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네가 왜 거기서 나와?2021.09.13.
‘이건…….’
실비아는 잘 가꾼 잔디밭 사이로 반짝이는 것을 주워들었다. 그것은…… 빈 와인병이었다.
‘여기가 명당이긴 한가 보네.’
실비아는 대수롭지 않게 빈 와인병을 휘휘 돌려보았다. 햇빛 잘 들고, 바람 잘 불고, 그늘도 적당하고. 이런 명당을 저 혼자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아마 어느 사용인이 휴식 시간에 이곳에서 쉬다가 깜빡 두고 간 모양이었다. 한동안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다른 빈병이 남아 있지는 않은가 주변을 살펴보던 실비아는 뒤통수를 콕콕 찌르는 시선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만 숨어 있고 나와요, 란델.”
그 말에 조금 떨어진 곳의 풀숲에서 파사삭 소리가 들렸다가 고요해졌다. 실비아가 고개를 돌려 풀숲을 빤히 응시하자, 결국 머리카락에 나뭇잎을 붙인 란델이 머쓱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는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한번 탈탈 턴 후 풀숲을 나와 실비아에게 다가왔다.
“이 시간에 바깥에는 무슨 일이십니까?”
“그건 내가 물을 말이네요. 그것도 숨어서 따라오던데.”
실비아가 수상쩍다는 듯 눈썹을 슬쩍 기울이며 물었다. 란델은 차마 ‘당신이 나를 불편해할 줄 알았다’라고 말하지 못하고 그녀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한동안 침묵하던 그들 중 실비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왜 나온 건데요?”
“아, 그것이.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지 잠이 잘 오지 않아서…….”
“……저도 마찬가지예요.”
“그렇습니까.”
두 사람은 문답을 마치자마자 또다시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실비아는 대화 중 악몽의 내용이 떠올라서였고, 란델은 잠이 오지 않는다는 실비아의 말이 걱정되어서였다. 악몽을 상기한 실비아가 무의식중에 손에 힘을 주었다가, 손바닥에 닿아오는 매끄러운 감촉에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아.”
실비아는 놀란 얼굴로 제 손에 들린 빈 와인병을 내려다보았다. 와인병에 시선을 고정한 그녀가 새삼스러운 감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란델과는 술을 마셔본 적이 없네.’
북부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가신들을 맞이하는 연회에서 술을 마신 적은 있지만. 란델과 단둘이서 얼굴을 맞대고 술을 마셔본 적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란델이 그녀의 생각과 똑같은 말을 내놓았다.
“부인과는 따로 잔을 기울인 적이 없군요.”
실비아가 시선을 들자 옅은 미소를 띤 란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저와 똑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에 놀라 눈을 깜박이던 실비아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그와 닮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네요. 어차피 잠도 안 오는데, 이렇게 된 거 술이나 한잔할까요?”
그 말에 란델의 얼굴이 밤하늘에 떠올라 있는 달처럼 환하게 물들었다. * * * 란델과 실비아는 야밤의 술자리를 갖기로 한 후 곧장 백작저의 부엌 뒷문으로 향했다. 손을 뻗어 문고리를 돌려본 실비아가 멈칫했다.
“생각해보니 당연히…… 잠겨 있겠네요.”
“실비아, 잠시.”
란델은 실비아를 옆으로 물러나게 한 후 소매에서 작은 핀을 꺼냈다. 그가 핀으로 잠금쇠를 이리저리 건드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찰칵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실비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란델을 올려다보자 그가 핀을 감추며 헛기침을 했다.
“큼. 필리아와 어렸을 적 여기저기 쏘다니다 보니…… 들어가죠.”
“사고뭉치들이었군요.”
“그렇게까지는…….”
두 사람은 사고뭉치의 정의에 대해 옥신각신 토론을 이어가며 부엌에 숨어들었다. 실비아는 기억을 더듬어 사용인들이 감춰둔 술과 과일을 약간 챙겼다. 그리고 란델을 이끌고 후원 한편에 있는 작은 정자로 향했다. 란델은 실비아를 대신해 들고 온 와인병과 잔, 안주를 테이블에 보기 좋게 차리며 물었다.
“실비아. 술은 잘 마시는 편입니까?”
“잘 모르겠는데…… 당신은요?”
“잘 마십니다.”
선뜻 대답이 돌아왔다. 실비아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듯한 그 태도에 묘하게 호승심이 자극되는 것을 느껴 입꼬리를 올렸다.
“자신감이 상당하네요.”
“사실을 말한 것뿐입니다.”
“흐음.”
“……그 눈은 뭐죠?”
“그래요, 잘 마신다니 좋겠네요.”
“허.”
실비아가 만용을 부리는 어린아이를 보듯 란델을 바라보자 그가 발끈했다. 한 손으로 거칠게 앞머리를 쓸어 넘긴 그가 전에 없이 삐뚠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정 못 미더우시다면 내기하시겠습니까? 둘 중 누가 먼저 잔을 내려놓는지.”
실비아는 란델이 제게 서슴없이 덤벼오자 가소로운 웃음을 띠고 승낙했다.
“좋아요.”
그렇게 한밤중에 별안간 시작된 술 내기. 그리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한 시간 즈음이 지나자 술에 취해 해롱대는 것은 란델 하나였다.
“대체 어떻게…… 그리 멀쩡, 하신 겁니까…….”
란델은 자꾸만 가물거리는 눈꺼풀에 힘을 주며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테이블 위는 어느덧 빈 와인병들로 가득했다. 중간에 한 번 보충을 했던 탓에, 가히 10병에 달했다. 그러나 맞은편에 앉은 실비아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얼굴로 즐겁게 그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게 누가 덤비랬나.’
그녀는 타고난 승부욕이 강한 데다가, 마왕으로 살았을 적의 경험 탓인지 누군가 제게 발칙하게 덤벼들면 그 상대를 꺾어야 직성이 풀렸다. 란델은 모르겠지만, 실비아는 첫 술잔을 기울이던 그때부터 제 몸에 해독마법을 걸어둔 상태였다. 그러니 밑 빠진 그릇에 물을 붓듯이 술을 아무리 마셔도 멀쩡할 수밖에. 실비아는 테이블에 반쯤 엎드리다시피 기대어 있는 란델을 보며 말했다.
“슬슬 포기하죠? 당신, 더 마셨다가는 내일 일어나지도 못할 것 같은데.”
“안 됩니다. 백작 부처께서…… 함께 가자고 하셨는데.”
란델은 부정확한 발음으로 중얼거리더니 애써 몸을 일으켰다. 머리는 엉망으로 흐트러지고,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랐는데도 포기하질 않는다. 그 눈물겨운 모습에 속으로 혀를 찬 실비아가 그에게서 와인병을 빼앗아 들었다.
“그냥 내가 진 걸로 하고 그만 해요. 원하는 게 뭐예요?”
두 사람은 내기의 대가로 상대가 원하는 한 가지를 들어주기로 약속했었다. 어차피 란델이 술에 취한 모습도 충분히 구경했고, 게다가 해독마법이라는 속임수도 쓴 상태였으니. 원하는 거 하나 들어주는 것쯤은 어렵지 않지. 하여 실비아가 선심 쓰듯 원하는 것을 묻자, 란델이 퍼뜩 고개를 내저었다.
“안 됩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술 취한 사람답지 않게 단호한 목소리였다. 꼭 이럴 때만 발음이 정확해지는 것 같네, 하며 실비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정말 괜찮아요? 세 번은 안 물어볼 건데.”
“…….”
“원하는 게 뭐예요?”
실비아가 이번이 마지막 물음이라며 압박하자 란델이 입을 다물었다. 평소보다 흐릿한 눈을 깜박이던 그가 한참이나 머뭇댄 끝에 입을 열었다.
“그럼…….”
“…….”
“입, 맞추고 싶습니다.”
물끄러미 상대를 직시하는 연녹색 눈에서 옅은 정염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실비아는 조금 민망해졌다.
“음…….”
란델과의 키스는 분명 기분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또다시 두 번째 삶과 같은 일을 반복하게 될까 봐 어쩔 수 없이 두려움이 일었다. 그렇게 실비아는 잠시간 두려움과 두근거림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항복하듯 양손을 들어 올렸다.
“알았어요. 내가 그쪽으로 갈까요? 아니면…….”
“부인께서는 언제나 그 자리에 계셔도 됩니다.”
그때 란델이 나지막한 목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 목소리에 실비아가 움직임을 멈춘 사이 그가 테이블을 돌아오며 설핏 웃었다.
“제가 다가가면 되니까요.”
속삭임 같은 말을 끝으로, 란델이 손을 뻗어 실비아의 얼굴을 감싸며 고개를 숙였다. 실비아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그의 입술이 내려앉은 곳은 그녀의 이마였다.
“뭐…….”
놀란 실비아가 란델의 팔을 붙들었다. 얇은 옷 너머로 느껴지는 체온이 뜨거웠다. 란델은 이마를 시작으로 눈꺼풀, 콧잔등, 볼 등 실비아의 얼굴 곳곳에 자잘한 입맞춤을 남겼다. 진한 입맞춤이 아닌, 나비의 날갯짓처럼 가볍게 스쳐 지나가는 입맞춤. 그것이 오히려 간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실비아는 란델이 제 얼굴에 입맞춤을 남기는 동안 손끝을 움찔거리며 신음을 참았다. 마지막으로 실비아의 입술에 도장을 찍듯 제 입술을 꾹 누른 란델이 배부른 맹수처럼 만족스럽게 눈을 휘고는 몸을 물렸다.
“감사합니다.”
“하…….”
실비아는 란델이 떨어진 후에야 참았던 숨을 가늘게 뱉어냈다. 어쩐지 호흡이 가빠져 숨을 고르고 있던 때, 란델의 몸이 스르르 무너지더니 그가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란델?”
실비아는 저를 끌어안듯 몸을 기댄 란델을 양팔로 감싸며 당황한 음성을 냈다. 그러나 그는 술에 취한 탓인지 그녀의 어깨에 가볍게 뺨을 비비며 낮게 중얼거렸다.
“사실은 입맞춤 말고…… 저를 밀어내지 말아달라 부탁드리고 싶었습니다.”
뜻밖의 말에 실비아의 어깨가 움찔 굳어졌다. 그 작은 움직임을 감지한 란델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꼬리를 흐렸다.
“하지만 그건 너무…… 욕심인 것 같아서.”
나는 당신이, 스스로 내게 와줬으면 하니까. 오롯한 당신의 의지로 ‘나’라는 사람을 선택해줬으면 하니까. 당신이 자꾸만 내게서 멀어지려 하는 건 조금, 아니, 사실 무척 속상하지만. 그럴 때마다 내가 한 걸음 더 다가가 거리를 좁히면 되니까. 부디 나를 밀어내지 말아 달라는 부탁은, 그래서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란델은 그 중얼거림을 끝으로 완전히 정신을 잃고 잠에 빠져들었다. 실비아는 몸에서 완전히 힘이 빠져 늘어진 그를 끌어안은 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그 소리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실비아는 저도 모르게 란델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어떻게…….’
이 사람은 어쩜 이렇게 한결같을 수 있는 걸까. 어쩜 이렇게 한결같이…… 강할 수 있는 걸까. 글레버 후작의 일도, 자신의 거절도. 분명 상처가 되는 일이었을진대, 그것에 굴하지 않고 언제나 다시 웃는다. 밀어내면 다가온다. 그것이 얼마나 큰 마음인지, 강인함인지. 이 사람은 알고 있을까. 실비아는 끝내 두근거림을 이기지 못하고 란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 * *
‘슬슬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한동안 란델을 끌어안은 채 마음을 진정시킨 실비아가 평정을 되찾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란델을 껴안고 몸을 일으키기 위해 슬쩍 다리에 힘을 주어 보았으나 어림도 없었다.
‘이건 안 되겠고.’
빠르게 포기한 실비아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밤이 늦은 까닭에 저택도, 후원도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보는 눈도 없고, 사람들은 전부 잠들었을 시간이고. 위험 요소가 없다고 판단한 실비아가 란델을 끌어안은 자세 그대로 이동 마법을 썼다. 눈을 깜빡이자 시야가 변했다. 란델의 침실에 들어온 실비아는 등 받침대가 사라지자 순간적으로 휘청이는 몸에 급히 힘을 주었다.
‘아무도 없지?’
다시금 방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음을 확인한 실비아가 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자 란델의 몸이 옅은 빛에 휩싸이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제야 바닥에서 몸을 일으킬 수 있게 된 실비아가 깊은숨을 내쉬며 뻐근한 손목을 돌렸다.
“안 그렇게 생겨서는 돌덩이 같네. 다 근육이라 그런가…….”
……하긴, 몸이 좀 좋은 게 아니긴 했지. 실비아는 잠시간 제가 보고 만졌던 란델의 몸을 떠올리다가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실비아는 란델의 침대를 찾아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걸음을 옮기는 것에 따라 허공에 뜬 란델의 몸도 그녀를 따라왔다. 그리고 실비아가 막 란델을 침대 위에 내려두려는 참이었다.
“주군!”
벌컥. 또랑또랑한 목소리와 함께 방문이 노크도 없이 열렸다. 실비아는 너무 놀란 나머지 그대로 굳어진 채 고개만 홱 돌렸다.
“……어?”
그리고 놀란 것은 상대 또한 마찬가지였다. 시큰둥한 얼굴로 방문을 열어젖혔던 오스턴의 얼굴이 서서히 경악으로 물들었다. 오스턴과 실비아의 머릿속에 나란히 비슷한 느낌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네가 왜 거기서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