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볕 아래의 열기2021.10.28.
날 좋은 오후. 왕명으로 왕궁에 발이 묶인 주인들로 인해 호위들 또한 건국제 기간까지 왕궁에 머물게 되었다. 호위들의 숙소는 근위 기사단 건물 근처의 작은 궁이었는데, 요즈음 그곳의 연무장이 드물게도 소란스러웠다.
“또 그러고 있대?”
“그렇다니까. 머리가 깨지진 않을까 걱정될 정도야.”
“야, 완전히 미쳤어. 가까이 가지 마라.”
신분도, 나이도 제각각인 호위들이지만 이 문제에 관해서는 같은 태도를 보였다. 그들은 이곳에 머물기 시작한 후부터 하루에 세 번씩 연무장에 나와 대련용 허수아비에 이마를 찧는 괴상한 호위를 두고 숙덕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괴상한 호위는…….
‘하…….’
바로 제프리 시더스였다. 제프리는 우울한 얼굴로 대련용 허수아비에 이마를 쿵쿵 찧었다. 처음에는 한 번만 찧어도 머리가 쪼개질 것처럼 아프더니, 이제는 익숙해진 것인지 여러 번 찧어야 고통이 느껴질락 말락 했다. 사람들은 그가 미친 것 같다고 했지만, 그는 나름의 규칙을 가지고 이마를 찧고 있었다. 쿵!
‘나는.’
쿵!
‘쓰레기…….’
하나에 ‘나는’, 둘에 ‘쓰레기’. 제프리는 속으로 그 구호를 읊조리며 착실히 제 이마를 혹사하고 있었다.
‘분명 나를…… 좋아한다고 했었는데.’
제프리는 이미 발갛게 달아오른 이마를 찧다가 말고 입술을 슬며시 깨물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며칠 전의 일이 끊임없이 재생되고 있었다.
-왕세자 전하.
-필리아 세이크린이 왕세자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제프리는 필리아를 알아온 이후 지금까지, 그녀가 그토록 애교스러운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와 마주할 때면 언제나 발랄하고, 활기차고, 귀엽고. 물론 제삼자가 제프리의 생각을 읽었다면 그 또한 콩깍지가 중증이라 혀를 찼을 법하긴 했으나. 분명 ‘좋아한다’라고 말하던 그에게도 그 정도일 뿐이었는데.
-출정하시기 전에는 제 나이가 차지 않아 수도에 오지 못했던지라, 정식으로 뵙는 건 이번이 처음인 듯하네요.
왕세자를 부르는 필리아의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유혹하고자 하는 의도가 명백했다. 제프리는 충격적일 정도로 사랑스럽던 필리아의 목소리에 한 번. 절망스러울 정도로 왕세자에게 살갑게 굴던 필리아의 태도에 두 번 심란해졌다.
‘……물론 내가 먼저 피해놓고 할 소리는 아니지만.’
그는 생각을 이어가던 중 문득 자조적인 미소를 띠었다. 피크닉 전까지의 그는, 습격 날 한순간의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필리아에게 끌어안긴 것을 후회하며 그녀를 피해 다녔다. 마음의 빗장을 더욱 단단히 채워도 모자랄 판에 덥석 안겼던 과거의 자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미 지난 일이었으니. 이제라도 다시 거리를 두고 피해 다니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이 문제였을까. 피크닉 당일, 필리아는 돌연 나타난 왕세자에게 더없이 사근사근한 태도를 보였다. 마치 그녀가…… 왕세자를 좋아하게 된 것처럼. 그 모습을 본 제프리는 설마 자신이 필리아를 피해 다녔던 일 때문에, 그녀가 진심으로 제게서 마음을 거두었나 싶어 새삼 두려워졌다. 먼저 차갑게 대하고, 얼굴을 보지 않으려 하는 주제에 필리아의 마음이 떠나지 않았으면 한다니. 이보다 더 추악하고 이기적인 마음이 어디 있겠는가.
‘더는 나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면 오히려 잘된 거지.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라, 제프리 시더스.’
제프리는 그런 생각으로 허수아비에 한 번 더 이마를 세게 찧었다. 쿵!
“어머, 아프겠다.”
“왜 그런 짓을 해요? 하지 말아요.”
그때 문득 꽃잎이 산들거리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놀란 제프리가 퍼뜩 고개를 들자, 연무장 주변을 두르는 산책로를 거닐던 여인들이 그에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누구지?’
제프리는 재빨리 그들의 차림새를 훑어보았다. 화려한 레이스와 꽃들로 장식된 의복, 손에 든 양산, 결정적으로 입가에 걸린 여유로운 미소. 아무래도 이번 왕명으로 인해 왕궁에 발이 묶인 귀족 영애들 같았다. 그녀들은 제프리의 지척으로 다가오더니 짐짓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에게 손을 뻗었다.
“세상에, 이마 빨간 것 좀 봐.”
“아프겠다…….”
“아, 저기…….”
제프리는 제 상태를 살피는 척 은근히 그를 더듬는 손길에 난처하게 고개를 뒤로 뺐다. 하지만 여인들은 끈질기게 그와 거리를 좁혔다. 아무래도 어리고 반반해 보이는 기사가 혼자 있는 것을 보자 치근덕거려 보고 싶었던 모양인데…….
‘곤란하네.’
제프리는 미간을 미미하게 찡그린 채 주변을 살펴보았으나 그가 며칠간 벌인 괴상한 행동 때문인지 주변엔 인기척 하나 없었다. 눈앞의 여인들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귀족인 그들이 평민 출신 기사인 제프리보다 신분이 높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런 그들을 섣불리 제압했다가 문제라도 생기면 곤란했다. 더 정확히는, 그가 아니라 그의 주인이 곤란해질 것이었다. 자고로 귀족들이란 가문끼리의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집단이니까. 결국 제프리는 최대한 온건한 태도로 한 걸음 더 물러나며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저기, 숙녀분들.”
“숙녀는 무슨 얼어 죽을. 요즘은 싫다는 사람 몸을 만지작거리는 것도 숙녀라고 하냐?”
그 순간, 잔뜩 불퉁한 목소리가 제프리와 여인들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제프리가 상황을 인식하느라 눈만 깜박이는 사이, 어디선가 나타난 하얀 손이 그의 손목을 잡아채 뒤로 끌어당겼다. 당황한 나머지 어어, 하며 끌려간 제프리는 순식간에 제 앞을 가득 채우는 자그마한 등에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필리아?’
제프리와 여인들 사이를 가로막고 선 것은 필리아였다.
“……뭐야, 넌 누군데 끼어드니?”
“우린 이 기사님을 걱정해드리고 있었던 것뿐이라고.”
한편, 필리아의 입을 통해 제프리를 더듬대던 것이 까발려진 영애들이 얼굴을 붉히며 눈을 세모꼴로 떴다. 그들은 연회에 참석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영애들인 데다가, 북부 귀족은 수도의 연회에 자주 얼굴을 비치지 않음으로 필리아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수도에 가까이 거주하는 그들이 알지 못하는 얼굴이라면 분명 변방의 한미한 가문 출신일 것이다. 그렇게 단정 지은 영애들이 본격적으로 필리아를 몰아세웠다. 개중 가장 목소리가 큰 영애가 앞으로 나서더니 검지로 필리아의 어깨를 툭 밀쳤다.
“지금 얼굴로만 보면 기사님이 싫어하는 사람은 우리가 아니라 너 같은데?”
“다른 사람 대화에는 끼어드는 게 아니라고 배우지 않았어?”
필리아는 체구가 작다 보니 가볍게 밀치는 손길에도 몸이 크게 흔들렸다. 그녀는 상대가 밀치는 대로 툭툭 밀려나며 헛웃음을 지었다.
‘하. 생각해 보니 이것들은 내 소문을 모르지?’
북부에서는 필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의 미모나 가문 때문이 아니라, 말괄량이 같은 성격과 자신을 향한 불의에 참지 않고 팔을 걷어붙이는 용맹한 성정 탓에.
‘확실히 내가 수도에 와서는 조용히 굴긴 했지?’
필리아는 삐딱하게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린 채 손가락을 꺾었다. 뚜둑, 하는 소리가 나며 개운한 감각이 퍼졌다.
‘소리 좋고.’
이윽고 준비운동을 끝낸 필리아가 눈을 번뜩이고 한바탕하려는 순간.
“아!”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아까와는 다르게 자비 없는 손길로 여자의 손을 쳐낸 제프리가 한 팔로 필리아의 어깨를 안아 잡아당기며 싸늘히 읊조렸다. 조금 전까지 필리아를 건드리던 여인은 아픔을 느낀 것인지 작게 새된 소리를 내지르고는 손을 감싸 쥐었다. 얼결에 제프리를 등 뒤에 두고 안긴 모양새가 된 필리아가 엉거주춤 눈을 끔벅였다.
‘엉?’
그녀는 아까까지만 해도 난처한 얼굴로 영애들의 행동을 내버려두던 제프리의 행동이 생각나 더욱 얼떨떨해졌다.
‘아까는 가만히 있더니?’
필리아는 조금 전, 오늘은 방에만 있겠다는 실비아의 말에 시무룩하게 바깥을 떠돌고 있었다. 그녀는 요 며칠 왕세자의 접근을 막겠다는 핑계 아닌 핑계를 대며 루베아와 실비아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호위를 핑계로 실비아와 노닥거리는 것도 나름 즐거웠는데. 실비아는 며칠 새 기력을 바닥까지 긁어내 쓴 것 같다며 침대에 누워 손만 휘적거렸다. 그 모습이 마치 강아지와 놀아주다가 체력이 달려 쓰러진 주인 같았다. 실비아가 아파서 드러눕게 할 수는 없었다. 필리아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발길을 돌렸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이곳이었다.
-……헛! 내가 언제 여기에!
한동안 제프리를 쫓아다니던 것이 금세 습관이 되었는지 무의식중에 발이 움직인 듯했다. 기왕 여기까지 온 김에 제프리를 찾아가 볼까, 했던 필리아는 이내 입술을 삐죽였다.
-어차피 만나주지도 않고 또 도망가겠지.
그렇게 투덜거리며 몸을 돌리려던 찰나. 연무장 구석에서 여인들에게 둘러싸여 희희낙락하고 있는 제프리의 모습이 필리아의 시야에 포착되었다. 그 순간 그녀의 눈에 불길이 확 일었다.
-저, 저게 또 여자들한테 둘러싸여 있어!
제프리는 란델, 혹은 오스턴처럼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타입의 미남은 아니었다. 하지만 타고난 분위기가 금욕적이고 단정해서 그런지, 이상하게 접근하는 여자들이 많았다. 그들 모두를 필리아 대하듯 차갑게 대하면 또 모르겠는데. 왜! 나한테 하는 것처럼! 안 하는 거냐고! 아오! 결국 울분을 이기지 못한 필리아는 양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리고 그대로 제프리를 향해 질주했다. 그리고 무례하게도 그를 더듬대던 손을 치우고 그를 제 뒤로 끌어당겼다. ……그때까지만 해도 지금 같은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야, 왜 그래?”
필리아는 맞닿은 몸이 의식되어 제프리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바르작거리며 작게 속삭였다. 하지만 제프리는 외려 그녀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필리아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필리아는 제프리를 등 뒤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제프리에게 접근했던 영애들은 그의 얼굴이 조금 전과 달리 날카롭게 벼려진 검 같다는 것을 깨닫고는 얼굴을 팩 구겼다.
“……뭐야, 임자 있는 사람이었어?”
“그러면 진작 말을 했어야죠. 그랬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괜히 흥만 식었네.”
“재미없어라. 가자!”
여인들은 제프리와 필리아가 연인 관계라고 오해한 것인지 콧방귀를 뀌며 자리를 벗어났다. 소란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연무장에는 금세 정적이 찾아들었다. 쿵, 쿵. 맞닿은 몸에서 심장이 뛰는 소리가 점차 커지는 것이 느껴졌다. 필리아는 인기척이 사라졌는데도 제프리가 미동이 없자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더욱 크게 바동거렸다.
“사람들 다 갔어. 이것 좀 놔 봐.”
“…….”
“야아, 이것 좀 놔 보라니까?”
“…….”
“……제프리?”
필리아는 여러 번 불렀는데도 제프리에게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그때, 그가 돌연 고개를 푹 숙였다. 필리아는 맨어깨에서 느껴지는, 불덩이 같은 열기에 흠칫했다. 필리아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제프리가 울 듯이 중얼거렸다.
“보지 마…….”
“…….”
그 중얼거림에 필리아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녀는 한순간 경악했다.
‘뭐 저렇게…….’
귀여운 목소리를 내지? 미친 건가? 필리아가 콩깍지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허우적대고 있을 무렵. 제프리는 흑역사의 늪에서 허우적대며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내가 무슨 짓을.’
제프리는 귀족 영애들이 사라지고 난 후에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자각했다.
-아, 안았…….
제 행동을 자각하는 순간 얼굴이 펑, 소리를 내며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 멍청한 얼굴을 보여줄 수는 없다. 빠르게 판단한 그는 필리아를 못 움직이게 하고 얼굴을 식히기를 택했다. 하지만 다급했던 탓에 방법이 잘못되어, 여전히 그의 얼굴은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필리아 또한 그것을 느낀 것인지 괜히 시선을 멀리하며 손부채질을 했다.
“어후, 역시 수도라서 그런가. 덥네, 더워…….”
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이나 바보같이 땡볕 아래에서 열기를 식히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