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 희한하고 기구한 (34/118)

34. 희한하고 기구한2021.07.26.

이후로도 실비아와 란델의 데이트는 순탄치 못했다. 내심 또다시 그에게, 분위기에 휘말릴까 봐 경계하던 것이 민망할 정도였다.

16558811203196.jpg‘이 정도면 뭐…… 아무 일도 없겠는데?’

실비아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저잣거리를 걸었다. 그에 반해 란델은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16558811203201.jpg‘오늘은 날이 아니었나.’

즐거운 하루를 보내게 해줘도 모자랄 판에, 자꾸만 일이 생각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결국 그가 준비했던 게 전부 유명무실해진 탓에 그들은 저잣거리나마 둘러보는 중이었다. 제대로 한 일조차 없는데 어느덧 노을이 지고 있었다.

16558811203201.jpg‘하지만 이대로 돌아갈 수는…….’

란델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며 실비아를 따라 걷다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16558811203201.jpg“아.”

16558811203196.jpg“왜 그래요?”

앞서 걷던 실비아는 란델이 걸음을 멈추자 의아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란델의 시선은 거리 한쪽에 붙박여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실비아는 검은 로브 차림의 점술사를 발견하고는 움찔했다. 란델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16558811203201.jpg“실비아. 잠시 저기에 들러도 되겠습니까?”

16558811203196.jpg“……음, 그래요. 저는 시더스 경과 함께 조금 떨어져 있을게요.”

실비아는 난감한 미소를 띤 채 제프리를 붙잡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16558811203196.jpg‘기운이 심상치 않아.’

보통 길거리의 점술사란 고객의 행동, 몸짓, 시선 등을 통해서 정보를 유추하는 사기꾼이 대부분이라지만. 이따금 진실로 심상치 않은 기운을 품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란델이 발견한 저 점술사가 그런 경우였다. 실비아는 평범한 영혼이라고 할 수 없었기에, 괜히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가 정체를 들킬까 봐 거리를 벌리는 것을 택했다. 란델은 실비아가 물러서자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지만, 곧 금방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점술사에게로 향했다. 점술사가 펼쳐놓은 돗자리 앞에 쪼그려 앉은 그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16558811203201.jpg“안녕하십니까.”

양손을 가슴 앞으로 모은 채 무언가를 중얼거리던 점술사가 간만의 손님에 반색했다.

16558811203285.jpg“그래, 뭘 봐줄까?”

16558811203201.jpg“저는…….”

16558811203285.jpg“척 보니 연인과의 궁합이 궁금해서 온 게로군. 돈만 조금 더 내면 연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주문도 걸어줄 수 있다네.”

점술사가 퍽 속물적인 손짓으로 슬쩍 금화를 표현해 보였다. ‘연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주문’이라는 말에 란델이 찰나 멈칫했다. 그의 얼굴에 갈등하는 기색이 떠오른 것을 눈치챈 점술사가 속으로 콧노래를 불렀다.

16558811203285.jpg‘흐흥. 역시 연인과의 문제 때문인 게 맞았군. 잘만 하면 큰돈을 챙기고 다음 지역으로 넘어갈 수 있겠어.’

점술사의 생이란 고달프다. 한 지역에 정착하고 싶어도, 이따금 점이 맞지 않는다며 화풀이하는 사람들이 들이닥치거나 사기로 사람들을 현혹한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경비대에 쫓기기 일쑤였다. 벨포르 영지에서의 수입도 영 좋지 않아 슬슬 지역을 옮겨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이런 거물 고객이 굴러 들어올 줄이야. 점술사 할멈은 기대감 어린 눈으로 란델의 답을 기다렸다. 이윽고 고심에 잠겨 있던 그가 어색한 웃음을 띠며 입을 열었다.

16558811203201.jpg“저, 어르신. 그것이 아니라.”

16558811203285.jpg“음? 아니라고?”

16558811203201.jpg“혹시 누군가의 안녕을 빌어주실 수 있나 싶어서 말입니다.”

16558811203285.jpg“…….”

점술사 할멈은 순간 제 귀를 의심해 되물었으나 란델의 말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진심이라는 듯 티끌 한 점 없는 맑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16558811203285.jpg‘뭐 이런 놈이…….’

점술사 할멈은 황당한 듯 턱을 떨어트렸다가, 란델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16558811203285.jpg“참 희한한 청년이로군.”

16558811203201.jpg“역시 이런 것은 조금 그런가요?”

16558811203285.jpg“참 기구한 영혼이고…….”

16558811203201.jpg“예?”

뒷말이 워낙 작았던지라 란델이 고개를 갸웃했으나 할멈은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이후로도 한참이나 란델의 얼굴을 신기한 듯 들여다보던 그녀가 돌연 얼굴을 구기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16558811203285.jpg“나한테 그런 재주는 없어. 그리고 당신들한테는 별다른 축복도 필요하지 않으니 그만 가봐.”

16558811203201.jpg“그래도…….”

16558811203285.jpg“아, 가보라니까! 늙은이 놀리면 못써!”

결국 점술사 할멈은 버럭 역정을 냈다. 란델은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자 어쩔 수 없이 후드 자락을 깊이 끌어 내리고 실비아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는 주섬주섬 물건을 챙겨 거리 저편으로 사라지는 할멈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의아해했다.

16558811203201.jpg“별다른 축복이 필요하지 않다니……. 놀린다는 건 또 무슨 말일까요?”

16558811203196.jpg“글쎄요.”

란델과 점술사 할멈의 대화를 대강 훔쳐 들은 실비아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녀는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가 펴며 속으로 짧게 자조했다.

16558811203196.jpg‘축복으로도 풀 수 없는 저주라는 뜻일 수도 있겠네.’

어차피 자신은 죽고, 란델은 남겨지게 될 테니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뜻일 수도 있으려나. 실비아는 점술사 할멈이 말한 ‘기구한 영혼’이라는 말이 그런 뜻이라고 생각했다. 기껏 마음에 담은 여인이 채 몇 년도 되지 않아 죽음을 맞이하는 건 뭇사람의 눈에는 충분히 비극일 테니까. 한편, 란델은 실비아의 무사를 기원하려다가 괜한 궁금증만 얻었다고 생각하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16558811203201.jpg“돌아가기 전에 한 군데만 더 들릴까요.”

16558811203196.jpg“어딘데요?”

16558811203201.jpg“영민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유명한 나들이 장소라더군요. 물론 피곤하면 돌아가도 됩니다.”

16558811203196.jpg“그래요, 가요.”

실비아는 오늘 종일 실망만 겪었을 란델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선뜻 그를 따라나섰다. 란델이 실비아를 이끌고 향한 곳은 ‘솔리스 언덕’이라는 곳이었다. 그는 오늘처럼 바람이 선선하고 노을이 아름다운 날이면 악사와 화가, 곡예사 등이 몰려와 사람들로 북적인다는 말을 덧붙였다.

16558811203196.jpg“사람이 많네요. 신기한 것도 보이고.”

실비아는 여러 생을 반복하는 동안 북부에는 자주 걸음 하지 않았었기에 흥미를 보였다. 란델은 실비아가 오늘 중 가장 즐거워 보이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솔리스 언덕은 실비아의 게으름마저 몰아낼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노을이 내려앉은 낮은 언덕, 악사들이 연주하는 노래,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뒤섞인 풍경은 평화로웠다. 실비아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감상하는 사이, 란델은 즉석에서 초상화를 그려주는 화가를 발견하고는 눈을 빛냈다.

16558811203201.jpg“실비아.”

16558811203196.jpg“네?”

16558811203201.jpg“저기서 초상화를 그려주는 것 같은데.”

실비아는 란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주고 있는 화가들이 여럿 보였다. 짧은 시간 동안 가볍게 그려내는 것임에도 화가들의 솜씨는 수준급이었다. 사람들은 웃는 얼굴로 대금을 치르고 초상화를 가져갔다. 란델이 기대에 차 물었다.

16558811203201.jpg“어차피 공작성에 걸어둘 초상화도 필요하고 하니, 한 장 그리고 가면 어떻겠습니까?”

16558811203196.jpg“…….”

16558811203201.jpg“……물론 내키지 않는다면 그리지 않아도 괜찮지만.”

그는 실비아에게서 답이 없자 금세 시무룩해져 말을 덧붙였다. 실비아는 그런 란델의 모습을 구경하며 난감하게 눈을 굴렸다.

16558811203196.jpg‘초상화라.’

솔직한 심정으로는 썩 내키지 않았다. 어차피 이곳을 떠나게 될 거라면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편이 서로에게 좋지 않을까.

16558811203196.jpg‘으음…….’

하지만 실비아는 미련이 잔뜩 남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란델에 조금 흔들렸다. 그가 안절부절못하며 제 눈치를 볼 때마다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노릇인지 모를 일이다.

16558811203196.jpg‘……뭐, 한 장 정도는 괜찮겠지.’

결국 실비아는 한숨을 푹 삼켰다. 어차피 자신이 죽었을 때 장례를 치르기 위한 그림 한 점 정도는 필요했다. 게다가 정식으로 화가를 초빙해 초상화를 그린다면 이보다 훨씬 공들인 그림이 될 테고, 그러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화가의 앞에 앉아 있어야 한다. 그녀의 체력은 그 고행을 견딜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니 차라리 지금, 약식으로 그려놓는 편이 여러모로 나으리라. 합리화를 마친 실비아가 란델을 보며 웃었다.

16558811203196.jpg“좋아요.”

16558811203201.jpg“……!”

실비아가 긍정의 답을 내뱉는 순간 먹구름 낀 하늘 같았던 란델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 표정 변화를 눈에 담은 실비아는 또다시 수런거리는 마음을 애써 다스렸다. 란델과 실비아는 후드를 살짝 걷어 올리고 한 화가에게 다가갔다. 손님이 없어 잠시 쉬고 있던 화가가 그들을 보고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16558811203285.jpg“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부부이십니까?”

16558811203201.jpg“흠, 흠. 그렇습니다.”

16558811203285.jpg“히야, 제가 이 일을 시작한 지 꽤 됐지만 이렇게까지 잘난 분들은 또 처음 봅니다!”

16558811203201.jpg“크흠.”

화가는 진심 가득한 감탄을 뱉었다. 란델은 막상 실비아와 잘 어울리는 부부라는 말을 듣자 쑥스러운지 연신 헛기침을 뱉었다. 화가는 그들을 보고 예술혼이 불타오르는지 열정적으로 손짓했다.

16558811203285.jpg“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서시지요! 제가 아주 멋지게 그려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은 화가의 인도에 따라 노을 지는 언덕을 배경으로 나란히 섰다.

16558811203201.jpg“……실비아, 잠시.”

란델은 머뭇거리다가 손을 뻗어 실비아의 어깨를 살짝 끌어안았다. 실비아가 힐긋 시선을 돌리자 잔뜩 긴장한 듯 목을 뻣뻣이 세우고 있는 란델이 보였다. 그녀는 순간 심술궂은 미소를 띠고 작게 속삭였다.

16558811203196.jpg“고작 이 정도로 이렇게 긴장하면 어떻게 해요? 내가 이따가 어딜 만질 줄 알고.”

16558811203201.jpg“쿨럭.”

16558811203285.jpg “어어,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반사적으로 헛숨을 들이켰던 란델이 화가의 일갈에 급하게 몸을 바로 세웠다. 그는 애써 웃는 얼굴을 유지하며 복화술을 하듯 빠르게 속삭였다.

16558811203201.jpg“그런 농담은 하지 않기로 했잖습니까.”

16558811203196.jpg“농담이라뇨? 저는 진심이었는데요.”

16558811203201.jpg“……내어드리는 건 상체뿐입니다.”

16558811203196.jpg“사기 거래로 신고해야겠어요. 처음부터 조건을 제대로 걸든가, 이제 와서 어디는 된다, 어디는 안 된다고 하는 법이 어디 있어.”

16558811203201.jpg“실비아, 제발…….”

란델은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며 달아오르다 못해 터질 것 같은 얼굴을 양손으로 가렸다. 그 모습을 본 실비아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고, 화가는 부부가 참 사이가 좋다며 함께 웃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화가가 이마의 땀을 훔치며 붓을 내려놓았다.

16558811203285.jpg“다 되었습니다. 와서 보시죠!”

화가의 말에 란델과 실비아가 걸음을 옮겨 그림을 확인했다. 그들은 생각보다도 더 아름답게 그려진 그림에 잠시 감탄했다.

16558811293478.jpg

16558811203201.jpg“고맙네. 그림은 이쪽 청년이 들 걸세.”

란델은 값을 치르며 제프리를 눈짓했다. 제프리가 화가와 그림 운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그가 실비아의 후드를 씌워주며 말했다.

16558811203201.jpg“부탁을 들어주어 고맙습니다. 나중에는 더 좋은 그림으로 바꿔 걸지요.”

16558811203196.jpg‘귀찮은데.’

실비아는 귀찮음을 덜기 위해 길거리 초상화를 택했던 것이었다. 그녀는 속내를 감추기 위해 미소 띤 얼굴로 반박했다.

16558811203196.jpg“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어차피 당신이 원할 때면 언제든 내 얼굴을 볼 수 있을 텐데.”

16558811203201.jpg“…….”

란델은 심장이 너무 뛰어서 죽는 게 아닌가 싶어 잠시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골랐다. 어째 실비아의 마음을 얻기 위해 나온 데이트였는데, 외려 그녀가 제 마음을 남김없이 가져가고 있는 듯했다.

16558811203196.jpg“이것도 좀 힘드네요. 저쪽에서 잠깐 쉬었다가 성으로 돌아가요.”

실비아는 잠깐 새 바닥난 체력을 채우기 위해 언덕의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란델은 그 곁에 앉으며 재킷을 벗어 그녀의 몸 위에 덮어주었다. 실비아가 재킷 너머로 눈만 빠끔히 내밀고 말했다.

16558811203196.jpg“혹시 잠들면 깨워줘요.”

16558811203201.jpg“알겠습니다.”

란델은 속으로 5분 안에 잠들겠군, 하고 생각하며 선선히 답했다. 그의 예상대로 실비아는 눈 깜짝할 사이에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바람이 란델의 금갈색 머리카락을 살랑 흐트러트렸다. 그는 다정한 눈으로 잠든 실비아를 바라보다가 문득 가슴이 선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16558811203201.jpg‘왜 이렇게…….’

실비아는 양손을 배 위로 겹친 채 반듯이 누워 있었다. 그 자세가 불현듯 관에 누워 있는 죽은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탓에 기분이 이상했다.

16558811203201.jpg‘……착각이겠지.’

란델은 고개를 휘휘 저어 애써 꺼림칙한 생각을 밀어냈다. 하지만 선득한 감각은 흉터처럼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스며들어 사라지지 않았다.

16558811203201.jpg“…….”

훗날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것은 본능이었다.

16558811325233.jpg

1655881132524.jpg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