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두 가지 기시감2021.10.04.
“우리의 왕이신 베이나스를 위하여!”
“베이나스를 위하여!”
광기 어린 외침을 내뱉은 사용인들이 날카로운 유리 파편을 쥔 채 귀족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꺄아악!”
웃음소리가 흐르던 연회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감미로운 음을 연주하던 악기가 엉망으로 바닥을 구르고 부서지며 내는 소음이 섬뜩함을 더했다.
“실비아!”
란델은 소란이 터지자마자 대경하며 실비아를 향해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그는 인파를 헤치고 가던 중, 플로레트 백작 부부를 노리고 달려드는 사용인을 발견하고는 이를 악물고 부부를 노리는 사용인의 팔을 꺾었다. 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사용인이 비명을 질렀다.
“이런. 어둠 벌레로군.”
한편, 다비드는 등 뒤에서 저를 노리고 달려드는 사용인을 보고는 혀를 차고 손을 뻗었다. 왕궁의 연회인 만큼, 경비를 서고 있는 기사들을 제외하고는 무기 지참이 금지되어 있었기에 당장은 맨손으로 상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여자의 손목을 쥐어 유리 파편을 떨어트리게 한 다비드가 그녀의 팔을 꺾어 멀리 밀쳤다.
“아악!”
우당탕 소리와 함께 여자 사용인이 멀리 나가떨어졌다. 다비드는 손을 가볍게 털고는 난전 중인 주변을 힐긋 일별했다.
‘어둠 벌레라고? 설마 현 마왕의 이름이 베이나스……인 건가?’
실비아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미간을 구겼다. 주위는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무기가 없는 귀족들은 맨손으로나마 어둠 벌레들을 막기 급급했고, 그나마 무기를 지닌 기사들은 수적 열세에 허덕였다. 이 정도면 연회장에 있던 사용인의 삼분지 일은 어둠 벌레였다고 보아야 할 상황이었다.
‘오스턴은 어디 있지?’
실비아는 오스턴을 비롯한 마법사들부터 찾았다. 무기를 지참할 수 없다고 하나 마법까지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마법사에게 구속구를 채우겠다며 설치다가 그들과 척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설령 그것이 왕일지라도 그러했다. 그러니 분명 궁정 마법사들 또한 탄신 연회에 초대를 받았을 법한데. 어째서인지 궁정 마법사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며 오스턴은 연회장 저편에서 정신없이 고함을 내지르며 사람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난전이다 보니 여유롭게 광역 마법 시전을 준비할 틈이 없는 듯이 보였다. 언뜻 그의 곁에서 루베아를 본 것 같기도 했다. 실비아는 자신이 위험한 상황에 놓였다는 데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란델과 부모님이 위험한 상황에 휩쓸린 것을 유감스러워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다비드가 또다시 제게 접근하는 어둠 벌레 하나를 떨쳐낸 후 실비아를 끌어안듯 제 망토 아래로 끌어들였다.
“위험하니 가까이 있어.”
“뭐…….”
실비아는 순식간에 다비드와 몸을 바짝 붙이게 되자 당황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누군가와 시선이 마주친 다비드가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악의 가득한 웃음에 실비아는 저도 모르게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인파 너머에서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듯한 얼굴로 이를 뿌득 갈고 있는 란델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등 뒤에는 그를 앞세운 기사들이 플로레트 백작 부부를 포함한 일부 귀족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란델은 다비드를 잠시 노려보다가 실비아에게로 시선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어둠 벌레가 또다시 그에게 덤벼드는 탓에 그의 시선은 금세 멀어졌다.
‘일부러 그런 거구나.’
그 미소에 실비아는 벼락같이 깨달았다. 조금 전의 다비드는, 분명 고의적으로 자신을 잡아당겨 안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란델에게 내보였다. 오로지 란델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서.
‘감히.’
그것을 깨닫는 순간 실비아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그녀의 주위로 찰나 마력이 일렁이더니 직후 쿵, 하는 무거운 울림과 함께 연회장이 흔들렸다.
“뭐, 뭐야!”
“으아아악!”
사람들은 어둠 벌레, 귀족 할 것 없이 황급히 몸의 균형을 바로잡으려 애썼다. 그 바람에 전투는 잠시 소강상태를 맞이했다. 란델은 실비아와 자신 사이의 길이 찰나 비워진 것을 깨닫고는 곧장 바닥을 박찼다. 거기까지는 실비아가 의도한 대로였다. 란델이 이곳까지 달려올 수 있게 길을 열어주는 것. 하지만 우악스럽게 턱을 쥐는 손길은 그녀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녀가 반사적으로 얼굴을 찡그리며 신음을 흘렸다.
“윽.”
“너, 방금 무슨.”
커다란 손이 턱을 부서트릴 듯 강하게 죄였다.
실비아의 턱을 한 손으로 그러쥔 다비드가 그녀의 얼굴을 바짝 끌어당겨 눈을 맞췄다. 무언가를 찾듯 금색 눈을 샅샅이 살피는 행태가 흡사 광인과도 같았다.
“방금 분명…… 그건…….”
다비드가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손을 더욱 가까이 당겼다. 실비아는 한순간 그 기세에 눌려 반항할 생각도 못 하고 꼼짝없이 보랏빛 눈과 시선을 맞췄다. 검고 진득한, 어쩐지 시취가 풍길 것 같은 보랏빛.
‘저 눈은…….’
숨조차 쉬지 않은 채 굳어 있던 그녀가 익숙함의 정체를 깨닫는 찰나.
“지금 감히 어디에 손을……!”
맹수의 으르렁거림 같은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턱을 죄던 힘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어 퍽, 둔탁한 소리가 나며 다비드의 몸이 어둠 벌레처럼 멀리 나가떨어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실비아. 괜찮으십니까? 턱에 멍이…….”
란델은 가차 없이 다비드를 밀쳐내고는 황급히 실비아를 살폈다. 그는 안절부절못하면서도 행여 제가 힘을 조절하지 못할까 싶어 실비아의 몸에 손대지 못하고 얼굴만 일그러트렸다.
“아.”
실비아는 란델의 눈에 비친 제 얼굴을 보고 나서야 다비드가 쥐었던 턱이 퍼렇게 멍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무의식중에 손을 가져다 대려 했다. 그러나 란델이 기겁해 그 손을 가볍게 잡아챘다.
“손대시면 안 됩니다.”
실비아는 제 손을 데우는 익숙한 온기를 느낀 후에야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뒤늦게 턱을 비롯한 온몸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탓인 듯했다. 그 사실에 어쩐지 웃음이 나와 실비아가 잠잠히 웃으며 맞잡은 손에 손깍지를 꼈다.
“……그러게요. 가만히 있어도 쓰라린데 손까지 댔으면 더 아팠겠어요.”
손가락 사이가 스치는 간지러운 감각에 란델이 흠칫하며 굳어졌다. 일련의 상황이 벌어지는 사이 연회장의 소란은 어느 정도 가라앉아 있었다. 저 멀리서 어둠 벌레들을 치워낸 오스턴이 달려왔다.
“주군, 마님! 괜찮으십니까! 헉, 마님 얼굴에 멍이!”
오스턴이 실비아의 얼굴을 보고 기겁했다. 란델은 그제야 제가 다비드를 내동댕이쳤음을 자각하고 실비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자존심 강한 다비드가 란델에게 밀침당하고도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물론 먼저 실비아를 함부로 대한 것은 다비드였지만, 그는 한번 눈이 돌아가면 그런 것을 일체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란델의 예상과 달리, 다비드는 바닥에 엉성한 자세로 넘어진 채로 가만히 실비아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한 기사가 다비드가 넘어진 것을 발견하고 달려와 물을 때쯤에야 그가 정신을 차렸다.
“……난 괜찮다.”
다비드는 그제야 자신이 품위 없는 자세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불쾌하게 입매를 뒤틀며 몸을 일으켰다. 그가 매무새를 가다듬던 차에 뒤늦게 근위 기사, 궁정 마법사들이 다급히 연회장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폐하!”
“다들 괜찮으십니까! 어둠을 통한 습격이 아닌지라 소식을 듣는 것이 늦었습니다!”
“게다가 밖에서도……!”
“밖에서도, 라니?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
한 궁정 마법사의 말에, 비틀대며 옥좌에 앉던 왕이 매섭게 눈을 번득였다. 그에 말을 꺼냈던 마법사가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입술을 뗐다.
“그것이…… 이곳뿐 아니라 왕궁 곳곳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져 사용인 몇이 사망했습니다. 다행히 다른 분들은 가벼운 부상에 그쳤지만…….”
그 말에 연회장의 공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어둠 벌레들이 이렇듯 수도 한가운데, 그것도 왕궁에서 보란 듯 일을 벌였다는 것. 그것이 마치 어떤 거대한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처럼 느껴졌다. * * * 한편, 연회장에서 어둠 벌레들이 소란을 일으키기 직전.
“도슬러 님, 저와…….”
“하하, 예. 그 이야기는 다음에 하죠. 제가 지금 좀 바빠서.”
오스턴은 썩어가는 얼굴을 애써 감추며 슬금슬금 구석 자리를 향해 발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에게서 등을 돌리자마자 얼굴을 팍 구기며 혀를 찼다.
‘박쥐보다 못한 작자들. 그렇게 박대할 때는 언제고 벨포르가 뒤에 있다는 것만으로 태도가 이만큼이나 바뀌다니. 이래서 수도에 오고 싶지 않았는데.’
오스턴이 벨포르 공작가에 자리를 잡은 이후. 그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되도록 수도에 오고 싶지 않았건만…… 란델의 보좌관이나 다름없는 자신이 불참했다가는 무슨 말이 나돌지 몰랐기에 어쩔 수 없이 따라왔다. 그래도 이런 일이 왕의 탄신연과 건국제 참석뿐이라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진작에 스트레스로 돌연사했을지도. 오스턴은 체면도 내려놓고 들러붙는 귀족들을 피하기 위해 구석진 자리를 찾았다. 그는 저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피하려는 듯 어둑한 곳에 기대어 서 있는 루베아를 발견하고는 손으로 눈가를 덮으며 탄식했다.
“이럴 수가. 그야말로 오스턴 도슬러 수난 시대로군.”
“사람을 보고 그딴 식으로 반응하지 마시죠.”
“사람이긴 하셨습니까?”
“뭐 눈엔 뭐만 보인다더니, 딱 도슬러 님 이야기군요.”
“뭐라고요?”
지난번 실비아에 관한 추문 때문에 협력했던 것도 잠시. 그들의 관계는 다시 개와 고양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정도로 돌아가 있었다. 서로를 그토록 싫어하며 산 기간이 있는데, 고작 협업을 한번 거쳤다고 바로 사이가 나아질 리도 만무하긴 했다. 오스턴은 일부러 과장된 한숨을 내쉬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된 거 마님 옆에나 가 있어야겠군. 사람들을 눈으로 쏘아 죽이는 재능을 가진 분이시니.”
실비아는 무표정할 때가 대부분이었고, 이따금 미소를 지을 때도 무언가 사람이 쉬이 다가갈 수 없는 분위기를 풍겼다. 아마도 대단한 실력의 마법사인지라, 은연중 포식자의 위엄이 새어 나오는 것이겠지! 마친놈 오스턴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 중얼거림을 들은 루베아의 눈썹이 불편하게 꿈틀했다. 그녀는 기둥 너머로 실비아가 어디 있나 기웃거리는 오스턴의 뒤통수를 흘겨보며 미심쩍게 말문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당신. 최근에 공작 부인을 그렇게 졸졸 따라다닌다는 소문이 들리던데…… 설마 공작 부인을.”
“그게 무슨 미친 소립니까!”
그녀의 말이 ‘설마 공작 부인을 좋아하느냐’라는 뜻임을 알아챈 오스턴이 대번에 펄쩍 뛰었다. 루베아는 그 반응을 보는 순간 불편했던 기분이 약간 나아지는 것을 느끼고는 스스로 당황했다.
‘뭐지?’
루베아는 이상한 박자로 뛰는 심장 탓에 가슴께에 손을 얹고 가만히 호흡을 골랐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심장 박동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정상으로 돌아왔다.
‘저딴 인간이 공작 부인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니 열불이 뻗쳐서 그랬던 건가.’
루베아는 의아하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사이 오스턴은 울분을 토해냈다.
“대체 그딴 유언비어를 옮기고 다니는 사람이 누굽니까! 사람 죽일 일 있어요? 저는 아직 주군께 받지 못한 월급도 있단 말입니다!”
‘……그래. 이게 저 사람이지.’
목숨이 달린 상황에서도 돈부터 챙기는 모습을 보니 그나마 있던 미운 정도 후드득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평소처럼 날 선 말을 내뱉으려던 루베아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보랏빛 눈이 크게 뜨였다. 제 무죄를 항변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던 오스턴은 그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속 시원히 말해보십시오! 설마 저번에 백작저 파티에서 입을 놀리던 그…….”
“피해요!”
그리고 직후. 루베아가 오스턴의 옷깃을 홱 잡아채며 그를 끌어당겼다. 그 바람에 두 사람의 몸이 풀썩 겹쳐졌다. 오스턴의 눈이 놀람으로 동그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