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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마친놈 (49/118)

49. 마친놈2021.09.16.

16558813832343.jpg‘네가 왜 거기서 나와……?’

실비아는 찰나 밤이 깊어 자신이 잘못 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잠시 넋을 놓은 탓에 마력이 흐트러져 란델이 침대 위로 퉁, 떨어지고.

16558813832348.jpg“으음.”

그 충격으로 인해 란델이 자그마한 신음을 흘리며 뒤척이는 소리에 이성이 돌아왔다. 실비아는 입술을 깨물며 속으로 작게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16558813832343.jpg‘젠장.’

잘못 본 게 아니구나.

16558813832359.jpg“……누굽니까, 당신?”

마찬가지로, 란델의 기척에 정신을 찾은 오스턴이 실비아에게 마법을 겨누며 경계 어린 목소리를 냈다. 그의 얼굴은 혼란과 의심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실비아는 우선 오스턴의 섣부른 행동을 막기 위해 항복의 의미로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16558813832343.jpg‘어떡하지.’

오스턴과 눈이 맞닥뜨린 순간 그의 기억을 지워야 하나,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랐지만. 세이크린 후작 때와 달리 상대가 마법사인 만큼, 오스턴이 반항하는 와중 마력이 부딪혀 그가 다칠 가능성도 컸다. 갈팡질팡하던 실비아는 옆에서 란델이 또다시 잠에서 깨어나려는 것처럼 몸을 뒤척이는 소리를 듣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16558813832343.jpg‘제대로 망했군.’

결국 체념한 그녀가 얼굴을 살짝 일그러트린 채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16558813832343.jpg“일단 그것부터 좀…… 치우지.”

그러자 실비아와 오스턴의 주위로 순식간에 소리 차단막이 생겨났다. 그것을 본 오스턴이 경악으로 턱을 떨구며 저도 모르게 마법진을 흩뜨렸다. 그가 뜻밖이라는 듯 중얼거렸다.

16558813832359.jpg“이게 무슨…… 저 시니컬한 표정은 분명 마님이 맞는데…….”

실비아는 어이가 없어 되물었다.

16558813832343.jpg“자네는 표정으로 사람을 구분하나?”

16558813832359.jpg“마법을 쓸 수 있으셨던 겁니까? 대체 어떻게…….”

하지만 오스턴은 실비아의 말을 들을 정신조차 없는지 두서없는 말만을 내뱉었다. 횡설수설하는 오스턴의 앞에서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실비아는 이렇게 된 거 뻔뻔하게 나가기로 하고 턱을 치켜들었다.

16558813832343.jpg“전에도 한 번 말했잖나? 천재라고.”

16558813832359.jpg“……예?”

오스턴이 어안이 벙벙한 목소리를 냈다. 실비아는 상대에게 최면을 거는 마음으로 차분한, 그리고 또렷한 발음으로 말을 이었다.

16558813832343.jpg“독학으로 깨우쳤네. 집에 널리고 널린 게 그런 서적들이었으니까.”

16558813832359.jpg“말이 되는 소리를 하십시오!”

실비아의 말에 오스턴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꿋꿋했다.

16558813832343.jpg“논리와 상식으로 설명되지 않는 사람이 있기에 천재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지. 그게 나고.”

오스턴은 거기서 말문이 막혔다. 그도 그럴 것이, 나름대로 대마법사의 이름을 달지도 모르는 인재라며 추켜세워지던 자신도 해결하지 못하던 개량식을 눈앞의 사람이 가뿐히 해결해주지 않았던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고민에 잠겼던 오스턴이 미심쩍게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16558813832359.jpg“……그럼 대체 왜 천재라는 사실을 숨기시는 겁니까?”

16558813832343.jpg“굳이 밝혀야 할 이유가 있나?”

16558813832359.jpg“굳이 숨겨야 할 이유도 없죠.”

어설픈 거짓말로는 쉽게 납득할 것 같지 않은 얼굴이었다. 실비아는 거짓과 진실을 교묘히 섞기로 했다.

16558813832343.jpg“귀찮아서.”

16558813832359.jpg“예?”

16558813832343.jpg“자네도 들은 게 있으니 알 거 아닌가. 나는 사람들 틈에서 정신없이 시달리는 일은 딱 질색이네.”

자신이 인파 틈바구니에 있는 광경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말을 잇던 중 실비아가 무의식중에 눈썹을 찌푸린 덕에 진정성이 강하게 느껴졌다. 오스턴은 그녀의 말이 공작성에 온 이후로도 할 일을 마치면 어지간해서는 드러눕는다던 소문과 맞물린다는 것을 깨닫고 혼란스러워졌다.

16558813832343.jpg“그러니 자네도 어지간해서는 비밀로 해주었으면 해. 일전에 내가 결계 마법 개량을 도운 적이 있으니 그것의 대가라고 생각하면 되겠군.”

거기에 실비아의 태도는 한결같이 당당했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의 평온함이었다. 이쯤 되자 오스턴은 슬슬 실비아의 변명에 넘어가기 시작했다.

16558813832359.jpg‘……진짜인가?’

16558813832343.jpg‘진짜인가 의심하고 있네.’

16558813832359.jpg‘일단 이유가 다 그럴싸하긴 한데…….’

16558813832343.jpg‘당장 의심할 만한 거리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나 보지.’

표정이 훤히 읽히다 못해 머릿속이 들여다보일 것 같았다. 저것도 재주라면 재주인가. 실비아는 느긋하게 오스턴이 생각을 정리하길 기다렸다. 이내 표정을 갈무리한 그가 긴가민가한 얼굴로 물었다.

16558813832359.jpg“그럼 혹시, 일전에 공작님의 사슬을 푼 것도…….”

16558813832343.jpg“아, 그때는 정신이 없어서 반동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 사과하지.”

16558813832359.jpg“하.”

실비아가 태연히 고개를 까딱했다. 그때의 일 때문에 각혈했던 것을 떠올린 오스턴이 허허로운 탄식을 뱉었다.

16558813832343.jpg“그나저나 수식을 뭐 그렇게 짜 놨나? 어찌나 허술한지 힘 좀 주니까 풀려버리던데.”

16558813832359.jpg“뭐라고요? 제 수식이 어디가 어때서!”

지적을 들은 오스턴이 발끈해 외쳤다. 하지만 그것은 맹수의 입에 저를 잡아먹어 주십사 머리를 들이미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16558813832343.jpg“첫 줄부터 마지막 줄까지 전부 엉망이야.”

너 잘 걸렸다. 눈을 번뜩인 실비아는 안 그래도 전부터 거슬렸던 부분들을 하나둘 조목조목 지적하기 시작했다. 이 부분은 왜 이렇게 돌아가냐, 쓸데없이 돌다가 인생 마감할 일 있냐, 여기는 왜 또 이렇게 난잡하냐……. 동료들의 부족한 점을 지적하고 채워주는 것은 ‘알리사’였을 적부터 곧잘 해오던 일이었다. 오스턴의 수식을 하나하나 분해하듯 짚어 이야기하는 모습이 흡사 아카데미의 교수라고 보아도 손색이 없었다. 실비아는 그 후로도 한참이나 저번 개량식과 이번 사슬 마법식에 대한 설교를 늘어놓다가 슬그머니 말꼬리를 흐렸다.

16558813832343.jpg“그래서 거기는…… 그렇게 고치면 될 것 같은, 데…….”

그도 그럴 것이 저를 바라보는 오스턴의 시선이 과하게 반짝거렸다. 충격적이게도 눈을 초롱초롱하게 뜬 채 실비아의 말을 경청하던 오스턴은 그녀가 말을 멈추자 울상을 지었다.

16558813832359.jpg“왜 말을 멈추십니까? 더 혼내주십시오. 더!”

16558813832343.jpg“……자네 변태였나?”

16558813832359.jpg“배움을 위해서라면 이깟 변태 취급이 대수이겠습니까. 가르침을 주십시오, 마님!”

얘가 이런 성격이었나. 실비아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오스턴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16558813832343.jpg‘이런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원래는 차갑고, 시니컬하고, 돈 더 달라고 투덜대는 성격 아니었나. 역시 인간은 참 여러 가지 면을 가진 동물이다. 그리 생각한 실비아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16558813832343.jpg“……알았으니 비밀이나 잘 지키고.”

16558813832359.jpg“넵!”

16558813832343.jpg“밤이 늦었으니 이만 사라지게.”

16558813832359.jpg“옙!”

실비아의 말에 즉각 대답한 오스턴이 희희낙락한 얼굴로 방을 나섰다. 실비아는 오스턴이 방문을 열고 나간 후 소리 차단막을 해제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방문에서 쉽사리 눈을 떼지 못했다.

16558813832343.jpg‘어째 불안하단 말이지…….’

  * * * 다음 날 아침. 각자의 방에서 자고 일어난 실비아와 란델은 매무새를 가다듬은 후 복도에서 만나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전날 밤과 달리 말끔한 차림이 된 란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16558813832348.jpg“신기하군요. 어제 그렇게 술을 마셔댔는데도 부인이나 저나 별다른 숙취가 없다는 것이.”

16558813832343.jpg‘……그야 당연히 나는 애초에 마신 적이 없고, 당신한테는 해독마법을 걸어줬으니까 그런 거지.’

실비아는 간밤에 란델을 두고 나올 때 그에게 해독마법을 걸어주었던 것을 떠올렸다. 물론 겉으로는 전혀 티 내지 않고 “그러게요, 신기한 일이네요”라고 하며 빙긋 웃었지만. 실비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음을 옮기던 란델이 수상한 시선을 감지하고는 멈칫했다. 그는 모퉁이 너머에서 고개를 빠끔히 내민 채 부담스러울 정도로 눈을 반짝이는 오스턴을 발견하고는 못 볼 꼴을 본 것처럼 얼굴을 팍 일그러트렸다.

16558813832348.jpg“……오스턴. 거기서 뭐 하는 거지?”

16558813832359.jpg“좋은 아침입니다, 주군. 숙취가 없으시다니 그거 정말 대단한 일이군요.”

16558813832348.jpg“자네 지금 놀리나?”

16558813832359.jpg“진심입니다만?”

누가 보아도 놀리는 것처럼 보였으나 오스턴은 진심이었다. 그는 복도를 지나던 중 우연히 란델과 실비아의 대화를 듣게 되었고. 모퉁이 너머로 내다본 실비아의 시큰둥한 얼굴을 보고는 란델이 숙취가 없는 것도 그녀가 한 일이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16558813832359.jpg‘다재다능하셔……!’

오스턴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왈칵 흘러나오려는 눈물을 애써 참았다. 오스턴이 전생에 안타까운 사연으로 헤어진 비운의 연인을 만난 듯한 얼굴로 실비아를 바라보자 란델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그는 발을 움직여 실비아의 앞을 가로막으면서 낮게 으르렁댔다.

16558813832348.jpg“어딜 그렇게 보나. 눈 치워.”

16558813832359.jpg“옙. 두 분, 오늘도 모쪼록 좋은 하루 되십시오!”

오스턴은 란델의 구박에도 굴하지 않고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 콧노래를 부르며 멀어지던 그는 제자리에서 폴짝 뛰더니 허공에서 양 발바닥을 맞부딪치는 기행까지 펼쳤다.

16558813832348.jpg“…….”

그 방정맞은 광경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란델이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16558813832348.jpg“……갑작스레 환경이 바뀐 탓에 미친 걸까요? 평소 같았으면 대번에 질색했을 텐데.”

16558813832343.jpg“그러게요. 미친 게 틀림없네요.”

마법에 미친놈인 게 틀림없어……. 실비아 또한 질린 얼굴로 맞장구치며 고개를 내저었다. 부부는 나란히 소름이 돋은 팔을 쓸어내리며 식당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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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아침 식사 자리에서 백작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실비아와 란델을 번갈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16558813910436.jpg“그러고 보니 간밤에 창고에서 와인이 여러 병 없어졌다는데.”

움찔. 두 사람은 그 말을 듣는 즉시 동작을 멈추고 굳어졌다. 힐긋 눈을 굴려 상대를 바라본 그들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16558813832348.jpg‘저희가 그렇게 많이 마셨습니까?’

16558813832343.jpg‘당연하죠. 다 합쳐서 10병은 족히 넘었을 텐데.’

16558813832348.jpg‘…….’

16558813832343.jpg‘…….’

실비아와 란델은 난처하게 눈만 굴렸다. 두 사람이 시선으로 대화하는 것을 본 백작은 도끼눈을 뜨고 무어라 입을 열려 했지만.

16558813925742.jpg“여보.”

백작 부인이 웃는 얼굴로 조용히 그의 옆구리를 꼬집는 바람에 소리 없이 몸을 뒤틀어야 했다. 실비아는 백작의 매서운 눈초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16558813832343.jpg“그러고 보니, 오늘 하고 싶은 건 정하셨어요?”

오늘 백작 부부와 란델, 실비아는 함께 거리 축제에 참석하기로 한 참이었다. 현재 수도에서는 왕의 탄신일을 기념하는 축제가 한창이었다. 왕의 탄신연 앞뒤로 며칠씩 이어지는 축제는 건국제와 더불어 가장 성대한 행사 중 하나였다. 거리에서 벌어지는 축제이니만큼 귀족들은 체면 때문에 참석하기를 꺼리는 편이었지만. 워낙 규모가 큰 탓에 인근 왕국에서 찾아오는 곡예사들을 비롯해 여러 희귀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많기로 유명했다. 실비아는 결혼 전까지 플로레트 저택을 벗어난 일이 없었기 때문에, 자연히 축제나 탄신연 파티에도 참석한 적이 없었다. 하여 백작 부인은 드디어 외부 활동을 시작한 딸과 함께 거리 축제에 참석하고 싶다는 소망을 내비쳤다. 플로레트 백작 부인은 우아함의 대명사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놀라울 만큼 이런 일에 거부감이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녀는 탄신연 파티에서는 주변 귀족의 시선 때문에 마음 편히 즐길 수 없을 테니, 가족이 다 함께 거리 축제에 참석하자고 제안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실비아는 사람이 많은 곳을 질색해 가고 싶지 않았지만. 백작 부부와 란델이 워낙에 기대 어린 눈을 하고 있던지라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백작 부인은 실비아의 물음에 곧장 환하게 피어난 꽃 같은 얼굴을 했다.

16558813925742.jpg“어머, 그럼! 우선 화살로 과녁을 맞혀 상품을 주는 곳이랑, 또…….”

그녀는 사용인들을 통해 미리 이것저것 놀거리들을 알아두었다며 신이 나 재잘거렸다. 그 모습이 오히려 실비아보다 소녀에 가까워 보여 다른 이들은 미소 띤 얼굴로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16558813910436.jpg“그건 그렇고, 두 사람 정말 간밤에 아무 일도 없었…….”

16558813925742.jpg“여보! 그만 물어보라고 했잖아요! 밥 좀 편하게 먹으라고 내버려 둬요!”

16558813910436.jpg“부인, 아픕니다…….”

중간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백작이 입을 열었다가 백작 부인에게 등을 맞는 소란이 일긴 했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가족의 단란한 아침 식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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