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빛과 그림자2021.09.23.
“그 손 치워.”
남자가 실비아의 팔을 잡아당기려는 순간. 빠르게 달려온 듯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란델이 남자와 실비아의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그러자 남자가 불편한 기색으로 인상을 썼다.
“이건 또 뭐야?”
“일행이 있다는 말도 알아듣지 못하더니, 사람에게 그런 호칭을 쓰는 것을 보아하니 인품도 알만하군.”
“뭐? 이 새끼가…….”
분위기가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란델은 형형한 눈으로 남자를 노려보며 실비아와 백작 부인을 제 등 뒤로 잡아당겼다. 그는 백작이 해주는, 백작 부인이 모르는 실비아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잠시나마 아내와 떨어져 있었던 저를 속으로 책망했다.
“헉, 허억.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
그때 란델이 화살처럼 달려 나가는 바람에 혼자 남겨졌던 백작이 헉헉대며 달려왔다. 의아한 목소리를 내던 그는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한 것인지 말을 멈췄다. 란델의 위압적인 분위기에 주춤거리던 남자들이 옳다구나 새롭게 나타난 목표물을 향해 눈을 돌렸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이 중에서 가장 가냘픈 체구를 지닌 백작을 위협하듯 다가갔다.
“허, 이 샌님은 또 뭐야?”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이런 놈보다는 낫지. 안 그래?”
남자가 그 말을 뱉고는 백작 부인에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로써 이 상황을 온전히 이해한 백작의 얼굴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란델의 곁에 선 그가 위협적으로 손가락을 꺾었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격투판 선수 같은데. 간만에 몸 좀 풀어볼까. 함께하겠나?”
“물론입니다.”
란델이 몸에 힘을 주고 서자 사내들이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본인들이 잠시나마 두려움을 느꼈다는 게 자존심 상하는지 어깨를 풀며 까딱까딱 손짓했다.
“하! 좋아. 저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넘어트려주지.”
“어디 얼마나 하는지 보자고.”
사내들은 침을 퉤 뱉고는 격투판으로 향했다. 당장에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구는 란델과 백작의 등에 백작 부인의 손이 매섭게 내려앉았다. 철썩!
“하여간 못 살아! 그냥 조용히 지나쳐서 경비대에 신고하면 될걸! 잘못해서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윽…….”
“크윽, 여보…….”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허벅지에 박힌 화살을 뽑아낼 수 있는 란델이지만, 어쩐지 장모의 손길은 매섭기 짝이 없었다. 사위보다 덩치가 작은 백작 또한 매한가지였다. 두 사람은 이후로도 몇 번이고 고통에 몸을 뒤틀며 백작 부인의 염려 어린 질책을 들어야 했다. 그동안 한 발자국 물러서 그 상황을 관전하던 실비아는 시야 한구석에 들어오는 반짝임에 문득 시선을 내렸다. 백작 부인이 선물해준 팔찌의 보석이 햇빛에 반짝거렸다.
‘그러고 보니 마법석 조각이라고 했던가?’
지극히 마법사다운 호기심에 손목을 얼굴 근처로 들어 올려 팔찌를 살피던 실비아가 직후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무의식중에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이게 왜…….”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반짝이는, 연노랑 색의 마법석 조각. 그건 실비아가 ‘알리사’일 적 쓰던 스태프에 박혀 있던 것이었다. * * * 그날 밤. 우여곡절 끝에 백작저로 귀환한 실비아는 제 방 침대에 걸터앉아 심각하게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손바닥 위에 마법석 조각이 박힌 팔찌를 올려두고 그것을 빤히 바라보았다.
‘착각이 아니야.’
혹시 몰라 몇 번이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마법석에 새겨진 희미한 술식들은 분명 그녀가 손수 새겨 넣었던 것이었다. 실비아가 ‘알리사’로 전장의 가장 앞에 서던 때. 그녀는 스태프와 같은 마법적 보조 도구가 필요 없을 실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활동하는 곳이 전장인 만큼 광역 공격 마법을 사용해야 하는 일이 잦았다. 현시대에 이르러서도 광역 공격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수준급의 마법사가 최소한 셋 이상은 필요했다. 그러나 알리사는 혼자로도 충분히 광역 공격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고, 평소에는 마법을 행하는 데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찰나의 흔들림, 짧은 방심. 그 한 번의 실수가 병사 수십의 목숨을 앗아가곤 했다. 마족과의 전투가 산발적으로, 잦게 반복되는 만큼 피로는 쌓였으며, 그에 따른 실수도 늘어갔다. 하여 알리사는 결국 광역 공격 마법을 원활히 하는 수식을 손수 개발해 마법석에 그려 넣고, 그것으로 스태프를 만들었다. 자칫 수식을 악용하는 이가 생길까 봐, 전쟁이 끝난 이후 해당 수식을 공개하려 했지만. 결국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알리사는 마족의 땅으로 내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이 수식이 새겨진 마법석은 세상에 오직 하나뿐이었다. ‘대마법사 알리사의 스태프’에 박힌, 마법석. 착각일 리는 없다.
‘……아무래도 스태프를 발견한 누군가 이걸 조각내서 팔았나 본데.’
사실 지금의 ‘실비아 플로레트 벨포르’는 광역 공격 마법을 사용할 일이 없으니 굳이 이러한 마법석이나 스태프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용하는 동안 나름 애착이 생겼는데, 이렇게 조각조각 내어 팔아 치우는 것은 좀…….
‘어쩔 수 없나.’
실비아는 귀찮게 되었다는 생각에 한숨을 푹 내쉬고는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별안간 허공에서 오스턴이 나타나더니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쿵!
“어억!”
오스턴은 침대 헤드에 기대어 책을 보던 자세로 소환당한 탓에 세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잠들 준비를 하다가 날벼락을 맞은 그가 고통에 몸을 비틀다가 실비아를 발견하고 눈을 끔벅거렸다.
“뭐, 뭡니까, 방금?”
“이동 마법식을 응용한 소환 마법.”
“뭐라고요!”
오스턴이 경악하더니 대번에 초롱초롱해진 눈으로 실비아를 응시했다. 그녀는 다리를 겹친 채 그를 내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부탁 하나만 들어주게. 그러면 가르쳐주지.”
* * * 그렇게 실비아는 제 모습이 된 오스턴을 방에 남겨두고 거리로 나왔다. 처음에는 팔자에도 없는 실비아 행세를 하게 되어 괴로워하던 오스턴은 그녀가 소환 마법식을 적어주자마자 거기에 코를 박았다. 어찌나 집중했는지 실비아가 방을 나설 때 손조차 흔들지 않았다.
‘역시 돈 다음으로 이게 제일 잘 먹히네.’
실비아는 오스턴의 협조를 얻어 순조롭게 밖으로 나온 후, 낮에 일행과 함께 들렀던 노점을 찾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가장 큰 상품을 잃었는데도 노점은 여전히 운영 중이었다. 그녀는 밤늦게까지 호객행위에 열심인 주인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물어볼 게 있는데.”
“아, 예! 참가하시려고요?”
실비아를 손님으로 착각한 주인이 얼른 접객용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그러나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내젓고 용건을 밝혔다.
“아니, 그건 아니고. 낮에 상품으로 내놓았던 팔찌를 어디서 구했는지 궁금해서 찾아왔네.”
“앗. 그, 팔찌…… 말이지요.”
실비아가 팔찌를 언급하자 주인은 잠시 가슴을 부여잡고 눈물을 훔쳤다. 이내 축제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제일 큰 상품을 빼앗긴 속상함을 다스린 그가 비장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날은 유독 비가 많이 내리던 날이었습니다…….”
왠지 추리 소설의 도입부 같은 말이었다. 주인은 이어 연극적인 어조로 상황을 설명했다.
“어쩐지 운이 좋을 거 같다는 예감에! 길을 걷다가! 딱! 어떤 떠돌이 상인이 저 팔찌를 파는 걸 발견했죠.”
“……운이 좋게?”
“예! 바로 그겁니다!”
주인은 환한 웃음을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나치게 극적인 어조가 묘하게 거슬렸다.
“흠…….”
실비아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주인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러자 주인이 저도 모르게 눈을 데구루루 굴려 시선을 피했다.
“그러고 보니 자네, 요즘 경비대의 처벌 기준이 강화되었다는 말을 들었나?”
그로써 수상함을 확신한 실비아는 사기꾼 칙을 몰아세웠던 것처럼 은근하게 주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는 횡설수설하며 답을 피하던 끝에 결국 지하 암시장 경매에서 상품을 구했다고 털어놓았다. 지하 암시장. 그곳은 법의 테두리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이들의 세상이었다. 주인을 경비대에 고발하지 않는 조건으로 경매장 건물의 위치를 알아낸 실비아는 후드를 깊이 눌러쓴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마침내 건물 앞에 다다르자 입구에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멀리서 잠시 상황을 살피자 입구의 경비원들이 초대장을 확인하는 것이 보였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실비아는 근처의 인적 없는 골목으로 들어가 제 몸에 인지 부조화 마법을 걸고 줄 사이로 슬쩍 끼어들었다. 그리고 초대장을 가지고 온 손님의 등 뒤에 붙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한쪽 벽에 드리워진 커튼 뒤에서 인지 부조화 마법을 푼 실비아가 태연자약한 태도로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손님, 이것을.”
경매장의 입구에서 경비원이 정중한 태도로 가면을 내밀었다. 화려한 색의 보석으로 장식된 가면은 눈을 빼고 얼굴 전체를 가리는 형태였다.
‘뭐, 조심해서 나쁠 건 없을 테니.’
실비아는 직원이 건넨 가면을 받아 얼굴을 틈 없이 가렸다. 이후 발을 들인 경매장은 장물 등을 파는 곳답지 않게 꼭 별천지 같았다.
“곧 경매가 시작됩니다. 귀빈 여러분께서는 모두 자리에…….”
곳곳에서 안내원들이 소란을 뚫고 목소리를 높였다. 실비아는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았다. 각 자리에는 입찰용 팻말과 가벼운 다과 등이 차려져 있었다.
‘경매장 주인을 만나서 물건의 출처를 물으려면 돈을 좀 써야 할 테니까. 아무거나 적당히 괜찮아 보이는 걸로 고르면 되겠지.’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허리를 곧게 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좌석이 채워지고 소란이 가라앉았다. 불이 꺼지더니 무대 위로 환한 불빛이 쏟아지며 부엉이 가면을 쓴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까지 몸소 걸음 하여 자리를 빛내주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지금부터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참석자들이 열정적으로 환호하며 그에 호응했다. 이윽고 잔뜩 달아오른 분위기 속에서 하나둘 경매 품목들이 소개되었다.
“100골드, 낙찰되었습니다!”
“무려 세 가문을 멸문시켰다는 저주받은 오르골은 이분께서 차지하셨군요! 당신께 짜릿한 불행이 함께하길!”
“더 입찰하실 분은 안 계십니까!”
역시 평범한 경매가 아닌, 암시장의 경매라서 그런지 소개되는 물건들이 하나같이 범상치 않았다.
‘대체 저런 건 왜 사는 거람. 변태들의 취향이란…….’
실비아는 조금 질린 얼굴로 경매를 지켜보았다. 그사이, 또 한 건의 경매를 마무리한 사회자가 기분 좋은 목소리를 내며 물건을 덮은 천의 끝자락을 쥐었다.
“다음 품목은 바로! 이것입니다!”
사회자가 천을 잡아당기는 순간. 가면 너머의 금빛 눈이 크게 확장되었다.
“그 보기 드물다는 마도구 중 하나! 안타깝게도 마법석은 사라지고 없지만, 상당히 솜씨 좋은 마법사가 다룬 듯이 보이는 스태프입니다!”
단상 위에는 낡은 티가 나는, 빛바랜 색의 나무 스태프가 놓여 있었다. 그것이 ‘알리사’의 스태프 자루임을 대번에 알아본 실비아가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마법석이 없다는 소리에 실망한 참석자들은 이전과 달리 미적지근한 반응이었다. 몇몇은 야유까지 보냈다.
“입찰은 10골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입찰하실 분께서는 팻말을 들어주세요!”
사회자는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우려 노력했으나 쉽지 않았다. 어차피 무언가를 사기로 한 거, 기왕이면 저 스태프를 살 수 있으면 좋으련만. 경매장 주인을 만나기 위해서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 좋았기에 실비아는 갈등에 빠졌다.
‘시작가가 너무 낮아. 적당히 가격 경쟁을 하다가 나가떨어져 줄 사람이 필요한데.’
처음부터 대뜸 높은 가격을 불렀다가는 경매장 주인을 만나려 한다는 꿍꿍이가 드러날 것이 뻔했다.
“입찰자, 없으십니까? 만약 30초 안에 입찰자가 생기지 않는다면……!”
사회자의 말에 실비아가 초조하게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누군가 장난으로라도 팻말을 들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녀가 의심을 감수하고 높은 가격에 스태프를 낙찰받기 위해 팻말로 손을 뻗는 순간.
“50골드.”
낮은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팻말을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