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조각난 추억2021.09.02.
“혹시 어쩌다가 제 마법이 해제된 것인지 아십니까?”
실비아는 그 물음에 잠시 침묵하다가 매끄럽게 답했다.
“글쎄. 내가 방에 들어왔을 때는 란델뿐이었네만. 달리 이상한 점은 없었어.”
“그렇습니까. 아무래도 마족의 힘과 충돌하다가 깨어진 모양이군요. 더 정진해야겠습니다.”
오스턴이 분한 얼굴을 했다. 실비아는 모른 척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느,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윌콧이 보낸 하인이 뒤늦게 공작성의 주치의를 불러왔다. 밤중에 급하게 달려온 주치의가 흐트러진 매무새로 허둥지둥 란델의 상태를 살폈다.
“외상은 오스턴 님 덕에 잘 아물었습니다만, 열이 심하십니다. 의식도 없으시고요.”
주치의가 심각한 얼굴로 빠르게 말을 늘어놓았다. 그가 자신의 조수를 보며 말했다.
“테이린 약초를 가져오게.”
“헉, 테이린 약초라면…… 지금은 남은 것이 없습니다.”
“뭐? 내가 늘 부족하지 않도록 관리하라 그리 일렀건만!”
“죄, 죄송합니다! 몇 시간 전에 아픈 아이를 데리고 성문 앞에서 읍소하던 여인이 있어서……! 공작님의 명을 따라 남은 테이린 약초를 그들에게 내주었습니다. 날이 밝으면 채워놓으려 했는데……!”
조수가 울상을 지으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던 델마가 혀를 차더니 팔을 걷어붙였다.
“거, 됐소! 그리 야단할 시간에 내가 금방 나가서 사 오…….”
“내가 가지.”
잠잠하고도 선명한 목소리가 소란을 일거에 잘라냈다. 델마가 놀라 뒤를 돌아보자 실비아는 벌써 하녀를 시켜 클로크를 가져오라 지시하는 중이었다. 델마를 비롯한 사용인들이 기겁해 실비아를 만류했다.
“예?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을……!”
“내가 가겠네.”
“마님…….”
“가게 해줘.”
“…….”
화들짝 놀라 한 마디씩 내뱉던 사용인들이 약속한 듯이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실비아를 말리기엔, 그녀의 얼굴이 침상에 누워 있는 란델보다도 창백했기 때문이었다. 실비아를 말릴 수 없음을 깨달은 델마는 하녀가 가져온 클로크를 손수 입혀주었다. 델마가 실비아에게 은화가 담긴 주머니를 내밀며 단단히 일렀다.
“성을 나가서 대로를 따라 쭉 가시다 보면 사거리 정면에 큰 약재상이 보이실 겁니다. 문이 닫혀 있겠지만 신경 쓰지 말고 문을 두드리며 벨포르 공작성에서 왔다고 하세요. 바로 열어줄 거예요.”
“알았네.”
“……저는 시더스 경을 불러오지요. 먼저 정문에 가 계셔요.”
델마는 안타까운 웃음을 흘리고는 실비아의 등을 떠밀었다. 실비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델마가 기사단 숙소 쪽을 향해 몸을 튼 순간. 실비아의 모습은 작게 반짝이는 빛의 잔상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 * *
“커헉!”
벨라는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느낌에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으나 역부족이었다. 입을 틀어막은 손 틈새로 검붉은 피가 왈칵 흘러나왔다. 서큐버스의 능력을 사용하던 중, 강제로 표적과의 연결이 끊어진 반동이었다.
“베, 벨라 님!”
“약! 당장 약을 가져와!”
벨라의 몸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바닥에 쓰러져 경련하는 그녀의 모습에 놀란 어둠 벌레들이 새된 비명을 내지르며 바삐 뛰어다녔다. 벨라는 고통으로 인해 오두막 바닥에 손톱을 박아 넣으며 이를 으득 갈았다. 붉은 눈이 흉흉한 빛을 띠고 빛났다.
‘대체 어떤 놈이……!’
그녀의 능력을 끊어낼 수 있는 것은 더 큰 어둠을 지닌 마족뿐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알기로 분명 현재 인간 세상에 나와 있는 마족 중 자신보다 고위 마족은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벨라가 혼란에 잠긴 사이에도 피는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그녀의 곁을 지키던 어둠 벌레들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대체 약을 가져오라 한 지가 얼마나 지났는데 아직도 오질 않아!”
“제가 가서 확인해보겠습니다.”
우두머리의 지시를 받은 어둠 벌레 하나가 다급히 오두막을 뛰쳐나갔다. 하지만 그 또한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 버러지들이……!”
결국 인내심을 잃은 우두머리가 몸을 일으키던 차였다. 콰직. 쿵.
“……? 뭐지?”
오두막 바깥에서부터 기묘한 소음이 점차 가까워졌다. 정작 숲은 비명 한 자락 울리지 않고 고요하건만. 그 와중에 무언가 부서지고 뒤틀리는 소리만 반복되는 것이 외려 섬뜩했다. 무언가 심상찮음을 감지한 우두머리와 벨라의 안색이 변했다. 우두머리가 다급히 벨라의 앞을 막아서며 검을 뽑아 들었다. -콰앙! 그리고 그 순간 오두막의 문이 굉음을 내며 산산이 부서졌다.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검은색 클로크를 두르고 있는 인영이었다.
“여기 있었군.”
고운 입매 틈으로 무감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흰 뺨에는 눈밭에 흩날린 꽃잎처럼 피가 튀어 있었다. 상대는 후드조차 눌러쓰지 않은 차림이었다. 상대의 얼굴을 알아본 우두머리와 벨라가 동시에 놀란 얼굴을 했다.
“……벨포르 공작 부인?”
침입자는 실비아 플로레트 벨포르였다. 그녀의 어깨 너머로, 숲길을 따라 기괴한 자세로 널브러져 있는 어둠 벌레들의 시신이 눈에 들어왔다.
‘오스턴 도슬러가 함께 온 건가? 아니면 공작?’
벨라는 바쁘게 눈을 굴리며 지원군을 찾으려 했으나 주변에서 인기척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가 그것에 의문을 가질 무렵, 실비아가 무표정한 얼굴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벨라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게 내가 경고했잖나.”
“뭐…….”
“공작은, 건드리지 말라고.”
어둠을 등진 금색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벨라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위압감에 반사적으로 숨을 멈췄다.
“으아아아! 죽어!”
그때 어둠 벌레의 우두머리가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땅을 박차며 검을 휘둘렀다. 그가 쥔 검날에 흰빛이 맺히는 것을 본 실비아가 무료하게 중얼거렸다.
“검기 사용자였나.”
“죽……!”
“그래봤자 겉핥기에 불과한 것 같지만.”
서걱-. 가볍디가벼운 손짓이었다. 하지만 하인을 부르듯 무성의하고 가벼운 그 손짓에, 우두머리의 목이 그대로 날아갔다. 검날에 맺혀 있던 빛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커다란 몸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리며 쿵, 하는 둔탁한 울림을 만들어냈다. 벨라는 조금 전 제가 본 광경을 믿을 수 없어 넋을 놓은 채 더듬거렸다.
“마법사였다고……? 당신이?”
그사이, 우두머리를 죽인 실비아가 걸음을 떼었다. 그녀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찰박, 하는 질척한 소리가 들렸다.
“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그 소리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벨라가 버둥거리며 어떻게든 그녀에게서 멀어지려 애를 썼다. 붉은 눈에 난생처음 죽음에 대한 공포가 서렸다. 하지만 실비아는 벨라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몸을 숙였다. 손을 뻗어 벨라의 턱을 쥐고 제 쪽을 바라보게 한 실비아가 온기 없이 눈꼬리를 휘었다.
“벨라.”
“아, 으…….”
“안심해. 지금 당장 너를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뭐?”
뜻밖의 말에 벨라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이어진 말을 듣는 것과 동시에.
“그렇게 쉽게 죽여줄 수야 없지.”
벨라는 실비아의 눈 한가운데 아른거리는 붉은 기운을 발견하고는 눈을 부릅떴다.
“너도 내 남편이 겪은 고통의 절반 정도는 느껴봐야 하지 않겠어.”
“……!”
“부디 오래도록 고통스러워하길 바라.”
나긋한 속삭임이 끝나는 순간. 그녀의 발밑에서 피어오른 검은 아지랑이가 벨라의 몸을 집어삼키듯 감쌌다. 실비아는 불길에 휩싸인 듯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벨라에게 우아하게 인사했다.
“그럼 안녕히.”
화아악! 그 인사를 끝으로 숲에서 불길이 치솟더니 실비아의 모습이 사라졌다. 벨라는 어떻게든 그녀를 붙잡으려 했으나 끔찍한 고통 탓인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주인의 통제를 벗어난 몸이 삐걱거리며 일어섰다. 그리고 숲의 뒤편에 있는 절벽 쪽으로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멈춰……! 멈춰, 제발!’
벨라는 절벽이 가까워지는 것을 보며 어떻게 해서든 제 몸을 감싼 어둠을 떨쳐내려 애썼다. 하지만 단순히 마족이 아닌, ‘마왕’이었던 실비아의 힘을 뿌리치기는 역부족이었다.
‘안 돼…….’
절벽 아래는 누군가 공들여 깎은 듯 날카로운 바위가 가득했다. 끝을 직감한 벨라의 눈이 공포로 물들던 찰나. 그녀의 몸이 훅, 소리와 함께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 * *
‘실비아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은데.’
란델은 정신을 잃은 사이 꿈을 꾸었다. 아니, 그것을 꿈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를 ‘겪었다.’ 따사로운 햇살이 머리 위를 비추고, 선선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간질였다. ‘란델’은 드넓은 평원에 우뚝 선 나무 아래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잠에 빠져들 수 있을 것 같은 날씨였으나, 그는 계속해서 잠들락 말락 한 상태만 유지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톡.
“…….”
톡톡.
“…….”
톡톡 토독 톡.
“……아, 진짜! 왜 이렇게 사람을 귀찮게 해! 저리 가!”
미간을 찡그린 채 침묵하던 란델은 결국 참지 못하고 제 머리를 건드리는 스태프를 거칠게 쳐냈다. 그러자 란델의 코앞에 쪼그려 앉아 있던 검은 머리카락의 여자가 방긋 웃었다. 그 웃음에 따라 붉은 눈이 곱게 휘어졌다.
‘뭐지?’
란델은 그녀의 얼굴을 눈에 담는 순간 소란해지는 심장을 느끼고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말도, 행동도. 분명 자신의 것인데도 뜻대로 할 수 없는 것이 마치 다른 사람의 몸에라도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사이, 란델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던 스태프를 거두어들인 여자가 짐짓 엄한 투로 입을 열었다.
“레오 너. 또 해럴드한테 들이박았다며?”
“……아니야.”
“참나. 얼굴에 이렇게 상처를 주렁주렁 달고서는.”
여자가 혀를 끌끌 차더니 스태프를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자 알게 모르게 쓰라리던 얼굴의 생채기들이 사라진 것이 느껴졌다.
‘이 몸의 이름이 레오라는 건가. 이 여자는…… 마법사?’
온통 알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그사이, ‘레오’라 불린 소년이 툴툴대며 입을 열었다.
“해럴드 그 자식이 먼저 시비 걸었다고.”
“어허. 형이라고 해야지.”
“형은 무슨. 그 사람, 완전 재수 없고 느낌도 별로야. 날 볼 때마다 욕하고, 애새끼가 싸가지 없다면서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툭 친다고.”
다시 생각해도 기분이 나쁜지 레오가 손을 들어 제 이마를 문질렀다. 그에 으음, 하고 난처한 신음을 삼킨 여자가 스태프에 기대며 말했다.
“네가 감이 좋은 건 알지만, 그래도 해럴드는 동료잖아.”
“…….”
“다들 인간의 평화를 위해서 청춘을,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이야. 겉보기에는 조금 거칠더라도 속은 좋은 사람인 거 알지? 너처럼.”
여자가 손을 뻗어 레오의 머리카락을 슬슬 쓰다듬었다. 이것이 전부 자신을 달래려는 수작이라는 걸 알지만 어쩔 수 없이 심장이 뛰고 마음이 풀렸다. 레오는 붉어진 귀를 들키지 않기 위해 여자의 손을 밀어내며 슬쩍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연구는 잘 되어가? 요즘 그것 때문에 바쁘다고 잘 만나주지도 않았잖아.”
“글쎄? 아마 지금까지 해온 정도만 더 하면 되지 않을까?”
“뭐야, 아직도 절반이나 남았다는 소리잖아.”
“절반밖에 안 남은 거지. 내가 뭐 못하는 거 봤어?”
여자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도 찬란하고 눈부신 탓에 레오는 빛에 이끌리듯 잠시간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내 웃음을 거두어들인 여자가 읏차, 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곧 재료 구하러 숲에 가야 할 것 같은데, 같이 갈래? 간 김에 쓸 만한 약초 구별법도 가르쳐줄게.”
최근 여자가 연구로 바쁘다며 얼굴조차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기에, 레오는 오랜만에 함께 움직일 생각에 신이 나 곧장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
“리사 누나라고 부르면 데려가 주지.”
“…….”
레오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 모습을 본 여자가 기다렸다는 듯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또다시 놀림 받은 레오가 씩씩대며 발을 굴렀다.
“안 가! 안 간다고!”
“깔깔깔.”
“이런 인간이 대마법사라니…… 세상에 인재가 다 죽었지, 아주.”
“어어? 같이 가!”
심통이 난 레오가 성큼성큼 나무 아래를 벗어났다. 여자는 당황한 듯 눈을 깜박이다가 다급히 소년을 따라갔다. 나무 아래 홀로 남겨진 ‘란델’이 혼란스럽게 눈을 깜박였다. 그는 그들이 남긴 말들을 곱씹었다.
‘리사…… 대마법사…….’
……대마법사 알리사? 벼락같은 깨달음이 찾아든 순간. 촛불이 꺼지듯 눈앞의 풍경이 훅,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