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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각방? (39/118)

39. 각방?2021.08.12.

16558812139353.jpg“이번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후작답지 않아.”

응접실 문 옆에 등을 기댄 채 실비아를 기다리던 란델이 문득 중얼거렸다. 마찬가지로 뭔가를 고민하던 오스턴이 긍정했다.

16558812139404.jpg“맞습니다. 멀쩡하셨던 분이 갑자기 저렇게 얼간이가 된다는 건 노망으로도 설명이 어렵지요.”

16558812139353.jpg“…….”

란델은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의 어휘를 정정해줄까 하다가 말을 아끼기로 했다. 연녹색 눈이 서늘히 가라앉았다.

16558812139353.jpg“마법, 혹은 마족에게 당한 것 같던데. 오스턴, 네 의견으로는 어떻지?”

16558812139404.jpg“아까 후작님을 마차에 태울 때 한 차례 살펴보았지만 별다른 마법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16558812139353.jpg“역시 그런가.”

란델은 오스턴의 의견을 듣고 세이크린 후작이 마족에게 당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그는 곁눈질로 응접실의 문을 힐긋 일별하고 가만히 방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응접실 안은 고요했다. 이후로도 한동안 응접실 안의 상황을 파악하려 노력하던 란델이 미련을 접고 오스턴을 돌아보았다.

16558812139353.jpg“세이크린 후작저에 최근 새 얼굴이 들락거린 적은 없는지 알아보도록. 마족이 인간의 눈에 띄지 않게 후작에게 접근하려면 분명 도움이 필요할 테니까.”

16558812139404.jpg“존명.”

오스턴은 란델의 명령을 머릿속에 새기며 깍듯이 답했다. 이후 오스턴은 란델과 함께 실비아를 기다리며 이번 일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문득 떠오르는 얼굴에 흠칫 숨을 멈췄다.

16558812139434.jpg-도와줘요.

16558812139404.jpg‘아, 젠장. 또.’

오스턴은 자꾸만 습관처럼 떠오르는 루베아의 얼굴을 몰아내려 애썼으나 기억은 제멋대로 범람했다.

16558812153742.jpg-일전에 지시하셨던 일에 관한 이야기가 조금 전에 도착했는데, 언제쯤 보고드려야 할지…….

  글레버 백작저의 파티에서, 오스턴은 란델과 함께 남부의 전황과 왕세자의 근황에 대한 보고를 듣기 위해 자리를 비웠었다. 하지만 보고 중간에 란델이 아무래도 실비아를 혼자 두기가 걱정된다며 그에게 실비아의 곁을 지킬 것을 명했다. 오스턴은 란델의 곁에서 노동하지 않고 받는 추가 수당의 달콤함을 만끽하다가 툴툴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16558812139434.jpg-아, 여기 계셨군요.

  루베아 글레버가 그를 찾아온 것은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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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턴은 바쁘게 돌아다닌 듯 작게 숨을 몰아쉬는 루베아 글레버의 모습에 경계심부터 세웠다. 그를 싫어하다 못해 경멸하는 루베아 글레버가 자진해서 그를 찾아왔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오스턴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마법진을 불러내고는 싸늘히 입을 열었다.

16558812139404.jpg-누구냐.

16558812139434.jpg-……? 머리라도 다치셨습니까, 도슬러 님?

16558812139404.jpg-글레버 백작께서 먼저 날 찾을 이유가 없다. 넌 누구지? 마법으로 모습을 바꾼 건가?

  오스턴의 계속되는 추궁에 루베아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경멸에, 오스턴은 상대가 루베아라는 것을 확신하고 마법을 거두었다. 루베아는 오스턴이 정신을 차린 것 같자 본론을 꺼내 들었다.

16558812139434.jpg-저랑 잠시 동행해주셔야겠습니다.

16558812139404.jpg-제가 왜 백작을? 싫습니다.

16558812139434.jpg-공작 부인을 위한 일이에요.

16558812139404.jpg-……예?

  오스턴은 순간 제 귀가 잘못된 줄 알고 되물었다. 하지만 루베아는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16558812139434.jpg-최근 공작 부인에 관련된 불미스러운 소문이 나돌고 있어요. 말이 더 퍼지기 전에 최초로 소문을 퍼트린 사람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아내야 해요.

16558812139404.jpg-허.

  오스턴이 기가 찬 웃음을 내뱉었다.

16558812139404.jpg-지금 저더러 백작께서 공작 부인을 돕겠다고 하시는 걸 믿으라는 겁니까?

  오스턴은 실비아가 공작 부인이 된 이후로 루베아가 그녀에게 적의를 품었던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제외하고도 루베아의 명령 같은 말을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손톱만큼도 들지 않았다. 평소처럼 돈을 요구할까, 아니면 고개를 숙이고 정중히 부탁해보라고 빈정대어 저 곱상한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구경할까. 오스턴이 그런 생각으로 입매를 뒤틀던 차.

16558812139434.jpg-부탁드립니다.

  그가 머릿속으로 생각했던 행동을 고스란히 빼내어 간 듯, 루베아가 허리를 깊이 굽혔다. 오스턴은 벼락을 맞은 듯한 기분을 느끼며 그대로 굳어졌다. 저 고고한 여자가. 평생 구름 위에서 저를 내려다보고 있을 것 같던 여자가. 처음으로 제게 날을 세우지 않고 허리를 굽혔다. 그 사실은 오스턴에게 굉장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루베아는 허리를 숙인 채 덤덤히 말을 이었다.

16558812139434.jpg-사람들은 갓 백작위를 물려받은 제게 선선히 진실을 털어놓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제 곁에 도슬러 님께서 서 계시기만 해도 그들은 눈치를 보겠죠. 이것이 공작님의 뜻이 아닌가, 하며.

16558812139404.jpg-…….

16558812139434.jpg-그러니 부탁드립니다. 잠시면 됩니다. 어차피 저 또한 도슬러 님께서 저를 못마땅하게 여기신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요. 정당한 보수도 지급하도록 하지요.

  가만히 루베아의 말을 듣던 오스턴은 알 수 없는 울렁거림에 충동적으로 불쑥 내뱉었다.

16558812139404.jpg-……됐습니다.

16558812139434.jpg-……네?

16558812139404.jpg-보수는 됐습니다. 동행하지요.

  루베아는 그 말에 생경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오스턴 또한 자신이 무보수로 일을, 그것도 귀족의 일을 돕기로 자처하다니 정신이 조금 이상해진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조금 전에 본,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상대를 위해서 서슴없이 허리를 굽히는 루베아의 모습이 어쩐지 마음에 남아서. 그는 상대가 먼저 자존심을 굽히고 제게 예를 갖추었으니, 이번만큼은 저 또한 사감을 제외하고 협력하는 것이 도리라 합리화하며 손을 내밀었다.

16558812139404.jpg-모시겠습니다, 백작님.

  ***

16558812181486.jpg“……너희들의 주인이 벨라라고?”

한편, 응접실 안. 실비아는 파르르 떨던 뱀들이 내놓은 답에 놀라 중얼거렸다. 그녀는 갑작스럽게 세뇌가 풀린 탓인지 기절한 후작의 맞은편에 앉아 미간을 설핏 일그러트렸다.

16558812181486.jpg‘외모가 심상치 않아 의심은 했지만…… 서큐버스였군.’

세뇌라는 것은 결국 상대를 현혹해 제 뜻대로 움직이는 것. 넓게 보면 서큐버스의 ‘유혹’과도 같았다. 실비아는 어느새 제 기운에 적응했는지 제게 애교를 부리는 뱀들을 쓰다듬으며 고민에 잠겼다.

16558812181486.jpg‘목적이 나일까, 아니면 란델일까.’

벨라가 세이크린 후작에게 세뇌를 건 범인이라면. 그 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받을 뻔한 사람은 둘이다. 본인, 그리고 란델. 실비아는 자칫하다가는 북부 사람들의 반감에 공작 부인 자리에서 쫓겨날 수 있었고. 란델은 왕가로부터 소문을 빌미로 공격당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벨라의 목적은 어느 쪽이었을까. 실비아를 공작 부인 자리에서 내쫓는 것? 아니면 왕실로 하여금 란델과 북부를 압박하게 하는 것?

16558812181486.jpg‘흠…….’

실비아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제 주위에서 머리를 까딱거리는 뱀들을 바라보았다.

16558812181486.jpg‘역시, 그 주인이라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내야 확실해지려나.’

벨라의 뒤를 봐주어 그녀를 인간 세계에 머물게끔 하고, 제 수족으로 부리는 자. 그자가 누구인지 알아야 했다. 혹시나 이번 일이 벨라의 단독 행동이었다고 한들,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게 하는 약을 제공하는 사람에게 반기를 드는 행동을 할 수 있을 리는 없으니. 그 주인의 뜻이 곧 벨라가 벌이는 행동의 이유일 가능성이 컸다.

16558812181486.jpg‘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실비아가 지금 벨라의 뒤를 캐어도, 그것은 대외적으로 북부의 안정을 위한 일처럼 보일 것이다. 신의 의심을 피하며 자연스럽게 위험에 빠지기에는 최적의 조건이라는 뜻이었다.

16558812181486.jpg“…….”

생각을 이어가던 순간 란델의 얼굴이 떠오른 탓에 움찔 어깨를 떨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가볍게 휘저어 생각을 떨쳐낸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16558812181486.jpg‘어차피 오늘 일 때문에 당분간 후작에게 접근하지는 못하겠지만, 뱀들이 사라지면 눈치채겠지.’

실비아는 벨라가 뱀들에게 심어놓았던 ‘세뇌’의 능력만 거두어들인 후 그들을 다시 후작의 그림자로 들여보냈다. 후작은 여전히 기절한 채였다. 실비아는 표정을 가다듬고 소리를 차단하는 결계를 없앤 뒤 방문을 열었다.

16558812181486.jpg“란델.”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란델이 곧장 벽에서 몸을 떼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16558812139353.jpg“실비아.”

16558812181486.jpg“주치의를 불러줄래요?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기도 전에 갑자기 머리를 감싸고 고통스러워하더니 쓰러지더군요.”

실비아는 짐짓 염려스러운 표정을 띤 채 소파에 널브러진 후작을 향해 손짓했다. 놀란 란델이 오스턴에게 주치의를 불러오라 시킨 후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방 안에 한 발을 들이는 순간. 란델이 돌연 움직임을 멈추더니 가늘게 뜬 눈으로 경계하듯 방을 둘러보았다. 그는 실비아가 앉았던 자리 부근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술을 달싹였다.

16558812139353.jpg“……실비아.”

16558812181486.jpg“네?”

16558812139353.jpg“혹시 이상한 일은 없었습니까? 어쩐지 방의 기운이 이상한 듯하여.”

란델은 말을 하는 도중에도 경계를 거두지 못한 듯 그녀를 제 등 뒤로 이끌었다. 실비아는 조금 황당한 얼굴로 그의 뒤통수를 올려다보았다.

16558812181486.jpg‘……짐승도 아니고, 그걸 느꼈다고?’

‘어둠’을 느낄 수 있는 건 어둠을 다루는 마족, 혹은 그러한 기운에 민감한 짐승뿐인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란델은 짐승에 가까운 감을 가진 탓인지, 실비아가 잠시 불러냈던 어둠을 감지한 듯했다. 실비아는 보면 볼수록 놀라운 사람이라며 몰래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겉으로는 시침을 뚝 떼며 답했다.

16558812181486.jpg“아뇨. 아무 일도 없었어요.”

16558812139353.jpg“그렇습니까?”

16558812181486.jpg“네.”

란델은 워낙 석연치 않은 기분에 실비아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금색 눈과 연녹색 눈이 닮은 듯 다른 긴장을 담은 채 상대를 응시했다.

16558812153742.jpg“으윽…….”

그때, 소파에 쓰러져 있던 후작이 자그마한 신음을 흘리더니 눈을 떴다. 란델과 실비아는 그 소리에 흠칫 놀라 서로에게서 시선을 떼고 후작의 곁으로 다가갔다.

16558812139353.jpg“세이크린 후작. 괜찮으십니까?”

란델이 후작을 부축해 소파에 등을 기대어 앉게 하며 걱정을 내비쳤다. 후작은 아직도 머리가 아픈지 얼굴을 찌푸리고 주위를 두리번댔다.

16558812153742.jpg“여긴…… 제가 어째서 이곳에…….”

16558812139353.jpg“글레버 백작저의 파티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성으로 모셔온 참입니다만.”

16558812153742.jpg“글레버 백작저의…… 파티라고요?”

후작은 혼란스러운 기색이었다. 손가락을 접어 날짜를 헤아려보던 그는 이내 포기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16558812153742.jpg“죄송합니다. 제가 최근에 기억이 온전치 않은 일이 잦았던지라…… 제대로 기억이 나질 않는군요.”

그 말에 란델의 낯이 어둑해졌다.

16558812139353.jpg“그럼 후작이 실비아와 내가 초야를 치르지 않았다며 이혼을 주장했던 것도 기억나지 않겠군요.”

16558812153742.jpg“예, 아니, 예? 그게 무, 무슨. 제가 그런 말을 했단 말입니까?”

후작이 대번에 펄쩍 뛰었다. 그는 사색이 된 얼굴로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16558812153742.jpg“죄송합니다. 기억이 없긴 하나 제가, 제가 감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입이 백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란델과 실비아는 저마다 약간의 안타까움이 스민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의지로 한 일이 아님에도 진심으로 미안해하며 사과부터 건네는 그의 모습이 마음 아파서였다. 란델이 한숨을 삼키며 그를 일으켜 세웠다.

16558812139353.jpg“……아닙니다. 그것은 후작의 의지가 아니었을 테지요.”

16558812153742.jpg“예? 그게 무슨…….”

16558812139353.jpg“지금 당장 자세한 말씀을 드리기는 어려울 듯싶습니다. 우선 후작저로 돌아가 당분간 칩거하십시오. 조사가 끝나면 찾아뵙겠습니다.”

실비아 또한 후작의 안색이 좋지 않다며 후작저로 돌아갈 것을 권유했다. 결국 후작은 오스턴이 데려온 주치의에게 간단한 진찰을 받은 후 혼란스러운 얼굴로 마차에 올랐다. * * * 후작이 저택으로 돌아간 뒤. 란델은 오스턴과 함께 후작의 주변 인물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고, 실비아는 벨라의 주인을 만날 방법을 고심하기 시작했다. 저마다 바쁜 밤을 보낸 부부는 이른 아침, 식당에서 다시 만났다.

16558812139353.jpg“좋은 아침입니다, 실비아.”

16558812181486.jpg“좋은 아침이에요.”

부부는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은 후 자리에 앉았다. 사용인들이 식사를 차리고 물러난 후, 란델이 미안한 기색으로 말문을 뗐다.

16558812139353.jpg“어젯밤에는 일 때문에 침실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미리 말했어야 했는데…… 미안합니다.”

그는 전날, 후작을 돌려보낸 후 오스턴과 함께 곧장 성을 나섰기에 실비아에게 늦게 돌아온다는 말을 미처 전하지 못했다. 그것이 마음에 걸려 사과를 건네자, 실비아는 대수롭지 않게 빵에 버터를 바르며 웃었다.

16558812181486.jpg“아뇨, 괜찮아요.”

16558812139353.jpg“그래도…….”

16558812181486.jpg“어차피 이제부터는 각방을 쓸 생각이었으니까요. 신경 쓰지 말아요.”

챙그랑.

16558812139353.jpg“……예?”

‘각방’이라는 말을 들은 란델의 손에서 나이프가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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