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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균열 (43/118)

43. 균열2021.08.26.

16558812800718.jpg‘……괜히 신경 쓰이네.’

어느덧 날이 어두워졌다. 실비아는 침실로 들어가기 전, 괜히 가운의 리본을 풀었다가 다시 매었다. 정작 결혼식 첫날은 이미 한참 전에 지났건만, 왜 이렇게 기분이 묘한지 모를 일이었다. 마치 진짜로 초야를 치르는 것처럼 말이다. 실비아는 이내 고개를 휘휘 저어 상념을 털어내고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그러자 결혼식 첫날과 똑같이, 소파에 앉아 있던 란델이 어깨를 크게 움찔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16558812800726.jpg“실비아.”

16558812800718.jpg“왜 또 침대가 아니라 거기에 있어요? 이리 와요.”

실비아는 곧장 침대에 걸터앉아 팔랑팔랑 손짓했다. 그러자 란델이 한숨을 푹 내쉬며 무어라 중얼거리더니 부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침대에 다가와 앉았다. 그것을 본 실비아는 나만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구나, 싶어 괜스레 기분이 간질거렸다.

16558812800718.jpg“불 끌게요.”

16558812800726.jpg“……예.”

실비아는 후 입바람을 불어 촛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란델 또한 어색한 몸짓으로 그녀의 곁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약간의 어색함은 존재했으나, 그들은 어느덧 서로의 온기와 기척에 익숙해진 상태였으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잠에 빠져들었다.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던 란델의 미간이 구겨진 것은 자정이 가까워진 때쯤이었다.

16558812800718.jpg<란델.>

꿈과 현실의 경계가 흐릿해지자 익숙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란델은 꿈속에서 눈을 떴다. 그 직후 대경해 주춤 물러났다.

16558812800726.jpg‘……실비아?’

그는 너무 놀란 나머지 이렇다 할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앞에는 새까만 실크 가운을 반쯤 풀어 헤친 실비아가 서 있었다. 반사적으로 흰 피부에 시선을 고정할 뻔했던 란델이 황급히 고개를 쳐들었다. 그는 행여 실수로라도 시선을 내리지 않기 위해 목에 핏줄이 불거질 정도로 힘을 주고 물었다.

16558812800726.jpg‘실비아, 그 차림새는 대체 무슨…….’

16558812800718.jpg<……좋아해요.>

그 순간 들려온 말에 사고가 정지하고 숨이 턱 막혔다. 그는 직전까지 세상이 멸망해도 시선을 내리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것이 무색하게 천천히 고개를 떨궜다. 아스라이 미소 짓는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맨발로 그에게 가까이 다가온 실비아가 그의 볼에 손을 가져다 대며 다시금 최면을 걸듯이 속삭였다.

16558812800718.jpg<진심으로 당신을 좋아해요.>

16558812800726.jpg‘…….’

16558812800718.jpg<란델…….>

꿈에서라도 듣고 싶은 말이라 생각한 탓일까. 설령 이것이 덧없이 깨어질 환상일지라도,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란델은 무언가를 원하듯 제 이름을 부르는 실비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실비아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쳤다. 그리고 그녀의 눈을 보며 물었다.

16558812800726.jpg‘제가 당신에게…… 닿아도 되겠습니까.’

16558812800718.jpg<……네?>

16558812800726.jpg‘원하는 만큼, 원하는 대로 닿아도…… 괜찮은 겁니까?’

그 조심스러운 물음에 실비아는 잠시 당황한 얼굴을 하다가 그림 같은 미소를 입에 걸고 고개를 끄덕였다.

16558812800718.jpg<그럼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요.>

말을 마친 실비아가 란델의 목을 살며시 껴안았다. 그에 찰나 굳어졌던 그는 곧 홀린 사람처럼 입술을 내렸다. 온몸이 불 속에 있는 것처럼 뜨거웠다. 란델은 차마 입술에 닿을 생각은 못 하고 먼저 실비아의 턱에 입술을 대었다. 가냘프다 못해 날카롭게까지 느껴지는 턱선을 따라 움직이던 입술은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새하얀 목덜미를 입술로 지분대던 란델이 목과 어깨가 이어지는 부분을 가볍게 핥고 깨물자 머리 위로 앓는 듯한 신음이 흘렀다.

16558812800718.jpg“흣…….”

그 음성이 어쩐지 꿈에서 깬 것처럼 선명하게 느껴진다면 착각일까. 란델은 몽롱한 기분으로 실비아의 어깨를 따라 같은 행위를 반복했다. 분명 꿈일진대 손끝에 닿는 피부가 미치도록 부드러웠다. 란델은 지금의 이 감각을 뇌리에 새기려는 듯 집요하게 느껴질 정도로 실비아의 피부를 물고 핥았다. 이윽고 그의 입술이 쇄골을 지나 더 아래로 내려가려던 순간이었다.

16558812800718.jpg“……란델!”

별안간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확 돌아왔다. 란델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상기된 실비아의 얼굴에 화들짝 놀랐다.

16558812800726.jpg“……실비아?”

입 밖으로 나오는 그의 목소리는 열기로 갈라진 땅처럼 버석했다. 란델은 자신이 실비아의 손목을 붙잡고 그 위에 덮치듯 올라타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는 급히 몸을 물렸다. 빠르게 움직이느라 저답지 않게 잠시 휘청였던 그가 가까스로 상체를 바로 세우는 순간.

16558812800726.jpg“……!”

그는 실비아의 목덜미와 어깨에서 꽃이 핀 듯한 흔적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굳어졌다.

16558812800726.jpg“아.”

란델을 따라 상체를 일으켰던 실비아가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깨닫고 가운을 추슬렀다. 실비아의 목소리 또한 그와 비슷하게 꽉 막혀 있었다. 그녀는 드물게도 상기된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이 모든 상황이 꿈이 아닌 현실임을 인지한 란델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16558812800726.jpg“……미안, 합니다.”

란델은 그 말을 남기고 몸을 일으켰다. 그는 무어라 말릴 새도 없이 비틀대며 방을 빠져나갔다. 사실 실비아에게는 란델을 붙잡을 정신이 없었다. 그녀는 조금 전 제게 일어난 일을 되짚으며 필사적으로 숨을 골랐다.

16558812800718.jpg-……?

  몸을 감싸는 압박감에 문득 잠에서 깨어난 실비아가 인상을 찌푸린 채 눈을 깜박였다. 어둠에 적응된 시야로 보이는 것은 저를 끌어안고 있는 란델이었다. 실비아는 얇은 가운 너머로 느껴지는 홧홧한 체온에 잠시 당황했으나, 그가 잠결에 이러는 것인지 아니면 의식이 있는 것인지 확신하지 못해 선뜻 그를 떨쳐내지 못했다. 그사이 허리를 감싸고 있던 란델의 손이 느릿하게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맹수의 탐색 같은 그 움직임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뭔가…… 달라. 본능 같은 깨달음이 찾아든 것과 란델이 그녀의 턱선에 입술을 가져다 댄 것은 거의 동시였다. 란델은 마치 그녀가 잘 익은 과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턱선을 따라 입술을 지분거리더니 이윽고 목덜미를 핥고 깨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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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8812800718.jpg-흣…….

  그 움직임에 피어나는 야릇한 감각에 실비아는 입술을 말아 물며 신음을 삼키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점점 자극이 심해졌다. 눈가가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실비아는 란델의 어깨에 양손을 얹고 그를 밀어내려 했다.

16558812800718.jpg-란델.

  평소의 란델이었다면 그 움직임, 그 부름을 인지한 즉시 손을 뗐을 것이었다. 아무리 잠결이라지만 무의식중에도 그런 면으로는 강박적일 만큼 바른 그였으니까. 하지만 실비아가 란델을 밀어내려는 기색을 보이자 그는 외려 그녀의 양 손목을 침대에 고정하듯 단단히 그러쥔 채 계속해서 입술을 움직였다. 스치듯 마주친 연녹색 눈은 죽은 사람처럼 텅 비어 있었다. 그에 일순 섬뜩함을 느낀 실비아가 목소리를 높였다.

16558812800718.jpg-란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 부름에 란델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잠시 얼음처럼 굳어 있던 그는 본인도 혼란스러운 듯 눈을 깜박이다가 방을 나가버렸다. 실비아는 란델의 체온에 옮은 것인지 덩달아 달아올라 있는 몸을 차게 식히고 나서야 생각을 이어갈 수 있었다. 자극이 가시자 뒤늦은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16558812800718.jpg“……뭔가 이상해.”

희고 고운 미간이 일그러졌다. 란델에게 잠버릇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은 실비아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자신을 물고 핥으면서도 잠에서 깨지 않았다는 것이 의아할뿐더러, 두 번째 부름에야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는 점이 미심쩍었다.

16558812800718.jpg“아.”

무의식중에 한 손으로 어깨를 짚었던 실비아가 쓰라림에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지금쯤 제 목덜미를 온통 뒤덮었을 흔적을 생각하니 다시금 열기가 화악 피어올랐다. 결국 실비아는 의심과 열 등으로 인해 밤을 꼬박 새울 수밖에 없었다. *** 실비아는 날이 밝자마자 사용인들을 물리고 홀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도 그럴 것이 거울을 통해 확인한 자국은 생각보다 훨씬 적나라했다. 그것을 그대로 내보였다가는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이 뻔해서, 실비아는 제 손으로 옷을 갈아입고 식당으로 내려갔다. 식당에서 다시 만난 란델은 밤을 지새운 것인지 초췌한 얼굴이었다. 부부는 사용인들이 음식을 다 차리고 물러날 때까지 말이 없었다. 이후로도 식기에 손조차 대지 않고 침묵하던 그들이 동시에 입술을 뗐다.

16558812830046.jpg“저…….”

실비아와 란델은 무어라 말을 꺼내려다가 놀란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실비아는 작게 헛기침하고 입을 열었다.

16558812800718.jpg“음, 먼저 말해요.”

그녀는 그리 말한 후 어색함을 줄이기 위해 식기를 들었다. 란델은 실비아가 고기 요리의 구운 채소만 골라 먹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불쑥 말했다.

16558812800726.jpg“각방을 써야 할 것 같습니다.”

16558812800718.jpg“……네?”

실비아는 찰나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고개를 들자 차갑게 굳어 있는 란델의 얼굴이 보였다.

16558812800718.jpg‘아.’

그 얼굴을 눈에 담는 순간 이유를 알 수 없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지금까지 차가운 얼굴의 란델은 몇 번 목격했으나. 그가 ‘실비아’를 향해 저런 얼굴을 드러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16558812800726.jpg‘……우선은 거리를 둬야 해.’

한편, 란델은 볼 안쪽을 짓씹으며 자꾸만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가다듬었다. 어젯밤. 실비아를 두고 방을 옮긴 란델은 온몸을 달구는 열기 탓에 밤새 시트를 부여잡고 허덕여야 했다. 단순한 욕정 때문이라기에는, 그것을 참아냄에 따르는 고통이 지나칠 만큼 커서. 란델은 대번에 심상찮음을 감지하고 경계심을 세웠다.

16558812800726.jpg‘목표가 나인지, 아니면 실비아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후자라면 더 위험하다. 일단 방부터 옮겨야겠군.’

아마 그의 꿈에 나타났던 ‘실비아’는 몽마(夢魔), 즉 서큐버스임이 유력했다. 하지만 서큐버스는 고위 마족인지라 그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았고. 상대가 어째서 흔히 알려진 사실처럼 단순히 그의 정기를 취하려 하는 것이 아닌, 실비아를 덮치게 하려 했는지도 의문이었다.

16558812800726.jpg‘게다가 해결책조차 불투명한 상황이니.’

란델의 얼굴이 소리 없이 어둑해졌다. 란델은 북부의 방패이자 수장이었다. 그런 그가 정체가 불분명한 마족에게, 해결책조차 없는 공격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사람들을 불안에 떨게 할 것이다. 그러니 적어도 해결책을 찾을 때까지는 서큐버스가 그, 혹은 실비아를 노리고 있다는 걸 비밀로 한 채 그녀를 제게서 떨어트려 놓아야 했다. 그의 각방 선언은 이러한 사고의 흐름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실비아는 포크를 쥔 손에 가만히 힘을 줄 뿐이었다. 한동안 침묵하던 그녀는 란델을 따라 표정을 굳히며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16558812800718.jpg“……그렇게 해요.”

란델이 이처럼 ‘직접적으로’ 그녀를 밀어낸 것은 처음이었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가슴 한쪽이 칼에 베이기라도 한 것처럼 시큰거린 까닭은. *** 이후 란델은 오스턴과 함께 서고와 각종 자료집을 뒤져가며 서큐버스의 능력을 파훼할 방법을 찾았다. 하지만 은밀히 조사할 수 있는 곳에서 찾을 수 있는 자료에는 한계가 있었다. 가장 좋은 것은 왕궁 서고의 자료를 요청하는 것이지만, 자칫했다가 란델이 서큐버스의 표적이 되었다는 사실을 들킬 수도 있기에 우선은 보류. 해결책을 찾는 것은 지지부진했지만 란델의 증상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서큐버스는 꿈을 통해 능력을 사용하는 종류의 마족이었기에 잠을 자지 않고 버텨보려고도 했지만, 밤이면 촛불을 끄듯 강제로 의식이 사라지곤 했다. 그렇게 되면 또다시 실비아의 모습을 한 서큐버스가 나타나 그를 괴롭혔다. 서큐버스 때문에 강제로 달아오른 몸은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실비아를 찾으려 했으나 란델은 침대에 제 손목, 발목을 묶어가면서까지 그에 저항했다. 인위적으로 돋운 욕구이니만큼 그것을 해소하지 못했을 때의 고통은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란델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으면서도 결코 실비아를 찾아가지 않았다. 오늘도 서큐버스는 어김없이 실비아의 모습으로 란델을 농락하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물러갔다. 란델은 초췌한 얼굴로 매무새를 가다듬고 바깥으로 나섰다.

16558812800726.jpg‘오늘은…… 서쪽 숲의 시찰 일정도 있던가.’

서큐버스 때문에 고통받는 와중에도 영주로서 해오던 일들 또한 문제없이 수행해야 했기에 피로감은 배가 되었다. 란델이 침침한 눈을 손으로 문지르며 계단에 한 발을 내리던 순간, 그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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