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마음은 죽지 않는다2021.07.29.
제프리는 실비아와 란델이 솔리스 언덕에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 조금 떨어진 곳의 나무 아래 앉아 있었다. 공작 부부와 함께 있을 때는 웃는 얼굴이던 그는 심란한 표정이었다.
-오스몬드, 세이크린 후작 영애와 혼담이 진행 중이라며?
며칠 전. 제프리는 훈련이 끝난 후 기사단 숙소로 돌아가던 길에 들린 말에 멈칫했다. 고개를 돌리자 훈련장 한쪽에 몇몇 기사가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 가운데에 서 있던, 금발의 젊고 잘생긴 기사가 난처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무슨……. 그냥 가문에서 혼담을 넣기로 했다는 것뿐이지, 아직 확정된 건 아니니 괜한 말 말아.
-에이. 자네가 어디가 부족해서?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나.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될 걸세.
-맞아. 요즘 세상에 자네처럼 괜찮은 사내가 어디 있다고. 자신감을 가지게!
-그만들 하라니까. 이만 들어가자고.
오스몬드는 자꾸만 말을 보태는 기사들의 등을 떠밀어 숙소로 들어갔다. 제프리는 한동안 제 발이 굳은 것조차 깨닫지 못한 채 멍하니 그 자리에 붙박여 서 있었다.
‘……혼담.’
그는 제 속과 다르게 평화롭기 그지없는 솔리스 언덕의 풍광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바야흐로 사교 시즌. 필리아의 결혼 또한 사람들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였다. 세이크린 후작가는 북부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가인 데다가, 활달한 성격과 귀여운 외모까지 갖춘 그녀는 단연 주목할 만한 신붓감이었으니까.
‘오스몬드 선배의 가문이 림버트 백작가던가.’
제프리는 오스몬드의 가문이 꽤 저명하다는 걸 상기하고는 어두운 얼굴을 했다.
‘후작님의 입장에서도…… 나무랄 데 없는 사윗감이겠지. 인품도 훌륭하고, 외모도 훌륭한데 가문까지 받쳐주니까.’
그는 짙디짙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때 제프리가 등을 기대고 앉은 나무의 반대쪽에 누군가 다가와 앉는 기척이 났다. 그가 한발 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경계심을 세우려던 차였다.
“그렇게 한숨 쉬다가 땅 꺼지겠다.”
조금 전까지 그의 머릿속을 온통 차지하고 있던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짓말 같은 상황에 한순간 멍해진 제프리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왜 거기…….”
“그야 네가 내 얼굴만 보면 도망가니까 그렇지.”
“…….”
“……이번에는 도망가지 마. 나 여기까지 걸어 올라오느라 발 아프단 말이야.”
필리아는 뒤로 갈수록 목소리에 자신이 없어지더니 엉성한 핑계를 대며 그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이성을 되찾고 몸을 일으키던 제프리는 그 말에 흠칫 움직임을 멈추었다. 평소 같았다면 듣는 시늉조차 하지 않고 자리를 벗어났어야 하는데. 지금은 하늘 가득한 노을이 전부 그의 어깨에 내려앉은 것인지 도통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제프리는 복잡한 얼굴로 고민에 잠겨 있다가 조심스레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필리아는 그가 웬일로 등 뒤에서 떠나지 않자 화색을 띠고는 재잘재잘 떠들기 시작했다.
“잘 지냈어? 며칠밖에 안 되긴 했어도 엄청 보고 싶더라. 난 요즘 아버지가 자꾸 귀찮게 굴어서 도망 나왔는데…….”
제프리는 노랫소리를 감상하듯 가만히 눈을 감은 채 그녀의 목소리를 귀에 담았다. 지금이야 발랄하다 정도의 감상이지만, 소녀 시절 필리아의 목소리는 정말이지 종달새가 지저귀는 소리 같았다.
-야, 너희! 덩치 큰 놈들이 어린애 하나 둘러싸고 뭐 하냐! 부끄러움도 없어?
어렸을 적, 또래에 비해 유달리 작고 왜소했던 제프리는 동네 건달 아이들의 좋은 괴롭힘 대상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저잣거리 구석에서 괴롭힘을 당하던 때였다. 난생처음 보는, 하녀복 차림의 붉은 머리카락의 소녀가 불쑥 난입해서 그를 보호했다. 제프리를 괴롭히던 소년들은 소녀를 보며 험악하게 인상을 구겼다.
-넌 뭐야?
-땅딸막한 계집애가 어디서 겁도 없이…….
-뭐? 너 지금 나더러 땅딸막하다고 했냐!
소녀, 필리아는 그길로 이를 드러내며 소년들을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결국 소년들은 울며 도망갔고, 필리아는 흙바닥을 굴러 꼬질꼬질해진 몰골로 활짝 웃으며 제프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쟤네 갔다! 일어나!
그 일을 계기로 필리아와 제프리는 친하게 지내기 시작했다. 제프리가 아버지를 도와 일을 끝마치고 서둘러 가게 뒤편으로 달려가면, 나무 뒤에 숨어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필리아가 고개를 쏙 내밀고 웃었다.
-제프리!
필리아는 본인을 세이크린 후작저의 하녀라 소개했다. 하녀치고는 외모나 말씨에서 숨길 수 없는 귀티가 흘렀으나, 어렸던 그는 하녀 복장에만 눈이 멀어 그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게 점차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나고, 필리아가 언덕에 드러누워 만든 화관을 제프리에게 씌워주면 그가 남몰래 얼굴을 붉히게 되었을 무렵이었다.
-제리! 우리 가게에서 앞으로 후작저에 정기적으로 채소를 납품하게 됐다!
-와! 정말요?
-그래! 정말이라니까! 그 집 아가씨께서 편식이 심하신데 우리 가게의 채소는 드신다더라. 이렇게 감사할 데가!
필리아가 7살, 제프리가 9살이 되던 해. 제프리의 아버지는 기쁜 얼굴로 세이크린 후작저와 거래를 텄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때쯤 그의 집안은 수입이 줄어 곤란한 상태였기에 부자는 뛸 듯이 기뻐했다.
-반지…… 살 수 있겠다.
제프리는 반지를 사 필리아에게 고백할 생각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갈무리하며 아버지를 따라 후작저에 채소를 배달하러 갔다. 그의 아버지가 식당의 뒷문 앞에서 후작저의 사용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후원 쪽에서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씨! 필리아 아가씨! 위험하게 그러지 말고 내려오세요! 수업 들으러 가셔야죠! 벨포르 공자님께서 기다리실 텐데!
-하여간 그놈의 수업! 그 바보가 기다리건 말건 나랑 무슨 상관인데?
-아가씨이!
제프리는 귀에 익은 이름에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눈을 크게 떴다. 저택의 후원 한쪽, 고급스러운 흰 잠옷 원피스 차림으로 나뭇가지에 올라앉은 필리아. 그리고 그 나무 밑에서 그녀가 다칠까 전전긍긍하는 한 무리의 사용인을 발견한 순간.
-……아.
그의 안에서 갓 싹을 틔우던 마음은 충격으로 바싹 말라버렸다. 그동안 필리아가 자신을 속였다는 배신감. 그녀가 제프리 집안의 사정을 알고 그의 가게를 지정해 채소를 납품하게 한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자괴감과 수치. 그 모든 감정이 불길처럼 타올라 속을 헤집었고, 그날 저녁 필리아가 제프리를 찾았을 때, 그는 메마른 눈을 하고 있었다.
-……다신 찾아오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진심이에요.
제프리는 그날 이후 철저하리만치 필리아를 무시했다. 그는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처지에 대한 부끄러움과 열등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꿋꿋하게 그녀를 모르는 사람 대하듯 대했다. 필리아는 제프리가 모든 사실을 눈치챘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에게 용서를 구하려 애썼다. 하지만 다음 해에 란델이 왕궁으로 떠나고, 그로 인해 홀로 남게 된 필리아가 부모의 뜻에 따라 아카데미에 진학하며 그들은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제프리는 집안 형편이 나아지자 학업과 무예에 정진했고,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타고난 재능과 노력 덕에 벨포르 기사단에 입단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나름 탐나는 신랑감이 되었다고 한들, 필리아와 그의 사이는 여전히 까마득하게 멀었다. 필리아는 북부의 대귀족인 세이크린 후작가의 외동딸. 그는 아직 세습 작위조차 없는, 한낱 평민 출신 기사 나부랭이. 그토록 미천한 자신이 감히 귀하디 귀한 아가씨를 마음에 품을 수 있을 리가 없잖은가. 현실에서 눈 돌린 채 마냥 해맑게 웃을 수 있는 어린 시절은 이미 지났으니까.
한동안 쉼 없이 떠들던 필리아가 문득 말을 멈추었다. 그녀는 어깨 너머를 힐긋 돌아보고는 슬그머니 운을 뗐다.
“근데, 호옥시나 네가 내 얼굴을 보고 싶다고 하면 그쪽으로 가줄 의향이 있긴 한데.”
“…….”
“응? 나 어떻게 할까?”
필리아는 정답을 알려주고 그 답을 고르라고 독촉하듯 재차 물었다.
‘……멍청한 놈.’
이 와중에도 저 음성이 마음에 겨운 것을 보니 아직도 마음에 미처 짓밟지 못한 싹이 남아 있나 보다. 씁쓸한 미소를 띤 제프리가 속으로 자기 자신을 향한 욕설을 지껄이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소리에 필리아가 나무 너머에서 슬쩍 고개를 내밀었지만 보이는 것은 그의 뒷모습뿐이었다. 필리아가 당황해 입술을 달싹였으나 그의 말이 먼저였다.
“돌아가십시오.”
“어?”
“당신께서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해가 지고 있습니다. 늦지 않게 댁으로 돌아가시길. 그럼 이만.”
“야! 잠깐만……!”
제프리는 모르는 사람을 대하듯 깍듯한 태도로 그리 말하고는 휑하니 사라졌다. 필리아가 손을 뻗어 그의 망토 자락을 붙잡으려 했으나 얇은 천은 손아귀 사이로 물 흐르듯 빠져나갔다.
“……뭐야, 간 거야?”
필리아는 한동안 멍하니 제프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곧 현실을 받아들인 그녀가 벌렁 드러누워 허공에 발길질하며 씩씩댔다.
“저 고집불통 멍청이가 진짜!”
자신보다 더 어리고 약한 아이들에게 동네 건달들의 괴롭힘이 향할까 봐 가만히 괴롭힘을 참고 있을 때부터 알아봤지만. 제프리 시더스는 참 한결같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좋았다. 멋모르던 어릴 적의 마음을 아직도 미련하게 품고 있을 정도로.
“……아이씨.”
필리아는 눈을 세모꼴로 뜨고 보랏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을 노려보다가, 결국 눈물을 참지 못하고 양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 * *
“으…….”
세이크린 후작은 이제는 익숙해진 두통에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는 집무실 창 너머를 내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요즘 자꾸 기억이 드문드문해지는 것 같단 말이지.’
설마 벌써 치매인가 싶어 걱정이 앞섰다. 적어도 필리아가 좋은 사람과 만나는 것까지는 봐야 할 텐데……. 그가 지극히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다운 고민에 잠겨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주인님. 벨라 님께서 방문하셨는데요.”
“아, 들라 하게.”
후작은 흐트러진 매무새를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허락에 문이 열리고 옅은 갈색 단발머리의 미인이 방 안으로 들어와 웃으며 인사했다.
“세이크린 후작님을 뵙습니다.”
“앉지. 오늘은 신제품을 가져온다고 했던가?”
“네, 맞아요.”
세이크린 후작과 벨라가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후작은 자리에 앉자마자 물씬 풍겨오는 달큼한 향기에 티 나지 않게 미간을 찌푸렸다.
‘향수인가?’
벨라의 향수 냄새에 두통이 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 즈음 그의 눈은 몽롱하게 풀려 있었다. 후작이 향에 취한 것을 확인한 벨라가 그의 곁으로 다가가 서며 어둠을 불러냈다. 그녀의 동공이 세로로 길쭉하게 찢어지며 눈이 붉게 물들었다.
“후작님. 따님이 소중하죠?”
“……소중하다.”
“그럼 딸이 가장 좋은 걸 가졌으면 하겠네요? 물건이건, 사람이건.”
“좋은, 것…….”
“네, 좋은 거요. 예를 들면 벨포르 공작 같은 사람. 그런 사람이랑 결혼하면 딸이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벨라는 최면을 걸듯이 과장된 어조로 속삭임을 이어갔다. 그녀가 말을 더할 때마다 등 뒤의 어둠이 뱀의 형태로 바뀌어 후작의 그림자로 흘러 들어갔다.
“제가 망령 아이들을 통해서 따로 알아봤는데, 세상에. 공작이랑 공작 부인이 아직 초야도 안 치른 사이라지 뭐예요?”
“…….”
“혹시…… 그녀가 왕가의 명을 받아 일부러 북부를 기만하기 위해 그러는 건 아닐까요? 어떻게 그런 사람을 공작 부인 자리에 둘 수가 있는지, 세상에 끔찍해라.”
벨라는 충격적이라며 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하지만 하얗고 가느다란 손에 가려진 입술은 미소 짓고 있었다.
“그 여자가 이대로 북부 사람들을 기만하는 모습을 두고 봐선 안 되겠죠? 다른 사람들도 이 일을 알아야 해요.”
“……그래. 모두에게…… 알려야 해.”
“바로 그거예요.”
눈에 초점이 나간 후작이 건조하게 중얼거리자 벨라가 만족스럽게 맞장구치며 엄지와 검지를 딱 부딪쳤다. 그러자 그녀의 눈이 다시 연분홍빛으로 돌아오며 어둠이 걷혔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꼭 모두에게 진실을 알려주셔야 해요?”
벨라는 즐겁다는 듯 깔깔깔 웃으며 방을 떠났다. 그 웃음소리는 메아리처럼 한참이나 사라지지 않고 후작의 방을 맴돌았다. * * * 한편, 깊은 밤. 벨포르 공작성.
“손으로만 만져야 한다는 말은 없었죠?”
“……예?”
란델은 침실에서 굉장히 곤혹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