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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소중한 것 (40/118)

40. 소중한 것2021.08.16.

16558812297013.jpg“어차피 이제부터는 각방을 쓸 생각이었으니까요. 신경 쓰지 말아요.”

챙그랑.

16558812297018.jpg“……예?”

‘각방’이라는 말을 들은 란델의 손에서 나이프가 떨어져 내렸다. 그는 하루 전의 후작처럼 사색이 된 얼굴로 되물었다.

16558812297018.jpg“각방…… 말입니까?”

16558812297013.jpg“네. 어차피 이번 일로 사람들이 우리가 초야를 치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도 했고, 굳이 같은 침실을 쓸 필요 없을 것 같아서요.”

실비아는 말을 맺으며 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하지만 조금 전의 말은 핑계에 불과했다.

16558812297013.jpg‘란델과 같은 방을 쓰면 빠져나가기가 어려울 테니까.’

실비아는 당분간 밤에 몰래 빠져나가 벨라를 관찰하며 그녀의 주인에게 접근할 방법을 찾을 생각이었다. 그런 상황에 란델과 같은 침실을 쓸 수는 없었다. 그는 어둠마저 감지할 만큼 짐승 같은 감각의 소유자라, 마법을 써서 빠져나가려 해도 들킬 위험성이 있으니. 당분간만이라도 아예 다른 침실을 쓰는 것이 안전할 터였다.

16558812297013.jpg‘맛 좋네.’

실비아는 태연한 얼굴로 빵의 폭신함을 음미했다. 그러한 사정을 모르는 란델은 세상을 잃은 얼굴이었다.

16558812297018.jpg‘나도 모르는 새에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건가.’

그는 자신이 무언가 잘못이라도 저질렀나 싶어 진지하게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과거의 자신을 쥐어짜 보아도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16558812297018.jpg‘설마…… 질렸나?’

그나마 자신할 것이라고는 몸뿐이라고 여겼는데. 설마 그마저도 질린 건가?! 결국 답은 찾지 못하고 자괴감만 잔뜩 기른 란델이 시무룩하게 답했다.

16558812297018.jpg“……부인께서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맘만 같아서는 ‘어째서’를 연발하고 싶었으나, 그랬다가 실비아가 자신을 귀찮게 여기기라도 할까 봐 겁이 났다. 하여 란델은 엉망인 속내를 감추고 의연한 얼굴로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한편, 실비아는 그의 대답에 샐러드를 뒤적이다가 말고 미묘하게 미간을 구겼다.

16558812297013.jpg‘막상 또 반발 한번 안 하니 괜히 기분이 별로네.’

란델이 선선히 각방을 쓰기로 해준 것이 좋긴 한데. 그와 동시에 그가 선선히 각방을 쓰자고 했다는 사실에 왠지 모르게 심술이 났다. 실비아는 괜한 마음을 털어내기 위해 고개를 가볍게 젓고는 식사에 집중하려 했다. 그러나 식사 중간중간 란델이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저를 힐끔거리자 양심이 콕콕 찔렸다. 애써 모른 체하던 실비아는 죄책감을 덜기 위해 고기 한 점을 포크로 집어 란델에게 내밀었다.

16558812297013.jpg“……먹어요.”

16558812297018.jpg“예?”

16558812297013.jpg“고기 좋아하잖아요. 맛있을 것 같으니까 먹어요.”

맛있으니까 먹어라, 도 아니고 맛있을 것 같으니까 먹어라, 라니. 제가 생각해도 바보 같다는 마음에 실비아는 속으로 땅을 쳤으나 꿋꿋이 손을 내리지 않았다. 란델은 잠시 심각하게 고민에 잠겼다.

16558812297018.jpg‘병 주고 약 주고……?’

각방을 쓰자고 하고 음식을 손수 먹여주는 건 무슨 뜻일까. 그리고 그 와중에 ‘맛있을 것 같으니까 먹어라’라고 말하는 실비아가 귀여워 보이는 자신은 미친놈일까, 아닐까. 아마 전자인 것 같긴 하다.

16558812297018.jpg“고맙습니다.”

란델은 말갛게 웃은 뒤 고개를 숙여 포크 끝의 고기를 이로 살짝 빼낸 후 삼켰다.

16558812297013.jpg“……뭘 그렇게 웃어요.”

16558812297018.jpg“그냥요. 맛있군요. 부인께서도 드십시오.”

실비아는 괜히 민망한 기분에 란델을 타박했으나 그는 식사 내내 싱글벙글했다. 결국 민망함을 이기지 못한 실비아가 란델의 어깨를 퍽퍽 때리고 나서야 그는 웃음을 그쳤다. * * * 그날 밤, 실비아는 각방을 쓰기로 했다는 말에 충격받은 얼굴의 사용인들을 뒤로하고 침실에 들었다. 란델과 함께 쓰던 부부침실이 아니라, 공작 부인의 침실이었다.

16558812297013.jpg“흠.”

실비아는 묘한 얼굴로 낯선 느낌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녀는 손을 뻗어 부드러운 이불을 만지작대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16558812297013.jpg‘왜 이렇게 커 보이지?’

공작 부인의 방에 있는 침대는 부부 침실에 있는 것과 달리 1인용이었다. 물론 1인용치고는 크고 고급스러운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2인용 침대에 비해서는 작은 크기임이 확실했다. 그런데도 왜 이리 침대 위가 휑해 보이는 것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실비아는 곧 착각이겠거니 치부하고는 침대로 올라갔다. 이불을 덮었는데도 피부 위로 돋아난 소름이 가시지 않았다.

16558812297013.jpg‘조금 추운가.’

실비아는 무의식중에 양팔로 어깨를 감쌌다가 등 뒤를 흘끔 돌아보았다. 그렇게 하면 늘 보이던 널따란 등이 없으니 어쩐지 방 안의 공기가 한층 싸늘하게 느껴졌다.

16558812297013.jpg‘그냥 지금 나갈까? 누가 들어오지는 않을 것 같은데…….’

본래는 사용인들을 비롯한 사람들이 모두 잠에 든 후 몰래 성을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잠도 안 오는 김에 조금 일찍 출발한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은 없지 않을까. 실비아가 한동안 침대 위에서 뒤척거리며 고민하다가, 끝내 성을 벗어나기로 마음을 정하고 몸을 일으키려던 때였다. 방 밖에서 작은 인기척이 들리는가 싶더니 희미한 대화 소리가 들렸다.

16558812297018.jpg“……는?”

16558812328531.jpg“……고 계실 겁니다.”

실비아는 그것이 란델과 델마의 목소리임을 깨닫고 재빨리 움직임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침실의 문이 조용히 열리더니 란델이 안으로 들어왔다. 실비아는 옆으로 돌아누워 있어, 눈꺼풀만 들어 올리면 문이 보이는 자세였다. 그녀의 얼굴로 소리 없는 시선이 닿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16558812297018.jpg“…….”

란델은 한동안 문가에 선 채 가만히 실비아를 바라보다가 발을 떼었다. 발소리를 죽이며 침대 옆까지 다가온 란델이 실비아의 머리맡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실비아는 당황했다.

16558812297013.jpg‘……뭐지?’

눈을 굴리고 싶었으나 혹여 자신이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들키게 될까 봐 그러지도 못했다. 그녀는 자신이 잠들었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도 자리를 떠나지 않는 그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란델은 이후로도 묵묵히 실비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조심스러운 눈길이 이마, 콧날을 지나 입술까지 움직였다가. 다시 흰 볼을 쓰다듬고, 눈꺼풀 위를 배회하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16558812297013.jpg“…….”

사람의 시선만으로 이렇게 간지러울 수도 있었던가. 실비아는 생경함을 느꼈다. 느리고 차분한 숨이 일정한 간격으로 이루어지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침대 위에서 한 이불을 덮고 있는 것이 아님에도, 란델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싸늘하던 몸에 온기가 도는 느낌이었다. 그제야 익숙한 숨소리, 온기를 되찾은 몸에 잠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실비아는 란델이 자리를 비우면 성을 빠져나갈 생각으로 잠들지 않기 위해 노력했으나, 어느 순간 까무룩 잠에 빠져들었다. 꿈조차 꾸지 않고 이어지던 잠은 찾아올 때만큼이나 갑작스럽게 물러갔다.

16558812297013.jpg“……!”

실비아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눈을 떴다. 눈을 감기 전과 달리 방 안은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으로 인해 환했다. 다급히 침대 머리맡을 확인하자 란델이 앉아 있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그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처럼, 그 자리에는 그의 향기가 은은히 남아 있었다. 실비아는 멍하니 침대 머리맡을 바라보았다. 잇새로 무심코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16558812297013.jpg“……뭐야?”

뭘 저렇게 소중한 것을 보듯이…….

16558812297013.jpg“……!”

무의식중에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가 스스로 놀란 실비아가 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손바닥에 가려진 그녀의 볼은 눈에 띌 만큼 달아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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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다음 날. 실비아는 방을 나오다가 마주친 란델에게 제 침실에 들어오지 말라 으름장을 놓았고. 당황하던 그는 곧 처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16558812297013.jpg‘……좀 지나쳤나?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원할 때 볼 수 있지 않냐고 했던 건 나인데.’

뒤늦게 자신이 민망함 때문에 지나치게 화를 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은 밤이 다 되어서였다. 하지만 란델의 시선이 간지럽다 못해 민망한 것은 사실이었기에 실비아는 상념을 털어내며 클로크의 끈을 조였다. 실비아는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기 위해 침실에 사람을 감지하는 마법을 걸어두고 이동 마법을 사용했다. 그녀가 이동 마법을 통해 도착한 곳은 저잣거리의 건물 위였다. 밤의 거리는 낮보다는 조용했으나 여전히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실비아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마법을 사용하며 ‘간판 없는 가게’의 문이 내려다보이는 위치로 움직였다. 그리고 지붕 위에 올라앉아 손님들이 들락거리는 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16558812297013.jpg‘내가 벨포르 공작 부인이라는 것을 알았을 테니 경계할 텐데.’

처음 만났던 날. 벨라가 실비아에게 일자리를 제안한 것은 어디까지나 그녀가 벨포르 공작 부인임을 몰랐기에 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아니라면 그녀가 마족의 공적이자, 아마도 주인의 적일 란델의 부인에게 접근했을 리가 없으니까.

16558812297013.jpg‘얼굴을 바꾸고 접근하면 그건 그것대로 경계심을 풀기 어렵…… 아, 미형의 얼굴이면 괜찮으려나?’

그때 벨라가 제 얼굴을 마음에 들어 했던 것이 기억났다. 실비아는 마음을 정하자마자 마법을 이용해 제 얼굴을 바꾸기 시작했다. 인식 장애 마법을 변형한 것의 일종이었다. 오스턴을 비롯한 현시대의 마법사들이 보았다면 기겁할 만큼 정교한 변형이었지만 그녀는 별생각이 없었다.

16558812297013.jpg‘좋아, 가볼까.’

실비아가 변장을 끝마치고 숨을 들이켤 때였다. 그녀는 골목 저 끝에서 움직이는 한 무리의 인영을 보고 눈썹을 움칫 일그러트렸다.

16558812297013.jpg‘뭐지?’

검은 옷으로 온몸을 휘감은 이들은 빠르고 소리 없이 가까워졌다. 이윽고 ‘간판 없는 가게’의 지척에 다다른 그들이 곧장 가게의 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16558812328531.jpg“꺄, 꺄아악!”

16558812328531.jpg“당신들 뭐야!”

가게 안쪽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검은 옷의 습격자들 틈에서 유달리 큰 키의 사내를 발견한 실비아의 눈이 커졌다.

16558812297013.jpg‘……란델?’

남자는 분명 란델이었다. 그는 검을 든 채 사람들을 지휘하며 커다랗게 외쳤다.

16558812297018.jpg“한 놈도 빠져나가게 두지 마라! ‘벨라’부터 찾아!”

16558812343992.jpg“알겠습니다!”

잘 보니 란델과 함께 가게를 습격한 이들은 벨포르 기사단이었다. 실비아는 당황해 몸을 일으켰다.

16558812297013.jpg‘저 사람이 어떻게……!’

최근 바빠 보였던 것이 설마 이 일을 위해서였나. 실비아는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본능처럼 상황을 판단했다.

16558812297013.jpg‘지금 여기서 벨라가 잡히도록 두면 안 돼.’

그녀의 목적은 벨라의 배후를 캐는 척하며 죽을 기회를 잡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벨라가 잡혀버리면 그럴 기회가 사라진다.

16558812297013.jpg“…….”

실비아는 입술을 깨문 채 두려운 눈으로 하늘을 한번 흘긋 올려다보았다가, 직후 지붕 아래로 뛰어내렸다. * * * 가게 안쪽의 파티장에 있던 벨라는 직원의 다급한 말에 턱을 떨어트렸다.

16558812328531.jpg“뭐?”

16558812328531.jpg“지, 지금 벨포르 기사단이! 불법 도박과 중독성 약물 유통에 대한 죄를 묻겠다며 사장님을 찾고 있습니다……!”

직원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듯, 벽 너머로 소란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16558812328531.jpg“젠장.”

까마귀 가면을 벗어 던진 벨라가 이를 갈며 내달렸다. 어디서 정보가 샌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도망치는 것이 먼저였다. 바깥으로 이어지는 길의 중간, 그녀가 벽돌 하나를 꾹 누르자 숨겨진 통로가 드러났다. 이 통로의 끝은 가게 뒤편의 숲과 이어졌다. 벨라는 숲을 통해 빠져나갈 생각으로 빠르게 통로를 가로질렀다.

16558812328531.jpg‘거의 다 왔……!’

16558812328531.jpg“여기 비밀 통로가 있습니다!”

16558812297018.jpg“혹시 모르니 그쪽도 확인해!”

16558812343992.jpg“예!”

하지만 통로의 끝에 다다를 무렵 저편에서부터 여럿의 인기척과 고함이 들렸다. 빠져나갈 곳이 없음을 직감한 벨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16558812328531.jpg‘싸워야 하나?’

여기서 잡힌다면 왕세자는 자신을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세이크린 후작에게 세뇌의 능력을 사용하느라 힘이 평소 같지 않았다. 그녀가 고민하는 와중에도 기사들의 목소리는 가까워졌다.

16558812328531.jpg‘두 놈까지는 어떻게 해볼 만한데. 그때쯤에 이성을 차릴 수 있을지가…….’

인간을 죽이고픈 본능을 참은 지 어언 몇 달. 이런 상황에 인간을 죽이는 쾌락을 맛봤다가는 제때 빠져나갈 생각을 하지 못하고 부족한 힘으로 미쳐 날뛰다가 목숨을 잃을 것이다. 결국 벨라가 이를 악물며 어둠을 일으켰다. 연분홍색 눈에 붉은 기운이 어렸다. 그녀가 앞으로 한발 내디디며 손을 휘두르려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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