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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불청객 (59/118)

59. 불청객2021.10.21.

실비아는 사람을 시켜 제프리를 불러달라 말한 후 방에서 필리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그를 기다렸다. 하지만 뜻밖에도 루베아가 제프리보다 한발 앞서 실비아를 찾아왔다.

16558815623829.jpg“공작 부인. 글레버 백작님께서 만남을 청하십니다.”

16558815623836.jpg“루베아가?”

16558815623839.jpg“으.”

실비아는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고, 필리아는 루베아의 이름을 듣자마자 질색하더니 슬그머니 실비아의 허리를 껴안았다. 실비아는 영문을 몰라 눈을 깜박이면서도 우선 한 손으로 필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16558815623836.jpg“들여보내렴.”

16558815623829.jpg“네, 마님.”

하녀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문을 열었다.

16558815623856.jpg“루베아 글레버가 벨포르 공작 부인을 뵙…….”

우아한 자태로 모습을 드러낸 루베아가 인사를 하려다가 멈칫했다. 그녀는 실비아의 허리에 매미처럼 달라붙어 있는 필리아를 발견하고 미간을 팩 구겼다.

16558815623856.jpg“……저건 왜 여기서 저러고 있는 겁니까?”

16558815623839.jpg“사람보고 이거저거 부르는 인성은 여전하네.”

16558815623856.jpg“사람다운 행동을 해야 사람으로 대하지 않겠어? 부인께서 불편해하시는 듯한데 떨어지는 게 어때?”

16558815623839.jpg“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루베아와 필리아는 저마다 눈을 세모꼴로 뜬 채 상대를 향해 날을 세웠다. 실비아는 두 사람을 함께 마주하는 게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조금 당황했다. 그녀는 우선 두 사람을 진정시켜야겠다는 생각에 한 손으로 필리아의 눈을 가리고 루베아에게 질문을 던졌다.

16558815623836.jpg“그보다 글레버 백작은 어쩐 일인가?”

16558815623856.jpg“……도슬러 님께서 간단한 호신용 마법석을 만들어주시기로 약속한 것이 있어 찾으러 왔습니다. 마침 부인의 방이 가까우니 돌아가는 길에 인사라도 드리려 했는데, 선객이 있을 줄은 몰랐군요.”

루베아는 실비아가 화제를 돌리려 한다는 것을 눈치챘으나 그녀의 의도에 따라주기 위해 선선히 답을 내놓았다. 실비아는 루베아의 입에서 의외의 이름이 나오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16558815623836.jpg“오스턴이? 그대에게?”

16558815623856.jpg“예.”

정작 루베아는 시종일관 담담했다. 실비아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를 살폈다.

16558815623836.jpg“흐음.”

16558815623856.jpg“……왜 그렇게 보시는 거죠?”

16558815623836.jpg“아니, 그냥.”

16558815623856.jpg“저번의 연회장 습격 때 그분을 도와드린 데에 대한 보답일 뿐입니다.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마세요.”

16558815623836.jpg“도와줬단 말이지…….”

루베아가 심상찮은 기색을 느낀 듯 빠르게 해명했으나 실비아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일전에 루베아와 오스턴을 두고 떠돌았던 소문, 그리고 그 소문에 신빙성을 더하던 오스턴의 태도가 몽글몽글 떠올랐다. 필리아와 제프리도 그렇고, 루베아와 오스턴도 그렇고.

16558815623836.jpg‘좋을 때다.’

요즘 젊은이들은 참 열정적으로 사는구나, 싶은 생각에 실비아가 노인처럼 인자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16558815623836.jpg“글레버 백작. 여기까지 온 김에 피크닉을 같이하지 않겠나? 마침 오스턴도 방에 있다고 하니 부르도록 하지. 세이크린 후작 영애와 함께 나가려던 참이었거든.”

16558815623856.jpg“……예?”

16558815623839.jpg“으으.”

루베아는 당황하고, 필리아는 아까보다 더 크게 질색했다. 하지만 천사처럼 웃고 있는 실비아의 앞에서 차마 싫다며 고함을 내지를 수는 없었기에 그들은 속으로 기원했다.

16558815623856.jpg‘오지 마라.’

16558815623839.jpg‘오지 마라!’

루베아는 오스턴이, 필리아는 루베아가 불참했으면 좋겠다고 빌었다.

16558815663907.jpg“마님, 부르셨습니까!”

하지만 실비아의 마법 실력을 알게 된 후로 그녀의 자발적 하인이 된 오스턴은 부름을 듣자마자 뛰어왔고.

16558815623856.jpg‘……그렇게 돈을 밝히는 사람이 대가도 없이 저렇게 뛰어온다고? 분명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했는데.’

그 모습이 신경 쓰인 루베아는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피크닉에 참석하기로 했다.

16558815623839.jpg‘안 돼애애.’

실비아, 제프리와 함께 오순도순 피크닉을 즐길 계획이었던 필리아는 좌절했다.

16558815623836.jpg‘재밌겠네.’

그리고 정작 이 모든 일의 원흉인 실비아는 오래간만에 젊은이들의 연애를 구경할 생각에 즐거워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다섯 사람은 저마다의 생각에 빠진 채 밖으로 나섰다. 유달리 하늘이 맑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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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실비아 일행은 왕궁 내에서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왕의 명령으로 귀족 대부분이 왕궁에 머물게 된 데다가, 날씨까지 좋은 탓에 정원이나 후원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16558815663907.jpg“자리 잡기가 이렇게 힘들 줄이야.”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가 소문이라도 퍼지면 곤란해지는 실비아를 대신해 주위를 돌아보고 온 오스턴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다른 방향으로 자리를 찾으러 갔던 필리아가 손을 붕붕 흔들며 돌아왔다.

16558815623839.jpg“다들 이쪽으로 와 보세요!”

필리아가 찾아낸 곳은 왕궁 구석,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작은 궁이었다. 전체적으로 소담한 느낌이 강한 궁은 옛날에 누군가 머물렀던 듯이 보였지만,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것인지 온통 고요했다. 실비아 일행은 궁을 한 바퀴 둘러보며 사람의 발길이 완전히 끊긴 곳이라는 사실을 확신한 후 작은 정원에 자리를 잡았다. 실비아가 필리아의 곁에 앉으며 물었다.

16558815623836.jpg“이런 곳을 어떻게 찾았어요?”

16558815623839.jpg“돌아다니느라 발이 아파서 벽을 짚는데, 갑자기 손이 쑥 들어가더라고요. 알고 보니 입구가 덩굴에 가려져 있던 거였어요.”

16558815623836.jpg“다치지 않았다니 다행이에요. 고생했어요.”

16558815623839.jpg“별말씀을요. 그보다 공작님이 계셨다면 오래 헤매지 않고 이런 곳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필리아는 발바닥이 얼얼하다며 입을 삐죽였다. 북부의 사람 중 왕궁에서 오래 지낸 경험이 있는 것은 란델뿐이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실비아도 북부보다 수도 부근에서 생활한 기간이 더 길었지만. 그동안 플로레트 백작저를 벗어나 본 일이 없었으니 왕궁에 대해 아는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16558815623836.jpg“조사가 지지부진하다니 어쩔 수 없죠.”

실비아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현재 란델은 왕명으로 꾸려진 습격 사건 조사단에 합류해 있었다. 란델을 비롯해 여러 유력 귀족들로 이루어진 조사단은 지난번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기 위해 힘썼으나 이렇다 할 성과가 없어 요즘은 방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날도 잦았다.

16558815623836.jpg‘……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말로는 어쩔 수 없다고 했지만, 이렇듯 주변에 사람이 많으니 외려 란델의 빈자리가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실비아는 잠시 가라앉은 얼굴을 하고 있다가 애써 상념을 지워내며 눈앞의 사람들에게 집중했다. 제프리는 호위의 입장이었지만, 오스턴와 실비아의 지속적인 권유에 못 이겨 돗자리 위로 자리를 잡았다. 이렇듯 사람들을 한곳에 모으긴 했으나 내심 괜찮으려나 걱정하던 실비아는 이내 어느 정도 화기애애하게 담소를 나누는 모습에 걱정을 접었다. 한편, 대화가 이루어지는 내내 필리아는 제프리에게 ‘이래도 피하나 보자’라는 마음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프리는 계속해서 교묘하게 필리아의 시선을 피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렇게 두 사람이 무언의 추격전을 벌이는 것을 우연히 목격한 루베아가 못 볼 꼴을 봤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16558815623856.jpg“가관이네. 그러다가 눈이 빠지겠어.”

16558815623839.jpg“이게 진짜. 넌 왜 여기까지 따라와서 시비야!”

제프리 때문에 초조한 상황에서 루베아가 속을 긁자 울컥한 필리아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그 모습을 본 루베아가 코웃음을 치며 찻잔을 기울였다.

16558815623856.jpg“조금만 속을 긁어도 대뜸 소리부터 지르고 보는 그 성질은 고쳐지질 않나 봅니다. 그래서야 공작 부인께 누가 될 뿐일진대.”

16558815623839.jpg“그러는 백작께서야말로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건 눈치채지 못하셨나 보죠? 낄 자리와 끼지 말아야 할 자리조차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시는 분께서 한 가문을 이끌어 가실 수 있을지 염려되는군요.”

16558815623856.jpg“지금 뭐라 했습니까?”

실비아는 호호 웃으며 젊은이들의 대화를 구경하던 와중에 갑자기 자신이 화제가 되어 말다툼이 벌어지자 당황해 눈만 끔벅였다. 그녀는 모종의 책임감을 느껴 난감한 얼굴로 두 사람을 말리려 애썼다.

16558815623836.jpg“으음, 저기.”

16558815623839.jpg“왜 그러시죠? 사실에 기반해 판단하자면 공작 부인께 누가 되는 것은 제가 아니라 백작님이 아닐까요?”

16558815623836.jpg“두 사람, 잠시.”

16558815623856.jpg“멋대로 그런 판단을 내린다는 것 자체가 당신이 부족하다는 증거입니다.”

16558815623839.jpg“하! 그러면 공작 부인께 직접 여쭤보면 되겠네요!”

필리아가 날카롭게 코웃음 쳤다. 직후 필리아, 루베아가 동시에 고개를 홱 돌려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푸른빛의 눈과 보랏빛의 눈이 제각기 기이한 승부욕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16558815623839.jpg“공작 부인. 저희 둘 중 누가 더 곁에 두기 좋으세요? 당연히 저죠?”

16558815623856.jpg“저런 식으로 누군가 답을 강요한다고 해서 그릇된 판단을 내리시지는 않으리라 믿습니다.”

필리아와 루베아는 옥신각신하며 실비아의 대답을 기다렸다. 한바탕의 소란에 기가 빨린 실비아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초연한 미소를 띠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16558815623836.jpg“나는 남편이 가장 좋네.”

16558815623839.jpg“…….”

16558815623856.jpg“…….”

예상외의 상대에게 실비아의 측근 자리를 빼앗긴 필리아와 루베아가 나란히 말을 잃었다. 실비아가 이제야 비로소 조용해지겠다며 한숨을 삼키던 때였다.

16558815705681.jpg“역시 아직 한창때라는 건가. 두 사람 다 서로를 아끼는 모습이 참 보기 좋군.”

돌연 낯선 목소리가 일행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에 일행이 무어라 반응을 내비칠 새도 없이 실비아의 곁에 낯선 인영이 털썩 주저앉았다. 상대를 알아본 실비아가 낭패라는 표정을 감추며 입을 열었다.

16558815623836.jpg“……왕세자 전하.”

1655881570569.jpg“반갑네, 공작 부인. 몸이 좋지 않다더니 퍽 즐거워 보여.”

불쑥 나타난 다비드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빈정거렸다. 그간 실비아가 의도적으로 왕세자를 피해 다닌 것을 아는 일행이 난처하게 침묵했다. 그사이 침착함을 되찾은 실비아가 은근슬쩍 몸을 물리며 물었다.

16558815623836.jpg“왕세자 전하께서 이런 구석진 곳까지는 어쩐 일이십니까.”

1655881570569.jpg“그렇게 못 올 곳에 온 사람 보듯이 보지 말게. 이곳은 왕자궁이니까. 무단침입한 건 오히려 자네들이야.”

16558815623836.jpg“왕자궁……이라고요?”

실비아는 의아함에 미간을 찌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왕자가 머물렀던 궁이라기엔 이곳은 상당히 규모가 작았다. 그 의문에 답하듯 다비드가 삐딱하게 앉은 채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1655881570569.jpg“내가 어렸을 적에는 뭔가를 많이 부수고 다녀서. 폐하께서 내가 부술 집기를 줄이겠다는 명목으로 나를 이곳에 처넣으셨지. 은근히 눈에 띄지 않는 곳인데, 용케도 찾아냈군.”

다비드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이곳으로 일행을 안내한 장본인인 필리아가 점점 울상이 되었다. 실비아는 괜찮다는 의미로 그녀에게 살짝 웃어주고는 다시 얼굴을 굳히며 몸을 일으켰다.

16558815623836.jpg“오늘은 마침 몸 상태가 나쁘지 않아 잠시 바람을 쐴 겸 나왔을 뿐입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1655881570569.jpg“저런. 그래도 돌아가기 전에 사과는 받고 가야지.”

하지만 다비드가 실비아의 손목을 잡아채 그녀를 다시 자리에 앉히는 것이 먼저였다. 제프리는 곧장 검을 뽑아 들려 했으나 실비아가 눈짓으로 그를 말렸다. 다비드가 먼저 실비아의 몸에 손을 대는 무례를 저질렀다고는 하나 그는 왕족이었다. 게다가 이곳은 북부가 아닌 수도, 그 한가운데의 왕궁. 이런 곳에서 왕세자에게 검을 들이댔다가는 어떠한 이유로든 해코지를 당할 것이 뻔했으므로. 다비드는 실비아가 도망치지 않겠다는 기색을 내비치자 선선히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가 자못 침통한 얼굴로 실비아에게 사과했다.

1655881570569.jpg“……그날, 연회장에서 그대의 얼굴에 손을 댔던 걸 진심으로 사과하지. 그때는 한순간 내가 알던 사람인가 싶어 정신이 없었어.”

끝까지 사족을 붙이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다비드와 길게 얼굴을 맞대고 싶지 않았던 실비아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사과를 받아들였다.

16558815623836.jpg“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1655881570569.jpg“하지만 말뿐인 사과로는 부족할 테니, 그대에게 따로 식사라도 한번 대접하겠네. 언제가 괜찮겠나?”

하지만 다비드는 사과에 그치지 않고 어떡해서든 실비아와 단둘이 만나는 자리를 만들기 위해 애썼다.

16558815623836.jpg“직접 사과해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1655881570569.jpg“그럴 수야 없지. 식사가 싫다면 보석은 어떤가?”

16558815623836.jpg“그 또한 사양하겠습니다.”

다비드의 수작질을 목격한 필리아와 루베아가 힐끔 시선을 교환했다. 그들의 눈은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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