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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새싹이 나무가 되기까지 (57/118)

57. 새싹이 나무가 되기까지2021.10.14.

란델이 8살이 되던 해. 그의 부모인 벨포르 공작 부부는 비틀림을 넘어온 마족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공작 부부가 전사하기 전날 밤.

16558815215329.jpg“반드시 성안에 있어야 한다. 알았지?”

16558815215329.jpg“하지만, 어머니……!”

란델은 활을 들고 전장으로 나서려는 공작 부인의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그러자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듯이 굴던 공작 부인이 멈칫했다. 그녀는 창밖으로 지금쯤 제 남편이 고전하고 있을 전장 쪽을 힐긋 바라보고는 몸을 낮췄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급한 기색이던 그녀는 아들을 시야에 담자마자 봄과도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치 주름진 얼굴에 꽃이 피어난 듯했다. 그녀는 불안으로 얼룩진 눈을 한 채 울고 있는 아들의 볼을 다정하게 닦아주었다.

16558815215329.jpg“못 갈 곳에 가는 것도 아닌데 왜 이리 울어.”

16558815215329.jpg“위험하잖아요……. 아버지, 께서도…….”

16558815215329.jpg“네 아버지가 위험하니까 도와주러 가야지.”

16558815215329.jpg“그럼 저도 갈래요!”

16558815215329.jpg“란델.”

봄볕 같던 얼굴이 순식간에 엄해졌다. 공작 부인이 란델의 눈을 직시하며 물었다.

16558815215329.jpg“나와 네 아버지가 평소에 뭐라고 했었지?”

16558815215329.jpg“……저희가 곧 북부 그 자체라고요.”

눈물 머금은 목소리였으나 대답만큼은 또렷했다. 그러자 공작 부인의 얼굴이 다시 부드러워졌다.

16558815215329.jpg“그래. 우리가 곧 북부의 긍지이자 북부 그 자체다. 그러니 너는 이곳에 남아 성을 지키렴.”

16558815215329.jpg“하지만…….”

16558815215329.jpg“물론 어디까지나 임시로.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만이야. 우리가 언제 네게 작위를 물려주겠다고 했니?”

공작 부인이 장난스럽게 란델의 코를 꼬집었다가 놓아주었다. 그가 울상을 지었다.

16558815215329.jpg“어머니의 손힘이 아버지보다 아픈데…….”

양손으로 코를 감싼 채 코에서 불이 나고 있다고 중얼거리는 란델을 바라보던 공작 부인의 눈에 찰나 슬픔이 스쳐 갔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공작 부인 또한 이 전투를 끝내려면 자신과 남편의 목숨을 맞바꾸어야 한다는 사실을 직감한 듯했다. 잠시 란델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공작 부인이 그를 끌어안았다. 란델은 어리둥절하게 눈을 깜박였다.

16558815215329.jpg“어머니?”

공작 부인은 란델을 끌어안은 채로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16558815215329.jpg“란델.”

16558815215329.jpg“…….”

16558815215329.jpg“만약에, 정말 만약에. 우리가 네 곁으로 돌아오지 못한다고 해도…….”

16558815215329.jpg“…….”

16558815215329.jpg“그건 너도,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거라.”

16558815215329.jpg“…….”

16558815215329.jpg“다녀오마.”

그 말을 끝으로 힘 있게 란델을 한 번 끌어안은 공작 부인이 그대로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것이 란델이 본 공작 부인의 살아생전 마지막 모습이었다. 만약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린 아들을 등 뒤에 둔 채 전장으로 나아가던 어머니의 눈물을 닦아드렸을 텐데. 란델은 요즘도 이따금 비 오는 밤이 되면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 * * 이후 란델은 그를 깎아내리는 이들에게 자신을 증명해 보인 후 왕명에 따라 왕궁에 머무르게 되었다. 당시 그를 왕자궁까지 안내하던 귀족은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결국 왕자궁 부근에서 걸음을 멈추고 란델에게 말을 붙였다.

16558815215329.jpg“저…… 벨포르 공작님.”

16558815215329.jpg“왜 그러십니까?”

16558815215329.jpg“이런 말씀을 드리기가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미리 알고 계시는 것이 좋을 듯하여 말씀드립니다. 왕자 전하께서는 조금…… 불안정한 분이십니다.”

16558815215329.jpg“불안정……이요?”

란델은 그의 말을 이해하기가 힘들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을 꺼낸 귀족도 이것을 어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16558815215329.jpg“예. 아직 어려서 그러신 것 같긴 하지만…… 당신의 기분이 나쁘시면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집어 던지십니다. 그러니 가급적이면 그분 앞에서는…….”

귀족은 최대한 돌려서 왕세자의 상태를 설명했다. 그 말에 란델은 미미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다른 사람의 앞이라 어지간하면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어렸을 적부터 단순히 본인의 기분을 이유로 타인에게 손을 올리는 것은 쓰레기나 하는 짓이라 배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란델은 본인이 처한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아직 작디작은, 심지어 신하들에게조차 무시 받는 북부의 어린 군주. 이런 상황에서 차기 왕이 될 게 거의 확실한 왕자와 척이라도 졌다가는 좋을 것이 없었다. 란델은 그렇게 판단하고는 왕자 앞에서 최대한 말수와 행동을 줄이기로 마음먹고 마저 발걸음을 옮겼다.

16558815215329.jpg“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귀족은 란델을 왕자궁의 응접실에 남겨두고 왕자를 데리러 갔다.

16558815215329.jpg‘왕궁은 되게 넓구나.’

혼자 남겨진 란델은 신기한 기분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문득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정원의 나무 위, 둥지에서 작은 아기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16558815215329.jpg“어……!”

란델은 당황해 벌떡 일어섰다. 응접실이 1층에 있었기에 창문을 통해 정원으로 나간 란델이 나무 밑으로 달려갔다. 삐이익. 란델이 보았던 대로, 작은 아기새 한 마리가 나무 아래에 떨어져 버둥대고 있었다. 아기새는 란델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위협을 느낀 것인지 더욱 거세게 울며 발버둥 쳤다.

16558815215329.jpg“쉬이. 잠시만, 다시 올려줄게.”

란델은 행여 새가 다칠까 염려되어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새를 감싼 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정원사가 사용하던 것처럼 보이는 사다리가 있었다. 란델은 그것을 가져와 나무에 기대두고 조심스레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했다. 한 발, 두 발. 양손으로 새를 감싸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발을 움직일 때마다 사다리가 덜걱거렸다. 란델이 막 세 번째로 발을 움직이던 순간이었다.

16558815215329.jpg“……마!”

저 멀리서 쨍그랑, 하고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고함이 같은 것이 들렸다. 그 소리에 란델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자 왕자궁에서 씩씩대며 뛰쳐나오는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16558815215329.jpg“제기랄. 대체 언제쯤 돌아오는 거야……! 빌어먹을!”

어린아이답지 않게 험악한 얼굴로 욕설을 지껄이며 정원의 초목을 걷어차던 소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란델을 발견했다. 그는 사다리에 올라 있는 란델을 보고는 먹잇감을 발견한 것처럼 미간을 한껏 찡그린 채 그에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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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8815215329.jpg“넌 뭔데 거기서 그러고 있는 거지?”

16558815215329.jpg“아, 나는…….”

란델이 왕자에 대해 전해 들은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던 데다가. 그는 당시 새를 둥지로 올려주는 데 정신이 팔려 있어 눈앞의 소년과 귀족이 해주었던 경고를 곧장 연결하지 못했다. 란델이 무어라 대답하려던 사이, 왕자, 다비드는 그의 손에 들린 새와 나뭇가지 위의 둥지를 확인하고는 삐뚜름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16558815215329.jpg“지금 그 새를 다시 둥지로 올려주려는 거야?”

16558815215329.jpg“응.”

16558815215329.jpg“그딴 짓을 왜 해?”

16558815215329.jpg“왜냐니, 당연히…… 가족이랑 떨어져 있으면 슬프잖아.”

란델은 그렇게 대답하다가 문득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에 어두운 얼굴을 했다. 그것을 본 다비드가 기가 찬다는 듯 웃었다.

16558815215329.jpg“설마 네가 벨포르 공작이냐?”

16558815215329.jpg“내가 누군지 알아?”

란델은 첫 만남부터 이렇게까지 무례하게 구는 사람을 만난 것이 처음이었다. 하물며 그가 공작의 신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경우 없이 굴다니. 란델은 조금 불쾌한 기분으로 되물었다. 그러나 다비드는 그를 무시한 채 제 할 말만 지껄였다.

16558815215329.jpg“고작 너 따위를 지키자고 목숨을 내버렸을 이들이 안타깝군. 완전히 개죽음이잖나?”

16558815215329.jpg“……뭐?”

순간, 부모님을 비롯해 마족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이들의 얼굴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며 사고가 그대로 정지했다. 란델이 너무도 큰 모욕에 얼음처럼 굳어진 사이, 다비드가 사납게 입매를 뒤틀었다.

16558815215329.jpg“난 너 같은 것들이 제일 싫어.”

퍼억! 짓씹는 듯한 중얼거림과 동시에, 다비드가 란델이 올라 있는 사다리를 그대로 걷어찼다. 사다리와 함께 란델의 몸이 크게 휘청이더니 쿵, 소리를 내며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16558815215329.jpg“으윽!”

삐이익! 란델의 신음을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덮었다. 그는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일순 굳어졌다가, 다음 순간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삐이익, 삐익……. 하지만 란델의 몸에 깔린 새는 기괴한 자세로 널브러진 채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숨을 할딱이고 있었다. 란델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울음소리를 들으며 굳어져 있자, 그 모습을 본 다비드가 진심으로 흡족하다는 듯 비웃음을 띠며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16558815215329.jpg“이런, 불쌍해서 어쩌나. 저 짐승 새끼도 너 때문에 죽어버렸네?”

란델의 이성은 거기까지였다. 그는 직후 이성을 잃은 채 다비드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퍼억! 커다란 소리와 함께 다비드가 뒤로 구를 듯이 바닥으로 널브러졌다. 하지만 그 또한 곧장 벌떡 일어나 란델에게 달려들었다. 뒤늦게 왕자를 쫓아 뛰어나온 사람들이 그들을 말렸을 때는 이미 둘 다 엉망이 된 후였다. 란델은 다비드가 일방적으로 사다리를 걷어차 자신을 다치게 하고 새를 죽였다 주장했다. 하지만 다비드는 서로 오해로 인해 다툼이 벌어졌던 것뿐이며, 자신은 발을 헛디뎌 사다리를 넘어트렸을 뿐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목격자가 없어 진실을 가려내기 쉽지 않았을뿐더러. 사람들은 다비드가 아무리 사나워도 어린아이가 그렇게까지 잔인한 짓을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결국 왕은 서로 잘못한 부분이 있을 거라며 두 사람을 억지로 화해시켰다. 란델은 왕의 앞에서 이를 악물고 악수하는 와중에도 다비드가 입 모양으로 ‘멍청이’라 시비를 걸어 하마터면 또다시 그에게 달려들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이후로도 두 사람의 사이는 늘 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위태위태했다. 다비드는 란델을 보면 늘 기분이 더럽다며 사람들의 눈을 피해 교묘하게 패악을 저질렀고. 란델은 더 이상 엮였다가는 자신만 위험해지겠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그를 무시했다. 하지만 다비드의 괴롭힘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란델은 어린 나이임에도 문무를 가리지 않고 다방면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러나 다비드는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패악만 부리기 바빠 수업조차 제대로 듣지 않았으니 그에 비해 실력이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두 사람의 첫 검술 대련이 있던 날이었다. 란델은 다비드와 길게 마주해서 좋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빠르고 압도적인 실력으로 그의 검을 날려버렸다. 그에 다비드는 충격받은 얼굴로 제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16558815326898.jpg“너 이 새끼! 감히 또 나를! 이 나를……!”

다비드는 무언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란델에게 달려들려 했다. 란델은 어느새 익숙해진 태도로 그의 공격을 대비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다비드가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서며 한 손으로 더듬더듬 제 가슴께를 더듬었다. 무언가를 가늠해보던 그가 갑자기 실성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16558815326898.jpg“하하, 하하하! 그럼 그렇지! 당연히 이래야지! 나는 ……니까!”

다비드가 한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린 채 마구 웃어대는 탓에 그가 하는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는 못했다. 란델이 다비드가 끝내 미쳐버린 걸까 생각하게 되었을 무렵. 돌연 웃음을 뚝 그친 다비드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차분한 태도로 검술 스승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한순간에 어린아이에서 수백 살 먹은 노인으로 보일 만큼 극명한 태도 변화였다.

16558815326898.jpg“죄송합니다, 스승님. 제가 철이 없어 그간 해이하게 굴었던 것을 용서해주십시오.”

말을 마친 다비드가 고개를 들어 올리고는 씨익 웃었다. 그 웃음이 어찌나 기괴했던지 란델은 아직도 그날의 일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 다비드는 란델을 볼 때면 늘 그랬듯 시비를 걸긴 했지만 어렸을 때처럼 짐승을 해한다거나, 정도 이상의 패악을 부리는 일은 없어졌다. 왕은 왕자가 철이 들었다 흡족해하며 그를 왕세자로 임명했고, 귀족들 또한 적당히 예의 있고 능청스러운 그를 좋아했다. 하지만 란델만은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아직도 고통스럽게 울부짖던 새의 비명을 기억했다. 하여 그는 왕명으로 약속된 기간이 끝나자마자 더러운 것을 피하듯 북부로 돌아갔다. 그것이 벌써 몇 년 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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