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스며든 독2021.10.18.
어렸을 적의 일을 상기하니 더더욱 눈앞의 사람이 증오스러웠다. 란델은 다비드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을 짓씹어 뱉었다.
“그딴 관계를 친구라고 부르는 미치광이가 어디 있나.”
미치광이라는 단어에 다비드의 눈썹이 불쾌하게 꿈틀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흥이 식었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란델을 스쳐 지나갔다.
“하긴, 이런 식으로 시간 낭비할 이유는 없지. 비켜.”
정확히는 스쳐 지나가려 했다. 란델은 다비드가 다시금 응접실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하자 본능적으로 그의 팔을 강하게 붙들었다.
“어딜 가십니까.”
생각보다 말과 행동이 튀어 나가는 것이 먼저였다. 란델은 저도 모르게 굳은 목소리를 내고는 한발 늦게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다비드가 실비아에게 접근하는 걸 껄끄러워한다는 사실을 고스란히 드러낸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다비드는 란델의 약점이라면 무엇이든 손에 넣고 부서트리려 하는 이였고, 현재 실비아는 명실상부하게 란델의 가장 큰 약점이었다. 란델은 다비드가 자신의 약점이 실비아라는 것을 확인하면 광소를 터트리며 기뻐할 줄 알았다.
“…….”
하지만 다비드는 의외로 묘한 표정으로 란델을 바라보기만 했다. 잠시 침묵하던 그는 이내 무언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자그마한 미소를 띠더니 란델에게 다가왔다. 란델에게 바짝 다가선 다비드가 그의 귓가에 음흉한 속삭임을 흘려 넣었다.
“그러고 보니, 공작이 결혼한 지 이제 반년이 다 되어가던가.”
“…….”
“그쯤 되면 슬슬 몸이 식을 법도 하지. 부인이 자네에게 비밀을 만들지는 않나?”
비밀. 그 단어에 란델은 찰나 움찔했다. 하지만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티 내지 않을 수 있었다. 란델은 딱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대꾸했다.
“일국의 왕세자씩이나 되는 분께서 말을 그렇게 저급하게밖에 못 하시다니, 심히 유감스럽습니다.”
말에 고저가 없었기에 더 모욕적이었다. 결국 다비드가 이를 갈며 란델의 옷깃을 잡아챘다.
“이 새끼가…….”
다비드는 당장이라도 란델의 얼굴에 주먹질을 할 것처럼 형형한 눈으로 이를 갈았다. 란델은 미동도 없이 그를 차게 내려다보았다. 결국 벌레를 보는 듯한 그 시선을 견디지 못한 다비드가 손을 드는 순간.
“이게 무슨 소란이냐!”
우레와 같은 목소리가 들려오며 왕과 실비아, 사용인들이 응접실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실비아는 란델이 다비드와 함께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놀란 얼굴을 했다. 그녀를 본 란델이 급하게 표정을 풀며 고개를 숙였다.
“폐하를 뵙습니다.”
“……폐하를 뵙습니다.”
다비드는 한발 늦게 란델의 옷깃에서 손을 떼며 마지못해 왕을 향해 예를 갖추었다. 왕은 쩔쩔매며 허리를 굽히는 시종들, 다비드를 막아서는 란델 등으로 상황을 파악한 것인지 아들을 향해 호통쳤다.
“분명 자숙하라 일렀을 텐데 네가 왜 바깥에 나와 있느냐! 공작과는 왜 또 그러고 있는 것이고!”
“……벨포르 공작 부인이 폐하를 알현하고 있다는 소식에, 제 잘못을 직접 사과하고자 부득이하게도 방을 나섰습니다. 공작과는 오래간만에 만났던지라 장난이 격해진 것뿐이니 심려치 마십시오.”
“그게……!”
다비드는 조금 전과 달리 차분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빠르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왕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것인지 다시 한번 입을 열려 했다. 그러나 고개를 숙이고 있던 다비드가 힐긋 시선을 들어 왕과 눈을 맞추는 순간. 왕이 멈칫하더니 서서히 노기를 거뒀다.
“……그래. 알겠다.”
란델과 실비아는 아무리 아들이라고 할지라도 자존심 강한 왕이 제 명을 어겼다는데 저 정도 분노밖에 내비치지 않는다는 것이 의아해 순간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다비드는 자못 겸허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물론 폐하의 명을 어긴 벌은 따로 받겠습니다.”
“무슨 벌까지야. 다만 사과는 자숙이 끝난 후에 하도록 해라.”
“예, 폐하.”
다비드가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그래도 아들은 다르다는 건가?’
실비아는 무언가 미심쩍은 마음에 왕의 뒤편에서 티 나지 않게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왕이 뒤를 돌아 실비아에게 말했다.
“오늘 즐거웠네, 공작 부인. 다음에 또 부르도록 하지.”
“영광입니다.”
실비아는 의심을 감추기 위해 온기 없는 미소를 띤 채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앞으로 불쑥 흰 장갑을 낀 손 하나가 다가왔다.
“그럼 다음에 찾아뵙지요, 공작 부인.”
“…….”
다비드가 손등에 입을 맞추겠다는 듯 무언으로 실비아에게 손을 요구했다. 실비아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란델의 얼굴이 굳어지고, 다비드의 얼굴에 웃음이 서렸다. 하지만 실비아는 다비드에게 손등을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의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든 후 곧장 손을 거두었다.
“살펴 가십시오, 전하.”
실비아는 다음에 만나자는 말에 대한 대답을 교묘히 피하고는 그를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다비드를 지나칠 때 그의 입가에 삐뚜름한 미소가 걸린 듯도 했다.
“가요, 여보.”
“……예, 부인.”
실비아는 란델의 팔짱을 끼고 다정하게 말했다. 란델은 그제야 굳었던 표정을 풀며 그녀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왕세자에게서 충분히 멀어졌을 때쯤 실비아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그 물음에 란델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와 팔짱을 끼고 있던 실비아도 자연스레 발을 멈춰 세웠다.
“…….”
란델은 잠시간 말없이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전에 없이 복잡한 기색이었다.
-부인이 자네에게 비밀을 만들지는 않나?
비밀. 떨쳐내려 해도 다비드의 물음이 독처럼 머릿속을 끊임없이 맴돌았다. 차라리 헛소리라 치부하고 무시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따금 자신이 실비아로부터 느꼈던 위화감을 다비드가 정확히 꿰뚫어 본 듯해 속이 울렁거렸다. 한편, 실비아는 란델이 말없이 저를 바라보고만 있자 의아한지 눈을 깜박였다.
“란델?”
그녀가 다시 한번 그를 부르자 그제야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란델이 푸스스 웃음을 흘리고는 어서 방으로 돌아가자며 실비아를 이끌었다. 실비아는 그 웃음이 어쩐지 다 타고 남은 폐허에 흩날리는 재와 같이 느껴져서 한동안 란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 * * 다비드는 이후 자숙 기간이 끝나자마자 하루에도 몇 번씩 사용인을 보내 실비아에게 만남을 청했다. 하지만 실비아는 그때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사과 한번 받겠다고 그 인간 얼굴을 또 마주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사과를 받지 않는 게 낫지.’
실비아가 왕을 알현했던 날. 란델은 별일이 없었다고 했지만, 그들은 분명 다투고 있었다. 다비드가 란델에게 손을 올리려던 것도 분명히 목격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가 곱게 보이지 않았다. 다비드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레 왕에 관한 생각도 따라왔다. 실비아는 의자 팔걸이에 턱을 괸 채 검지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고 보니.
-최근 북부에 불미스러운 소문이 돌았었다지.
당시, 그 말을 뱉는 왕의 얼굴에는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실비아가 란델에게 무언가 불리한 말을 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실비아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혹 저희 부부에 관한 추문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실비아는 일부러 말끝을 흐리며 찻잔을 집어 들었다. 더없이 우아한 자태로 그녀가 빙긋이 웃었다.
-염려는 감사하지만, 걱정하실 일은 없었습니다.
-……진심인가, 부인?
-저희 부부 사이가 워낙에 좋다 보니 외려 그런 이상한 추문이 도는 듯하더군요. 저와 남편은 아무런 문제도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폐하께는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마지막 말은 약간이나마 진심이었다. 왕이 란델과의 혼인을 주선해준 덕분에 실비아는 죽을 희망이나마 가질 수 있게 되었으므로.
-…….
왕은 잠시간 미묘한 얼굴로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찻잔을 막 입술로 가져가려던 때 그가 불쑥 물었다.
-공작을 사랑하나?
그 말에 실비아는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몇 초간 굳어 있던 그녀가 이내 자연스럽게 보이려 노력하며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그렇게 시간을 끌어 보았음에도 여전히 어떻게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입술만 달싹였다.
-전…….
결혼 직후 늘 그래왔던 것처럼, 란델을 사랑한다고 답하며 태연히 웃어 보이면 되는 일이었다. 어렵지 않았다. 분명 어렵지 않은 일이었는데. 지금은 란델을 ‘좋아한다’라는 사실을 깨닫고 난 이후라서일까. 어쩐지 입에서 쉽사리 거짓이 나오지 않았다.
-저는…….
실비아가 대답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대자 왕의 눈에 의심이 스미려 했다. 하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바로 그 순간 노크 소리가 들리며 당황한 얼굴의 사용인이 응접실로 들어왔다.
-말씀 나누시는 중에 죄송합니다! 지금 왕세자 전하께서 바깥에…….
그 말을 들은 왕이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분명 의심을 샀으리라. 실비아는 어느새 란델에 대한 제 마음이 줄어들기는커녕 손쓸 도리 없이 깊어졌음을 깨달은 기분이라 마음이 무거웠다. 그때 수도에서 실비아를 전담하는 하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마님, 무슨 일 있으세요? 노크를 여러 번 했는데도 대답이 없으셔서…….”
“아, 그랬구나. 무슨 일이니?”
“세이크린 후작 영애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우선 응접실로 모셔두었어요.”
“필리아가?”
실비아는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로 데려와 주겠니?”
“예, 마님.”
하녀가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로부터 채 1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 필리아가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실비아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공작 부인! 저 왔어요!”
대형견이 제힘을 모르고 주인이 좋다며 달려드는 것만 같았다. 실비아는 순간적으로 휘청이는 몸에 급히 힘을 주며 필리아를 마주 안았다. 조금 전까지 심각하게 생각에 잠겨 있던 것이 무색하게도 저절로 옅은 웃음이 지어졌다.
“그렇게 뛰다가 넘어지면 어떻게 하려고요.”
“그럼 무릎 좀 깨지고 마는 거죠, 뭐. 어차피 한두 번 깨진 무릎도 아닌데.”
필리아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헤헤 웃었다. 실비아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픽 미소를 흘리고는 필리아를 놓아주었다.
“그보다 어쩐 일이에요?”
“저번에 말씀드렸었잖아요, 앞으로는 별 용건이 없어도 자주 찾아오겠다고! 심심해서 왔어요.”
“흠.”
실비아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필리아를 바라보았다.
“정말 그 이유뿐이에요? 아닌 것 같은데?”
“……앗, 들켰다.”
“감추려는 노력 정도는 하고 말해야죠. 지금도 어떻게 시더스 경을 불러달라고 해야 하나 궁리하고 있으면서.”
실비아가 손가락으로 필리아의 코끝을 톡 건드렸다. 그러자 그녀가 멋쩍게 볼을 긁적였다.
“죄송해요. 실은 지난번 탄신연 이후로 제프리가 다시 저를 피하거든요. 그 괘씸한 자식…….”
필리아가 분하다는 듯 이를 갈았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자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분명 자신이 걱정돼서 그렇게 넋 빠진 얼굴로 달려왔으면서! 심지어 안겨서 반쯤 울었으면서! 상황이 정리되고 나자 제프리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듯이 죄책감 서린 얼굴로 또다시 필리아를 피해 다녔다. 필리아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필리아가 시무룩한 얼굴로 실비아에게 찰싹 달라붙어 팔짱을 꼈다.
“제가 피크닉 준비도 다 해왔어요. 피크닉 핑계로 제프리 좀 불러주시면 안 될까요? 며칠 동안 얼굴을 못 봤더니 기운이 없고 입맛도 없고…….”
“으음.”
피크닉이라는 말에 실비아가 난처한 신음을 흘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지난 며칠간 왕세자와의 만남을 거절하느라 칩거하다시피 했기 때문이었다. 괜히 방을 벗어났다가 마주치기라도 하면 귀찮을 것이 뻔했다. 하지만 저렇듯 간절한 눈으로 저를 보는 필리아를 외면하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결국 한숨을 삼킨 실비아가 신신당부했다.
“대신 사람들 눈에 띄는 곳은 안 돼요. 알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