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경배하라2021.08.09.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후작.”
실비아가 연회장에 발을 들이자마자 보게 된 것은 숨죽인 사람들과 그 가운데 마주 선 란델, 세이크린 후작의 모습이었다. 란델은 잘 차려입은 것이 무색하게도 목과 턱에 핏줄이 도드라질 만큼 분노한 얼굴이었다. 실제로 다른 사람들은 그가 뿜어내는 살기에 차마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실비아는 란델의 얼굴을 본 순간 그 또한 추문을 접했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세이크린 후작은 짐짓 당당하기까지 한 태도로 꿋꿋이 말을 이었다.
“공작 부인께서는 북부의 안주인 자격이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초야는 대대로 이어져 온 신성한 의무이자…….”
“내가 이 자리에서 장갑을 벗어 던지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면 그 입 다무는 것이 좋을 겁니다.”
란델이 낮게 으르렁거리며 후작의 말을 막았다. 그는 잘 정돈된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쓸어 넘기며 필사적으로 살의를 억눌렀다.
‘젠장. 갑자기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이 와중에도 공대를 버리지 못하고, 차마 노망이 났느냐는 말은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것이 지극히 그다웠다. 란델은 당장에라도 의무를 거부한 것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밝혀 실비아에게 씌워진 추문을 벗기고 싶었다. 하지만 늘 왕가를 의심하고 경계하는 북부 사람들이 그의 말을 쉽사리 믿을 것인지 알 수 없을뿐더러. 자칫 실비아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돌기라도 할까 봐 염려스러워 섣불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이곳이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연회장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했다. 란델이 진지하게 세이크린 후작의 뒷덜미를 내려쳐 기절시킬까 고민하는 사이. 후작은 끈질기게 실비아를 깎아내리려 애썼다.
“냉정히 생각하십시오, 공작님. 지금이라도 초야 거부를 빌미로 공작 부인을 내치셔야 합니다. 그리고 제 딸처럼 제대로 된 영애를 안주인으로 들여 북부의 결속을 꾀하는 것이…….”
세이크린 후작이 자연스럽게 제 딸인 필리아를 거론하는 순간. 란델과 실비아의 머릿속에 동시에 비슷한 생각이 스쳐 갔다.
‘……저번에 벨포르 성에서 열렸던 연회에서도 이상하게 필리아와 나를 엮으려 하셨지. 혹시 마법, 아니면 마족의 능력에 당한 건가?’
‘그러고 보니 서큐버스 중에는…… 가끔 세뇌와 비슷한 능력을 쓸 수 있는 자도 있었어.’
차이가 있다면 란델은 정답에 거의 근접했다는 것이고, 실비아는 답을 아는 사람이었다는 점이었다. 세이크린 후작이 제정신이 아니라 확신한 실비아가 걸음을 떼었다. 그녀를 발견한 사람들이 작게 웅성거리기 시작하자 란델이 흠칫해 몸을 돌렸다.
“실비아.”
란델이 실비아를 눈에 담는 것과 동시에 그의 주위를 가득 메우고 있던 살기가 조금이나마 옅어졌다. 실비아는 매끄러운 미소를 띤 채 후작과 란델의 앞에 멈춰 섰다.
“두 분 다 그만두세요.”
“공작 부인.”
“글레버 백작이 성심껏 준비한 파티에서 이 이상 소란을 일으키면 실례지요. 그렇지 않나, 후작?”
실비아는 묘하게 위협적인 미소로 후작의 말문을 막았다. 그녀는 후작의 말문이 막힌 틈을 타 주위를 둘러보며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후작께서 뭔가 오해하신 듯하군. 괜한 오해로 파티를 망칠 수는 없으니 우리는 성으로 돌아가 따로 얘기를 나누기로 하겠네.”
“저는…….”
“란델.”
후작이 무어라 반발하려 하자 실비아가 란델을 불렀다. 란델은 그녀의 뜻을 눈치채고는 후작의 어깨를 단단히 붙들었다.
“함께 가시죠. 안 그래도 피곤해 보이시는데.”
“저는 피곤하지 않……!”
“오스턴. 귀환한다.”
“예, 주군.”
란델이 이어 오스턴에게 눈짓하자 오스턴이 남몰래 손을 움직여 마법으로 후작의 입을 막았다.
“읍, 으읍!”
후작은 당황해 발버둥 쳤으나 홀로 세 사람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중 란델이 혼자서도 세 사람만큼의 힘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실질적으로 다섯을 상대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후작은 제 발로 걷지 못하다시피 하며 공작성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탈 수밖에 없었다. * * * 공작 일행과 세이크린 후작이 떠난 연회장은 사람들의 혼란스러운 웅성거림으로 가득했다.
“오해?”
“후작께서 말씀하셨던 이야기가 다 오해라는 뜻인가?”
“하지만 후작님이 확신도 없이 허튼소리를 하실 분은 아닌데…….”
평소 후작의 인품이 그린 듯 훌륭했기에 사람들은 쉽사리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혼란을 잠재운 것은 루베아였다.
“소란을 일으켜 미안합니다. 부디 후작님의 오해가 잘 풀렸으면 하는 바람이네요.”
그녀가 부채를 탁 접으며 말문을 떼자 사람들이 일제히 말을 그쳤다. 루베아는 늘 그랬듯이 허리와 목을 반듯이 펴고, 턱을 안으로 당겨 더없이 귀족적인 태도로 좌중을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모두 들으셨겠지만, 후작께서는 현재 사소한 오해를 가지고 계십니다. 나는 오늘 파티의 주최자로서, 이와 관련된 헛소문이 자칫 여러분의 귀를 더럽히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말에 앞장서서 말을 옮기고 다니던 귀족 몇이 어깨를 움츠렸다. 루베아의 말뜻은 분명했다. 괜히 헛소문을 옮기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파티 주최자의 권한으로 그 사람을 내쫓겠다는 뜻이었다. 공작 부부가 글레버 백작에게 우호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귀족들은 될 수 있으면 그녀의 눈 밖에 나지 않기를 원했기에 조용히 입술을 닫았다. 모두가 눈을 굴리며 서로의 눈치를 보던 찰나. 명랑한 목소리가 굳어 있던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었다.
“어머, 설마 그렇게까지 저급하고 상식과 예의를 갖추지 못한 사람이 있을까요? 괜한 걱정을 하시네요, 백작님.”
물론 말의 내용은 전혀 부드럽지 않았지만. 한 손에 부채를 펼쳐 든 필리아가 나비 같은 걸음으로 루베아에게 다가섰다. 루베아의 미간이 티 나지 않을 정도로 미미하게 좁혀졌다. 필리아는 그런 기색을 일절 눈치채지 못한 듯 한숨을 폭 내쉬며 어깨를 으쓱했다.
“저희 아버지께서 요즘 나이 드셔서 그런지 자주 이것저것 헷갈리고, 또 깜빡하신다더라고요.”
란델조차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노망나셨냐’는 말은 정작 친딸인 필리아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하지만 필리아는 천연덕스럽게 부채로 얼굴을 반쯤 가리며 눈웃음을 지었다.
“이런 사소한 오해로 괜히 저희 집안과 공작님의 사이가 벌어졌다느니…… 그런 허튼소리를 하는 분은 없을 거라고 믿어요. 그렇죠?”
아름다운 웃음이었으나 부채 위로 드러난 눈에서는 ‘입 잘못 놀리면 다 물어 뜯어버리겠다’라는 뜻이 명백히 전해져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루베아에 이어 필리아까지 후작이 한 말이 오해라는 데 의견을 싣자, 사람들은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따님이신 세이크린 후작 영애까지 저렇게 말씀하신다면…….”
“하긴, 후작님께서 연세가 좀 있으신가. 나도 벌써 깜빡하는 일투성이인데.”
“당신도 참.”
누군가 입을 열자 사람들은 거기에 저마다 한 마디씩을 보탰다. 그러자 연회장은 금세 다시 활기를 띠고 소란스러워졌다. 루베아와 필리아는 그런 사람들을 보며 여전히 미소를 유지한 채로 등을 맞대고 섰다. 필리아가 부채로 입가를 가리고 작게 비아냥댔다.
“웬일이래? 네가 다른 사람을 나서서 감싸주기도 하고.”
루베아 역시 눈썹을 슬쩍 구기며 맞받아쳤다.
“그러는 너야말로 남부에서 뭘 잘못 주워 먹고 오기라도 했나? 내 말에 맞장구를 다 치고.”
“하여간 한 마디도 안 지지.”
“누가 할 소리를.”
둘은 동시에 콧방귀를 뀌었다가, 상대와 동시에 같은 행동을 했다는 데 기분이 상해 얼굴을 팍 구겼다. 필리아는 등 뒤를 한번 힐긋 흘겨보고는 말했다.
“나는 혹시라도 말귀 못 알아들은 얼간이가 없는지 확인하러 갈 테니까, 너는 사용인들 입단속이나 해. 소문은 원래 사용인들 입을 타고 퍼지는 경우가 제일 많은 거 알지?”
“그건 일개 영애인 너보다 가주인 내가 더 잘 알아.”
“허. 너 지금 나보다 아주, 아주 조금 먼저 작위 물려받았다고 유세 부리니?”
필리아가 발끈했으나 루베아는 그녀를 무시하고 연회장을 벗어났다. 무시당한 필리아는 잠시간 제자리에서 발을 구르며 씩씩대다가, 곧 귀족들을 향해 걸음을 떼었다. * * * 한편, 실비아와 란델은 후작을 납치하다시피 하여 벨포르 성으로 돌아왔다. 우선 후작의 입을 막았던 마법을 풀고 그를 응접실에 반 감금한 후. 실비아와 란델은 응접실 문 앞에서 실랑이를 벌였다.
“제가 먼저 단둘이 얘기해볼게요. 소문의 주체는 저잖아요.”
“안 됩니다. 위험합니다.”
“그럼 문 바로 앞에 서 있으면 되잖아요. 혹시라도 무슨 문제가 생기면 소리를 지를게요.”
“…….”
란델은 ‘후작이 세뇌당했을지도 모른다’라는 확실하지 않은 사실을 전해도 될지 말지 고민에 잠겼다. 그가 말을 잃은 틈을 타 실비아는 재빨리 응접실 안으로 몸을 들였다.
“정말 잠깐이면 돼요. 물어볼 게 있어서 그런 거니까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요.”
“실비아, 잠깐…….”
란델이 당황한 얼굴로 손을 뻗었으나 실비아는 곧장 문을 잠가버렸다. 잠시 문밖에서 한숨 소리, 안절부절못하며 왔다 갔다 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곧 잠잠해졌다. 란델이 제 말대로 문밖에서 얌전히 대기하고 있는 것을 확인한 실비아가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 몸을 물렸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저는 오해한 것이 없습니다.”
방문을 두드리다가 자포자기해 소파에 앉아 있던 세이크린 후작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실비아는 말없이 후작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소파는 응접실의 한가운데, 그러니까 방문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진 곳에 놓여 있었다. 실비아는 소파로 걸음을 옮기며 등 뒤로 가볍게 손을 움직였다. 손끝에서 작은 마법진이 반짝 빛나는가 싶더니 그녀와 후작의 주위로 눈에 보이지 않는 막이 생겨났다.
‘이 정도 거리면 눈치채지 못했겠지.’
실비아는 란델과 함께 있을 오스턴을 상기하며 방문을 힐긋 돌아보았다. 그녀의 예상대로 방문 밖은 조용했다. 소리를 차단하는 마법이 워낙 간단한 것이기도 했고. 막으로부터 방문까지의 거리가 꽤 되었기에 오스턴은 마력의 미세한 움직임까지는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저래서 어떻게 대마법사라는 칭호를 달겠다는 건지.’
실비아는 저도 모르게 노인처럼 혀를 한번 끌끌 차고는 시선을 바로 했다. 후작은 늘 온화하던 실비아의 분위기가 한순간에 달라진 것을 느끼고 흠칫 어깨를 굳혔다.
“무슨…….”
“가까이서 보니까 더 확실하네. 저번보다 어둠이 짙어졌어.”
후작이 당황해 버벅거렸으나 실비아는 그를 무시한 채 제 할 말만 중얼거렸다. 후작은 세뇌된 것이 거의 확실하니 아마 이 일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고, 마법으로 소리를 차단했으니 누군가 엿들을 일도 없다. 그로써 거리낄 것이 없어진 실비아의 얼굴에서 ‘인간다움’이 모조리 빠져나갔다. 지극히 무표정한 얼굴의 그녀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란델과 초야를 치르지 않았다는 정보를 누구에게서 들었지?”
“공작 부인. 부인께 공작님을 위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으시다면 저를 협박하실 것이 아니라 지금이라도 이혼하십시오. 그것이 공작님을 위하는 길입니다.”
“묻는 말에나 답하지 그러나.”
“초야는 부부의 의무입니다. 의무를 수행하지 않은 채 권리만 찾으시는 것은 옳지 못한 행동입니다.”
실비아는 여러 번 대화를 시도했으나, 후작의 대답은 전부 어딘가 묘하게 논점에서 어긋난 채 집요하게 반복되었다. 그로써 후작이 제정신이 아님을 확신한 그녀가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 올렸다.
“역시 대화만으로는 안 되네.”
실비아는 중얼거림을 끝맺는 동시에 발밑에서부터 어둠을 끌어 올렸다. 찬란한 금빛 눈이 동공부터 서서히 붉게 물들었다. 그녀가 마왕마저 압도할 듯한 짙은 어둠으로 제 지위를 고스란히 드러내자 순식간에 방 안의 공기가 탁해졌다. 그때 멍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후작의 그림자가 겁에 질린 것처럼 파도치듯 일렁이기 시작했다. 실비아는 절반쯤 붉게 물든 눈으로 그 움직임을 빤히 응시했다. 그 시선에서 압박을 느낀 것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후작의 그림자에서 새까맣게 일렁이는 뱀들이 기어 나와 실비아의 발치에 머리를 조아렸다. 고작 어둠의 파편 정도인 그들이 왕에게 경배하지 않을 도리는 없었다. 그것을 본 실비아가 상냥하게 눈을 휘며 손을 뻗었다.
“착하지. 이리 온.”
그 손짓에, 가장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던 뱀이 벌벌 떨며 그녀의 팔을 타고 스르륵 기어올랐다. 실비아는 뱀의 머리를 손끝으로 가볍게 간질이며 속삭였다.
“그래서…… 너를 보낸 주인이 누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