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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각자의 마음 (55/118)

55. 각자의 마음2021.10.07.

16558814881672.jpg“피해요!”

루베아가 오스턴의 옷깃을 홱 잡아채며 그를 끌어당겼다. 그 바람에 두 사람의 몸이 풀썩 겹쳐졌다. 오스턴의 눈이 놀람으로 동그래졌다. 하지만 그가 무어라 당황을 표하기도 전.

16558814881679.jpg“우리의 왕이신 베이나스를 위하여!”

16558814881679.jpg“베이나스를 위하여!”

섬뜩한 외침이 들려오며 간발의 차를 두고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그의 목덜미를 스쳐 갔다.

1655881488169.jpg“이게 무슨……!”

오스턴은 황급히 저를 공격하려 했던 사용인을 마법으로 내리찍었다. 쿵! 묵직한 소리와 함께 사용인이 신음을 뱉으며 바닥에 박히듯이 널브러졌다.

16558814881679.jpg“꺄아악!”

순식간에 비명이 경종처럼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이성을 되찾은 오스턴은 곧장 루베아와 떨어져 광기가 서린 눈으로 귀족들에게 달려드는 어둠 벌레들을 막아내기 시작했다. 루베아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1655881488169.jpg‘젠장, 수가 너무 많아!’

오스턴이 이를 바득 갈았다. 한 사람을 도왔다 싶으면 제 등 뒤에서 위협이 날아들었고, 그것을 막아내면 또다시 다른 곳에서 비명이 들렸다. 이번 일은 어둠 벌레들이 벌인 일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컸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음지에서 활동하던 그들치고는 과할 정도로.

1655881488169.jpg‘대체 어떻게? 설마 어디서 지원이라도 받은 건가?’

오스턴은 어지러운 머리로 정신없이 사람들을 구하고, 어둠 벌레들을 멀리 쳐냈다. 그때 저 멀리서 왕세자가 실비아의 턱을 거세게 그러쥐고 입을 맞출 듯 고개를 바짝 들이미는 것이 스치듯 보였다. 기겁한 오스턴이 한순간 그쪽에 정신이 팔려 고함을 치려 했다.

1655881488169.jpg“마……!”

16558814881717.jpg“죽어!”

그와 동시에,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어둠 벌레 하나가 돌연 몸을 일으켜 그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한발 늦게 상황을 파악한 오스턴이 눈을 감으려던 찰나였다. 퍽!

16558814881672.jpg“괜찮아요?”

1655881488169.jpg“……글레버 백작?”

오스턴은 조금 전보다 더한 충격이 머리를 덮쳐오는 듯한 기분으로 멍하니 루베아를 바라보았다. 휘청거리며 무너지는 어둠 벌레의 등 뒤로 작게 숨을 몰아쉬는 루베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드레스 밑단을 죄다 찢어낸 채, 어딘가에 부딪혀 부서진 듯이 보이는 의자 다리를 몽둥이처럼 쥐고 있었다. 금색의 긴 머리카락은 산발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엉켜 있었고, 짧아진 드레스 밑으로 흰 다리가 드러나 있었다. 지금껏 그가 보아왔던 루베아 중 가장 흐트러진 모습. 그것이 어째서인지 그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오스턴은 무의식중에 아래로 내려가는 시선을 붙잡기 위해 루베아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 시선을 오해한 것인지 루베아가 그의 눈을 피하며 새침하게 중얼거렸다.

16558814881672.jpg“……여긴 활도 없고, 있어도 쓰기 애매하니까요. 그러니까 그렇게 미친 사람 보듯 보지 말아요. 당장 손에 잡히는 게 이것뿐이었으니까.”

1655881488169.jpg“그게 아니라…….”

반쯤 넋을 놓고 있던 오스턴이 저도 모르게 말문을 뗐다가 급하게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는 순간적으로 제가 뱉을 뻔한 말을 상기하고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1655881488169.jpg‘지금 저 모습을 보고 멋있다니, 미친놈은 나 아닌가?’

저렇게 엉망인 모습을 보고 걱정하지는 못할망정, 멋있다니. 멋있다니! 이 상황에 맞춰 자신까지 함께 미쳐가는 것 같았다. 설상가상으로 아까 루베아가 자신을 끌어당겼을 때 겹쳐졌던 몸의 감각이 불쑥불쑥 떠올라 더욱 미칠 것 같았다. 루베아는 오스턴이 혼란스러워하는 사이에도 어둠 벌레 둘을 의자 다리로 가격해 기절시켰다. 그녀는 석상처럼 굳어 있는 오스턴을 돌아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16558814881672.jpg“뭘 멍청하게 서 있어요? 지금 여기서 가장 유용한 인력은 당신이라는 걸 잊었어요?”

1655881488169.jpg‘……그래, 저런 여자였지.’

차갑고 오만한 눈. 날 선 말. 제가 알던 익숙한 루베아의 모습을 마주하자 그제야 엉망이던 머릿속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평정을 되찾은 그가 루베아와 등을 맞대듯이 서며 비아냥댔다.

1655881488169.jpg“그 말은 백작이 저보다는 쓸모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로군요. 영광입니다.”

16558814881672.jpg“……물에 빠지면 주둥이만 떠다닐 사람 같으니.”

1655881488169.jpg“그러는 백작께서는 혀만 가라앉으시겠습니다. 보통 날카로워야 말이지.”

두 사람은 상대를 향해 칼날 같은 말을 뱉으면서도 침착하게 어둠 벌레들을 처리해나갔다. 우습게도, 맞닿은 등만은 유달리 따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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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연회가 한창이던 때. 제프리는 연회장 건물 옆의 정원을 서성이고 있었다. 왕궁 연회장 안으로는 무기의 반입이 불가했고, 호위 또한 경비를 서는 근위 기사들이 맡기로 되어 있었다. 하여 제프리는 공작 부부의 가는 길을 호위한 후, 연회가 끝날 때까지 근처에서 대기하는 중이었다. 당연하게도 그의 머릿속에는 한 사람의 얼굴만이 가득했다.

16558814917959.jpg‘필리아…….’

북부를 떠나기 며칠 전, 제프리는 필리아에게서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탄신연 때, 왕궁 정원 분수대 앞에서 만나. 할 말이 있으니까 꼭 나와야 해.」 하지만 현재의 제프리는 편지의 내용과 달리 분수대에서 멀어지려 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발을 옮기는 도중에도 문득문득 걸음이 무거워지고,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필리아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고,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가는 또다시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릴 거라는 생각에 억지로 발을 떼었다. 결국 제프리는 정원의 구석진 곳에서 발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산책로를 따라서 걷는 귀족, 사용인이 몇 보였다. 그들의 뒤로 노을 진 하늘이 그림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 빼고는 모든 것이 평화로워 보였다. 제프리가 자괴감에 쓰게 미소 지을 때였다.

16558814917959.jpg“……?”

그는 문득 연회장 건물 쪽에서 소란이 느껴지는 듯해 미간을 설핏 구겼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소란이 정원을 덮쳤다.

16558814881717.jpg“으아아악!”

16558814881717.jpg“이, 이게 무슨! 사람 살려!”

평화롭던 풍경이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사용인 몇이 어디선가 꺼낸 단도를 들고 귀족들을 해치고 있었다. 이 정원에 있는 것은 제프리와 같은 몇몇 호위, 혹은 연회에서 잠시 빠져나와 휴식을 취하던 귀족들이었다.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무기를 소지할 수 없었으므로 호위들을 제외하면 전원 무기가 없는 맨몸. 그것을 자각하자마자 제프리는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16558814917959.jpg‘필리아.’

입속으로 작게 중얼거린 그가 곧장 분수대를 향해 땅을 박찼다. 하지만 가는 길 내내 그에게 달려드는 어둠 벌레, 혹은 도움을 요청하며 그를 붙잡는 귀족들 때문에 가는 길이 쉽지 않았다. 제프리는 어둠 벌레들을 도륙하다시피 베어내며 이를 악물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귓전을 그득히 메웠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필리아의 안위가 걱정되어 미칠 것만 같았다.

16558814917959.jpg‘그냥 거기 있었더라면.’

필리아에 대한 마음을 접겠느니 하는 어쭙잖은 객기를 부리지 말고, 그냥 편지의 내용대로 분수대 앞에 있었다면. 그랬다면 필리아는 적어도 안전했을 텐데. 못난 자신이 또다시 푸른 눈에 눈물 짓게 한들, 몸만은 무사했을 텐데. 자괴감과 죄책감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제프리는 어느새 피범벅이 된 채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정원을 가로질렀다. 분수대가 있는 곳의 모퉁이를 도는 순간까지의 시간이 억겁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직후.

16558814917988.jpg“이거…… 놔!”

퍼억! 이를 악문 목소리와 무언가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제프리가 모퉁이를 돌자마자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단검을 쥔 사용인과 그 사용인의 머리를 구두 굽으로 내리찍는 필리아의 모습이었다. 필리아에게 위협이 가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자마자 얇디얇아져 있던 이성이 툭 끊어졌다.

16558814917959.jpg“감히.”

표정 없는 얼굴로 작게 중얼거린 제프리가 우악스러운 손길로 사용인을 필리아에게서 떼어냈다. 필리아의 눈이 크게 뜨이고, 어둠 벌레가 핏발이 선 눈으로 그를 돌아보는 것과 동시에. 그의 검이 상대의 팔을 꿰뚫었다.

16558814881717.jpg“크아아악!”

챙그랑, 소리가 나며 단도가 바닥에 떨어졌다. 제프리는 일부러 검을 비틀어 뽑고는 어둠 벌레를 발로 걷어찼다. 검은 눈이 섬뜩하리만치 어두웠다. 제프리는 그대로 검을 움직여 필리아를 붙잡았던 손을 꿰뚫고, 그녀에게 날붙이를 들이댔던 손을 잘라냈다. 단번에 목을 베지 않는 것이 외려 더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16558814881717.jpg“아, 아악! 살려……!”

제프리의 바람대로 어둠 벌레는 끔찍한 고통으로 몸부림치다가 재차 눈을 희번덕거리며 그에게 달려들려 했다. 제프리는 그제야 검을 크게 휘둘러 어둠 벌레의 목을 베어냈다.

16558814917988.jpg“흡.”

필리아가 다리에 힘이 풀려 작게 숨을 삼키며 주저앉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볼에 묻은 피를 닦아내던 제프리가 그 소리에 멈칫했다. 검은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16558814917959.jpg“……아.”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자각한 그가 창백해져 주춤 뒤로 물러났다. 이성을 되찾자마자 코끝으로 흠씬 몰려드는 피비린내가 역하기 짝이 없었다. 제프리는 당장이라도 필리아의 안위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행여 그녀에게 피라도 묻을까 싶어 다가가지는 못하고 제자리에 붙박인 듯 서 있었다. 그 모습이, 불안하게 배회하는 시선이 마치 길을 잃은 아이처럼 보여서. 뜻밖의 광경을 목격하고 잠시 충격에 젖어 있던 필리아가 한숨처럼 웃음을 비쳤다.

16558814917988.jpg“제프리.”

필리아는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제프리에게 다가가려 하자 그가 주춤대며 뒤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필리아는 그가 물러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양팔을 뻗어 곧장 그를 끌어안았다. 얼굴에 피 묻은 옷이 닿았으나 그녀는 개의치 않고 그의 등을 토닥였다.

16558814917988.jpg“많이 놀랐어?”

16558814917959.jpg“…….”

16558814917988.jpg“난 괜찮아.”

조곤조곤한 그 목소리에 제프리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필리아는 다 안다는 듯 그를 더 깊이 끌어안으며 등을 쓰다듬었다. 제프리는 결국 무너지듯 검을 놓으며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다. * * * 어둠 벌레들이 왕궁 전체에서 습격을 벌였다는 소식에 수도가 공포로 물들었다. 적잖은 귀족들이 부상을 입었으며, 소란에 휩쓸린 사용인 몇이 불운하게도 사망했다. 지금까지 어둠 벌레들이 이토록 큰 규모의 일을 벌인 적은 없었기 때문에 무언가 심상찮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여 왕은 이번 습격의 진상을 밝혀낼 때까지 잠시 수도를 봉쇄할 것을 명했다. 조사가 끝날 때까지는 연회에 참석했던 귀족들도 영지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이에 몇몇 귀족이 이토록 불안한 수도에 더는 머물 수 없다고 항의하자, 왕은 한발 물러서 건국제 때까지 약 2주의 기간만 왕궁에 머무르라며 명을 정정했다. 2주면 그리 긴 기간이 아니었고, 습격 사건을 조사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귀족들은 그제야 잠잠해졌다. 실비아와 란델 또한 다른 이들과 함께 왕궁에 신세를 지게 되었다. 습격 사건으로부터 며칠 후. 왕궁의 제 방에서 쉬고 있던 실비아는 시종장이 전한 말에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오스턴이 눈물을 쏟으며 치유 마법을 사용해준 덕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던 턱은 말끔하게 나은 상태였다.

16558814938628.jpg“……폐하께서 부르신다고?”

16558814881717.jpg“예. 티타임을 함께하자 청하셨습니다.”

16558814938628.jpg“나 혼자 말인가? 공작님께서는?”

16558814881717.jpg“폐하께서 부르신 것은 부인뿐이십니다.”

시종장이 말을 마치며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하지만 고개를 숙인 모습에서 빠르게 채비하라는 무언의 재촉이 느껴졌다. 잠시 고민하던 실비아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16558814938628.jpg“그럼 남편에게 외출 사실만 알리고 돌아오겠네. 그 정도는 괜찮겠지?”

16558814881717.jpg“……알겠습니다.”

실비아는 시종장을 지나쳐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란델의 방으로 향했다.

16558814938628.jpg‘무슨 꿍꿍이지.’

그녀는 란델의 방으로 향하는 짧은 시간 동안 눈을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 왕이 자신을 혼자 불러내는 것이 도무지 좋은 의도로는 보이지 않았다.

16558814938628.jpg‘뭔가 캐려고 하는 건가.’

합리적인 의문으로 금빛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애초에 란델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해 휘하의 귀족과 결혼시킨 왕이니, 저를 통해 북부의 사정을 살피려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방문을 두드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란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문을 열어주었다.

16558814957018.jpg“실비아?”

16558814938628.jpg“란…….”

실비아는 곧장 용건을 꺼내려다가 그의 모습을 보고 움찔 입술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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