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어쩌면 지지 않는 꽃이 피어나는 곳2021.08.05.
“……아직 초야도 치르지 않았다면서요?”
희미한, 하지만 말에 담긴 은근함을 눈치챌 만큼은 선명한 말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실비아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우뚝 멈췄다. 그녀가 걸음을 멈추자 방 안에서 이루어지는 대화가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세상에, 어떻게…….”
“두 분은 굉장히 사이가 좋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맞아요. 저번 연회에서도 그렇게 좋아 보이셨는데!”
“아이, 참. 두 분 다 한창때에, 그렇게까지 금슬이 좋은데 아직도 아이 소식이 없다는 게 뭐겠어요? 그게 다 공작 부인께서 초야를 거부하셨기 때문이라잖아요!”
“어머, 어머머.”
누군가 극적인 어조로 뱉은 말에 잔뜩 흥분한 이들이 동조했다. 그로 인해 저들의 대화 주제가 자신과 란델이라는 것을 깨달은 실비아가 소리 없이 헛웃음을 흘렸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솔직히 놀랍지도 않았다. 오히려 지금 저들의 반응이야말로 실비아가 눈을 감고도 그려낼 수 있을 만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공작저의 사용인 중 누구의 입을 통해 흘러나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래지 않아 이렇게 될 것이라 예견하고 있었기에 새삼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실비아는 어디 뭐라고 떠드는지 들어나 보자, 싶은 마음에 팔짱을 끼고 닫힌 문 옆에 등을 기대어 섰다. 그녀의 존재를 모르는 방 안의 여인들은 한층 더 신이 나서 재잘거렸다.
“공작 부인께선 대체 왜 초야를 거부하시는 걸까요? 공작께서 저렇게 훌륭하신데…….”
“사실, 그게 다 정치적인 이유라는 말이 있어요.”
“어머, 어떤……?”
누군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자 다른 이들도 덩달아 숨을 죽였다. 실비아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대화에 집중했다.
“공작 부인께서는 플로레트 가문 출신이시잖아요. 가재는 게 편이라는 남부 속담처럼, 현왕께서 북부를 고깝게 보시는데, 플로레트 가문 사람이라고 다르겠어요?”
“설마…….”
“공작 부인께서는 초야를 빌미로 북부의 기를 죽이시려는 거예요. 제대로 된 안주인이 되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비치시는 거나 다름없죠.”
“세상에나.”
의혹이 깊어짐에 따라 사람들의 음성에 은은한 분노가 배어나기 시작했다. 실비아는 문밖에서 차게 가라앉은 눈으로 생각했다.
‘누군지 몰라도 머리를 잘 썼네.’
엘바레스 왕국에서 초야는 암묵적인 부부의 의무로 여겨진다. 한 가문을 이끄는 수장 부부라면 그 의무는 더욱 막중해진다. 그들은 강건한 후계자를 여럿 낳아 영지를 차질 없이 돌보아야 하니까. 사실, 애초에 초야를 거부한 것은 영주인 란델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의 대화를 통해 유추하건대, 이미 북부 사람들의 마음에는 실비아에 대한 반감이 싹튼 상태일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왕이 북부를 경계한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란델과 실비아의 결혼 또한 왕가의 강요로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북부 사람에게는 북부의 영주인 란델이 초야를 거부했다는 사실보다는, 실비아가 초야를 거부하며 기 싸움을 하려 드는 것이라는 소문이 더욱 신빙성 있게 들릴 테지. 자고로 공동의 적이란 언제나 내부의 결속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법이었다.
‘왕가 쪽에서 나설 여지도 있고. 여러모로 곤란한데…….’
금색 눈이 가늘어졌다. 위험한 것은, 이 소문이 왕가가 북부에 개입할 여지를 줄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진실은 상관없다. 단지 북부를 정치적으로 공격할 빌미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현왕은 필시 소문에 반발할 것이다. 그는 실비아가 아닌 란델이 초야를 거부한다고 주장하며, 이것이 혼인을 주선한 자신을 괄시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고 목소리를 높일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일이 커지면 란델, 그 멍청하리만치 올곧은 남자는 초야를 거부한 것이 자신이라 주장할 테고. 왕은 제 발로 입속에 걸어 들어오는 먹잇감을 보는 기분이겠지.
‘설마 이 소문을 낸 게 왕인가?’
실비아가 합리적인 의심을 이어갈 때였다. 달그락. 마치 대화를 끊기 위한 것처럼, 찻잔이 받침과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귓가를 자극했다. 그 소리를 낸 당사자로 추정되는 여인이 싸늘하게 일갈했다.
“그건 저희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실비아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필리아 세이크린?’
실비아는 놀란 나머지 눈을 크게 뜬 채로 얼음처럼 굳어졌다. 그사이, 신나게 소문을 옮기던 여인이 불편한 목소리를 냈다.
“세이크린 후작 영애, 방금 무슨.”
“못 들으셨다니 다시 한번 말씀드리죠. 저는 그것이 뭇사람이 왈가왈부할 만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필리아는 꿋꿋했다. 그녀의 말에 방 안에서 느껴지던 활기가 삽시간에 죽은 듯 가라앉았다. 숨 막히는 정적 가운데, 필리아가 이때까지 들어본 적 없는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애초에 초야를 치를지 말지에 관한 결정은 구닥다리 같은 세간의 인식이 아니라 당사자들이 내리는 겁니다. 지극히 사적인 부부간의 일이라는 뜻이죠.”
“하지만…….”
“다른 이의 집안일에 말을 얹는다는 건 가주의 권위에 도전한다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던가요? 공작님께서 이 일을 알게 되면 어떻게 나오실지 참 궁금하군요.”
“히끅.”
끈질기게 항변하던 영애는 란델이 거론되자 작게 겁에 질린 소리를 내며 입을 다물었다. 필리아는 그제야 평소의 발랄한 어조로 돌아와 말했다.
“이런 것 말고 조금 더 고상한 이야기를 하죠, 우리. 저는 이 모임이 그런 취지로 운영된다고 들었기에 참석한 것이니까요.”
“그, 그럼요! 당연히 그래야지요.”
“흠흠. 안 그래도 이번에 ‘날개 없는 신’이라는 소설을 쓴 통속 작가가 신작을 내놓았다던데…….”
이후 뜬소문에 관한 이야기는 더는 나오지 않았으며, 대화는 대체로 무난하게 흘러갔다. 실비아는 한동안 멍하니 문 옆에 기대어 서 있다가, 이윽고 불편한 기분으로 자리를 떴다.
‘……뭐지.’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었다. 이런 기분을 언제 느껴봤더라?
‘아, 그래.’
루베아가 제게 아비의 반역 사실을 고발한 내용의 쪽지를 건넸을 때. 그때도 꼭 이런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믿어왔던, 알고 있던 것들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기분.
‘아무리 연적이라도 아닌 건 아니라는 건가?’
필리아 세이크린은 분명 실비아를 고깝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니 상대가 이런 추문에 휩싸이는 것을 기꺼워해야 이치에 맞을진대. 대체 어째서…….
“…….”
불쾌함이라고 해야 할지, 생소함이라고 해야 할지 모를 감정이 숨을 턱 틀어막는 느낌이었다. 결국 실비아는 멀리 가지 못하고 휴게실 복도 끝에 멈춰 서서 가만히 호흡을 골랐다. 그녀가 눈을 감고 마음을 다스리고 있던 때, 별안간 모퉁이 너머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기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작 부인! 왜 여기 나와 계세요? 제가 분명 휴게실에 계시라고…….”
“……글레버 백작.”
루베아는 휴게실에 있으라 신신당부한 것이 무색하게도 복도 한가운데에 서 있는 실비아를 보고 놀란 듯 눈을 부릅떴다. 그녀는 다급하게 실비아의 손을 잡아끌어 바로 옆의 휴게실로 들어가 문을 닫아걸었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루베아가 몸을 빙글 돌려 실비아와 시선을 맞췄다. 보랏빛 눈에는 망설임이 그득했지만, 그녀는 이내 결연한 눈빛으로 말문을 뗐다.
“그보다, 제가 드릴 말씀이 있다고 했었지요.”
“…….”
“이런 추문을 전하게 되어 굉장히 송구합니다만, 세이크린 후작님께서…… 공작님과 부인께서 제대로 된 부부가 아니라는 말을 퍼트리고 다니십니다.”
루베아는 본인이 소문을 퍼트린 게 아님에도 왜인지 미안한 기색이었다.
“소문의 최초 근원지를 확실히 하느라 말씀드리는 게 늦어졌습니다. 원래 그런 분이 아닌데, 대체 왜 그러시는 건지…….”
“…….”
“부인?”
실비아가 놀란 반응조차 없이 입을 열지 않자, 루베아가 의아한 듯 그녀를 불렀다. 그 모습을 보자 문득 떠오른 생각에 실비아가 입을 열었다.
“백작.”
“아니, 대체 왜 그렇게 바보처럼 서 계시는…… 예, 말씀하시지요.”
“자네는 분명 나를 싫어했었지.”
“콜록.”
갑작스럽게 들춰진 치부에 당황한 루베아가 마른기침을 내뱉었다. 그녀는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한 사람처럼 입술만 달싹였다. 실비아는 루베아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지금도 그다지 좋아하는 건 아닐 테고.”
“갑자기 그런 말씀은 왜…….”
“그런데 왜 나를 돕는 건가? 사실 모른 척하는 것이 더 편할 텐데.”
옳지 않은 일을 ‘옳지 않다’라고 말하는 지극히 단순한 일.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모두가 왼쪽을 가리킬 때, 혼자서 오른쪽을 가리키는 인간은 무리로부터 버림받기 마련이기에. 그녀가, 알리사가 그랬던 것처럼.
-그건 저희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하지만 필리아 세이크린은 그렇게 했다. 그 자리의 모두가 신이 나서 공작 부부의 추문을 입에 올릴 때. 그녀는 망설임 없이 사람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것을 택했다. 그 행동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하면 좋단 말인가. 인간은 제게 이득이 되지 않는 일에 움직이지 않는다. 인간은 타인의 불행으로부터 자신의 행복을 찾는 족속이다. 인간의 마음은 덧없이 져버리는 꽃잎과도 같은 것이라, 작은 유혹에도 쉽게 스러진다. 또, 인간은……. 실비아가 기도문을 외듯 두서없는 생각을 이어가고 있을 때. 당황을 추스른 루베아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말씀대로, 저는 부인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습니다. 물론 쪽지를 전해주려 하셨던 건 감사하지만.”
“…….”
“하지만 그때도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
“저는 가신으로서,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에요.”
아. 실비아는 저도 모르게 탄식 같은 숨을 뱉었다. 마치 그녀를 감싸고 있던, ‘불신’이라는 이름의 유리 벽 한구석이 부서져 나간 느낌이었다. 실비아가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잠겨 있는 사이. 루베아는 새침하게 눈을 내리깐 채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물론 좋아하지 않는다 뿐이지, 싫어하는 것도 아니지만.”
“……아, 미안하네. 미처 못 들었는데, 다시 한번 말해주겠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워낙 작은 중얼거림이었던지라 실비아가 한발 늦게 되물었으나 루베아는 정색하며 딴청을 피웠다. 직후 무언가를 퍼뜩 떠올린 루베아가 실비아의 등을 떠밀었다.
“그러고 보니 공작님께서 부인을 찾으셨어요. 얼른 연회장으로 돌아가세요.”
“그래. 고맙네.”
어느 정도 평정을 되찾은 실비아가 담백하게 덧붙인 말에 루베아가 움찔했다. 그녀는 소름이 오소소 돋은 양팔을 슬쩍 문지르고는 고개를 돌렸다.
“……뭐, 딱히 도왔다고 할 만큼의 일을 한 것도 아닌데요.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루베아는 한숨이 나올 만큼 완벽하게 예를 갖춰 보이고는 사라졌다. 실비아는 한동안 루베아가 서 있던 자리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상한 사람들.’
북부에 온 이후로 자꾸만 마음이 수런거렸다. 분명 이럴 리가 없는데. 자신이 기나긴 세월 동안 겪고, 본 인간의 악의가 아직도 눈앞에 선한데. 어째서 자꾸만 끝의 끝까지 선의를 간직하는 사람이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일까. 영원한 마음이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왜 한편으로는 그 거짓말 같은 일이 현실이 되었으면 싶은 것일까. 왜…….
-실비아.
그때 불현듯 란델의 웃는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실비아는 제풀에 놀라 고개를 휘저어 혼란을 털어내고는 도망치듯 휴게실을 벗어났다. 복도를 가로지르며 조금 전, 필리아와 영애들이 모여 있던 휴게실을 확인하자 텅 비어 있었다.
‘연회장으로 돌아간 건가?’
실비아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연회장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창밖에는 어느덧 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이윽고 실비아가 연회장의 입구에 막 한 발을 들이는 순간.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후작.”
서슬 퍼런 란델의 음성이 귓가로 날아와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