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특별한 이의 특별한 유품2021.09.27.
“50골드.”
낮은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팻말을 들어 올렸다. 실비아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통로를 사이에 둔 반대쪽 좌석에서 어떤 이가 팻말을 들어 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첫 입찰자가 나왔군요! 그것도 50골드라는 높은 금액입니다!”
사회자는 기대 이상의 금액이 거론되자 흥분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에 정신을 차린 실비아가 제 앞의 팻말을 들어 올리며 차분히 입술을 뗐다.
“60골드.”
예상치 못한 전개에 장내가 한번 술렁였다. 그러자 이번엔 상대 쪽에서 실비아를 돌아보았다. 그녀와 달리 동물의 머리뼈를 통째로 씌워놓은 듯한 가면이 괴기스러웠다. 가면에 뚫린 눈구멍 너머로 서늘한 기색의 보랏빛 눈이 언뜻 시야에 들어왔다.
“네! 60골드! 60골드 나왔습니다! 41번 참가자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회자가 잔뜩 들떠 외쳤다. ‘41번 참가자’는 잠시 알 수 없는 눈으로 실비아를 응시하더니 이내 고개를 돌리며 화답했다. 그 목소리가 어쩐지 이를 가는 듯 들렸다.
“……70골드.”
그러거나 말거나. 실비아는 생각보다 수월하게 경매장 주인을 만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차근히 금액을 올렸다.
“80골드.”
“100.”
“150골드.”
어느새 스태프 자루의 가격은 오늘 나온 물품 중 최고에 이르렀다. 실비아와 41번 참가자가 경쟁적으로 가격을 올리자 몇 명이 호기심에 팻말을 들어 올렸으나, 금세 두 사람의 기세에 밀려 물러났다.
“500.”
금액이 300골드 언저리에 이르렀을 무렵. 남자가 승부수를 띄우겠다는 듯 한 번에 금액을 두 배 가까이 올렸다.
“500! 500골드입니다! 이 정도라면 역대 경매품 중 열 손가락에 들 거 같은데요! 1분 안에 500골드보다 높은 금액을 부르지 않으시면 이 물건은 41번 참가자께 낙찰됩니다!”
사람들과 사회자가 흥분해 소리를 질러댔다. 실비아는 이제 형형한 눈으로 저를 노려보는 41번 참가자와 시선을 맞추다가, 느긋이 다리를 겹치며 고개를 돌렸다.
“1000골드.”
순간 시장바닥처럼 시끌벅적했던 장내가 한순간에 찬물을 들이부은 듯 조용해졌다. 그리고 직후 폭발적인 함성이 터져 나왔다.
“역대 최고가 경신! 이 물품은 자동으로 골든벨을 울리신 분께 낙찰됩니다!”
사회자가 단상에 놓여 있던 나무 봉을 들어 탕탕 소리가 나게 두드렸다. 경매장에서 역대 최고가를 뛰어넘는 금액을 제시한 사람은 상대의 금액 상향과 상관없이 곧장 해당 물품을 낙찰받을 수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암묵적으로 ‘골든벨’이라 불렀다. 사실 마지막으로 골든벨을 울린 사람이 정체를 숨긴 남부의 국왕이었기에 더 이상 골든벨을 울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그리 예상했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가문이 아주 부유한 것은 아니었지만, 플로레트 백작 부부는 틈만 나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외동딸에게 재산을 넘겨주기 바빴고. 그것을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옷장 속에 그대로 처박아둔 그녀에게 1000골드쯤은 그리 크지 않은 돈이었다. 골든벨에 대해서는 몰랐으나 목적을 이뤘음에 만족한 실비아는 더 경매장에 남아 있을 필요를 느끼지 못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이런 곳에 오래 머물러봐야 좋을 건 없었기에 건물 내에는 달리 휴게실이 존재하지 않았다. 깍듯이 허리를 굽힌 직원이 사무실 앞 복도에 실비아를 남겨두고는 잠시 안으로 들어갔다. 실비아가 군데군데 서 있는 경비원을 한 번 돌아보고 벽에 등을 기대려던 찰나. 강한 악력이 그녀의 팔을 홱 잡아끌었다.
“너.”
고인 물처럼 깊게 침잠한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다. 실비아는 제 팔뚝을 그러쥐는 거센 힘에 미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를 잡아당긴 사람은 조금 전까지 낙찰 경쟁을 했던 41번 참가자였다. 동물의 뼈 가면 너머로 보이는 보랏빛 눈에 언뜻 광기가 스쳐 지나갔다.
“그 스태프 자루. 내게 넘겨라.”
대뜸 나타나 막무가내로 팔을 잡아당긴 것만 해도 충분히 무례한 일인데, 이제는 아예 명령조였다. 급격히 기분이 더러워진 실비아가 가면 아래로 입매를 뒤틀었다. 그녀가 힐끔 눈을 굴려 주위를 살피더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정당한 경쟁을 통해 낙찰한 물건을 넘겨달라고 주장하시는 건가요?”
그다지 크지는 않았지만 또렷한 음성이었다. 그 말을 들은 경비원들이 험악한 시선을 보내며 이쪽으로 다가올 태세를 취했다. 그러자 남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실비아의 팔을 놓아주었다. 하지만 가면 너머로 보이는 눈은 여전히 험악한 기색이었다. 실비아를 노려보던 남자가 이를 뿌득 갈고는 분노를 억누르며 말을 이었다.
“원하는 금액을 말해. 최대한 맞춰주지. 한꺼번에 줄 수는 없지만, 우선 500골드를 선금으로 받고 나머지는…….”
그 모습을 하찮다는 듯 바라보던 실비아가 싸늘하게 눈을 휘었다.
“세 배.”
“……뭐?”
“당신이 얼마를 생각하고 있건, 내가 제시할 금액은 그 가격의 세 배야.”
달리 말하자면 나는 절대 당신에게 물건을 넘길 생각이 없으니 꿈 깨라는 뜻이자 비아냥이었다.
“너 지금 뭐라고…….”
한 박자 늦게 실비아의 말을 이해한 남자가 위협적으로 한 발을 떼는 순간. 사무실의 문이 열리며 직원이 뛰어나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사장님께서 직접 물건을 전달하며 감사를 드리고 싶다는데…… 무슨 일 있으셨나요?”
직원도 41번 참가자를 알아본 듯 경계 어린 기색으로 물었다.
“아니. 아무 일도 없었네.”
실비아는 덤덤하게 고개를 내젓고는 직원을 따라 복도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다가 멈칫했다. 몸을 돌린 그녀가 장갑 낀 손을 부서질 듯 움켜쥐고 있는 남자를 보며 물었다.
“그런데, 당신.”
“…….”
“대체 왜 이 스태프 자루에 집착하는 건가? 마법석도 없으니 사실상 단순히 나무막대에 불과한데.”
“내가 그걸 왜 말해줘야 하지?”
가면 때문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쩐지 대번에 인상을 구긴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래봤자 칼자루를 쥔 것은 이쪽이다. 실비아는 여유롭게 받아쳤다.
“이유를 말해주면 물건을 넘기는 걸 생각해보도록 하지.”
“……뭐?”
보랏빛 눈이 놀란 듯 크게 뜨였다. 실비아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돌아섰다.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아니, 잠깐. 잠깐 기다려.”
실비아가 미련 없이 발을 떼려 하자 다급한 목소리가 그녀를 붙잡았다. 고개를 돌리자 갈등하듯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입 안으로 무어라 작게 욕설을 중얼거리던 남자가 이윽고 한숨을 푹 내쉬고는 내키지 않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어서 들려온 것은 충격적인 말이었다.
“그건…… 내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 사람의 유품이다. 그러니 내놓…… 아니, 내게 넘겨.”
‘……특별한 의미?’
실비아는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반사적으로 숨을 멈췄다. 남자의 보랏빛 눈과 시선을 맞춘 그녀가 불현듯 한 이름을 떠올렸다.
‘레오……?’
일순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던 실비아는 곧장 고개를 내저어 헛생각을 털어냈다. 클레온의 눈도 남자와 같은 보랏빛이긴 했지만, 느낌이 전혀 달랐다. 클레온이 흠 없이 견고한 자수정 같은 눈을 가졌다면, 눈앞의 남자는 검고 질척한, 썩은 내가 풍기는 눈을 지녔다. 한동안 혼란스러움에 입술만 달싹이던 실비아가 미간을 구겼다.
‘그럼 대체 뭐지? 혹시 나 외에도 저 스태프를 사용한 마법사가 있던 건가?’
하지만 그랬다면 마법석에 새겨진 수식이 알려지지 않았을 리가 없을뿐더러. ‘알리사’였을 때의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자신이 ‘특별한 의미’로 남았을 만한 사람은 클레온 외에 떠오르지 않았다. 알리사는 클레온에게 생명의 은인이었으니까.
‘……아무래도 거짓말 같은데.’
금빛 눈이 가늘어졌다. 상대를 위아래로 한 번 훑어본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잘 들었어.”
“그래, 가격은 얼마를…….”
“그러니 약속했던 대로 물건을 넘길지 말지 생각 정도는 해보도록 하지. 그럼 이만.”
빠르게 말을 맺은 실비아는 남자가 무어라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복도 안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직원이 사장실을 안내해주겠다며 실비아를 쫓아가고, 41번 참가자 또한 그 뒤를 따르려 했으나 경비원들이 그를 가로막았다.
“이 안쪽으로는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비켜.”
“죄송합니다.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남자가 상대를 씹어 먹을 듯 노려보며 이를 갈았으나 경비원들은 완강했다. 결국 쫓겨나듯 건물을 나온 남자가 어두운 골목길에서 가면을 벗어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제기랄, 멍청하게 그딴 수작질에 놀아나고!”
콰직! 사나운 욕설을 내뱉은 그가 흙바닥을 구르는 가면을 거칠게 짓밟았다. 그 충격으로 인해 조각난 뼛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몇 번이고 더 가면을 지르밟던 남자가 씨근거리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후드 아래로 짙은 적갈색 머리카락이 짧게 드러났다가 다시 감춰졌다. 저를 엿 먹이고 유유히 사라지던 희고 가는 뒷모습을 상기하자 저절로 이가 갈렸다.
“……급한 일만 끝나면 찾아서 죽여버려야겠어.”
‘그 사람’의 물건을 남의 손에 넘길 수야 없지. 음산한 읊조림을 남긴 남자가 이내 골목의 어둠 속으로 몸을 감췄다. * * * 결과부터 말하자면, 실비아는 나머지 마법석의 행방과 스태프에 대해 알아내지 못했다.
-하하, 골든벨이라니. 제 대에서 진귀한 광경을 보게 해주셔서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경매장의 주인이라는 사내는 말 그대로 뱀 같은 사람이었다. 뼛속까지 장사꾼이라서 그런지, 그는 실비아가 넌지시 판매자와 만나고 싶다는 말을 전하자 곧장 난색을 표하며 거절했다. 여차하면 골든벨을 물러주겠다고까지 하며 판매자의 신변 보호를 단호히 주장하니 실비아로서도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제 스태프의 자루나마 되찾은 것으로 만족하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물론 그녀가 가지고 온 스태프 자루를 발견한 오스턴이 그에 흥미를 보인 탓에 또다시 귀찮아지긴 했지만. 어쨌거나 한밤의 외출은 그렇게 끝이 나고, 새날이 밝았다.
“마님! 오늘 저녁이 국왕 폐하의 탄신 연회이니 슬슬 준비하셔야죠!”
실비아는 오랜만에 아침부터 욕조에 담기는 경험을 했다. 그녀가 꾸벅꾸벅 조는 사이 공작성의 하녀들과 백작저의 하녀들이 손발을 맞춰 그녀를 씻기고 광내고 꾸몄다. 수도의 날씨에 맞춰 오래간만에 가볍고 하늘하늘한 드레스가 실비아의 몸에 걸쳐졌다. 드레스의 분위기에 맞춰 머리카락도 반으로 묶고 리본으로 장식할 때쯤에야 잠기운이 달아났다. 더없이 완벽한 실비아의 모습에, 공작성과 백작저의 하녀들은 소리 없이 코밑을 문지르며 전우애가 담긴 시선을 나눴다. 실비아는 그들에게 감사 인사를 한 뒤 란델과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미리 저택 앞에 나와 출발 준비를 하고 있던 백작 부부가 그들을 보고 감탄했다.
“잘 어울리네요, 두 사람.”
“감사합니다.”
“어머니께서도 아름다우세요.”
란델과 실비아가 다정히 칭찬을 건네고, 백작은 장성한 딸의 모습에 또다시 눈물을 훔쳤다. 이윽고 네 사람을 태운 마차가 왕성으로 향했다. 플로레트 영지는 수도 바로 옆에 붙어있다시피 했기에 일행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왕성에 다다랐다. 왕성은 이미 참석을 마친 귀족들의 마차로 빼곡했다. 백작 부부와 공작 부부는 나란히 팔짱을 낀 채 연회장에 들어섰다.
“벨포르 공작 부처와 플로레트 백작 부처 드십니다!”
시종의 외침에 제각기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말을 멈추며 길을 비켜주었다. 플로레트 백작 부부와 란델, 실비아는 사람들 사이를 가로질러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있는 왕에게로 직행했다. 왕의 앞에 다다른 네 사람이 공손히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엘바레스의 주인,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옥좌에 앉아 신하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왕이 그들을 발견하고 몸을 일으켰다.
“오! 이게 누군가.”
손수 단 아래로 내려오는 호의를 보인 그가 다음 순간 어딘지 삐뚤어진 미소를 띠며 고개를 기울였다.
“오랜만이로군. 특히 이쪽은 결혼식 이후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아 얼굴을 까먹을 뻔했지 뭔가. 아무리 신혼이라 한들 얼굴은 자주자주 비춰야지.”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란델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