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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사랑과 겁의 상관관계 (60/118)

60. 사랑과 겁의 상관관계2021.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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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비드의 수작질을 목격한 필리아와 루베아가 힐끔 시선을 교환했다. 그들의 눈은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16558815791791.jpg“왕세자 전하.”

그리고 다음 순간. 필리아가 애교스러운 목소리를 내며 싱긋 웃었다. 그 부름에 다비드가 멈칫하고 고개를 돌렸다. 필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르르 웃으며 예를 갖추었다.

16558815791791.jpg“필리아 세이크린이 왕세자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165588157918.jpg“루베아 글레버입니다.”

루베아 또한 필리아의 곁에서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함께 인사했다. 제프리와 오스턴은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것처럼 달라진 그들의 태도에 소리 없이 경악하며 턱을 떨궜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시 자리를 잡고 앉은 필리아와 루베아가 다비드의 곁으로 바짝 다가가 말을 붙이기 시작했다. 필리아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16558815791791.jpg“출정하시기 전에는 제 나이가 차지 않아 수도에 오지 못했던지라, 정식으로 뵙는 건 이번이 처음인 듯하네요.”

다비드는 지난 몇 년간 남부 정벌을 위해 왕궁을 떠나 있었다. 하여 그는 약 2년 전부터 부모를 따라 왕의 탄신연에 참석하기 시작한 필리아와는 초면이었다.

16558815791809.jpg‘……뭔가 익숙한 느낌인데.’

다비드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만들며 제 옆에서 시종일관 미소 띤 얼굴을 하고 있는 필리아와 루베아를 훑어보았다. 그녀들의 태도는 꼭…… 왕세자비 자리를 노리며 그에게 접근하는 귀족 영애들만 같았다. 정확히는 그렇게 보이도록 필리아와 루베아가 의도한 것이었다.

16558815791791.jpg‘속았나?’

165588157918.jpg‘속은 것 같은데.’

두 사람은 다비드의 눈을 피해 힐긋 시선을 주고받았다. 필리아와 루베아는 다비드가 실비아에게 수작을 부린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안 그래도 좋지 않던 왕세자에 대한 인상이 바닥으로 꺼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 방면으로는 두 사람 모두 눈치가 빨랐기 때문에, 그들은 상황을 판단한 직후 눈으로 의견을 교환했다.

16558815791821.jpg‘쫓아내자.’

란델도 이따금 불만스러울 지경인데, 감히 왕세자 따위가 유부녀인 실비아에게 집적대게 둘 수는 없다! 그리 다짐한 두 사람은 곧장 티 나지 않게 왕세자를 몰아내기 위해 사교용 미소를 입가에 장착했다. 신분 상승을 위해 왕세자비 자리를 노리는 귀족 영애처럼 지나치리만큼 그에게 관심을 내비치면, 질색한 다비드가 자리를 떠날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워낙 드러내놓고 친근하게 군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다행히 다비드는 필리아와 루베아에게 꿍꿍이가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챈 듯했다. 루베아는 기세를 몰아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다비드에게 물었다.

165588157918.jpg“그런데 전하께서는 이상형이 어떻게 되시나요?”

16558815810479.jpg“쿨럭.”

그녀의 물음을 들은 오스턴이 차를 넘기다가 말고 쿨럭였다. 그는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아무것도 아니라며 급히 손을 내저었으나 그 후로도 한참이나 기침했다. 다비드가 흥미롭다는 듯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리고는 되물었다.

16558815791809.jpg“그게 왜 궁금하지?”

165588157918.jpg“궁금해하면 안 되는 건가요?”

루베아는 오히려 눈을 똑바로 뜨며 도발적으로 되물었다. 그에 허, 하고 황당한 웃음을 흘린 다비드가 눈매를 찡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16558815791809.jpg“이상형…… 이상형이라.”

다비드의 관심을 이쪽으로 돌렸다, 는 생각에 루베아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는 순간이었다.

16558815791809.jpg“그러고 보니, 공작 부인은 이상형이 어떻게 되나?”

다비드가 돌연 고개를 돌려 실비아에게 물었다. 싸늘한 얼굴의 실비아가 약간의 경멸을 담아 그를 노려보았다.

16558815810499.jpg“전하께서야말로 왜 그런 것을 궁금해하시는 겁니까?”

16558815791809.jpg“이제부터 맞춰가 보려고.”

하지만 다비드는 그에 굴하지 않고 빙글빙글 미소했다. 사람들이 어떤 말을 꺼내든 결국 자신을 향해 말을 붙일 구실로 만드는 그 재주에 실비아는 내심 감탄했다. 하지만 감탄과 별개로 다비드가 제게 관심을 보이는 이유를 알고 있는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았다.

16558815810499.jpg‘이상형…….’

실비아는 다비드의 말문을 막기 위해 세상에 없을 법한 남자의 특성을 늘어놓기로 했다.

16558815810499.jpg‘잘생기고, 몸 좋고, 피부색은 적당히 짙고, 머리카락은 조금 곱슬거리고, 귀엽고, 사랑스러운데 또 야한…….’

……늘어놓고 보니 란델인데? 실비아는 새삼스럽게 란델이야말로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법한, 완벽한 남자라는 것을 깨닫고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16558815810499.jpg‘죽기 위해서 결심한 결혼을 이런 남자와 하게 될 줄은 또 누가 알았겠어.’

상념을 떨치고 속으로 생각한 것들을 하나하나 다 늘어놓으려던 실비아는 문득 귀찮아졌다. 게다가 자신이 이상형에 대해 세세하게 늘어놓으면 다비드가 정말 그에 맞추겠다고 피부색과 머리를 바꿔 올지도 모르는 노릇 아닌가. 실비아는 애초에 여지를 주지 말아야겠다는 생각 반, 다비드 따위에게 굳이 정성 들여 대답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 반으로 툭 답을 내뱉었다.

16558815810499.jpg“란델.”

16558815791809.jpg“…….”

16558815810499.jpg“제 남편이야말로 이상형 그 자체입니다.”

정원에는 또다시 한 차례 침묵이 찾아들었다. 다비드를 쫓아내기 위해 연기를 하고 있던 필리아와 루베아조차 한순간 짜게 식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부인, 부부 사이가 좋은 건 축하할 일이지만 제발 팔불출을 멈춰주세요……. 하지만 다비드는 예외였다. 실비아는 그가 또다시 비웃음을 흘릴 거라 예상했지만, 그는 어쩐지 묘하게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16558815791809.jpg“……남편이 몹시 소중한가 보군.”

16558815810499.jpg“…….”

16558815791809.jpg“부디 두 사람의 사이가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기를 기원하겠네.”

그 모습과 말이 어쩐지 불안해, 실비아는 햇빛 아래 앉아 있음에도 한기가 느껴지는 듯해 괜스레 팔을 쓸어내렸다. * * * 란델은 피크닉 날, 저녁 늦게 방으로 돌아왔다. 실비아는 란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의 방으로 찾아갔다.

16558815810499.jpg“란델.”

16558815825689.jpg“아, 실비아. 왔습니까.”

16558815810499.jpg“조사 결과는 어떻게 됐어요? 뭔가 진척이 있나요?”

실비아가 걱정스럽게 란델의 안색을 살폈다. 란델은 며칠 사이 눈에 띄게 까끌해진 얼굴을 한 손으로 쓸며 머쓱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16558815825689.jpg“남아 있는 흔적이 그리 많지 않더군요. 마치 누군가 작정하고 흔적을 지워낸 것처럼…….”

그는 말을 잇던 중 문득 방으로 돌아오던 길에 마주쳤던 다비드가 생각나 말꼬리를 흐렸다.

16558815791809.jpg-조사는 잘 되어가고 있나?

  지금이야 자숙이 끝났다지만, 다비드는 조사단이 결성되었을 무렵 왕명으로 인해 자숙 중이었기에 조사단에 합류하지 않았다. 그는 복도를 지나다가 밤늦게 귀환한 란델을 발견하고는 빙글거리며 말을 붙였다.

16558815825689.jpg-……왕세자 전하.

  란델은 피로함에 그를 무시하고 지나치고 싶었으나 그런 마음을 꾹 내리누르고 고개를 숙여 보였다. 다비드는 제게 고개를 숙이는 란델을 만족스러운 눈으로 보다가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16558815791809.jpg-고생이 많아.

16558815825689.jpg-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16558815791809.jpg-어차피 성과는 없을 듯하지만, 그래도 열심히 하라고.

  속삭임 같은 말을 남긴 다비드가 란델을 스쳐 지나갔다. 그 의뭉스러운 말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남부 정벌 당시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몇 번이나 자리를 비웠다던 왕세자. 그리고 왕세자의 귀환 이후 갑작스럽게 세력을 불리고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한 어둠 벌레들.

16558815825689.jpg‘설마…….’

란델은 불길한 가정을 하다가 저도 모르게 머리를 털어 괜한 추측을 털어냈다. 그가 아무리 다비드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고, 또 다비드의 성품이 그리 좋지 못하다지만. 그래도 일국의 왕세자라는 자가 인간의 공적인 어둠 벌레들과 결탁하여 얻을 것이 무엇이겠는가. 란델은 괜한 착각이라 생각하며 애써 찜찜한 기분을 떨쳐냈다. 그가 실비아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16558815825689.jpg“그래서 건국제 전까지는 지금처럼 바쁠 것 같습니다. 부인께서는 무얼 하며 지내셨습니까?”

16558815810499.jpg“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찾아왔어요.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듣는 것보다는 직접 듣는 게 나을 것 같아서.”

16558815825689.jpg“예? 그게 무슨…….”

란델은 실비아의 말에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숨을 한번 깊이 들이켠 실비아가 본론을 꺼냈다.

16558815810499.jpg“낮에 왕세자 전하를 만났어요.”

16558815825689.jpg“……예?”

16558815810499.jpg“그게, 세이크린 후작 영애와 시더스 경을 만나게 해주려다가 잠시 바깥에 나섰는데 하필 전하께서…….”

실비아는 란델에게 낮에 있었던 일의 자초지종을 차분히 설명했다. 그녀가 다비드가 제 이상형에 대해 질문했다는 부분까지 알리자 란델이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며칠 사이, 다비드가 실비아에게 관심을 보이는 와중에 그녀의 곁을 떠나 바깥으로 나돌아야 하는 상황이 그의 평정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저런 이야기를 들으니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찔해졌다.

16558815825689.jpg‘다음에는 그런 일이 생기면 곧장 피하십시오. 아니, 그냥 방 밖으로 나가질…….’

그는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 나가려는 말을 막기 위해 입술을 사려 물었다. 자신이 들어도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들릴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16558815825689.jpg‘……보통 미친 게 아니군.’

란델은 스스로가 지금 ‘정상적인’ 상태가 아님을 자각하고 있었다. 어둠 벌레들의 흔적을 쫓으며 쌓인 피로, 왕궁에 머물면서 어쩔 수 없이 마주하게 되는 국왕과 왕세자로 인한 스트레스. 그런 것들이 자꾸만 란델이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는 ‘좋은 사람’의 가면을 벗겨내려 했다. 그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고여 있는 음습한 소유욕과 집착. 란델은 행여 그것을 실비아에게 드러내게 될까 봐 필사적으로 심호흡했다. 실비아는 란델의 반응을 살피다가 슬그머니 입술을 움직였다.

16558815810499.jpg“……이상형에 관한 질문에 내가 뭐라고 답했을 것 같아요? 궁금하지 않아요?”

실비아는 란델이 궁금하다고 답하면 자신의 이상형이 그라고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말이지만, 조금이나마 그의 기분이 풀릴지도 모른다는 마음에. 그러나 란델은 차마 실비아에게 그에 관해 물을 수가 없었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실비아의 이상형이 다비드에 가까우면 어쩌나. 정략결혼으로 시작한 관계이기에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정을 붙이려 ‘노력’했을 뿐. 그녀의 내심은 제가 알던 것과 다르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 걱정과 자괴감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16558815825689.jpg‘……늘 결정적인 대답은 피하던 사람이었으니.’

혹시라도 제 상태가 좋지 않은 이 상황에. 실비아가 자신에게 가진 일말의 애정이, 애완동물에게 가지는 그러한 종류라는 걸 확인했다가는……. 진심으로 절망스러울 것 같아서. 란델은 비겁하게도 실비아에게서 한 발 물러서기를 택했다. 그는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따듯한 미소를 지은 채 입을 열었다.

16558815825689.jpg“굳이 이야기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16558815810499.jpg“……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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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8815810499.jpg“아, 그…… 알겠어요. 당신도 고생 많았을 텐데 쉬어요.”

명백한 축객령에 실비아는 드물게도 조금 당황했다. 하물며 축객령을 내린 사람이 란델이라는 것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실비아는 간신히 침착한 미소를 보인 후 방문을 닫고 나왔다. 그녀는 잠시 방문 앞에 등을 기대고 선 채 술렁이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16558815810499.jpg‘뭐지.’

지금 이렇게 마음이 술렁이는 것이 란델이 제게 축객령을 내려서인지, 아니면 그가 왕세자와의 일을 그리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인지 혼란스러웠다. 생각에 잠겼던 실비아는 문득 자신이 더없이 기만자 같다는 생각에 실소를 흘렸다.

16558815810499.jpg‘전자도, 후자도…… 내게 그럴 자격이 있나?’

실비아는 늘 란델을 밀어내려 애썼다. 그를 마음에 두었다는 것을 자각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행여 간신히 다잡은 희망을 다시금 제 손으로 불길 속에 던져 넣게 될까 봐. 또다시 정처 없는 마음에 휩쓸려 상처 입게 될까 봐. 그녀는 서슴없이 그를 밀어내기를 택했다. 그런 상황에서 란델이 고작 저를 한 번 밀어냈다는 사실에 이리 마음이 상하다니. 이제 겨우 첫 번째 생을 살고 있을 란델보다도 그녀가 더 어린아이처럼 굴고 있지 않은가.

16558815810499.jpg‘……적어도 란델에게 나는 최악의 사람이겠구나.’

실비아는 결국 몸을 돌려 란델을 찾아가지 못하고, 그대로 방문 앞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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