 춰…….」  

16558811008948.jpg“으음.”

실비아는 종이 한가득 서술된 루베아와 오스턴의 염문에 옅은 침음을 흘렸다. 글이 어찌나 장황하고 자극적인지 루베아와 오스턴이 이미 결혼을 약속하고 밤까지 보낸 사이로 보일 지경이었다.

16558811008948.jpg‘저번에 루베아가 성에 머물 때, 딱히 그런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실비아는 애매한 웃음을 띤 채 하녀에게 종이를 되돌려주었다. 약간의 조언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16558811008948.jpg“이런 잡지에 나오는 말은 너무 믿지 말고.”

16558811008967.jpg“그럼요. 그래도 두 분께서 마주칠 때마다 강렬한 시선을 주고받으시는 건 사실이랍니다! 제가 몇 번 봤는걸요!”

16558811008967.jpg“맞아, 맞아.”

하지만 한창때의 하녀들은 여전히 볼을 붉히며 꿈꾸는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 믿음 가득한 모습을 보자니 실비아 또한 잠시나마 의구심이 생겼다.

16558811008948.jpg‘……루베아가 오스턴과?’

어쩐지 상상이 안 가는데.

16558811029585.jpg-하하.

16558811029588.jpg-호호.

  머릿속으로 두 사람이 따스한 웃음을 띠고 서로를 바라보는 모습을 떠올리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역시 다시 생각해보아도 헛소문인 것 같다. 실비아는 쓸데없는 생각을 지워내고 뜨거운 물에 몸이나 담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때 하녀 한 명이 물었다.

16558811008967.jpg“아, 참. 그보다, 오늘 주인님과 나들이를 가신다면서요?”

16558811008948.jpg“……아.”

그게 오늘이었나. 며칠 내내 정신을 놓고 잠에 취해 있었더니 날짜 감각도 흐려진 상태였다.

16558811049665.jpg-나중에 5분 동안 저를…… 만질 수 있게 해드릴 테니 하루만 제게 시간을 내어주십시오.

  하지만 약속의 내용을 상기하니 잠이 확 달아나며 현실감이 밀려들었다. 만지게 해주겠다니. 어쩜 저리 발칙한 발상을 해냈는지, 원. 속으로 혀를 끌끌 찬 실비아는 나들이 날이 맞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몽롱하게 풀어져 있던 하녀들의 눈이 일제히 이글이글 타올랐다.

16558811008967.jpg“맡겨만 주세요. 저희가 반드시! 주인님의 다리를 풀리게 해드릴 테니까!”

16558811008967.jpg“아자!”

16558811008967.jpg“저는 델마 님께 마님께서 깨어나셨다고 말씀드리고 물을 받아놓을게요!”

하녀들은 순식간에 역할을 분배하고는 실비아를 이끌었다. 실비아는 며칠 내내 잠에 빠져 있었으니 전보다는 여유롭게 치장을 견딜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그들을 따랐다. 물론 착각이었다. 실비아는 긴긴 치장 시간을 버티다가 무려 다리가 휘청이는 경험을 했다.

16558811008948.jpg‘이 아이들…….’

더 강해졌구나……. 벨포르 공작성의 사용인들은 성장형이었다. * * * 억겁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지난 후, 실비아는 갓 태어난 사슴처럼 후들거리는 다리를 움직여 방 밖으로 나왔다. 물론 사용인들의 열정과 애정 덕분에 그녀는 유달리 아름다웠다. 활동에 편하도록 간편한, 하지만 고급스러운 원단의 나들이용 드레스. 턱 아래로 리본을 묶어 고정한 모자. 무도회 때처럼 화려하지는 않다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연인과 외출에 나서는 아가씨’ 차림은 완벽했다.

16558811008948.jpg‘힘들어…….’

물론 겉이 완벽하다고 속까지 멀쩡하리라는 법은 없다. 실비아는 정문에서 바람이라도 쐬며 란델을 기다릴 생각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때 복도 저편에서 비척비척 걸어오는 청년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실비아는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놀라 인사를 건넸다.

16558811008948.jpg“좋은…… 오전은 아닌 것 같군, 오스턴.”

16558811029588.jpg“……아, 마님을 뵙습니다.”

오스턴이 허리를 꾸벅 굽히며 인사했다. 그가 인사 후 몸을 바로 세우더니 의아하게 미간을 좁혔다.

16558811029588.jpg“며칠 푹 쉬신 분치고는 안색이 썩……?”

16558811008948.jpg“……자네 지금 자기소개 하나?”

실비아 또한 하녀들에게 시달리느라 약간의 기력을 잃기는 했지만, 오스턴이 할 말은 아니었다. 오스턴은 두 눈이 잔뜩 충혈된 채 퀭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 그늘이 시커멓게 자리한 것이 일전에 한창 결계 마법을 개량할 때보다 기운이 없어 보였다. 실비아는 오스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슬쩍 운을 떼었다.

16558811008948.jpg“데뷔탕트 무도회가 무척 즐거웠나 보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눈까지 다 그리된 걸 보면.”

16558811029588.jpg“쿨럭.”

‘데뷔탕트 무도회’라는 말을 듣자마자 오스턴의 어깨가 움찔 튀어 올랐다. 당황해서 숨을 잘못 들이켠 것인지 연신 콜록대던 그가 창백한 얼굴로 물었다.

16558811029588.jpg“……혹시 보셨습니까?”

16558811008948.jpg“무얼?”

16558811029588.jpg“모르신다면 됐…….”

16558811008948.jpg“글레버 백작도 늦게까지 성에 남아 있었다고 들었는데. 빈방을 내어줄 걸 그랬나.”

16558811029588.jpg“아닙니다. 아니라고요.”

실비아가 모르는 척 루베아를 언급하자 오스턴이 발끈하며 부정했다. 하지만 실비아는 오히려 그 과한 반응이 의심스럽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훑어보았다.

16558811008948.jpg‘오…….’

의외로 그 가십지의 내용이 신빙성 있는 편일지도? 실비아는 흥미로운 눈으로 오스턴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에 위기감을 느낀 오스턴이 황급히 말을 돌렸다.

16558811029588.jpg“그보다, 나들이를 가신다면서요?”

16558811008948.jpg“그대도 알고 있었나?”

16558811029588.jpg“며칠 전부터 주군께서 미친 사람처럼 마물을 베고 다니고, 꼭두새벽부터 집무실에 박혀 계시길래 여쭤봤습니다.”

16558811008948.jpg‘어쩐지 안 보이더라니.’

실비아는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자신과 데이트를 하고 싶을까 싶어 조금 착잡한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텐데.

16558811008948.jpg‘그래도 혹시 모르니 마음을 단단히 먹는 게 좋겠지.’

실비아는 방심이 초래하는 실패를 잘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자신을 켈베티아로 떨어트렸던 동료들의 배신 같은 것. 그러니 란델이 아무리 어리고 순하다 한들, 그를 너무 얕보지는 않는 편이 안전할 것이다. 어쨌든 자신도 그가 신경 쓰이고, 그로 인해 흔들린 전적이 몇 번 있으니까. 실비아는 오늘의 데이트가 아무리 즐거울지라도 란델에게 넘어가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숨을 골랐다. 한편, 오스턴은 환히 밝혀진 창밖을 일별하더니 그녀가 약속에 늦겠다 싶었는지 한 걸음 옆으로 물러섰다.

16558811029588.jpg“다녀오십시오.”

16558811008948.jpg“그래. 그대도 좀 쉬고, 혹 글레버 백작을 만나거든 하루 더 머물다 가도 좋다는 말을 전해주게.”

16558811029588.jpg“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실비아가 또다시 모른 척 루베아를 입에 담자 오스턴이 길길이 날뛰었다. 그녀는 결국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솔직히 호기심은 둘째 치고 자신이 건드릴 때마다 펄쩍 뛰는 오스턴의 반응이 재미있었다. 물론 가장 재미있는 건 란델의 반응이지만. 자신이 이따금 툭 건드릴 때마다 귀랑 목덜미가 발갛게 물들어서는…….

16558811008948.jpg“이만 가보겠네. 자네도 들어가게.”

실비아는 고개를 내저어 습관처럼 뒤따라온 란델의 생각을 지워내며 걸음을 떼었다. 실비아는 호위인 제프리와 함께 정문에서 란델을 기다렸다. 그녀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란델이 초조한 손놀림으로 크라바트를 고쳐 매며 성을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손을 들어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정돈하다가 실비아를 발견하고는 굳어졌다.

16558811049665.jpg“……!”

란델은 한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는지 짧게 휘청였다가 다급히 실비아를 향해 다가왔다.

16558811049665.jpg“실비아.”

그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가 눈부신 것을 보듯이 그녀를 보며 눈을 깜박였다.

16558811008948.jpg‘……누가 보면 내가 신이라도 되는 줄 알겠어.’

그 시선이 참 간지러웠다. 실비아는 묘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설핏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16558811008948.jpg“오랜만인 것 같네요.”

16558811049665.jpg“아, 미안합니다. 시간을 비우려다 보니…….”

16558811008948.jpg“사과하라고 한 말은 아니었으니 걱정하지 마요.”

산뜻하게 란델의 사과를 막은 그녀가 몸을 빙글 돌리며 물었다.

16558811008948.jpg“그래서, 제 하루를 어디에 쓰실 계획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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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8811049665.jpg“아, 우선 식당을 알아뒀습니다.”

란델은 언뜻 비장한 얼굴로 답했다.

16558811049665.jpg‘잘해야 해.’

그는 오늘을 위해서 며칠 치 일을 당겨서 처리하고, 또 완벽한 데이트를 위해서 심혈을 기울여 계획을 세웠다. 어쩌면 다시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기회를 허망하게 날릴 수는 없었으니까. 란델은 심기일전하며 실비아와 함께 미리 알아두었던 식당으로 향했다. 평소 실비아가 편식하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녀가 좋아하는 종류의 음식으로 유명한 가게였다. 달리 예약이라는 것을 받지 않는 가게라, 미리 대기자가 없을 시간대인 것도 확인해두었다. 하지만 식당 앞에 다다른 순간, 란델은 황망한 얼굴로 탄식했다.

16558811049665.jpg“이럴 수가…….”

16558811008948.jpg“저런.”

실비아는 전혀 안타깝지 않은 음성으로 그에게 동조했다. 란델이 알아놓았던 식당의 입구는 굳게 닫혀 있었다. 닫힌 나무 문 위로 ‘건강 악화로 오늘부터 당분간 쉽니다’라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 첫 계획부터 무참히 어그러지자 란델은 당황했다. 두 사람은 이 약속 탓에 성에서 끼니를 챙기지 않고 나온 상태였다. 우왕좌왕하던 란델은 우선 실비아를 광장의 분수대에 앉혔다.

16558811049665.jpg“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는 실비아와 제프리를 두고서 재빨리 근처의 골목으로 향했다. 그가 이따금 바깥을 돌아다닐 때 기사들과 즐겨 먹곤 하던 샌드위치 노점을 찾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샌드위치 노점은 정상적으로 영업하고 있었다. 란델은 고기가 가득한 샌드위치, 상추와 과일잼이 든 샌드위치를 각각 사서 손에 들고 돌아왔다.

16558811049665.jpg“실비아, 우선 이것으로라도 배를 채우지요. 맛은 괜찮을 겁니다.”

란델이 실비아의 식성을 고려해 과일잼 샌드위치를 그녀에게 건네는 순간이었다. 까악-! 분수대 근처의 나무 위에 앉아 있던 까마귀 한 마리가 휙 날아들어 과일잼 샌드위치를 채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16558811049665.jpg“…….”

16558811008948.jpg“…….”

실비아와 란델은 잠시 말이 없었다. 침묵이 내려앉은 가운데 바람이 비웃듯 그들 사이로 휘잉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이내 그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앓는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16558811049665.jpg“……제프리.”

1655881111177.jpg“예, 주군.”

16558811049665.jpg“저거 잡아.”

1655881111177.jpg“예!”

제프리는 공을 물어오라는 말을 들은 강아지처럼 재빠르게 사라졌다. 주인 부부의 어색한 상황에 끼어 있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16558811049665.jpg“…….”

남겨진 란델은 잠시 제 인생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며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실비아는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그의 팔을 다정히 도닥였다.

16558811008948.jpg“괜찮아요, 웃겼으니까.”

16558811049665.jpg“……웃기면 안 되는데…….”

16558811008948.jpg“귀여웠어요.”

16558811049665.jpg“…….”

그는 결국 조금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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