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우연이 겹치면 우연이 아니다2021.08.19.
“한 놈도 빠져나가게 두지 마라! ‘벨라’부터 찾아!”
“알겠습니다!”
란델의 명에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란델은 차게 굳은 얼굴로 주인을 잃은 테이블 위에 놓인 잔을 들어 올렸다. 잔을 코 가까이 가져오자 금방이라도 취할 것처럼 달큼한 향이 물씬 피어올랐다. 연녹색 눈이 한층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바깥 고객들에게도 중독성 약물을 섞은 술을 팔아온 건가.’
-‘간판 없는 가게’?
며칠 전. 오스턴에게 지시했던, 최근 세이크린 후작저에 드나든 이들의 신원 보고서를 넘기던 란델이 낯익은 단어를 발견하고 미간을 설핏 구겼다. ‘간판 없는 가게’라면, 일전에 실비아가 저잣거리에서 갑작스럽게 사라졌을 때 들린 곳이 아니던가. 그는 보고서 위로 깃펜 끝을 움직여가며 내용을 다시 확인했다. 주점, 간판 없는 가게. 사장의 이름은…… 핀크.
-하지만 이곳의 사장은 분명…….
‘벨라’라는 여자가 아니었던가? 의아함과 함께 본능적으로 깨달음이 찾아왔다.
-……오스턴.
-예.
-이곳을 조사해봐라. 하나도 놓치는 것 없이, 자세히. 분명 뭔가 있어.
란델은 서류상의 사장 이름이 자신이 보았던 사장과 다르다는 걸 깨닫자마자 수상함을 감지하고 은밀히 조사에 착수했다. 그리하여 이 가게가 세이크린 후작의 일을 제외하고도 불법 도박, 중독성 약물 유통 등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아낸 그는 기습 계획을 세웠다.
“도박장은?”
“찾았습니다. 저쪽 테이블 밑에 장치가 되어 있더군요. 한데 사장이…….”
아직은 계획과 크게 어긋나는 것이 없었다. 사장인 ‘벨라’를 잡지 못한 것만 빼고서는. 란델이 기사들과 함께 도박장, 주점을 샅샅이 살피던 때였다. 기사 중 한 명이 황급히 달려와 외쳤다.
“주군! 숲에서 비밀 통로의 출구로 보이는 곳을 발견했답니다!”
“바로 가지.”
불법 도박장의 손님, 가게의 직원들이 도망갈 것을 대비하려 바깥에도 벨포르 기사들이 포진해있었다. 란델은 보고를 듣고 곧장 숲으로 향했다. 기사들이 유난히 무성한 덤불을 걷어내자 그 안쪽으로 어둑한 동굴 같은 통로가 드러났다. 방향은 간판 없는 가게 쪽이었다.
“진입한다. 경계를 늦추지 말도록.”
란델은 검을 빼 들고 기사들과 함께 통로를 역으로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기척을 죽이고 발걸음을 옮기던 란델은 모퉁이 너머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한 손을 들어 기사들을 멈춰 세우고 귀를 기울였다.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벽을 타고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을 노려. 공작이 아니라.”
‘……둘?’
직원과 함께 탈출하기라도 한 것인지, 통로를 울리는 기척은 두 사람의 것이었다. 하나건 둘이건, 우선 잡아야 한다. 란델은 이내 상념을 떨치고 조용히 손짓했다. 그의 수신호에 맞춰 기사들이 일제히 땅을 박차는 순간, 돌연 거센 바람이 통로 안쪽에서 쏟아져 나왔다.
“크윽!”
“조심……!”
건장한 기사조차 거뜬히 날릴 만큼 강한 바람에, 기사들은 서로의 손을 붙잡으며 간신히 땅에 발을 붙이고 있었다. 란델은 팔을 들어 눈가를 보호하며 외쳤다.
“오스턴!”
제 이름을 들은 오스턴이 힘겹게 수인을 맺어 란델 주위의 마력을 흩뜨려놓았다. 그 덕에 바람이 약해진 틈을 타 란델이 모퉁이 너머로 발을 움직였다. 직후 그는 허공에서 반짝이는 이동 마법 특유의 빛, 그리고 그 앞에 선, 검은 망토로 몸과 얼굴을 가린 인영을 맞닥뜨리고 눈을 크게 떴다.
“……!”
정체 모를 그는 이동 마법을 위한 수인을 그리다 말고 란델의 기척에 놀란 듯 등을 돌렸다. 그 움직임에 긴 망토 자락이 펄럭이며 그 아래로 가냘픈 발목이 찰나 드러났다. 희고 가는 그 발목이 어쩐지 익숙하다는 감상이 드는 순간. 수인을 끝맺은 그가 빛과 함께 허공으로 스러지듯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직후 통로 안을 찢어놓을 듯 사납던 바람 또한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
“주군! 괜찮으십니까!”
란델이 미묘한 기시감에 눈을 가늘게 뜨고 그가 사라진 자리를 응시하는 사이. 바람이 멎자마자 기사들과 오스턴이 달려왔다. 오스턴은 란델의 곁에 서며 난처하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주군. 원래는 바람 자체를 없애려 했는데, 상대가 보통 마법사가 아니었는지 파훼가 쉽지 않아서…… 주군?”
오스턴은 란델이 석상처럼 굳어져 한 곳만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자 의아해 고개를 기울였다. 그 부름에 란델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벨라를 제외하고는 전부 잡은 건가?”
“제가 알기로는 그럴 겁니다.”
“그럼 성으로 돌아간다.”
“……예?”
갑작스러운 명령에 오스턴이 당황해 물었으나 란델은 말없이 몸을 휙 돌렸다. 기사를 돌아본 그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실비아…… 부인께서는 지금 어디 있나?”
* * * 실비아는 벨라가 어둠으로 기사들을 공격하기 직전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벨라는 허공에서 뚝 떨어지듯 나타난 그녀의 모습에 반사적으로 손을 거두어들이며 기겁했다.
“무슨……!”
“조용히 해. 도우러 온 거니까.”
실비아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 말에 벨라가 여전히 경계를 거두지 않은 얼굴로 입매를 뒤틀었다.
“……뭐야. 돕는다길래 어둠 벌레라도 되는 줄 알았더니, 인간이잖아? 인간이 왜 날 돕는 거지?”
“역시 벨포르 영지 내의 어둠 벌레들과 여전히 접촉하나 보지.”
벨라는 저도 모르게 정보를 흘렸음을 깨닫고 움찔 어깨를 떨었다.
‘머리가 썩 좋은 편은 아닌가.’
그리 판단한 실비아가 낮고 빠르게 말했다.
“당신은 지금 여기서 잡히면 안 돼. 영지 외곽에 대충 떨굴 테니까 그 뒤로는 알아서 도망쳐.”
“그게 뭔 말도 안 되는 소리…….”
벨라가 황당하게 입을 열어 중얼거렸으나. 실비아는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저 자신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충동에 따라 불쑥 내뱉었다.
“……그리고 노릴 거면 공작 부인을 노려. 공작이 아니라.”
말을 마친 실비아가 지척까지 다다른 기사들의 기척을 느끼고는 마력을 움직였다. 나비의 날갯짓처럼 가벼운 손짓이 불러낸 것은 태풍과도 같은 강풍이었다.
“크윽!”
“조심……!”
기사들이 강풍에 휘말려 당황하는 것을 확인한 실비아가 곧장 벨라의 등 뒤로 이동 마법진을 불러냈다. 그리고 오른손을 뻗어 벨라의 어깨를 그대로 밀쳤다.
“너……!”
벨라가 눈을 사납게 치켜뜨며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그녀의 신형은 곧 빛이 되어 흩어졌다. 실비아는 벨라가 완전히 이곳을 벗어난 것을 확인하자마자 성으로 돌아갈 요량으로 이동 마법진을 새로 그려냈다.
“오스턴!”
날카로운 부름이 들리고, 등 뒤로 익숙한 기척이 다가든 것은 그때였다.
“……!”
놀란 실비아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그녀는 설마하니 오스턴이 제 마법을 잠시나마 흩트려놓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지금껏 보아온 것이 ‘대마법사’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못한 모습들뿐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곧장 평정을 되찾은 실비아는 재빨리 이동 마법을 써서 성으로 돌아왔다. 아무도 없는 제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얼굴에 걸어둔 마법을 풀고, 클로크를 성의 창고 구석으로 보내버린 후 태연한 모습으로 소파에 걸터앉아 책을 펼쳤다. 그녀가 숨을 고른 지 오래 지나지 않아 델마가 방문을 두드렸다.
“마님. 주인님께서…….”
“실비아,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란델은 평소답지 않게 대답이 들려오기도 전에 벌컥 문을 열었다.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던 그가 소파에 앉아 있는 실비아를 보고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실비아는 짐짓 여유로운 동작으로 책을 덮으며 그를 맞이했다.
“이 시간에 외출복 차림이라니. 어디 나가려고요?”
“…….”
“란델?”
란델은 잠옷에 가운을 걸친 차림의 실비아를 말없이 응시하다가 문득 시선을 내렸다. 가운 아래로 드러난, 희고 가는 발목. 그것이 조금 전에 보았던 정체불명의 마법사와 같아 보이는 건 단지 기분 탓일까.
‘……그럴 리가 없지.’
란델은 본능처럼 밀려드는 불안을 애써 밀어내며 입꼬리를 올렸다.
“아닙니다. 막 돌아왔는데, 씻고 나면 부인께서 잠드셨을 것 같아서.”
란델은 장갑을 벗고 맨손으로 실비아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그가 흰 손등에 입술을 내려 담백하게 입 맞추고는 자세를 바로 했다.
“평안한 밤 보내십시오, 부인.”
“……당신도요.”
실비아는 어쩐지 손등이 간질거리는 듯해 그가 입 맞춘 손을 다른 쪽 손으로 감싸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마음이 수런거리는 이유는 하마터면 란델에게 자리를 비운 걸 들킬 뻔해서이겠지. 그래, 단지 그뿐일 것이다. 그녀는 방을 나서는 란델의 뒷모습에서 도망치듯 시선을 돌리며 생각을 끊어냈다. * * * 날이 밝은 후. ‘간판 없는 가게’에서 불법 도박장을 운영하고, 거기에 더해 중독성 약물이 섞인 술을 팔았다는 것이 알려졌다. 불법 도박장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던 이들, 직원들은 처벌을 피하지 못했으며. 가게의 주인인 벨라를 찾는다는 대대적인 수배가 내려졌다. 더불어, 벨라가 사라짐에 따라 세이크린 후작에게 나타났던 기억 소실, 두통 등의 증세도 완전히 사라짐으로써 그에게 씌워졌던 오명 또한 말끔히 벗겨졌다.
“모시겠습니다, 마님.”
“고마워요, 시더스 경.”
어느덧 사교 시즌의 막바지였으나, 란델은 벨라와 관련한 일로 바빴기 때문에 실비아는 호위인 제프리를 파트너로 삼아 파티에 참석했다. 오늘 파티는 세레이드 백작저에서 열리는 것이었다. 북부에서 가장 수다스럽고 발 넓기로 유명한 세레이드 백작 부인이 주최하는 파티였기에, 연회장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후작의 오명으로 인해 함께 누명을 썼던 필리아도 개운한 얼굴로 파티에 참석했다. 하지만 상쾌하던 얼굴은 나란히 붙어 있는 실비아와 제프리를 발견하자마자 사정없이 구겨졌다.
‘저 자식 또 웃고 있네. 아주 그냥 입꼬리를 핀으로 고정하든가 하지 왜?’
제프리가 실비아를 향해 미소 짓는 것을 보고 배알이 뒤틀린 필리아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일부러 목소리를 높이며 큰 동작으로 인사했다.
“필리아 세이크린이 공작 부인께 인사 올립니다. 그간 잘 지내셨는지 아주 좋아 보이시는군요.”
필리아가 ‘내 남자랑 시시덕거리니 좋던?’이라는 뜻을 담아 날 선 미소를 내비쳤다. 실비아는 필리아가 자신에게 시비를 걸고 있음을 눈치채고 콧잔등을 살짝 찡그렸다.
‘또 저러네.’
그녀는 얼마 전, 공작성을 방문한 루베아에게 뜻밖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참이었다.
-세이크린 후작 영애가?
-네. 어찌 보면 저보다 더 열성적으로 보일 정도로 귀족들의 입을 틀어막고 다니더군요.
루베아는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 올리며 답했다. 휴게실에서 귀족들의 말을 일축했던 것으로도 모자라, 모든 파티에서 자신을 옹호하고 다녔다니. 필리아가 란델을 좋아하는 것으로 아는 실비아로서는 당황스럽기 그지없는 소식이었다.
-……혹시 나한테 호감이라도 있나?
-후작 영애가, 부인께요?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사람 보듯 보지 말아주겠나, 백작?
그런 생각도 해보았지만, 오늘 만난 필리아는 어김없이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다만 그 이유가 아리송했다.
‘오늘은 란델도 없는데 왜…….’
실비아는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하다가 필리아의 시선이 묘하게 자신을 비껴가 있음을 자각했다. 눈을 돌리자 필리아의 시선 끝에 있는 것은…….
‘……제프리?’
제프리 시더스. 자신의 호위였다. 제프리는 교묘하게 필리아의 눈길을 피하며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실비아의 머릿속에 퍼뜩 한 가지 가정이 스쳐 갔다.
‘설마.’
……양다리를 노리는 건가? 북부의 지배자와 떠오르는 유망주를 동시에 가지겠다는 마음인 건가?
‘아무리 어리다고 하지만, 이건 좀…….’
실비아는 이제 자못 측은한 눈으로 필리아를 바라보았다. 실비아는 아주 오랜 세월을 살아온 사람으로서, 상대가 연적이라지만 양다리는 몹시 나쁜 일이라는 충고 정도는 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더불어 그간의 파티에서 헛소문을 막아준 데에 대한 감사의 인사도 할 겸, 그녀가 말문을 뗐다.
“세이크린 후작 영애. 괜찮다면 따로 차라도 들겠나? 할 말이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