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다비드 데 켈마르 로클렌2021.09.30.
“오랜만이로군. 특히 이쪽은 결혼식 이후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아 얼굴을 까먹을 뻔했지 뭔가. 아무리 신혼이라 한들 얼굴은 자주자주 비춰야지.”
왕이 그렇게 말하며 란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분명 웃는 얼굴이었지만 어딘가 비틀린 미소가 스산해 실비아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뭐지?’
확실히 왕은 란델을 경계한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게 적개심을 드러내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왠지 모르게 눈에 초점이 없는 느낌이었다. 실비아가 묘한 기시감에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왕이 돌연 고개를 돌려 그녀를 응시했다.
“그대도 그동안 잘 지냈나.”
“염려해주신 덕에 평안히 지냈습니다.”
조금 놀라긴 했으나 실비아는 티 내지 않고 차분히 말을 받았다. 그러자 왕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띠었다.
“그것참 다행이로군. 돌아가기 전에 나와 단둘이 차라도 한잔하지. 일전에 왕궁에 왔을 때는 식만 올리고 떠나버려 이야기를 나눌 틈도 없었으니.”
그 말에 란델과 실비아의 얼굴이 동시에 설핏 굳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저 말은 왕이 실비아를 통해 북부를 감시하겠다는 선전포고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왜…….’
란델 역시 왕이 이상하리만치 날 서 있음을 감지하고 눈썹을 구겼다. 결혼 후 지금까지는 별다르게 실비아에게 접촉하지 않았으면서, 이제 와 접근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를 통해 무엇을 하려 하는 것인지. 온통 의문투성이였으나 당장 내놓을 수 있는 답은 정해져 있었다. 실비아는 란델을 힐긋 돌아보고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영광입니다, 폐하.”
그 대화를 끝으로 플로레트 백작 부부와 란델, 실비아는 왕의 앞에서 물러났다. 수도의 인사들과 안부를 주고받는 백작 부부를 위해 벽 쪽으로 가서 선 란델과 실비아가 말을 주고받았다.
“확실히…….”
“이상하죠?”
“예. 원래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제 결혼을 명하셨을 때와는 별개로요.”
란델은 의아하게 중얼거리다가 시선을 들어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연녹색 눈 한가득 걱정이 들이찬 것을 본 실비아는 작게 웃어버렸다. 이 상황에서도 실비아 자신이 북부의 정보를 넘기면 어떡하나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왕이 제게 무슨 해코지를 할까 봐 걱정하는 모습이, 그 믿음이 애틋하고 마음에 겨웠다. 실비아가 란델을 위로하기 위해 무어라 입을 열려던 차였다. 귀족들의 인사를 받아주던 왕이 그들의 접근을 막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모두 이렇듯 건강한 모습으로 나의 탄신일을 축하해주어 기쁘기 그지없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람들이 입을 닫았다. 소란스럽던 연회장에 순식간에 쥐 죽은 듯한 고요가 찾아들었다. 왕은 모두가 제 말에 귀를 기울이는 상황이 기꺼운지 가벼운 미소를 띠고 말을 이었다.
“좋은 날을 맞이해 그대들에게 전할 좋은 소식이 있어.”
란델은 그 말에 왠지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왕이 잠시 말을 멈추고 연회장 문 쪽을 손짓했다. 그러자 시종들이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열었다. 그 문 너머에서 한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마 전 남부 전쟁을 승전으로 이끈 왕세자가 돌아왔다네. 도착한 지는 며칠 되었지만, 기왕이면 기쁜 날 귀환 소식을 알리고 싶다더군.”
왕은 하나뿐인 아들의 효심이 감동적인지 자랑스러운 어조였다. 사람들이 놀라 웅성거렸다. 그사이, 왕세자는 연회장 한가운데를 따라 길게 늘어진 붉은 카펫 위로 걸음을 떼었다. 그가 곁을 지나갈 때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그 덕이라고 해야 할지 옥좌 근처에 서 있던 란델과 실비아는 인파 너머로 왕세자의 모습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저 사람이…….’
실비아는 아버지인 플로레트 백작이 지나가듯 한 이야기로만 왕세자를 접했던지라 이렇듯 직접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왕세자, 다비드 데 켈마르 로클렌. 그는 짙은 적갈색의 머리카락, 짙은 보랏빛의 눈을 지닌 곱상한 미청년이었다. 그는 왕족이라는 말에 걸맞게, 한때 왕국의 백합이라 불렸던 플로레트 백작만큼이나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말끔한 흰 예복을 갖춰 입어서인지 더욱 그러해 보였다. 하지만 아름다운 얼굴과 달리 이유 모를 불쾌감이 일었다.
‘독화.’
머릿속에 그 말이 저절로 떠올랐다. 실비아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채 눈을 가늘게 떴다. 그때 다비드가 란델과 실비아 근처에 다다랐다. 그는 사람들 사이로 머리 하나는 더 우뚝 솟아 있는 란델을 발견하고는 그를 힐긋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친 찰나. 고운 입매에 칼날 같은 비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
그것을 목격한 란델은 굳은 얼굴로 주먹을 말아 쥐며 잠잠히 허리를 굽혔다. 다비드는 아무런 반응을 내비치지 않는 란델의 모습에 입 모양으로 ‘재수 없는 새끼’ 하고 중얼거린 후 다시 온화한 미소를 띤 얼굴로 돌아갔다. 이윽고 옥좌 앞에 다다른 다비드가 공손히 한쪽 무릎을 꿇고 왕에게 예를 갖췄다.
“탄신일을 축하드립니다, 폐하. 명하셨던 대로 승리를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허허, 그렇게 있지 말고 일어나거라. 쉬어도 된다고 했거늘, 돌아오자마자 연회에까지 참석하느라 피곤하겠구나.”
왕은 흡족한 표정으로 손수 다비드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그 손길에 따라 어쩔 수 없다는 듯 몸을 일으킨 다비드가 그림같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럴 리가요. 엘바레스의 경사를 축하할 수 있다니 제 기쁨입니다. 오히려 오랜만에 바다 비린내가 나지 않는 곳에 와 있으니 좋은 것을요.”
다비드의 능청맞은 말에 몇몇 사람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사람들을 따라 슬쩍 웃고는 은근하게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제가 떠난 사이 친우가 결혼식을 올렸다고 하던데…….”
“아, 그래. 마침 저쪽에 있구나. 인사 나누게, 공작.”
왕은 실비아와 함께 서 있던 란델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손짓했다. 두 사람은 경계 어린 기색으로 왕세자의 앞으로 다가가 그에게 인사했다.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전하.”
란델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덤덤했다. 다비드는 제게 고개 숙인 그를 빤히 내려다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축하 고맙네. 이쪽이 자네 부인인가?”
그 물음에 란델의 얼굴이 설핏 굳어졌다. 실비아는 무표정하게 왕세자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전하. 실비아 플로레트 벨포르입니다. 승전과 무사 귀환을 감축드립니다.”
“그래. 벨포르…… 벨포르란 말이지.”
다비드는 희미한 웃음기를 띤 채 실비아의 인사를 곱씹었다. 묘한 침묵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다비드는 실비아의 손을 잡아당겨 그 위에 입을 맞추며 눈을 휘었다.
“반갑네, 벨포르 공작 부인. 그대에게 엘바레스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분명 담백한 입맞춤이었건만, 어쩐지 뱀이 손을 휘감는 느낌이 들어 실비아는 자연스럽게 제 손을 빼냈다. 다비드는 순식간에 비어버린 제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에 심상찮음을 느낀 란델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이만 물러가겠다고 입을 열려 했다. 그때 주먹을 한 번 쥐었다가 편 다비드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명색이 연회에 참석하였으니 춤을 한 곡은 추어야 할 텐데. 오랫동안 수도를 떠나 있어서 그런지 다른 분들과는 영 어색해서. 내 친우의 아내인 그대가 도움을 좀 주었으면 하는데.”
다비드는 짐짓 무구하게 말을 맺었다. 그러나 그것이 핑계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적어도 란델과 실비아는 그러했다. 란델은 예상했던, 그러나 피해가길 바랐던 상황이 고스란히 펼쳐지자 어두운 얼굴을 했다. 그의 굳은 얼굴을 본 실비아는 걱정되는 마음 반, 다비드가 껄끄러운 마음 반에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국왕이 껄껄 웃으며 악단에게 손짓하는 것이 먼저였다.
“그거 좋은 생각이구나. 잔잔한 것보다는 신나는 것으로 준비하도록. 전쟁도 끝났으니 하루빨리 다시 수도에 적응해야지.”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폐하.”
왕과 다비드가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순식간에 실비아와의 춤을 확정 지었다. 분위기도 분위기이거니와, 귀족들 앞에서 왕족을 거절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실비아는 어쩔 수 없이 란델을 돌아보고 작게 속삭였다.
“금방 올게요.”
“……다녀오십시오.”
란델은 등 뒤로 주먹을 세게 그러쥐며 애써 태연히 웃어 보였다. 자신이 여기서 당황하거나 불쾌한 기색을 내비친다면 다비드는 더욱더 실비아에게 관심을 보이며 그녀에게 접근하려 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는 실비아는 란델이 곧장 자신을 보내주는 것에 묘한 섭섭함을 느꼈다. 결국 부부는 꺼내놓지 못한 감정들을 끌어안은 채 등을 돌렸다.
“공작 부인, 이쪽으로.”
실비아는 다비드의 손을 잡고 연회장 가운데로 향했다. 두 사람이 자리를 잡고 서자 다른 귀족들도 춤을 추기 위해 합류했다. 이어서 음악이 흐르기 시작하고, 실비아와 다비드는 음악에 맞추어 발을 움직였다. 다비드와 춤을 추는 것은 란델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란델이 상대에 맞추어 춤을 춘다면, 다비드는 상대가 본인을 따라올 수 있도록 끌어당기는 느낌이랄까.
“왜, 발을 밟지는 않을 실력이라 놀란 건가?”
다비드가 실비아의 표정을 살피다가 픽 웃고는 말했다. 실비아는 상념을 털어내고 태연함을 가장해 응수했다.
“저보다 잘 추시는 분은 몇 보지 못했던지라.”
“그건 그렇군. 결혼 전까지 이렇다 할 무도회에도 참석하지 않은 것치고는 참으로 훌륭한 솜씨야.”
다비드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실비아를 한 바퀴 돌렸다. 그 덕에 그녀는 순간적으로 표정이 굳었던 것을 숨길 수 있었다.
‘역시 불편해.’
허리에 닿아 있는 손도, 맞잡은 손도. 장갑과 옷을 사이에 두고 있음에도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까지 실비아가 춤을 춰본 것이라곤 어렸을 적 잠시 가르침을 받았던 가정교사, 그리고 란델이 전부였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는 누군가와 몸을 맞대는 것이 이처럼 거슬린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란델과 춤을 추고, 손을 잡을 때는 단 한 번도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 순간 다비드가 돌연 실비아의 손을 휙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코앞에서 다비드와 시선을 맞추게 된 그녀가 반사적으로 숨을 멈췄다.
“나와 춤추며 공작 생각을 하는 건가? 이거 좀 섭섭한데.”
음악 소리 사이로 작은 속삭임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실비아가 얼굴을 굳히며 되물었다.
“……무슨 뜻이시죠?”
“말 그대로의 의미지.”
다비드는 보란 듯 야살스럽게 눈꼬리를 휘었다. 그가 제게 추파를 던지고 있다는 걸 확신한 실비아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와락 구길 뻔했다.
‘원래 이런 성격의 사람이었던가?’
실비아가 아는 다비드에 대한 정보는 극히 적었다. 란델과 그가 어렸을 적 잠시 왕궁에서 함께 지낸 사이라는 건 델마에게서 전해 들었으며. 그가 무난한 왕재라는 말은 아버지인 플로레트 백작에게서 전해 들었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는 것은 이미 결혼한 여인에게 추파를 던지는 무뢰한이었다. 어렸을 적 왕궁에서 함께 지냈던 것치고는 란델의 태도가 싸늘하더니, 혹시 이런 성격인 것을 알았던 걸까.
‘그렇다면 지금 내게 이런 식으로 구는 건 혹시…….’
실비아가 사실에 거의 가까운 생각을 추론해냈을 때였다. 문득 다비드의 어깨 너머로 한 사용인이 쟁반을 든 채 귀족들 사이를 헤쳐 나오는 것이 느리게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미처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눈을 한 번 깜빡이자 사용인이 쟁반 위에 놓인 잔을 집어 들었다. 다시 한번 눈을 깜빡이자 그 잔이 쟁반에 부딪혀 산산이 깨어졌다. 쨍그랑! 날카로운 파열음이 연회장 곳곳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우리의 왕이신 베이나스를 위하여!”
“베이나스를 위하여!”
광기 어린 외침을 내뱉은 사용인들이 날카로운 유리 파편을 쥔 채 귀족들을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