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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늪 같은 마 (44/118)

44. 늪 같은 마음2021.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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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8812927111.jpg“……!”

란델은 계단을 잘못 디디는 순간 정신을 찾았다. 하지만 균형을 잃은 몸은 이미 기울어지는 중이었다. 란델이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는 것과 동시에 무언가 따뜻한 것이 그를 앞에서부터 붙들었다.

16558812927115.jpg“이게 무슨…… 괜찮아요?”

16558812927111.jpg“……실비아?”

계단을 올라오던 실비아는 란델의 얼굴이 심상치 않아 보여 그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계단에 발을 디디자마자 크게 휘청였다. 실비아가 곧장 계단을 뛰어올라 그를 앞에서 붙들지 않았다면 크게 다쳤으리라.

16558812927115.jpg‘……자꾸 이상한 데서 도움이 되네.’

실비아는 북부에 온 이후로 질리도록 먹었던 보양식 덕에 함께 계단을 구르는 참사는 면한 것 같다며 속으로 혀를 찼다. 란델이 휘청이는 것을 목격한 순간 생각을 이을 새도 없이 몸이 먼저 뛰쳐나간지라 마법을 사용하는 것도 잊었으니. 실비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란델이 제대로 서도록 도와주었다. 얼떨떨한 목소리를 냈던 란델이 뒤늦게 미간을 찌푸렸다.

16558812927111.jpg“위험할 수도 있었는데…… 괜찮으십니까? 다치신 곳은?”

16558812927115.jpg“아니, 지금 누구 걱정을 하는…….”

실비아는 자칫하면 계단을 구를 뻔한 주제에 제 걱정부터 하는 그의 미련함에 황당한 목소리를 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란델은 실비아가 무사한지부터 확인한 후에야 한 손으로 꺼끌한 얼굴을 쓸며 감사 인사를 했다.

16558812927111.jpg“붙잡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찰 일정이 있는지라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무리 정신이 없기로서니 계단에서 발을 헛디딜 줄이야. 란델은 자신의 나약함에 잠시 자조한 뒤, 자리를 뜨려 했다. 옷소매를 붙잡는 손길이 아니었다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16558812927111.jpg“실비아?”

버들가지처럼 약한 힘이었으나 란델은 곧장 움직임을 멈췄다. 의아한 듯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돌리는 그를 본 실비아가 확신했다.

16558812927115.jpg‘역시…… 이상해.’

실비아는 눈에 띄게 초췌해진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힐끔 시선을 내렸다. 그녀가 붙잡고 있는 옷소매 아래, 어딘가에 묶이기라도 한 것처럼 검붉은 멍과 쓸린 자국이 언뜻 보였다. 실비아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알아챈 란델이 황급히 손을 뒤로 감췄다. 잠시간의 침묵 후. 란델의 손이 있던 자리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실비아가 고개를 들었다.

16558812927115.jpg“란델.”

16558812927111.jpg“……예.”

16558812927115.jpg“나한테 할 말 없어요?”

그 물음에 란델이 입술을 다물었다. 란델은 등 뒤로 주먹을 세게 쥔 채 덤덤한 얼굴을 가장했다. 저를 곧게 응시하는 금색 눈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16558812927111.jpg“……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내놓을 수 있는 답은, 그것뿐이었다. * * * 그날 밤. 란델은 어김없이 꿈속에서 나타난 서큐버스를 필사적으로 외면했다.

16558812927115.jpg<란델. 나 좀 봐요.>

꿈인지 현실인지 모호한 의식 속. 란델은 흐트러진 차림새로 제게 접근하는, 실비아의 모습을 한 서큐버스를 피해 고개를 돌리고 이를 악물었다. ‘저것’은 실비아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자꾸만 몸이 강제로 움직이려 했다. 미리 오스턴을 통해 마법으로 팔다리를 결박해두지 않았다면, 자신은 필시 저 마족에게 홀려 실비아의 침실을 찾아갔을 것이다.

16558812927115.jpg<란델…….>

서큐버스, 벨라는 유혹적인 음성을 흘리며 그의 얼굴에 한 손을 가져다 댔다. 란델은 그녀의 손을 떨쳐내려 했으나 온몸을 옥죈 검보라색 밧줄이 그의 움직임을 막았다. 벨라가 서큐버스임을 깨달은 란델이 자꾸만 도망치거나 저항하려 하자 그녀가 만들어낸 것이었다.

16558812927111.jpg‘젠장.’

란델은 이미 피범벅이 된 입술을 재차 짓씹으며 이성을 유지하려 애썼다. 비록 꿈속이었지만, 현실의 제 몸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이곳까지 어렴풋이 전해졌다. 벨라에 의해 강제로 정욕이 돋워진 탓에 온몸이 불길에 휩싸인 듯 뜨겁고 쓰라렸다. 그의 몸이 주인의 의지를 배반하고 실비아를 찾아가기 위해 전신을 비틀 때마다 오스턴이 만들어낸 사슬이 피부에 상처를 냈다. 며칠째,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런 일이 지속되니 솔직히 란델로서도 한계였다. 이성을 유지하려 애썼으나 부드러운 살결, 달콤한 향기 등에 자꾸만 이성이 흐려지려 했다. 하지만…….

16558812927111.jpg‘너는…… 실비아가 아니야.’

란델이 피를 토하듯 뱉은 말에 ‘실비아’의 모습을 한 벨라가 멈칫했다. 란델은 바닥에 무릎 꿇려진 상태로 눈동자만 들어 살벌하게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는 자신에게 하는 말인 양 강한 어조로 말했다.

16558812927111.jpg‘그녀는 너처럼 더러운 눈으로 나를 보지 않아.’

16558812927115.jpg<…….>

16558812927111.jpg‘그러니 괜한 수작은 그만 부리는 게 좋을 거다. 그 알량한 목숨을 조금이라도 더 잇고 싶다면.’

그 흉흉한 살기에 저도 모르게 주춤 물러날 뻔했던 벨라가 속으로 날카로운 조소를 흘렸다.

16558812927115.jpg‘한낱 인간 따위가.’

인간의 살기에 자신이 잠시나마 두려움을 느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한 그녀가 보란 듯 상처받은 얼굴을 가장하며 양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16558812927115.jpg<어떻게 그런 말을…….>

16558812927111.jpg‘……아.’

그 모습을 본 란델은 일순 눈앞의 이가 실비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늘 무표정하거나, 아니면 온기 없이 웃는 얼굴인 실비아의 ‘상처받은’ 표정을 보는 건 처음인지라. 잘 다잡고 있던 정신이 찰나나마 흐트러졌다. 그리고 내내 란델을 주시하고 있던 벨라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16558812927115.jpg<됐다.>

기회를 포착한 벨라의 눈이 붉게 물들고, 란델이 한발 늦게 방심했음을 깨닫는 순간.

16558812927115.jpg“……델!”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공간에서 ‘실비아’가 다급히 자신을 부르며 침대로 다가오는 모습이 흐리게 눈에 들어왔다. 고통으로 인해 정신이 흐려져서일까. 어쩐지 실비아의 눈이 붉게 물든 것처럼 보였다.

16558812927111.jpg‘당신이 왜, 여기…….’

당신은 여기 있으면 안 되는데…….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란델의 의식이 새까만 어둠 속으로 잠겨 들었다. * * *

16558812927115.jpg‘아무래도 확인을 해봐야겠어.’

성 안의 사람들이 모두 잠에 빠져들었을 만큼 늦은 밤. 낮에 보았던 란델의 초췌한 얼굴과 상처가 신경 쓰였던 실비아는 굳은 얼굴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란델에게 무언가 심상찮은 일이 있음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가 순순히 사실을 실토할 것 같지는 않으니, 방에 몰래 숨어들어 사정을 알아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실비아는 제 모습을 투명하게 하는 마법을 건 뒤, 발소리를 죽여 침실을 빠져나갔다. 란델의 침실이 복도 바로 맞은편이기도 하고, 투명 마법을 건 상태에서 이동 마법을 중첩했다가는 자칫 모습이 드러날 위험이 있었기에 직접 걸음을 옮기는 방법을 택했다.

16558812927115.jpg‘……자는 것 같은데.’

실비아는 란델의 침실 문에 귀를 붙이고 동태를 살폈다. 하지만 십여 분이 지나도록 별다른 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안심한 실비아는 조심스레 문고리를 돌렸다. 문이 살짝 열리며 얇은 틈이 생겼다. 그 사이로 방 안을 들여다본 실비아가 그대로 굳어졌다.

16558812927115.jpg“무슨…….”

순간 잇새로 경악 섞인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어스름한 달빛이 비치는 방 안. 란델은 마법으로 만들어낸 사슬에 팔다리를 결박당한 채 괴로워하며 몸을 뒤틀고 있었다. 그가 누워 있는 침대 주위, 그림자처럼 보이는 어둠이 넘실거리는 것을 확인한 실비아는 생각을 이을 새도 없이 방 안으로 다급히 뛰어 들어갔다.

16558812927115.jpg“란델!”

그녀는 반사적으로 목소리를 높이고는 곧장 어둠을 불러냈다. 란델을 감싼 어둠을 힘으로 찍어 내리자 그림자에서 비명과도 같은 소리가 새어 나오더니 이내 스르륵 흩어졌다. 그 그림자에서 익숙한 기운을 느낀 실비아가 이를 악물었다.

16558812927115.jpg‘벨라…….’

세이크린 후작의 세뇌를 풀 때 느꼈던 기운. 서큐버스 벨라가 틀림없었다. 실비아는 진작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는 한편 정신없이 란델의 상태를 살폈다. 그는 실비아가 벨라의 어둠을 걷어내자마자 곧장 혼절한 상태였다. 어찌나 식은땀을 흘렸는지 침대 시트는 대부분 젖어 있었고, 손목과 발목은 피부가 다 쓸리고 짓물러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실비아는 손짓 한 번으로 란델의 팔다리를 속박하고 있는 사슬을 끊어내 버렸다. 타인의 마법을 강제로 없애거나 부서트리면 그 상대에게 고스란히 여파가 미친다는 것을 생각할 정신도 없었다. 그나마 일말의 이성으로 치유 마법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녀는 침대 시트의 깨끗한 부분을 찢어 피범벅이 된 손목 발목을 지혈하며 침대 옆의 줄을 반복해서 잡아당겼다.

16558812927115.jpg“델마! 윌콧!”

실비아가 내지른 새된 외침과 종소리에 성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녀는 제 외침을 들은 사용인들이 달려오기 전까지 어떻게든 란델의 정신을 붙들어놓으려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16558812927115.jpg“란델, 정신 차려봐요. 란델!”

그때 란델의 눈꺼풀이 움찔 떨렸다. 실비아는 숨조차 멈추고 그의 눈꺼풀이 느리게 들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16558812927111.jpg“누구…….”

란델은 고통으로 인해 미간을 찡그린 채 가늘게 뜬 눈을 몇 번 깜박였다. 연녹색 눈에 초점이 맞았다가 다시 맞지 않기를 반복했다. 이윽고 제 눈앞에 있는 것이 실비아라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16558812927111.jpg“……안 됩니다.”

16558812927115.jpg“……란델?”

16558812927111.jpg“당신은, 여기 있으면, 안…….”

란델은 상처투성이인 몸을 움직여 제 어깨를 잡은 실비아의 손을 떼어내던 중 다시 정신을 잃었다. 그의 머리가 베개 위로 툭 떨어지며 손에 힘이 빠졌다. 실비아가 허공에 덩그러니 남은 제 손을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 사용인들이 달려왔다.

16558812974489.jpg“마님! 무슨 일이십니까!”

16558812974489.jpg“세상에나, 주인님!”

16558812974489.jpg“주인님, 오스턴 님께서 각혈을……!”

사용인들은 만신창이나 다름없는 란델의 모습에 대경하며 정신없이 움직였다. 델마가 실비아에게 어찌 일이냐 묻고, 윌콧은 하인에게 지시를 내리고, 사용인들은 깨끗한 물을 가져오고 주치의를 불러오러 달려 나가고……. 사방이 소란했으나 실비아는 한가운데서 홀로 유리된 느낌이었다. 사람들의 말소리가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먹먹했다. 텅 빈 손에 멍하니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그녀는 불현듯 헛웃음을 흘렸다.

16558812927115.jpg‘아…….’

심장이 쿵, 쿵, 요란하게 뛰는 소리가 귓가를 죄 메웠다. 실비아는 찰나 몸에 힘이 빠져 침대 위, 란델의 몸을 감싸듯 엎드려 실소했다.

16558812927115.jpg‘결국 이렇게 됐구나.’

이 사람이 나를 밀어내는 게 죽는 것처럼 아프고 싫다. 이 사람의 상처가 나의 상처보다 더욱 쓰라리고 아파 가슴이 찢어질 듯하다. 이 사람의 호흡, 온기, 웃음 하나하나에 속절없이 휘둘리는 것이…… 기분 나쁘지 않다. 그 모든 감정이 가리키는 방향은 사실상 하나뿐이었다.

16558812927115.jpg‘좋아하는구나.’

내가 어느새 란델 벨포르라는 사람을 필요 이상으로 마음에 담아버렸노라고. 지금도 선연히 욱신거리는 심장이 그 마음을 대변했다.

16558812927115.jpg‘나는 또다시 이 늪 같은 마음에 잠겨 죽겠구나.’

기쁨인지, 절망인지 모를 감정에 자꾸만 바람 새는 듯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툭, 떨어져 란델의 가운 위로 젖은 자국을 남겼다.

16558812927115.jpg“…….”

다시는 사랑에 빠지고 싶지 않았는데. 다시는…… 잃어버릴 사랑을 만들고 싶지 않았는데. 결국 그녀 또한 나약하디 나약한 인간에 불과한지라. 햇살처럼 웃고, 보슬비처럼 울고, 바람처럼 다가오던 란델을 상대로 버틸 재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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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8812974489.jpg“마님, 괜찮으셔요?”

델마는 실비아가 란델에 대한 걱정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줄로 알고 조심스레 물었다. 그 물음에 조금이나마 혼란을 갈무리한 실비아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16558812927115.jpg“오스턴은?”

16558812974489.jpg“아, 오스턴 님께서 어찌 된 일인지 갑자기 각혈을…….”

1655881301449.jpg“속박 마법이 갑자기 해제된 충격으로 그런 겁니다. 별일은 아니에요.”

그때 등 뒤에서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자 오스턴이 입가에 묻은 피를 성의 없이 닦아내며 방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오스턴은 실비아를 힐긋 일별하고는 란델에게로 다가섰다.

1655881301449.jpg“쯧. 그러게 진작 치료받으시라고 했는데도 그럴 마력으로 사슬이나 한 번 더 두르라고 버티시더니.”

못마땅한 중얼거림을 흘린 그가 곧장 란델에게 치유 마법을 사용한 뒤 침대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한동안 주위를 둘러보던 오스턴이 이윽고 묘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1655881301449.jpg“그보다 마님께서 사용인들을 부르셨다고 들었는데…….”

16558812927115.jpg“…….”

1655881301449.jpg“혹시 어쩌다가 제 마법이 해제된 것인지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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