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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폭풍전야 (46/118)

46. 폭풍전야2021.09.06.

16558813321448.jpg“아.”

눈을 뜨자마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란델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둑이 터지듯 흘러나오는 눈물에 당황했다.

16558813321448.jpg‘이게 무슨…….’

정신을 잃은 사이 무언가 꿈을 꾼 것 같은데, 그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무의식은 그 꿈을 잊지 못한 것인지 자꾸만 눈물이 흘러나왔다. 란델은 당황해서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아내려 애썼다.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척과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58813321457.jpg“……란델? 당신 지금 울어요?”

방 한쪽에 놓인 소파에서 졸던 실비아가 다급히 몸을 일으켜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란델이 정신을 차리자마자 우는 모습에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눈에 담는 순간 지금까지의 눈물은 거짓이었다는 양 속에서 무언가 울컥 치받았다.

16558813321457.jpg“란…….”

실비아가 무어라 입을 열려 했지만, 그보다 란델이 그녀를 끌어당겨 안는 것이 먼저였다. 실비아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몸이 란델의 몸 위로 쓰러지듯 겹쳐졌다. 란델은 실비아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목멘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16558813321448.jpg“잠시, 잠시만.”

16558813321457.jpg“…….”

16558813321448.jpg“잠시만 이대로…….”

란델은 스스로조차 이해할 수 없는 원망과 그리움에 잠겨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그에 얼마간 침묵하던 실비아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란델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녀는 드물게도 자상한 목소리로 물었다.

16558813321457.jpg“악몽이라도 꿨어요?”

16558813321448.jpg“……모르겠습니다.”

16558813321457.jpg“그런데 왜 이렇게 울어요.”

16558813321448.jpg“그것도…… 모르겠습니다.”

16558813321457.jpg“대체 아는 게 뭐야? 내가 누군지는 알고 이렇게 껴안는 거예요? 설마 다른 여자랑 착각한 건 아니죠?”

16558813321448.jpg“큽.”

짓궂은 농담에 란델은 울다가 말고 설핏 웃어버렸다. 실비아는 이후로도 조곤조곤 말을 걸며 그를 달래려 했다. 평소 말수가 많지 않았던 그녀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란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안정을 되찾고 눈물을 그칠 수 있었다. 문제는…….

16558813321448.jpg‘……젠장.’

뒤늦게 찾아온 수치스러움이었다. 란델은 실비아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눈만 데구루루 굴렸다. 눈물을 그쳤으니 놓아주어야 하긴 하는데. 멋있는 모습만 보여도 모자랄 판에 어린아이처럼 품에 안겨 엉엉 우는 꼴을 보였다고 생각하니 민망함에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렇게 란델이 실비아를 안고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던 중, 먼저 말문을 연 것은 실비아였다.

16558813321457.jpg“란델.”

16558813321448.jpg“예.”

16558813321457.jpg“다 울었으면 이제 좀 놔줄래요?”

16558813321448.jpg“……예.”

조금 전 다정히 그를 달랬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싸늘한 목소리였다. 란델은 얌전히 실비아를 놓아주고 상체를 일으켰다. 실비아 또한 침대에 걸터앉으며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녀는 란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16558813321457.jpg“할 말이 없다더니.”

16558813321448.jpg“…….”

16558813321457.jpg“그래, 손목 발목이 피범벅이 되어서 며칠간 고열로 눈을 뜨지도 못하는 건 딱히 말할 만한 일도 아닌가 보죠. 이해해요.”

16558813321448.jpg“잘못했습니다.”

16558813321457.jpg“제가 아직 북부 풍습에 적응을 못 한 건지, 이런 건 별일 축에도 못 낀다는 걸 미처 몰랐네요. 앞으로는 사경을 헤맬 지경이어도 꼭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할게요.”

16558813321448.jpg“부인, 제발.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저 좀 봐주세요.”

란델은 산뜻하게 이어지는 실비아의 말에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애원했다. 그러나 실비아는 여전히 온기 없는 웃음을 띤 채 협탁에 놓여 있던 약 그릇을 들어 올렸다.

16558813321457.jpg“그러고 보니 당신이 깨어나면 주치의가 이 약을 주라고 하더라고요. 꼭 한 번에 다 마셔야 한대요.”

실비아는 차분한 손길로 란델의 손에 약 그릇을 쥐여주며 그가 정신을 잃은 사이의 일들을 전해주었다.

16558813321457.jpg“당신이 쓰러진 날 영지 외곽의 숲에서 큰불이 났는데, 거기가 어둠 벌레들의 근거지였대요.”

16558813321448.jpg“……예?”

란델이 당황해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실비아는 잠잠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16558813321457.jpg“어둠 벌레들은 전 글레버 후작의 반역에 연관되었던 이들 같고, 이번 일의 주범으로 보이는 마족의 시신도 발견됐어요. 내분인지, 외부의 습격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죽은 채로 불이 난 것 같다더군요. 시신은 기사들이 수습해뒀대요.”

실비아는 본인이 불과 10분 사이에 저지른 일이었음에도 뻔뻔하게 말을 맺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란델은 미간을 좁힌 채 생각에 잠겼다.

16558813321448.jpg‘시기가 공교로운데…….’

하필이면 자신이 서큐버스로 인해 정신을 놓기 직전 즈음에 그들이 전부 죽어 없어지다니. 꼭 누군가 그를 도운 것만 같이 느껴지지 않는가.

16558813321448.jpg‘뭐, 착각이겠지만.’

란델은 착각이겠거니 치부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16558813321448.jpg“어찌 되었건 다행이군요. 이제 막 새로운 상단들이 자리 잡아가는 시기에 또다시 테러라도 일어났다가는 곤란했을 테니.”

오스턴이 북부와 수도 사이에 이어진 길에 새 결계를 설치한 덕에, 북부로 오다가 목숨을 잃는 사람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러자 전에는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 북부 쪽으로는 발도 두지 않던 상단들이 하나둘 앞다투어 북부에 둥지를 틀기 시작했다. 그 덕에 영지의 경제는 전보다 활발해진 상태였다. 란델이 오스턴에게 추가 수당이라도 챙겨주어야겠다며 흐뭇해하는데, 실비아는 그를 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16558813321457.jpg“……일할 생각은 다 낫고 나서 하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약을 안 마셨잖아요.”

16558813321448.jpg“아.”

란델은 그제야 제 손에 들린 약 그릇을 상기했다. 그가 약을 마시기 위해 그릇을 들어 올리다가 말고 멈칫했다.

16558813321448.jpg‘……독약?’

연녹색 눈이 지진이라도 일 듯 갈피 없이 흔들렸다. 흰 그릇에 담긴 액체는 흡사 독약으로 보일 만큼 새까맣고 쓴 냄새가 풍겼다. 어지간하면 ‘쓰다’라는 맛을 잘 느끼지 못하는 란델마저 꺼려질 정도였다. 란델은 슬그머니 그릇을 내리며 짐짓 심각한 얼굴로 입을 뗐다.

16558813321448.jpg“실비아.”

16558813321457.jpg“네?”

16558813321448.jpg“이거…… 약이 아니라 독약처럼 보이는데, 혹 약재를 잘못 쓴 것은 아닐까요? 주치의를 불러봅시다.”

16558813321457.jpg“제가 직접 바깥에 나가서 사 온 약초로 달인 약이에요.”

16558813321448.jpg“큽, 쿨럭!”

란델은 실비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약을 벌컥 들이켜 한입에 삼켰다. 그리고 한 손으로 입을 막고 괴로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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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다행히 란델은 고작 이틀 만에 쾌차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족히 이 주일은 앓아누웠을 상태였는데, 주치의는 참 괴물 같은 회복 속도라며 혀를 내둘렀다.

1655881338387.jpg“그래도 후유증이 남아 있을 수 있으니 각별히 조심하셔야 합니다. 당분간은 약을 꼬박꼬박 챙겨 드시고, 음식도 신경 써서 드십시오.”

란델은 내키지 않아 했으나 주치의는 강경했다. 그리고 주치의보다 강경한 것이 바로 실비아였다. 간만에 부부가 식당에서 함께하는 아침 식사 자리. 란델은 복수라도 하듯 제 앞에 달팽이를 비롯한 보양식들을 산더미처럼 쌓아놓는 실비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16558813321448.jpg“……부인.”

16558813321457.jpg“네?”

16558813321448.jpg“왠지 신이 나 보이시는데, 기분 탓입니까?”

16558813321457.jpg“네.”

16558813321448.jpg“…….”

그런 것치고는 평소엔 잘 쳐다보지도 못했던 달팽이를 손수 발라내고 계시잖습니까……. 란델은 그리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포크를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실비아가 손수 옮겨준 음식인데 남길 수는 없었다. 그는 약부터 들이켜 미각을 마비시킨 후 보양식을 하나둘 집어 먹기 시작했다. 실비아는 그 모습을 보며 자못 사악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야 내 심정을 알겠냐’고 말하는 듯한 미소였다. 그렇게 즐겁지 않은 듯 즐거운 식사가 이어질 때였다.

1655881338387.jpg“주인님, 마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윌콧이 은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보통 때였다면 부부의 식사가 끝나길 기다린 후 방으로 찾아갔겠지만. 중요한 사람에게서 온 편지라 주인의 의사를 묻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에서였다. 란델과 실비아가 식기를 내려놓았다. 윌콧이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1655881338387.jpg“마님께 편지가 왔습니다. 대부인께서 보내신 것이라더군요.”

16558813321457.jpg“어머니께서?”

1655881338387.jpg“예. 어찌할까요? 원하신다면 침실에 가져다 두겠습니다.”

16558813321457.jpg“아니야, 지금 읽어보겠네. 이리 줘.”

실비아가 냅킨으로 입을 닦고 손짓했다. 윌콧은 실비아에게 플로레트 백작 부인의 편지를 넘겨준 후 다시 식당을 나갔다. 실비아는 란델의 앞에 보양식 접시를 하나 더 밀어준 뒤 편지를 뜯었다. 편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길디길었다. ‘사랑하는 딸에게’로 시작한 편지는 이내 안부 인사를 넘어, 어제저녁 식사의 메뉴가 뭐였는지까지 시시콜콜한 수다에 가까워졌다. 그러던 중 백작 부인이 문득 생각난 듯 적은 이야기가 보였다. 「그러고 보니 아가. 이번에 북부에 헛소문이 돌았다지? 너희가 아직도 초야를 치르지 않았을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다니. 저번에 북부에 들렀을 때 보았던 너와 공작님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말이야. 명색이 장모된 입장으로 그걸 어떻게 보고만 있겠니. 수도 사람들이 괜히 헛소문을 옮기고 다니려 하길래 내가 나서서 조용히 시켰어. 공작님이 너를 얼마나 다정하게 대하시는지에 관한 얘기도 빼놓지 않고 했더니 다들 납득하더라고. 이래 봬도 내가 젊었을 때는 수도 사교계의 꽃이라고 불렸단다, 호호.」 이걸 고마워해야 하나, 아니면 민망해해야 하나……. 실비아는 수도까지 헛소문이 퍼지지 않았다는 데 안도하는 한편. 백작 부인이 사실을 지나치게 왜곡한 것은 아닌지 싶어 미묘한 얼굴로 편지를 마저 읽어 내렸다. 「아, 맞다. 이 얘기를 하려고 편지를 쓴 게 아닌데, 얘기가 딴 길로 새버렸네. 곧 국왕 폐하의 탄신일인 건 알고 있지? 너와 공작님도 탄신연에 올 거니? 올 거지? 왔으면 좋겠는데. 조금 일찍 내려와서 우리랑 축제도 즐기러 다니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괜히 부담 가지지는 말렴. 정말 희망 사항일 뿐이니까 말이야. 남은 이야기는 만나서 전할 수 있다면 좋겠구나. 수도는 지금 한창 더울 때이니, 집에 들러서 수도에 머물 동안 입을 옷도 조금 더 챙겨 가고. 그럼 곧 수도의 햇살 아래서 볼 수 있길 바라며, 밀레이아 보겐 플로레트.」 실비아는 편지를 다 읽고 나서 그 내용을 란델에게도 말해주었다. 란델은 ‘왕의 탄신연’이라는 말에 썩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곧 한숨을 푹 내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16558813321448.jpg“예, 참석해야지요. 왕국 귀족의 의무니까요.”

마음만 같아서는 왕의 탄신일이야 지나가건 말건 북부에 틀어박혀 일이나 하고 싶었지만. 개인적인 불편함을 이유로 탄신연에 참석하지 않았다가는 역심이니 뭐니 쓸데없는 말이 나돌 것이 뻔했다.

16558813321448.jpg‘그러고 보니.’

란델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인상을 구겼다.

16558813321448.jpg‘왕세자도 참석하려나?’

최근 왕세자가 총사령관으로 참전했던 남부 정벌 전쟁이 종식됐다. 상대를 바닥까지 긁어내 제 것으로 만들려 드는 그 욕심 많은 성정상 협상까지 본인이 직접 마무리 짓고 올라올 가능성이 크긴 했지만. 아무래도 친부의 탄신연인 데다가, 전쟁도 끝났으니 부관에게 협상을 맡기고 수도로 올라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16558813321448.jpg‘기왕이면 협상이 오래 이어졌으면 좋겠는데.’

그들이 수도에 들러서 축제를 즐기고, 연회에도 참석한 후 북부로 돌아올 때까지 왕세자가 수도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란델은 무의식중에 실비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1655881338387.jpg-이 왕국에 존재하는 모든 건 내 소유야.

  왕세자는 어렸을 적부터 욕심이 남달랐다. 란델이 가진 것에 대해서는 특히나 더. 그런 그가 실비아를 마주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린 듯 예상된다는 점이 그를 불안하게 했다.

16558813321457.jpg“왜 그렇게 보는…….”

실비아는 란델이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자 의아한 듯 갸웃하다가 퍼뜩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고개를 가로저었다.

16558813321457.jpg“그렇게 봐도 안 돼요.”

16558813321448.jpg“……?”

16558813321457.jpg“거기 놓인 건 다 먹어야 해요. 그때까진 못 일어나요.”

16558813321448.jpg“……큽.”

란델은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숨죽여 웃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근심 걱정을 한가득 끌어안고 있던 것이 무색하게 실비아의 말 한마디에 다시금 웃음이 샘솟았다. 그는 결국 실비아가 그만 웃으라고 등을 찰싹찰싹 내리칠 때까지 웃음을 거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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