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동경2021.09.09.
얼마 후. 란델과 실비아는 국왕의 탄신연에 참석하기 위해 일부 식솔과 함께 수도로 향할 채비를 했다.
“거기! 조심해서 옮겨!”
“마차 바퀴는? 미리 확인했습니까?”
벨포르 공작성의 정원은 이른 아침부터 부산했다. 윌콧과 델마는 성을 지켜야 하는 저들 대신 주인 부부를 따라가는 사용인들에게 마지막까지 당부의 말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준비를 모두 마친 후에야 란델과 실비아는 마차에 오를 수 있었다.
“부인.”
란델이 마차에 오르려는 실비아를 돕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잠시간 물끄러미 바라보던 실비아가 온기 없는 웃음을 띠며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아요.”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는 먼저 마차에 올랐다. 홀로 남겨진 란델은 허공에 덩그러니 남은 손을 거두어들이며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가 폈다. 잇새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또 이러시는군.’
최근 들어 실비아는 란델과 웃으며 잘 지내는가 싶다가도 어느 순간 거리를 두는 일이 잦아졌다. 그럴 때마다 뭔가 실수를 했나 싶어 제 행동을 되짚어 보아도 특별히 문제 될 일은 없었다. 그것이 못내 신경 쓰여 란델이 마차에 오르지 못하고 잠시 마음을 다스리는 사이. 홀로 마차에 오른 실비아 또한 눈을 꾹 감고 호흡을 고르는 중이었다.
‘거리를 둬야 해.’
란델에 대한 마음을 자각한 이후로 두 번째 삶에서의 기억이 꿈에서 나오는 일이 잦아졌다.
-제냐…….
-엄마.
엉망이 된 채로 발치에 매달리는 남편과 아이의 모습. 그것이 마치 이번에도 누군가를 섣불리 마음에 담았다가는 그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경고처럼 느껴져서. 실비아는 자신이 란델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가능하다면 그 마음을 없애고 싶었다. 갓 마음을 자각한 지금이 적기일 듯해, 란델과 함께 속절없이 웃다가도 문득 이성이 돌아오면 거리를 벌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는데. 한편으로는 그럴 때마다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하는 란델의 모습이 마음 아파 쉽지 않았다.
‘수도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으려고 이러는 건지.’
란델에 대한 마음도 그렇고, 꿈도 그렇고. 이래저래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뭐, 기우겠지.’
실비아는 애써 상념을 떨쳐내며 창틀에 팔을 기대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사이 심란함을 갈무리한 란델이 마차에 올랐고, 이내 마차는 오스턴의 마법진을 통해 수도 부근으로 이동했다. 복잡한 마음과 달리 날은 아주 맑았다. * * *
“아이고, 먼 길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어서 오너라. 간만에 뵙습니다, 벨포르 공작님.”
란델과 실비아를 태운 마차는 수도 근처에서 다시 몇 시간을 달려 플로레트 백작저에 도착했다. 국왕의 탄신연 기간 동안 사람 많고 번잡한 왕궁 말고, 수도 인근에 있는 플로레트 영지에서 머물라며 제안한 백작 부부가 반가이 그들을 맞이했다.
“오랜만에 뵈어요. 어머니, 아버지.”
“두 분 모두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실비아가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 란델이 깍듯이 허리를 숙였다. 플로레트 백작은 실비아의 인사를 받고 나자 울컥했는지 눈물이 글썽이는 눈으로 딸을 바라보았다.
“우리 딸, 어떻게 저번에 다녀간 이후로 아빠한테 편지 한 번을 안 쓸 수가…….”
“어휴, 이이가 또 주책이네. 어서 들어가요. 식사 준비도 다 해놨으니까.”
백작 부인이 민망한 듯 백작의 어깨를 찰싹 때려 그를 만류하고는 실비아와 란델을 안으로 이끌었다. 오랜만에 본가에 돌아온 실비아 덕에 신이 난 주방장의 요리는 훌륭했다. 란델은 식사 내내 북부와는 확연히 다른, 해산물 위주의 음식들에 감탄했고 실비아는 간만에 보양식의 향연에서 벗어나서인지 산뜻한 얼굴이었다. 만족스러운 식사가 끝난 이후, 실비아는 본격적으로 하소연을 시작한 백작에게 붙들렸다.
“나는 우리 딸이 아프진 않을지, 또 밥은 잘 챙겨 먹고 있을까 얼마나 걱정했는데. 역시 결혼하고 나니 아비보다는 남편이 의지가…….”
“아버지, 진정하세요.”
실비아는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는 백작을 어색하게나마 달래려 애썼지만 역부족이었다. 한심하다는 듯 남편을 바라보던 백작 부인이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나며 란델에게 속삭였다.
“우린 나가 있을까요? 저 사람, 앞으로 한 시간은 더 딸한테 징징대고 나서야 서운함이 풀릴 거예요.”
“아, 그렇다면…….”
안 그래도 대외적으로는 싸늘하다고 정평이 나 있는 백작의 저런 모습에 적응을 못 하고 있던 란델이 내심 화색을 띠며 살금살금 방을 벗어났다. 두 사람은 방에서 멀리 떨어지고 나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불편했죠? 미안해요.”
“아닙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저이가 안 그렇게 보여도 가족한테는 무르거든요. 하나뿐인 딸을 시집보냈다는 게 아직도 실감이 안 나는 모양이에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란델이 진지하게 답했다. 백작 부인은 그런 란델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저택이라도 한 바퀴 돌아보는 건 어때요? 내가 구경시켜 줄게요. 물론 벨포르 성보다야 못하겠지만, 나름 괜찮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나름 괜찮은 정도라니, 겸손이 과하십니다. 게다가 직접 안내해주신다니 제가 더 영광이군요.”
란델은 웃으며 답하고는 그녀와 함께 저택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백작 부인의 얘기 대부분은 어린 시절의 실비아가 어땠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실비아가 결혼 전까지 지냈던 방. 그나마 자주 걸음 했던 후원 구석의 나무 밑. 어렸을 적에 백작 부부의 요청에 못 이겨 한 번 타보고 말았다는 맞춤 그네……. 이윽고 저택 곳곳을 돌아다니던 그들의 걸음이 멈춘 것은 역대 플로레트 백작 일가의 초상화가 줄지어 걸려 있는 복도였다. 란델은 복도 끝에 다다랐을 때 즈음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에는 어린 실비아와 지금보다 젊은 모습의 백작 부부가 그려진 초상화, 그리고 결혼 직후의 모습과 흡사한 실비아가 백작 부부와 함께 그려진 초상화가 각각 하나씩 걸려 있었다.
백작 부인은 란델이 어린 시절의 실비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것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어렸을 때도 표정은 지금이랑 똑같죠?”
“아…….”
란델은 백작 부인의 웃음소리를 듣고 난 후에야 약간의 이성을 되찾아 머쓱하게 뒷덜미를 긁적였다. 그것도 잠시, 그의 시선은 다시 초상화 속의 실비아에게로 돌아갔다.
‘……작다.’
백작 부인의 말대로 얌전히 의자에 앉은 실비아에게서는 왠지 모를 초연함이 느껴졌다. 어렸을 때부터 참 한결같은 사람이었구나, 싶어 새삼스럽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백작 부인은 란델과 함께 애정 어린 눈으로 딸의 초상화를 응시하다가 입술을 뗐다.
“그래도 오늘 보니 전보다 표정이 많이 나아졌더라고요. 말은 안 했지만, 아직 성인도 안 된 애가 늘 삶에 미련이 없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어찌나 걱정이 됐는지…….”
혹 장모에게 상처가 될까 싶어 구태여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란델 또한 공감하는 부분이었다. 이따금 눈을 감고 있는 실비아를 볼 때마다, 그녀가 관 속에 누운 시신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섬뜩한 적이 있었으니까. 백작 부인은 란델을 돌아보며 설핏 웃음 지었다.
“그 애가 진짜 ‘사람’처럼 말하고 웃기 시작한 게 다 공작님과 결혼한 후의 일이더라고요. 정말 고맙습니다.”
“아, 아닙니다. 제가 한 게 뭐 있다고요.”
란델은 겸손히 손을 내저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백작 부인이 문득 입을 열었다.
“……공작님께서는 선대 공작 부인을 정말 많이 닮으셨군요. 그래서 그런지 우리 집안사람들은 늘 신세를 지는 느낌이네요.”
“저희 어머니를 아십니까?”
뜻밖의 말에 란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백작 부인이 후후 웃었다.
“알다마다요. 젊었을 적, 수도에 갓 올라와 망신을 당하던 나를 구해준 것이 그분이었는걸요.”
연한 베이지색 눈이 먼 과거를 더듬듯 흐릿해졌다. 밀레이아 보겐. 그것이 현 플로레트 백작 부인의 젊었을 적 이름이었다. 당시 밀레이아의 가문인 보겐 남작가는 동부 끄트머리의 한미한 귀족가였다. 시골에서 논밭을 굴러다니던 밀레이아는 나이가 차자 데뷔탕트를 치르기 위해 수도로 올라왔고, 그곳에서 난생처음 사람들의 날 선 적의를 마주했다.
-저 촌스러운 옷 좀 봐요. 여기가 어디라고 저런…….
-너무 그러지들 말아요. 그래도 멋모르는 시골 영애가 저 정도면 많이 애쓴 거 아니겠어요?
-그것도 그렇네요.
곳곳에서 들리는 수군거림. 무언가 깎아내릴 것이 없는지 찾으려는 듯 바삐 움직이는 눈동자. 그 한가운데에서 밀레이아는 사시나무 떨듯 떨며 희게 질린 얼굴로 치마를 꾹 움켜쥐는 것밖에 할 줄 몰랐다. 알고 보니 그때의 밀레이아는 한미한 가문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외모 탓에 그 해에 데뷔탕트를 치른 영애 중 가장 주목을 받고 있었다. 다른 영애들은 그것이 질투가 나 밀레이아를 둘러싸고 차림새가 촌스럽다느니,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으며 그녀를 비웃은 것이었다. 하지만 내내 영지에서만 자랐던 밀레이아는 그러한 적의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눈물만 참을 뿐이었다.
-고개 들어요.
그때 나타난 것이 전 벨포르 공작 부인, 당시에는 세르시아 예커만 영애였다. 밀레이아가 부드러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게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죄인처럼 서 있지 말라고, 그렇게 서 있다가는 없던 죄도 뒤집어쓰기 십상이라며 손수 자세를 잡아주셨죠. 강한 분이셨고, 그래서 닮고 싶었어요.”
그 동경 덕분이었을까. 다음 해, 밀레이아는 각고의 노력 끝에 어느새 사교계의 꽃이라 불릴 만큼 영향력 있는 인사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한 해 사이 세르시아는 벨포르 공작 부인이 되어 수도를 떠났기에 밀레이아와는 마주칠 일이 없었다. 그리고 이후로 쭉 간간이 소문만 전해 듣다가, 마지막으로 들은 것이 공작 부부의 전사 소식. 일방적일지도 모르지만 그때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전 공작보다는 세르시아의 다정함을 더 많이 닮은 듯한 눈앞의 이 청년에게 자꾸만 마음이 쓰이는 것은. 밀레이아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이런저런 일들에 시달렸음에도 한결같이 바르고 정중한 란델이 마음에 겨워 그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늘 진심으로 고마워요. 혹시라도 내가 도와줄 일이 있다면 꼭 말하고.”
그 다정한 말에 란델은 어쩐지 목구멍이 꽉 막히는 기분이었다. 한동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던 그는 가까스로 답을 내놓았다.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 * *
“한 방을 쓰는 건 절대 안 됩니다.”
실비아에게 밀렸던 관심을 한껏 받고 난 후, 평소대로 돌아온 백작은 눈을 시퍼렇게 뜨고 단언했다. 백작 부인이 유난이라며 아무리 등을 내리쳐도 백작은 강경했다. 란델 또한 장인과 장모 앞에서는 조심할 필요성을 느꼈기에 별말 않고 실비아와 다른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날 밤.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뒤척이던 실비아는 결국 악몽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하…….”
그녀는 탄식 같은 숨을 뱉으며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꿈에서 죽은 남편과 아이의 얼굴을 보는 것은 그녀로서도 꽤 고역이었다. 결국 초췌한 얼굴의 실비아는 찬 공기를 쐴 생각으로 가벼운 가운만을 걸친 채 밖으로 나갔다.
‘낮에는 조금 더울 정도였는데, 밤은 여전히 쌀쌀하구나.’
실비아는 두꺼운 숄이라도 두르고 나올 걸 그랬나, 하는 생각에 팔을 문지르며 후원을 거닐었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때는 저기서 가끔 낮잠을 잤던 것 같은데.’
그러던 중, 후원의 외진 곳에 있는 나무를 발견한 실비아가 그리로 다가갔다. 22년의 대부분을 침대 위에서 지냈다고는 하나, 그녀도 사람인 이상 집 안에서만 지내는 것이 늘 갑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실비아는 그럴 때면 소음이 적은 후원으로 나가 가장 외진 곳에 있는 나무 아래서 잠시간 잠을 청하곤 했다. 물론 그러는 날이면 어김없이 감기에 걸리곤 했지만. 실비아는 감기에 걸린 자신보다 더 서럽게 울던 플로레트 백작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픽 웃음을 흘렸다. 나무 근처로 다가가던 그녀는 곧 나무뿌리 부근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