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인식2021.08.02.
몇십 분 전. 란델과 실비아는 고난과 역경의 데이트 끝에 성으로 돌아왔다. 실비아는 욕실로 향하려다가 아, 하며 걸음을 멈췄다. 그녀가 드물게도 선명한 눈으로 란델을 돌아보며 경고했다.
“약속은 지켜야죠? 침실에서 딱 기다리고 있어요.”
“……예, 부인.”
그 의욕적인 모습을 보자니 란델은 슬슬 위기감이 들었다.
‘대가가 너무 과했나……?’
효과가 좋다고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지나치다고 울어야 할지. 그는 갈피를 잡지 못한 채로 한숨을 푹푹 내쉬며 욕실로 향했다. 뭔지 모를 부끄러움과 걱정에 평소보다 훨씬 긴 시간을 욕실에서 머물렀으나 시간을 끄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늦었네요.”
“미안합니다.”
“서 있지 말고, 와서 앉아요.”
결국 란델은 감옥으로 끌려가는 죄인처럼 침실로 돌아와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았다. 실비아는 그가 자리를 잡자 꾸물꾸물 움직여 그의 맞은편으로 다가와 앉았다. 란델은 갓 목욕을 마치고 나와서인지 평소보다 더욱 하얗게 보이는 목덜미에 시선을 두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고 보니, 혹시 실수라도 하면 어떻게 하지.’
란델은 뒤늦게서야 자신이 실비아의 손길을 받고서도 이성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후회해봐야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가뜩이나 잘 보여야 하는 마당에 짐승처럼 굴면 끝이다.’
란델은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절박하기까지 한 마음으로 심호흡을 했다.
“5분이라고 했었죠.”
실비아는 그리 말하고는 가운에 가려진 란델의 몸을 시선으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목덜미부터 가슴팍, 복부 근처를 더듬던 시선이 슬그머니 그보다 더 아래로 내려갔다. 란델은 실비아가 제 몸을 빤히 바라보며 시선을 뗄 생각을 하지 않자 정색했다.
“상체만입니다.”
“그 말, 설마 진짜였어요? 거래할 때는 그런 얘기 없었잖아요. 부당 거래예요.”
“우리 둘 다 거래 시에 자세한 사항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았으니, 먼저 세부 조항을 건의한 제 말이 효력이 있는 것이죠.”
란델은 필사적으로 항변했다. 급조한 티가 많이 나기는 했으나 아예 말이 되지 않는 것도 아닌 변명이었다. 할 말이 없어진 실비아가 분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부부 사이가 좋아 보이는 가장 쉬운 방법이 스킨십이기에 되도록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란델이 저렇게까지 접촉을 거부하자 알 수 없는 오기가 치솟았다. 끝내 ‘아니,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나?’라는 데까지 생각이 치달은 실비아는 자존심에 작은 상처를 입었다. 란델을 괘씸하게 노려보던 그녀가 돌연 떠오른 생각에 한쪽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렸다.
“손으로만 만져야 한다는 말은 없었죠?”
란델이 그대로 정지했다. 그는 5초쯤 숨도 안 쉬고 굳어 있다가 누군가 머리를 세게 친 것처럼 되물었다.
“……예?”
“이번엔 내가 먼저 말했어요.”
“그게 무슨…… 읏.”
서서히 사고가 정상으로 돌아온 란델이 기겁하며 실비아를 말리려 했으나 그녀는 틈을 주지 않았다. 몸을 숙인 그녀가 고개를 기울여 란델의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는 반사적으로 이를 악물었다.
“실비아.”
“약속을 어기려는 건 아니죠? 가만히 있어요. 아직 1분도 안 지났으니까.”
“그렇지만, 이건 너무.”
란델은 실비아가 그의 살갗에 입술을 댄 채 웅얼거리자 한 손으로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실비아는 란델의 목덜미를 입술로 훑듯이 더듬으며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상체를 따라 자잘한 입맞춤이 스쳐 지나가자 란델은 말 그대로 돌 것 같았다. 싫은 게 아니라 정신이 나갈 것처럼 좋아서.
‘제기랄.’
란델은 드물게도 입 안으로 욕지거리를 짓씹었다. 욕만 씹은 것이 아니라 볼 안쪽도 피가 나도록 짓씹으며 이성을 부여잡았다. 하지만 그와 달리 실비아는 언뜻 무심하게까지 느껴질 정도로 태연한 얼굴을 한 채 그의 몸에 입 맞췄다.
‘반응이 격해서인가 생각보다 재밌네.’
오기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란델의 반응을 구경하는 게 생각보다 더 즐거웠다. 잔뜩 긴장해 돌처럼 단단해진 복부를 손가락으로 콕 찔러 본 그녀가 픽 웃음을 흘렸다. 이토록 덩치 크고 힘 좋은 남자가 자신 때문에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뭐랄까, 참……. 보기 좋다고 해야 하나.
‘내가 이런 취향이었나?’
상대가 란델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원래부터 취향이 이랬던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고개를 갸웃하던 실비아가 이내 복부부터 입 맞추기 시작해 다시 위로 올라오려 하자 란델은 결국 항복하듯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물론 그조차 한순간이었고, 그녀가 움직임을 멈추자 곧장 손에 힘을 풀었지만.
“실비아. 5분…… 된 것 같습니다.”
란델이 가쁜 숨을 내뱉으며 가까스로 말을 맺었다. 그에 고개만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본 실비아가 입을 약간 벌렸다.
“……아.”
벌어진 잇새로 작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눈가까지 붉어진 란델이 조금 일그러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을 눈에 담는 순간 심장이 크게 뛰었다. 흔히들 말하는 ‘홀린다’라는 표현에 가까운 감각. 실비아는 흥분을 억누르느라 짙어진 연녹색 눈을 저도 모르게 빤히 응시했다. 늘 죽은 듯 차분하기만 하던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순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손이 뻗어나갔다. 실비아가 란델의 목을 휘감고, 란델이 그녀의 뒤통수를 감싸 끌어당기는 것과 동시에 입술이 뭉개지듯 맞닿았다.
결혼식 때의 키스가 실비아의 철저한 이성과 란델의 당황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면. 지금은 두 사람 다 그저 본능에 충실한 키스였다. 영혼에 새겨진 세월도, 양어깨에 얹힌 의무조차 다 잊고. 그저 세상에 남은 것이라고는 둘뿐이라는 듯이 정신없이 숨을 섞었다.
“하…….”
한참이나 입맞춤을 이어가던 도중 실비아의 입술 새로 탁한 숨이 새어 나왔다. 란델은 그 소리에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그는 실비아의 허리를 한 팔로 감은 채 그녀를 덮치듯이 몸을 겹치고 있었다. 실비아는 갑작스럽게 입술이 떨어지자 흐린 눈을 깜박였다. 창백하기만 했던 평소와 달리 발긋하게 달아오른 눈가를 따라 눈물 한 방울이 톡 굴러떨어졌다. 란델은 속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만 같은 감각을 참아내며 확인하듯 물었다.
“좋아합니다.”
“…….”
그 담백하고도 무거운 고백에 실비아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란델은 열에 달떴던 그녀의 얼굴이 차츰 겁에 질린 사람처럼 가라앉는 과정을 눈에 새기듯 바라보았다. 그 표정이 곧 답이었다. 이윽고 이성을 되찾은 실비아가 당황한 듯 입술을 달싹이려던 차에 란델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그는 몸을 돌려 씁쓸한 미소를 감추고는 애써 침착한 목소리를 냈다.
“마음에도 없는 사람과 이런 일을 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란델.”
“약속은 지켰습니다. 쉬십시오.”
란델은 그 말만 남기고 가운을 여미며 방을 나섰다. 실비아는 닫힌 방문을 향해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가 이내 제풀에 놀라 손을 거두어들였다. 그녀는 양손을 가슴 앞으로 모은 채 어깨를 웅크리고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은 여전히 놀랄 만큼 빠르게 뛰고 있었다.
‘미쳤나?’
애초에 순간의 분위기와 본능에 휩쓸려 란델에게 입을 맞춘 것도 경악스러웠다. 그녀가 몇백 년에 걸쳐 쌓아 올린 이성과 평정심 등이 찰나 무용지물이 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뜻이니까. 게다가 입술이 떨어진 순간 든, 아쉽다는 마음까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실비아는 드물게도 충격받은 얼굴을 하며 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내가 이렇게까지 욕망에…… 약했던가?’
또다시 그런 의문이 들었다. 내가 이성의 몸에, 욕망에 약했던가, 하는.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녀는 이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끌린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 모든 혼란과 감정의 원인은 역시 하나뿐이었다.
‘란델.’
란델 벨포르. 실비아는 이제야 란델을 단순히 ‘남편’이 아닌, ‘란델 벨포르’라는 사람으로 동등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실비아에게 란델은 그저 안락한 삶을 위한 수단, 바보 같고 순박한 청년, 서류상의 남편 정도였다. 이따금 귀엽고, 때로는 그녀의 평정을 잠시 무너트릴 만큼 발칙하기도 하지만 결국 그뿐인 사람. 찰나의 격랑 같은 사람. 하지만 조금 전의 일로 확실해졌다.
“……이런 건 예상에 없었는데.”
단순히 지나가는 파도가 아니라 해일처럼. 란델 벨포르라는 사람은 어쩌면 그녀의 영혼을 통째로 뒤바꿔버릴 자일지도 모른다고. * * * 그날 이후 며칠간 알게 모르게 내외하던 부부는 글레버 백작저에서의 파티를 위해 다시금 손을 맞잡았다. 마차에서 내려 저택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을 오스턴이 따랐다. 하인의 안내를 받아 연회장에 발을 들이자 루베아가 서둘러 다가와 그들을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두 분.”
“오랜만이군, 글레버 백작.”
“훌륭한 파티네요.”
란델과 실비아가 각각 다정히 인사를 건넸다. 그 덕에 글레버 전 후작의 반역 사건과 강등 이후 은근히 루베아를 무시하던 귀족들이 긴장했다. 그것이 며칠간 휴식을 핑계로 칩거하던 실비아의 주목적이었다. ……물론 오스턴과 루베아에 관련한 가십이 사실인지 살피고 싶었던 것도 있지만, 본질은 그게 아니니 아무튼.
“공작님.”
그때 동글동글한 인상의 남자가 란델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그는 이어 실비아에게도 가볍게 예를 갖추고는 란델을 보며 말했다.
“일전에 지시하셨던 일에 관한 조사 결과가 조금 전에 도착했는데, 언제쯤 보고드려야 할지…….”
“아, 벌써 말인가? 생각보다는 빠르군.”
란델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미안한 기색으로 실비아를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습니다, 부인.”
“다녀오세요.”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며칠 정도 거리를 두고 마음을 다스려서일까. 실비아는 란델을 저와 동등한, 그것도 아주 위험한 사람으로 인식하긴 했으나 태연히 표정 관리를 할 수 있었다. 란델이 가신과 떠나고, 루베아가 실비아를 향해 물었다.
“함께 있어 드릴까요, 부인?”
“됐어. 자네는 손님들을 상대해야지. 가보게.”
이번 파티는 글레버 백작가의 위세를 다시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니 파티의 주최자인 루베아가 한 자리에 매여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실비아의 만류에 루베아는 머뭇대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얼굴은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되도록 휴게실에 계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뭐?”
“이유는 파티가 끝날 즈음 찾아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은 제 말대로 해주시겠습니까?”
“…….”
실비아는 의아했으나 루베아의 얼굴이 상당히 긴장되어 보였기에 우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루베아는 안도한 듯 예를 갖춰 인사하고는 사라졌다.
‘무슨 일이지?’
실비아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라폴드의 반역 이후로 루베아는 실비아에게 퍽 호의적이었다. 그런 그녀가 허튼소리를 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한 바퀴만 돌아보고 휴게실로 가야겠어.’
실비아는 고심 끝에 ‘공작 부인’이 파티에 참석했다는 사실만 알린 후 휴게실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녀가 열리는 파티마다 성실히 참석하는 편이 아닌 만큼, 이럴 때라도 사교계를 통솔하는 공작 부인으로서의 할 일을 다 하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야 잡음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연회장을 한 바퀴 도는 동안 그녀의 미간에 생긴 작은 골은 점점 깊어졌다.
‘……분위기가 이상해.’
오랜 세월을 살며 쌓인 경험에 기반해 실비아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그런 그녀의 감이 지금 이 연회장의 공기가 이상하다고 알리고 있었다. 본래라면 실비아가 연회장을 둘러보는 동안 두셋, 혹은 적어도 하나의 귀족이나마 눈도장을 찍으러 와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파티에 참석한 귀족들은 부채 뒤로 묘한 표정을 감추며 그녀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도 나서서 말을 걸지 않았다. 실비아는 이것이 혹시 루베아의 경고와 관련이 있나 생각하며 연회장을 벗어났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전까지는 그녀의 충고대로 휴게실로 피신해 있을 생각이었다. 실비아는 조용히 휴게실들이 늘어선 복도로 향했다.
‘저쪽은 사람이 있나 보네.’
그녀가 적당히 빈 휴게실을 찾아 들어가려던 때였다. 사람이 있는 듯 보이는 휴게실 쪽에서 희미하게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직 초야도 치르지 않았다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