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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강아지 둘, 여우 하나, 뱀 하나 (42/118)

42. 강아지 둘, 여우 하나, 뱀 하나2021.08.23.

실비아와 필리아는 복도 구석의 휴게실로 자리를 옮겼다. 호위인 제프리가 방문을 지키는 가운데, 실비아는 자신이 초대했으니 대접 또한 자신이 해야 옳지 않겠냐며 손수 휴게실에 비치되어 있던 차를 우렸다.

16558812632601.jpg“굉장히 능숙하시네요.”

16558812632657.jpg“뭐…… 그렇게 보인다니 다행이군.”

필리아가 놀란 듯 중얼거린 말에 실비아는 시치미를 떼고 상대의 앞으로 찻잔을 밀어주었다. 필리아는 실비아를 보며 방긋방긋 웃는 제프리가 보이지 않자 조금 풀어진 기색이었다. 그녀가 차의 향을 깊이 들이켜고는 물었다.

16558812632601.jpg“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셨죠. 무슨 일이신가요?”

실비아는 잠시 입 안으로 말을 고른 후, 진중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16558812632657.jpg“세이크린 후작 영애.”

16558812632601.jpg“네.”

16558812632657.jpg“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영애가 내 남편을 마음에 둔 것은 알고 있네.”

16558812632601.jpg“풉.”

막 찻잔을 기울이던 필리아가 차를 뿜었다. 그녀는 턱이 찻물로 젖어 드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충격받은 얼굴을 하고 되물었다.

16558812632601.jpg“……예?”

하지만 실비아는 최대한 점잖은 어조로, 나이 많은 노인이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말을 이었다.

16558812632657.jpg“물론 이번에 나와 관련한 추문을 막아준 것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하지만 란델과 나는 이미 결혼했고, 그대가 그에게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까지 만류할 수는 없겠지만 유부남을 마음에 담은 채로 미혼의 청년에게까지 손을 뻗는 것은 양쪽에게 못 할 짓이야.”

이쯤 되니 필리아는 정신이 다 혼미할 지경이었다. 당황한 그녀는 켈베티아 밑바닥까지 무너져 내린 정신을 간신히 수습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숨죽여 외쳤다.

16558812632601.jpg“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제가 좋아하는 건 제프리거든요?!”

16558812632657.jpg“콜록.”

이번엔 실비아가 혼미해질 차례였다. 그녀는 사레 들렸다. * * * 실비아와 필리아는 가까스로 오해를 풀고 잠시간 자아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16558812632601.jpg‘내가 그 자식을 좋아한다는 오해를 받다니…….’

필리아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오해를 받았다는 사실에 괴로워했고.

16558812632657.jpg‘란델을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니…….’

실비아는 제멋대로 착각해 섣부르게 입을 놀렸던 조금 전의 행동을 후회했다. 한참의 침묵 끝에, 필리아가 깊게 심호흡하고는 결연한 눈으로 물었다.

16558812632601.jpg“이 기회에 확실히 물어볼게요. 부인께서는 제프리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실비아는 단호한 태도로 그 물음을 일축했다.

16558812632657.jpg“사촌 동생을 보는 것 같네.”

16558812632601.jpg“부인께서는 또래의 사촌이 없는 것으로 아는데……?”

16558812632657.jpg“……표현이 그렇다는 거야.”

실비아는 잠시 제 친척 관계를 망각하고 있다가 급하게 얼버무렸다. 그 대답에 비로소 안도했는지, 필리아는 거하게 한숨을 내쉬고 소파에 힘없이 늘어졌다.

16558812632601.jpg“저도 마찬가지예요. 란델, 그러니까 공작님은 제 혈육이나 다름없다고요. 그것도 원수에 가까운 친오빠…….”

필리아는 말을 잇다가 말고 분노한 얼굴로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로써 실비아 또한 완전히 착각을 거두게 되었다. 그녀는 헛기침하고 정중히 사과했다.

16558812632657.jpg“오해해서 미안하네, 영애.”

16558812632601.jpg“저도 괜히 혼자 꽁하게 굴어서 죄송해요. 기분 나쁘셨죠.”

필리아가 한껏 누그러진 얼굴로 양손을 모았다. 그녀의 안에서 질투에 밀려 자리를 잃었던, 실비아에 대한 호감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16558812632601.jpg‘그럼 마음 놓고 좋아해도 되는 거네?’

사실 제프리에 대한 감정 때문에 조금 엇나가서 그렇지, 필리아는 실비아를 처음 봤을 때부터 호감을 느꼈다. 게다가 보아하니 실비아도 어느 정도 란델에게 마음이 있어 보이고. 그간의 행보를 보자면 딱히 왕가의 앞잡이인 것 같지도 않았다. 양손을 가슴 앞으로 모아 쥔 필리아의 눈이 점차 초롱초롱해졌다. 결국 그녀는 기쁨을 참지 못하고 양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환호했다.

16558812632601.jpg“와! 드디어! 그전까지는 매번 세이크린의 이름에 빌붙어보려는 사람, 아니면 그 재수 없는 여자밖에 어울릴 만한 사람이 없었거든요.”

16558812632657.jpg“재수 없는 여자……라면 글레버 백작 말인가?”

16558812632601.jpg“역시 바로 알아들으시네요. 걔가 원래 좀 그래요.”

필리아가 새침하게 루베아를 험담했다. 하지만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바꾸며 살갑게 웃었다.

16558812632601.jpg“드디어 북부에 새 친구가 생기다니 너무 기뻐요. 괜찮으시다면 자주 찾아뵈어도 될까요? 그러면 겸사겸사 제프리도 볼 수 있을 테니까…….”

사실 뒤쪽이 본론 같았다. 필리아가 얼굴을 붉히며 쑥스러워하다가 눈을 빛냈다.

16558812632601.jpg“네? 네? 안 될까요? 저 부인이랑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16558812632657.jpg‘……귀엽네.’

실비아에 대한 적의를 모조리 거두어들인 필리아는 첫인상처럼 한 마리 강아지 그 자체였다. 그 활발함과 귀여움에 휘말린 실비아는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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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655881266276.jpg“하, 젠장…….”

한편, 북부 외곽. 외딴 숲 깊은 곳에 자리한 오두막. 그곳에서 벨라는 약효가 떨어진 탓에 마족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와 거칠게 욕지거리를 내뱉고 있었다. 그녀는 장작더미 위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은 채 입술을 짓씹었다. 며칠 내내 그녀를 사로잡은 것은 온통 답을 알 수 없는 의문들이었다.

1655881266276.jpg‘대체 그놈은 뭐였지?’

간판 없는 가게에서 도망 나올 때, 그녀를 도와줬던 인간 마법사. 그에게 어깨가 밀쳐진 후 정신을 차려 보니 벨라는 벨포르 영지 가장 외곽의 한 숲속에 서 있었다.

1655881266276.jpg‘게다가 공작 말고 공작 부인을 노리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고…….’

사실 가장 미심쩍은 것이 그 말이었다. ‘공작이 아닌 공작 부인을 노려라’라는 말. 벨라의 주인인 왕세자의 목적은 란델과 북부를 무너트리는 것이었다. 물론 이번에 공작 부인도 함께 추문의 피해자가 되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본 목적은 란델 벨포르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공작이 아니라 공작 부인을 노리라니?

1655881266276.jpg“분명 개소리인데, 왜 이렇게 찝찝한지 모르겠단 말인지.”

벨라는 이마를 싸매며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분명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그 말을 내뱉은 인물의 분위기가 워낙 기묘했기 때문일까. 벨라는 쉽사리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말을 털어내기 위해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때 오두막 구석의 바닥에서 둔탁한 소음이 들리더니 숨겨진 문이 드러났다. 그 사이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온, 비열한 인상의 남자가 벨라를 보고 정중히 인사했다.

1655881266276.jpg“벨라 님.”

남자의 태도는 흡사 왕을 대하는 신하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벨라는 마족. 마족을 숭상하는 ‘어둠 벌레’에게는 신이나 다름없었다. 벨라는 그와 대조되게 대강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물었다.

1655881266276.jpg“어. 통신구는?”

1655881266276.jpg“죄송합니다. 최선을 다해 찾고 있긴 합니다만, 마도구라는 것이 가격도 가격이지만 흔한 것이 아니라…….”

남자가 난처한 어조로 말꼬리를 흐렸다. 벨라가 떨어진 이 숲은 마침 벨포르 영지에 숨어든 어둠 벌레들의 아지트가 있는 곳이었다. 그녀는 어둠 벌레들과 접선하자마자 왕세자에게 연락하기 위한 통신구를 구해달라 요구했다. 마족의 명령은 곧 신의 뜻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남자를 비롯한 어둠 벌레들은 아무런 대가조차 요구하지 않고 그 명을 따르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하지만 마도구는 그 값이 워낙 비싸기도 했고, 특히나 통신구는 구하기 어려운 마도구에 속했다. 돈은 충분했지만, 암시장을 통해 수배해보아도 현재로서는 통신구 매물이 없었다.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통신구를 구하자니, 벨포르 공작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그들을 찾고 있는지라 위험했다.

1655881266276.jpg“됐어. 라폴드 그 멍청이랑 어울렸던 너희한테 뭘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벨라는 못마땅함에 드러내놓고 혀를 쯧 찼다. 남자가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수그리고 오두막 밖으로 사라졌다. 그로써 다시 홀로 남게 된 벨라는 장작더미 위에 벌렁 드러누워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1655881266276.jpg‘아, 어떡하지. 수배가 붙었다니 약을 구한다고 해도 나돌아다닐 수 없고. 그렇다고 가게도 잃고 쫓기는 마당에 실적 하나 못 올리면 왕자님이 다시 나를 받아줄 리가 없는데.’

왕세자는 매정한 인간이었다. 가뜩이나 그가 지원해준 돈으로 차렸던 가게가 통째로 공중 분해되다시피 해 심기가 불편할 텐데. 란델의 눈에 걸려 그 사달을 내놓은 자신이 얼마나 밉상이겠는가. 다시 그의 밑으로 들어가려면 마땅한 결과물을 가져가야 했다. 이를테면…… 그래. 세뇌당해 인형처럼 변모한 란델을 왕세자에게 노예로 바친다든가.

1655881266276.jpg‘그런데 대쪽 같은 그 인간이 노인네처럼 쉽게 세뇌에 당해줄 리는 없고. 정신에 틈을 만들어야 하는데…….’

벨라는 머리를 싸매고 란델을 흔들 방법을 찾다가 벌떡 상체를 일으키며 탄성을 내질렀다.

1655881266276.jpg“아!”

그녀는 천재적인 생각을 해낸 자신에게 박수갈채를 보내며 활짝 웃었다.

1655881266276.jpg‘그래, 바로 그거야!’

실비아 플로레트 벨포르, 공작 부인을 처음 만났던 그날. 가게로 실비아를 찾으러 왔던 란델은 그녀가 다치기라도 했을까 전전긍긍했고. 실비아는 그와 대조되게 초연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것만 보아도 두 사람이 가진 마음의 크기 차이가 확연히 드러났다.

1655881266276.jpg‘공작을 홀려서 강제로 공작 부인의 몸을 취하게 만드는 거야.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가 혐오하는 눈으로 자기를 보면 얼마나 충격적일까?’

벨라에게는 향과 어둠을 이용해 상대를 세뇌할 수 있는 능력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그녀의 본질은 몽마(夢魔), 서큐버스. 꿈을 통해 인간을 홀리는 것쯤이야, 오히려 세뇌보다도 쉬운 일이었다.

1655881266276.jpg‘물론 이해는 안 되지만.’

벨라는 쾌락만 얻을 수 있다면야 마음에 없는 상대와도 얼마든지 잠자리를 가질 수 있었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고 들었다. 마음에도 없는 상대와 동침하게 된 실비아가 란델을 끔찍한 것 보듯 보게 되면 그는 분명 버티지 못하고 속에서부터 무너질 것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한순간은 흔들리겠지. 그럼 그 틈을 노려서 그에게 세뇌를 걸고……! 상상만으로도 짜릿한 기분에 벨라가 콧노래를 불렀다.

1655881266276.jpg“흐응, 좋아. 어차피 북부 인간들은 소문에 휩쓸리지도 않는 것 같았는데, 이렇게 된 거 그냥 우두머리 목부터 따면 되는 거잖아?”

왕세자가 들었더라면 뭐 이런 멍청한 게 다 있냐고 한숨을 내쉬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의 벨라에게는 그와 연락할 수단이 없었으므로, 그녀는 란델과 실비아를 나란히 불행에 빠트릴 생각에 신이 나 오두막을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 * * 어느덧 익숙해진 공작 부부의 아침 식사 자리. 그곳에서 란델은 음식을 씹다가 말고 크게 쿨럭였다.

16558812710668.jpg“그, 러니까, 쿨럭! 필리아가 저를…… 좋아하는 줄 아셨다는 말입니까?”

16558812632657.jpg“…….”

실비아는 민망함에 소리 내어 대답하지는 못하고 그의 눈을 피했다. 가까스로 기침을 갈무리한 란델이 소름이 돋은 뒷덜미를 어루만졌다.

16558812710668.jpg“어떻게 그런 끔찍한, 말도 안 되는 상상을…….”

16558812632657.jpg“나도 내가 착각했다는 건 충분히 잘 알고 있으니까 그만하죠. 아무튼.”

실비아는 제게 불리한 대화 주제를 재빨리 마무리하고 말을 돌렸다.

16558812632657.jpg“굳이 각방을 쓸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아요.”

16558812710668.jpg“……예?”

다행히 그녀의 의도대로, 란델은 새로운 대화 주제에 정신이 팔려 물컵을 향해 손을 뻗던 자세 그대로 굳어졌다. 실비아는 포크로 샐러드를 뒤적이며 대수롭지 않은 척 중얼거렸다.

16558812632657.jpg“뭐, 춥기도 하고…… 원래 쓰던 침실에 익숙해진 건지 바뀐 침대에서는 잠이 잘 안 와서.”

사실은 벨라에게 접근하려 했던 계획도 틀어졌고. 혼자 잠들려니 묘하게 침대가 허전한 느낌이 들어 그러는 것이었지만. 잘 포장한 핑계를 내어놓는 실비아의 얼굴만큼은 뻔뻔했다.

16558812632657.jpg“물론 내키지 않으면 당신까지 굳이 부부 침실을 쓸 필요는…….”

16558812710668.jpg“아닙, 아닙니다. 저도 침대가 작아 불편하던 참이었습니다. 오늘 밤부터는 다시 부부 침실로 가겠습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란델이 세상 다시없이 진지한 태도로 답했다. 빠르고 정확한 대답에 만족한 실비아가 기분이 좋아져 고기가 꽂힌 포크를 내밀었다.

16558812632657.jpg“이거 먹을래요? 맛있는데.”

16558812710668.jpg“맛있을 것 같은 게 아니라요?”

16558812632657.jpg“저 그냥 다시 각방 쓸까요?”

16558812710668.jpg“잘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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