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알고 있지만 꺼낼 수 없는 답2021.09.20.
“이런 걸 제대로 즐기려면 옷도 장소에 맞게 확실히 갖춰 입어야지!”
식사를 마친 플로레트 백작 부인은 미리 준비해둔 옷을 일행에게 내밀었다. 그녀가 내민 것은 평민들 사이에서도 위화감 없을 법한 옷들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뒷문 앞에서 만난 일행은 란델의 모습에 잠시 말을 잃었다.
“……왜들 그렇게 보십니까.”
란델은 플로레트 백작 부부와 실비아의 시선이 제게서 떨어지지 않자 민망함에 헛기침을 했다. 그 말에 백작 부부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고, 실비아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이런 옷을 입고도 저렇게…… 남사스럽게 보일 수가.’
플로레트 백작 부인이 준비한, 수수하다 못해 검소해 보이는 옷. 하지만 장식이나 무늬가 없어서 그런 것인지, 그 옷을 입자 외려 제복을 입었을 때보다 더 란델의 몸이 도드라졌다.
실비아는 잠시간 남편의 몸이 너무 훌륭한 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고민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란델의 가슴 부근에 슬쩍 인지 부조화 마법을 건 실비아가 태연히 입꼬리를 올렸다.
“아무 일도 아니에요. 이만 갈까요?”
백작 부인과 실비아가 먼저 마차에 오르고, 그 뒤를 란델과 백작이 따랐다. 백작저로 올 때도 느꼈던 것이지만 수도는 축제로 인해 시끌벅적했다. 마차를 타고 수도에 들어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내린 일행이 슬그머니 사람들 사이로 끼어들어 걸었다.
“축제 기간만 특별 판매되는 특제 와인 소스로 만든 고기 조림 맛보고 가세요!”
“무화과 크림치즈 프레첼이 하나에 1실버!”
“추첨에서 당첨된 분께는 무려 1골드 상당의 상품을 드립니다! 지금 바로 참여하세요!”
거리는 말 그대로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노점 앞에 줄지어 선 사람들, 중간중간 설치된 의자에 앉아 가족과 함께 웃고 떠드는 이들. 백작 부인은 실비아와 팔짱을 낀 채 사람들 틈을 걸으며 즐겁다는 듯 웃었다.
“다들 즐거워 보이는구나.”
“그러게요.”
실비아는 눈앞을 가득 메운 인파에 속으로 진저리를 쳤으나 백작 부인을 위해 담담한 미소를 유지했다. 두 사람의 뒤로는 어색하게 거리를 벌린 채 나란히 걷는 란델과 백작이 함께하고 있었다. 백작 부인은 날이 저물기 전 이 거리의 절반은 둘러볼 것이라며 의욕을 다졌다.
“실비아, 저기! 저것 좀 보렴!”
그녀가 첫 번째로 향한 곳은 화살로 과녁을 맞히면 경품을 증정하는 곳이었다. 사람들이 저마다 활을 들고 화살을 쏘아댔으나 중앙을 맞히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가게의 주인으로 보이는 청년이 종이를 둘둘 말아 만든 나팔을 입에 대고 유쾌하게 외쳤다.
“자, 자!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닙니다! 모든 과녁의 중앙을 맞히시면 무려 마법석이 달린 팔찌를 드려요!”
청년은 나팔을 쥐지 않은 한 손을 높이 들고 흔들었다. 그 손에 들린 유리 상자에는 중간에 노란 마법석이 달린 팔찌가 들어 있었다. 실비아는 백작 부인과 함께 청년에게 다가가 물었다.
“그 팔찌에 달린 마법석은 무슨 용도인가?”
청년은 순간 실비아의 미모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황급히 표정을 갈무리하고는 답했다.
“작은 조각이라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법진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보아 마법석은 확실합니다. 도전하시려고요?”
청년은 자연스럽게 란델과 플로레트 백작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 모두 직접 활을 쥔다기에는 너무 가녀려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백작 부인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으면서 그의 예상이 깨졌다.
“아니, 그쪽 말고. 내가 하지.”
“어, 상관은 없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그래. 활은 저걸 쓰면 되는 건가?”
청년이 얼떨떨한 얼굴로 되물었으나 백작 부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참가비를 지불하고는 한쪽에 활과 화살통을 세워둔 곳으로 가 활을 살피기 시작했다. 청년은 그 모습을 보고는 속으로 음험하게 웃었다.
‘이 시간부터 운이 좋구먼.’
수수하게 차려 입었다지만 말투나 외모에서 느껴지는 기품은 가릴 수 없다. 이따금 이런 식으로 변복을 하고 축제에 참석하는 귀족이 있다고 들었는데. 귀족 여성이 활을 제대로 쏠 수 있을지도 의문일뿐더러, 이런 길가의 노점에서 쓰는 활로는 과녁을 맞히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백작 부인이 손수 화살통을 들고 과녁 앞에 자리를 잡는 동안, 실비아와 란델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란히 팔짱을 끼고서 그녀를 지켜보았다.
‘보통 이런 건 상술인데.’
‘척 봐도 과녁 중앙이 너무 좁아. 저딴 것도 과녁이라고 걸어두다니.’
실비아와 란델은 제각기 염려스러운 생각을 하며 백작 부인이 나무 화살을 집어 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열 번 모두 중앙을 맞히시면 이 팔찌를 드리고, 만약 한 번이라도 중앙을 맞히시면 행운의 앵무새 깃털을 드립니다! 그럼 힘내세요!”
그사이, 주인 청년이 간단한 안내를 하고는 뒤로 물러났다. 백작 부인은 어깨와 목을 몇 번 돌려 풀더니 나무 화살을 활시위에 걸었다.
‘어라?’
백작 부인이 활을 잡는 자세가 예사롭지 않자 청년이 당황했다. 그가 무언가 심상찮음을 감지하는 것과 동시에, 나무 화살이 활시위를 떠나 쐐액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화살이 과녁에 박혔다. 박힌 위치는…….
“마, 말도 안 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정확히 중앙이었다. 청년이 사색이 되어 소리를 질렀다. 그는 눈앞의 광경을 믿지 못해 급하게 과녁으로 달려가 화살의 위치를 확인해보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어, 어떻게……!”
“역시 활이 썩 좋은 게 아니라서 그런가, 손맛이 영…….”
한편, 백작 부인은 묘하게 마음에 차지 않는다는 얼굴로 활시위를 퉁퉁 퉁겼다. 주변 도전자들은 개점 후 처음으로 중앙을 맞춘 득점자가 나타난 것도 놀라운데. 그것이 봄바람에 흩날리는 민들레 홀씨 같은 중년의 여인이라는 점에 한 번 더 놀라 들썩였다. 지켜보던 실비아와 란델마저 경악으로 턱을 떨군 가운데. 백작만이 흐뭇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박수를 짝짝짝 치고 있었다.
“역시 우리 부인 실력은 대단하다니까.”
“아버지, 저게…….”
“응? 아, 실비아 너는 처음 보는 것이겠구나. 선대 벨포르 공작 부인이 궁술에 출중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활을 배우기 시작했다던가, 허허.”
란델은 제 어머니의 활 솜씨와 비교해보아도 손색이 없는 백작 부인의 실력에 다시금 감탄했다. 그사이, 백작 부인은 그래도 한 번 쏴보니 감이 잡힌 거 같다며 연달아 화살을 날렸다. 퍽!
“꺄아악!”
탁!
“안 돼애액!”
청년이 절규하건 말건, 그녀는 열 번 모두 깔끔하게 정중앙을 맞혔다. 도전자들은 중앙에 구멍이 뻥 뚫린 과녁판을 구경하며 신기해했다. 백작 부인은 바닥에 계란처럼 흐물거리며 널브러진 청년을 뒤로하고 상품인 팔찌를 실비아에게 내밀었다.
“선물이다, 아가.”
“아…… 감사합니다.”
실비아는 노란 마법석 조각이 박힌 팔찌를 어색하게 받아들었다. 백작 부인은 제게 박수갈채를 보내는 백작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후 기분 좋은 얼굴로 실비아의 팔짱을 꼈다.
“너랑 이렇게 놀러 나오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 꼭 꿈만 같구나.”
고작 이런 일에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즐거워하는 백작 부인을 보자 실비아는 조금 미안해졌다. 지금이야 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밖에 나서기를 마다하지 않지만. 어렸을 때만 해도 그녀는 숨을 쉬고 있다 뿐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았으니까. 그리고 백작 부인은 생각보다 정확히 그녀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네가 늘 삶에 별다른 애정이 없는 듯해 걱정했는데.”
“…….”
“벨포르 공작님과 결혼하고 나서는 정말 좋아 보이는구나.”
백작 부인이 조용한 목소리로 그리 말하고는 빙그레 웃었다. 실비아는 그녀의 말을 듣고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란델을 바라보았다. 백작이 백작 부인의 자랑을 하는 것을 들으며 열심히 맞장구를 치고 있던 란델이 시선을 느꼈는지 눈을 살짝 돌렸다. 실비아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발견한 그가 사르르 눈을 접어 웃었다. 그에 다시금 심장이 쿵, 묵직한 소리를 내며 발끝까지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나는…….’
란델을 두고. 저 남자를 두고, 죽을 수 있을까? 이제는 그 물음의 답을 알고 있음에도, 목구멍이 꽉 막히기라도 한 듯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 * * 실비아는 백작 부인이 선물한 팔찌를 찬 채 거리를 돌아다녔다. 축제 기간에만 판매한다는 이런저런 음식들도 사 먹고, 머리 장식을 만들어서 란델과 백작의 머리에 달아주기도 하고. 나름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해서일까. 처음에는 소란스럽게만 느껴졌던 사람들의 기척과 목소리가 어느덧 익숙해졌다. 실비아는 백작이 사준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며 생각했다.
‘이런 것도…….’
나쁘진 않네. 생각을 이어가던 실비아는 문득 씁쓸한 기분에 옅게 웃었다. 한때는 이런 걸 좋아했던 것도 같은데. 이미 첫 번째 삶에서의 기억은, 배신당한 이후를 제외하고는 파도에 쓸려가는 모래처럼 희미해진 후라. 이제는 그때의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끼며 살았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그나마 기억나는 것은…… 레오, 클레온 정도일까.
‘그러고 보니 레오는 어쩌다가 용사 클레온이 된 거지?’
실비아는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라 미간을 슬쩍 좁혔다. 그녀는 일전에 꿈에서 본 기억으로 인해 레오가 ‘클레온’이라는 사실은 어느 정도 받아들인 상태였다. 하지만 이제는 ‘어떻게’라는 의문이 남아 있었다.
‘분명 내가 나서서 마족과 싸우는 건 좋아하지 않는 애였는데. 혹시 몰라 유언장도 남겨 뒀었으니 돈이 부족해서 용병 일을 시작한 것도 아닐 테고…….’
나름 진지에서 가장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 실종되어 충격이라도 받은 걸까?
‘그렇지만 나를 그렇게까지 좋아하진 않았던 걸로 아는데…….’
설마하니 그런 자신을 위해 복수를 다짐한 것은 아닐 테고. 도통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실비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 상념을 털어냈다. 그보다 지금은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에 집중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리 마음을 다잡은 그녀가 미소를 띤 채 백작 부인에게 말을 건네려던 차였다.
“어이, 거기. 혹시 자매끼리만 나온 건가?”
그때 굵직한 목소리가 백작 부인과 실비아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백작 부인과 실비아는 돌연 드리우는 그림자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상의를 걸치지 않은 채 하의만 입은, 덩치 큰 사내 둘이 그들을 은근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뭡니까?”
백작 부인이 차분하게 물었다. 그 목소리를 들은 사내들이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야, 목소리까지 고우시네.”
“볼일이 있느냐 물었습니다만.”
백작 부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재차 물었다. 그러자 어깨를 한 번 으쓱인 남자가 저와 제 친구를 손으로 가리켰다.
“볼일이 없었다면 말을 걸었겠나. 이쪽도 둘, 그쪽도 둘. 사람 수도 맞는데 일행이 없다면 오늘 하루 같이 다니는 건 어떻습니까?”
실비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백작 부인이 워낙 청순한 인상이라 그런지 그녀를 실비아와 자매로 착각한 듯했다.
“일행, 있습니다. 이만 가자.”
백작 부인은 단호히 고개를 내젓고는 실비아의 팔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그들은 앞을 가로막는 사내들 때문에 다시 걸음을 멈춰야 했다.
“일행이 어디 있는데? 코빼기도 안 보이는구먼.”
“그렇게 튕기지 말고 우리랑 다닙시다. 이래 보여도 우리가 저 격투판의 에이스들이라고?”
남자가 턱짓으로 제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상의를 벗어 던진 채 상대의 몸을 바닥으로 무너트리는 시합을 하는 이들과 그들에게 열광하는 관중들이 있었다. 실비아는 귀찮다는 생각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란델은 어디 있는 거지?’
그 모습을 본 남자가 느끼한 웃음과 함께 실비아의 팔을 잡아당기려 했다.
“어딜 그렇게 보시나. 나는 여기 있다니까?”
하지만 그 순간.
“그 손 치워.”
빠르게 달려온 듯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란델이 남자와 실비아의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