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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늑대와 뱀 (56/118)

56. 늑대와 뱀2021.10.11.

16558815033428.jpg“무슨 일이십니까?”

란델은 앞섶이 벌어진 목욕 가운 차림이었다. 머리카락 끝이 물기로 살짝 젖어 있는 것을 보아하니 씻다가 노크 소리를 듣고 급히 나온 듯했다. 그 모습이 말간 얼굴과 대조되어 더없이 색정적으로 보인 탓에 잠시 말을 잃었던 실비아가 곧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16558815033436.jpg“……혹시라도 문을 열어달라고 한 게 내가 아니었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16558815033428.jpg“예?”

란델은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때 복도 저편에서 사용인으로 추정되는 이들의 기척이 들려왔다. 란델이 그것을 깨닫고 실비아에게 들어오라고 말하려던 순간. 실비아가 그를 밀치며 재빨리 문을 닫았다. 쿵. 란델은 눈 깜박할 새에 문에 등을 기댄 채 실비아의 품에 안긴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그는 얇은 목욕 가운 너머로 느껴지는 체온에 당황해 입을 열었다.

16558815033428.jpg“실비아, 자세가…….”

문밖의 기척이 멀어지는 것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실비아가 그제야 란델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외려 금방이라도 키스할 것처럼 얼굴이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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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비아가 그 상태로 란델을 빤히 올려다보고만 있자 그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그가 결국 목을 바짝 긴장한 채 비스듬히 눈을 피해버리자 실비아가 시선을 흘긋 내렸다. 그녀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16558815033436.jpg“란델.”

16558815033428.jpg“…….”

16558815033436.jpg“여보.”

16558815033428.jpg“……아무 말 마십시오, 제발.”

16558815033436.jpg“난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16558815033428.jpg“재미있어하는 얼굴이잖습니까.”

16558815033436.jpg“……그게 구분이 돼요?”

실비아는 란델의 말에 놀라 한 손으로 제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자신이 대부분 무표정한 얼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여 그녀가 의도적으로 웃음 짓거나 하지 않는 이상, 사람들은 그녀의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워했다. 하지만 란델은 대번에 실비아의 속내를 정확히 읽어내니 조금 신기했다. 란델은 그 행동에 다비드가 손을 대 시퍼렇게 멍들었던 턱을 떠올리고 잠시 어둑한 얼굴을 했으나 애써 울분을 털어내고 입꼬리를 올렸다.

16558815033428.jpg“물론 부인께서 감정 표현이 크게 드러나거나 하는 분은 아니지만.”

16558815033436.jpg“…….”

16558815033428.jpg“……이렇게 보고 있노라면 모를 수가 없으니까요.”

연녹색 눈 가득 담긴 애정이 애틋하고 마음에 겨웠다. 실비아는 결국 사랑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발꿈치를 들었다. 쪽.

16558815033436.jpg“귀여운 소리 좀 그만해요.”

그녀는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춘 후 새침하게 몸을 돌렸다. 란델은 실비아가 침대에 걸터앉을 때까지도 조금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져 있었다.

16558815033428.jpg‘귀엽…….’

그의 머리가 한발 늦게 상황을 인지했다. 그는 얼굴이 화악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고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머리는 조금 전의 고장을 만회하려는 듯 열심히 굴러갔다. 그렇게 란델은 실비아가 했던 말과 행동을 곱씹어 보다가 무언가를 퍼뜩 깨달을 수 있었다.

16558815033428.jpg‘……저건.’

호감이 없다면 할 수 없는 행동 아닌가?

16558815033436.jpg-지금처럼 마주 본 채로, 닿지는 않고. 서로 간간이 장난도 쳐 가면서 가볍게 웃을 수 있는.

16558815033436.jpg-당신과 나는 딱 그런 관계가 어울려요.

  란델이 제 마음을 일부나마 드러냈을 때, 실비아는 분명 그렇게 말하며 선을 그었다. 하지만 최근의 실비아는 어쩐지 란델이 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껄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와의 입맞춤을 선선히 받아들여 주기도 했으니까. 게다가 저런 말에, 먼저 입을 맞추기까지 했다는 건……. 실비아의 앞에서가 예외일 뿐, 란델은 타고나기를 맹수에 가까웠다. 그는 본능에 가까운 감각으로 지금이 모종의 기회임을 알아차렸다. 그가 눈을 빛내며 실비아에게 조금 더 치대 보기 위해 발을 떼던 차였다.

16558815033436.jpg“아, 그러고 보니 찾아온 이유를 말하지 않았네요. 시종장이 폐하께서 저를 티타임에 초대한다며 찾아왔어요.”

16558815033428.jpg“……예?”

실비아의 말 한마디에 조금 전까지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불순한 생각들이 모조리 날아갔다. * * * 란델은 실비아의 말을 듣고 얼굴을 굳히더니, 결국 앓는 소리를 흘리며 나갈 채비를 했다.

16558815033428.jpg-응접실에 함께 들어가지는 못해도, 바깥에서 기다릴 수는 있겠지요.

  하여 실비아는 란델과 함께 응접실까지 향한 후 헤어졌다. 란델은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소리를 지르라고 몇 번이나 당부했다. 그것이 마치 아이가 부모에게 길을 잃지 말라 하는 것처럼 느껴져 가소로우면서도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16558815063902.jpg“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공작 부인. 무슨 생각을 하길래 자꾸 그렇게 웃는 건가?”

16558815033436.jpg“아.”

실비아는 란델의 생각에 빠져 있다가 귓가를 파고드는 물음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드니 흥미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관찰하고 있는 왕이 눈에 들어왔다. 실비아는 조금 전과 달리 껍데기만 남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

16558815033436.jpg“폐하께서 이리 손수 귀한 차와 다과를 내어주시는데 기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16558815063902.jpg“뭐? 허허.”

입에 발린 말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왕이 기분 좋게 웃고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실비아는 그가 자신을 부른 용건을 꺼내려 함을 눈치채고 그를 따라 찻잔을 놓았다.

16558815063902.jpg“그래, 내가 부인을 이리 부른 이유가 궁금하겠지.”

왕이 깊이 숨을 삼키며 말문을 뗐다.

16558815063902.jpg“사과를 하기 위함이네.”

16558815033436.jpg“……네?”

그가 사과를 입에 담자 실비아는 저도 모르게 놀란 음성을 뱉었다. 왕이 손짓으로 실비아의 얼굴 부근을 가리키고는 말을 이었다.

16558815063902.jpg“도슬러가 치료해 지금은 멍이 사라졌다고는 하나, 왕세자가 자네에게 실수를 저지른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

16558815033436.jpg“…….”

16558815063902.jpg“내가 대신 사과하지. 미안하게 됐군.”

왕이 담백한 어조로 말을 맺었다. 실비아는 묘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매끄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16558815033436.jpg“……실수라.”

달칵, 찻잔을 집어 드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그녀는 차향을 음미하는 것처럼 눈을 비스듬히 내리깐 채 가볍게 말했다.

16558815033436.jpg“원래 사과라는 것은 누군가 대신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지만.”

16558815063902.jpg“…….”

16558815033436.jpg“저도 구태여 왕세자 전하를 다시 만나 뵙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전하께서 제게 행하신 ‘무례’에 대한 사과를 받아들이겠습니다.”

실비아는 말끝에 태연하게 웃음 지었다. 그 웃음이 어찌나 맑던지 짧게나마 비아냥의 의미가 전혀 담겨 있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왕의 표정이 차게 가라앉았다. 한동안 침묵하던 그가 약간의 노기가 스민 음성으로 말했다.

16558815063902.jpg“공작 부인의 성정이 굉장히…… 의외로군.”

16558815033436.jpg“칭찬 감사합니다.”

비꼬는 말이었지만 실비아는 무구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러자 왕은 그녀의 진심을 가늠하려는 듯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다가 말을 더했다.

16558815063902.jpg“왕세자에게는 당분간 자숙하라 말해 두었네. 더해서 그대의 말이 맞아. 왕세자의 자숙이 끝나면 그대에게 직접 사과하라 전하도록 하지.”

16558815033436.jpg‘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데.’

실비아는 순간적으로 표정을 흩트릴 뻔했지만 간신히 평온한 얼굴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왕세자의 사과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렇다고 왕이 손수 왕세자의 머리를 굽혀주겠다는데 그것을 드러내놓고 거부하기에는 여러모로 난감했다. 게다가 ‘실수’라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 먼저 왕을 긁었던 것은 자신이니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결국 실비아는 속으로 혀를 차고 탐탁지 않은 얼굴로 차만 홀짝였다. 그때 왕이 팔걸이에 몸을 기대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16558815063902.jpg“그러고 보니.”

그 웃음에 실비아는 이제 본론이구나, 생각했다. 그녀의 예상대로 왕이 뱀의 속삭임 같은 목소리를 냈다.

16558815063902.jpg“최근 북부에 불미스러운 소문이 돌았었다지.”

  * * * 란델은 실비아가 응접실로 들어간 이후, 응접실 근처의 중앙 정원을 서성이고 있었다. 지나가던 귀족들이 간간이 그를 알아보고 인사를 해 오자 그는 어색한 미소로 받아주었다. 하지만 연녹색 눈은 자꾸만 불안하게 응접실 쪽을 힐긋거렸다.

16558815033428.jpg‘언제 나오는 거지.’

사실 실비아가 응접실로 들어간 지는 얼마 되지 않았으나. 행여 왕이 그녀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그에게는 억겁과도 같이 느껴졌다. 란델이 반쯤 정신을 응접실 쪽에 두고 제게 인사하는 귀족들을 하나둘 돌려보내고 있을 때였다. 정원 주변을 감싸듯 이어져 있는 회랑 저편에서부터 소란이 가까워졌다.

16558815063902.jpg“……전하! 이러시면 안 됩니다!”

16558815063902.jpg“방으로 돌아가십시오! 폐하께서 아시면……!”

숨죽인 외침을 들은 란델이 의아함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직후 시야에 들어온 광경을 보고 굳은 얼굴을 했다.

1655881510481.jpg“벨포르 공작 부인이 이곳까지 왔다는 데 사과도 하지 않고 보낼 수는 없잖아. 폐하께는 내가 따로 찾아뵙고 고할 테니 비켜.”

회랑 저편. 왕세자 다비드가 자신을 막는 사용인들을 힘으로 뿌리치며 응접실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언뜻 들리는 대화를 통해 다비드의 목적이 실비아라는 것을 눈치챈 란델이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란델은 놀라 웅성거리는 귀족들을 뒤에 둔 채 성큼 발을 떼었다. 그가 복도 한가운데를 가로막으며 다비드를 멈춰 세웠다.

16558815033428.jpg“왕명으로 인해 자숙하시는 중이라 들었습니다만.”

기사 하나를 밀치던 다비드가 귀에 익은 목소리에 행동을 멈췄다. 그가 불쾌한 기색으로 란델을 돌아보았다.

1655881510481.jpg“……벨포르 공.”

16558815033428.jpg“폐하께서 노하시기 전에 방으로 돌아가시지요. 지금 돌아가신다면 못 본 척해 드리겠습니다.”

1655881510481.jpg“헛소리.”

란델이 무감하게 말을 내뱉자 다비드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 쳤다. 다비드는 기사들의 팔을 뿌리치고 란델의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그가 음산하게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1655881510481.jpg“그 자숙의 이유가 바로 내가 공작 부인에게 실수로 손을 댔기 때문이지 않은가. 그러니 응당 만나서 사과해야지. 그걸 막겠다는 건가, 공작은?”

16558815033428.jpg“실수라는 핑계로 전하의 잘못을 축소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이번에는 란델 쪽에서 거리를 한 발 좁혔다. 다비드는 코앞에서 저를 노려보는 연녹색 눈에 찰나 티 나지 않게 어깨를 움찔거렸다. 란델은 너무 낮아 맹수의 으르렁거림처럼 들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16558815033428.jpg“저번에는 상황이 급박해 미처 제대로 잘못을 물을 겨를도 없었다지만.”

1655881510481.jpg“…….”

16558815033428.jpg“한 번만 더 내 아내에게 그딴 식으로 손을 댔다가는 손목을 뽑아주지. 경고다, 다비드 데 켈마르 로클렌.”

1655881510481.jpg“하.”

주변에는 들리지 않을 만큼 낮은, 하지만 다비드의 귓가에는 더할 나위 없이 선명하게 들리는 속삭임. 그에 다비드의 이마에 힘줄이 빠직 솟아났다. 짙은 보라색 눈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1655881510481.jpg“이 새끼가 어딜 감히…….”

16558815033428.jpg“사람 같은 소리를 지껄여야 사람으로 대하지 않겠나. 예의를 갖춰.”

란델과 다비드는 금방이라도 상대의 목을 조를 것처럼 살벌하게 서로를 노려보았다.

16558815063902.jpg“이게 무슨…….”

16558815063902.jpg“왕세자 전하께서 왜 저기에?”

16558815063902.jpg“그보다 두 분, 어렸을 적부터 친구라 하지 않으셨던가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을 보고 있던 귀족들이 놀라 숙덕거렸다. 그들의 말을 들은 다비드가 입꼬리를 뒤틀며 손을 들어 란델의 볼을 툭툭 쳤다.

1655881510481.jpg“그래, 나름 생사를 오가다가 살아 돌아온 소꿉친구인데. 그딴 식으로 굴면 섭섭하지, 공작.”

이번에는 란델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는 기분 나쁘게 제 볼을 치는 다비드의 손을 거칠게 쳐내며 이를 갈았다.

16558815033428.jpg“그딴 관계를 친구라고 부르는 미치광이가 어디 있나.”

그들 사이에는 차마 상극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골이 존재했다. 어지간하면 사람을 싫어하지 않는 란델조차 다비드를 경멸하다 못해 증오했다. 그는 대외적인 모습과 달리, 다비드가 얼마나 짙은 악의와 잔혹함으로 뭉쳐 있는 존재인지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처음 만났던 날.

1655881510481.jpg-네가 공작이냐?

1655881510481.jpg-고작 너 따위를 지키자고 목숨을 내버렸을 이들이 안타깝군. 완전히 개죽음이잖나?

  다비드는 단지 란델의 행동이 거슬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살아 있는 생명의 숨을 끊어놓았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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