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가면 속에 감추어진 것2021.11.01.
한편, 혼란스러운 것은 제프리만이 아니었다. 샹들리에의 불빛을 등 뒤에 두르고 오스턴에게 인사하려던 귀족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머, 도슬러 님. 안색이 안 좋으세요.”
“……아, 최근 잠을 잘 못 자서 그런 것뿐입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오스턴은 눈에 띄게 퀭한 얼굴로 손사래를 치며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잔을 집어 들었다. 그는 최근 들어 실비아가 건네주었던 마법식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수선한 상태였다.
‘그 여자…….’
이유는 루베아 때문이었다. 일전의 피크닉 날. 오스턴은 여태껏 보지 못했던 루베아의 모습에 기함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이상형이 어떻게 되시나요?
얼음장 같던 얼굴에 떠오른 화사한 미소도 잘못 본 것인가 싶어 눈을 비빌 정도였는데.
-궁금해하면 안 되는 건가요?
그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왕세자에 대한 호감을 드러낼 줄은.
“……하.”
미소 띤 루베아의 모습을 떠올린 오스턴은 괜히 속이 불편해져 입매를 뒤틀며 샴페인을 벌컥 들이켰다. 하지만 저조한 기분은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다. 최근 며칠 동안은 아예 루베아와 왕세자가 그의 꿈에 자리를 깔고 앉아 다정한 모습을 보이니 더욱 미칠 지경이었다.
‘그 여자가 대체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오스턴은 울컥해 평소에는 손도 대지 않던 카나페까지 한입에 털어 넣었다. 알싸한 향신료의 맛이 입 안에 감도니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것도 같았다. 음식 섭취로 약간의 평정을 되찾은 오스턴은 평소의 냉소적인 태도로 돌아갔다.
‘하여간, 끼리끼리 어울린다는 건가.’
오스턴이 소리 없이 코웃음을 쳤다. 적갈색 눈은 귀족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했다. 최근 여러 일로 인해 루베아의 인품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뻔했긴 하지만. 역시나 루베아는 루베아였다. 하긴, 그렇게나 고고한 여자의 눈에 차는 사람이야, 고상한 귀족 나으리들이나 혈통으로만 따지자면 최고인 왕족뿐이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면 루베아가 왕세자에게 호의적으로 굴던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자꾸만 란델을 긁고, 실비아에게 치근덕거리는 게 꼴 보기 싫어서 그렇지. 그런 부분들을 빼놓고 보자면 왕세자 다비드는 란델의 결혼 이후, 홀로 우뚝 선 일등 신랑감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왕가가 지금껏 북부에 한 짓이 있는데.’
역시 저 하나의 명예와 부귀를 위해서라면 정적이라도 상관없다는 것인가? 아니, 그렇다고 하기에는 전 글레버 후작의 죄까지 고발하며 란델에 대한 충정을 지키던 여자인데……. 하지만 왕세자에게 보인 그 미소는 거짓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밝고 따스했고. 그렇게 오스턴이 물과 불처럼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였다. 목이 타 샴페인을 물처럼 들이켜던 그는 문득 사람들 틈으로 물결치는 금발을 본 듯해 눈을 크게 떴다.
‘루베아 글레버?’
저 여자가 왜 여기에?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지만, 어쩐지 루베아가 맞을 것 같다는 묘한 확신이 들었다. 오스턴이 오롯한 제정신이었다면 루베아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파티장을 떠나려 했겠지만, 그는 연달아 들이켠 샴페인으로 인해 살짝 취기가 오른 상태였다. 그는 저도 모르게 루베아가 사라진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왜 만날 때마다 으르렁대는 그녀를 만나려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이쪽으로 간 것 같은데.’
오스턴은 휴게실로 이어지는 복도에 멈춰 미간을 찡그렸다. 그는 루베아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복도 구석에서 들려오는 작은 대화를 듣고 멈칫했다.
“……비켜.”
“그러지 말고 한 번만. 한 번이면 되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워?”
루베아의 짜증스러운 목소리와 웬 남자의 목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대화의 내용이 심상찮은 듯해 오스턴은 발소리를 죽이고 대화가 들리는 곳으로 다가갔다. 잘 보니 복도의 구석진 곳에 작은 틈이 있었다. 복도 끝의 벽에 등을 기대고 모퉁이 너머로 힐끗 시선을 던진 오스턴이 대경했다.
‘저, 저.’
루베아와 함께 있는 남자는 오스턴이 아는 얼굴이었다. 루베아의 양손을 붙든 채 그녀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있는 남자는 이 파티의 주최자인 큐비드 백작의 외동아들이었다. 오스턴이 듣기로 그는 수도에서 여자관계가 복잡한 인물로 한 손에 드는 사람이었다. 머릿속의 소문, 그리고 루베아를 끈질기게 붙잡고 무언가를 요구하는 태도. 그것들이 맞물리자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지금 어디서……!’
오스턴은 생각이라는 것을 할 틈도 없이 발부터 내디뎠다. 그가 손을 뻗어 남자의 어깨를 우악스럽게 움켜쥐었다.
“여긴 두 사람이 들어가기에는 지나치게 좁아 보이는군요. 그리 불편한 곳에 계시지 말고 이리 나오시는 게 어떠십니까, 영식?”
“으, 으윽! 누구냐!”
얼결에 복도에 패대기쳐진 큐비드 백작 영식이 와락 목소리를 높이며 뒤를 돌았다. 다음 순간. 오스턴을 발견한 그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도, 도슬러 님?”
“하하, 제가 누구인지 아시는 모양이군요. 그런데 이쪽 숙녀분이 누구인지는 알고 이러시는 겁니까?”
오스턴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한쪽 팔로 루베아의 허리를 휘감아 안았다. 그 손길이 무척이나 다정했다.
“무슨…….”
뜻밖의 상황에 놀라 굳어 있던 루베아가 뒤늦게 눈매를 구기며 그를 밀어내려던 차였다. 오스턴이 큐비드 백작 영식을 직시하며 또박또박 일러주었다.
“제 약혼녀입니다.”
“……뭐라고요?”
“예, 예?”
그 말에 루베아와 백작 영식이 나란히 당황한 음성을 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스턴은 뻔뻔한 태도로 연기를 이어갔다. 그는 그윽한 눈길로 루베아를 바라보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제 약혼녀라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 어쭙잖은 관심은 부디 거두시지요. 불쾌하진 않았습니까, 루베아?”
한없이 상냥한 부름을 내뱉은 오스턴이 사르르 눈을 휘며 루베아의 손등에 짙게 입 맞추었다. 그에 루베아는 한순간 당황하던 것조차 잊고 숨을 멈추었다.
지금 제 앞에서 농염하게 눈을 휘고 있는 사내가 정말 평소의 그 품위 없던 오스턴 도슬러가 맞는가 싶었다. 그사이, 오스턴의 말에 턱을 떨궜던 영식이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빼액 소리쳤다.
“지, 진짜야, 루베아? 안 친하다며! 그냥 같은 주군을 둔 멀디먼 전우라며!”
전우라며! 전우라며……! 그의 목소리가 긴 울림이 되어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 말에 오스턴은 별안간 쩡 굳어졌고, 루베아는 정신을 차렸다. 이성을 되찾은 루베아가 오스턴을 밀어내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 말이 사실이야. 아무래도 도슬러 님께서 내가 곤란한 상황인 줄 알고 도와주려 하신 모양이네.”
‘그냥 전우’의 충격에서 빠져나온 오스턴이 한발 늦게 이상함을 느끼고 루베아를 돌아보았다.
“……곤란한 상황이 아니었습니까? 분명 저자가 당신을 겁박하는 상황이었던 것 같은데요.”
오스턴은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못한 것인지 루베아의 앞을 한 팔로 가로막으며 영식을 향해 수상한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거하게 한숨을 푹 내쉰 루베아가 이마를 짚었다.
“친척이에요.”
“……예?”
“한 번만 만나게 해달라고 한 건 제가 아니라 도슬러 님이고요.”
“하하! 아무래도 제가 벌써 헛것이 들리나 봅니다.”
“…….”
“…….”
하지만 필사적으로 던진 농담은 파문만 남기고 고요 속으로 가라앉아버렸다. 정적이 이어질수록 오스턴의 입가에 걸려 있던 억지 미소 또한 옅어졌다. 결국 웃음을 잃고 창백한 얼굴이 된 오스턴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되물었다.
“진짜입니까?”
루베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오스턴은 술이 단번에 깨며 전신의 피가 식는 경험을 했다.
‘미친 새끼야아!’
단연 ‘오스턴 도슬러의 인생’에서 첫 번째 손가락으로 세워도 손색없는 흑역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 * 누군가에겐 파란만장한, 또 누군가에게는 갑갑했던 날들을 지나. 마침내 모두가 손꼽아 기다리던 건국제 당일이었다. 건국제 무도회는 다른 때와 달리 조금 특별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무도회장의 입구를 여럿으로 나누고, 무도회장에 들어가기 직전 가면을 개별 지급함으로써 사람들이 서로를 분간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다. 부부나 연인 또한 이 규칙을 피해갈 수는 없었기에, 건국제 가면무도회는 암암리에 은밀한 일탈의 장소로 여겨지게 된 지 오래였다.
‘오는 길이라도 함께였다면 좋으련만.’
늦은 저녁. 실비아는 필리아, 루베아와 함께 자신이 가야 할 입구로 발을 옮기며 어둑한 얼굴을 했다. 며칠 전, 그녀는 란델의 방에서 내쫓기듯 나온 이후로 그를 볼 수 없었다. 왕궁에 남아 있을 기간이 얼마 되지 않아 조사대의 일이 바빠진 것도 있지만, 더 중요한 건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다는 점일 것이다.
‘아까 조사대 전원이 왕궁으로 돌아왔다고 듣긴 했는데. 혹시 벌써 무도회장에 들어가 있나?’
심란해하던 실비아를 깨운 것은 낭랑한 목소리들이었다.
“다 왔네요. 부인께서 먼저 들어가시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어떤 옷을 입으셨는지 문틈으로 훔쳐보지는 않을 테니까요!”
루베아가 차분하게 대기실의 문을 열어주고, 필리아가 짓궂게 눈을 찡긋했다. 세 사람 모두 드레스 위로 길고 두꺼운 망토를 두르고 있던 터라 그 안에 입은 옷이 어떤지는 전혀 드러나지 않은 상태였다. 친한 사이라고 해도 가면무도회의 묘미를 놓칠 수는 없었으므로 세 사람은 철저히 혼자가 된 상태에서 치장했다. 실비아는 애써 란델에 대한 생각을 지워내며 미소 지었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볼게요.”
“네, 공작님과 즐거운 밤 되세요!”
“혹시 모르니 공작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조심하시고요.”
루베아가 언니 같은 당부를 남기는 모습이 묘하게 우스워, 실비아는 픽 웃음을 흘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대기실 안으로 발을 들이자 등 뒤로 문이 틈 없이 닫혔다. 대기실 안에 있던 사용인이 상자 속에서 얼굴의 절반을 가리는 나비 모양 가면을 꺼내서 건네주었다.
‘……가면을 보니 그때 생각이 나네.’
실비아는 문득 알리사의 스태프 자루를 구하기 위해 암시장 경매에 참석했던 것이 기억나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러고 보니 그 남자는 누구였을까.’
알리사의 스태프가 제게 특별한 의미라고 했던 남자. 그날 이후로 간간이 남자의 말에 대해 생각해 보았으나, 마땅히 떠오르는 인물은 없었다. 상념에 잠긴 실비아의 귓가로 사용인의 물음이 흘러들었다.
“가발도 착용하시겠습니까?”
“……아니, 괜찮네.”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듣자 잡생각이 조금이나마 줄어들었다. 실비아는 직원이 내미는 가발을 거절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완벽한 분장을 위해 가발까지 착용하는 귀족이 더러 있다지만, 귀찮았을뿐더러 란델과 빠르게 만나길 희망하는 실비아에게는 장애물이나 다름없었다. 사용인은 선선히 물러나며 무도회장으로 향하는 입구를 열어주었다.
“그럼, 환상적인 시간 되시길.”
실비아는 망토를 벗어 사용인에게 건네고, 가면을 한번 매만진 후 통로를 향해 발을 떼었다. 무도회장으로 이어진 통로는 어둡고 좁았다. 그곳을 따라 얼마나 걸었을까. 갑자기 주변이 확 트이며 밝은 빛이 쏟아졌다.
“……!”
실비아는 한순간 밝은 빛에 눈을 찡그리며 손을 들어 눈가에 그늘을 드리웠다. 그러자 무도회장의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확실히…… 화려하네.’
듣기로는 결국 탄신연의 습격 사건에 관해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고 했다. 왕은 그것을 만회하려는 듯 무도회장을 공격적으로 꾸며 두고, 무도회장을 호위하는 인력도 대폭 늘려두었다. 마치 그따위 수작질에도 자신은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이 말이다.
‘란델은 어디 있지?’
실비아는 이내 무도회장의 화려함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내젓고는 란델을 찾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또다시 왕세자를 만나 곤욕을 치르는 것은 사양이었다. 그녀는 빠르게 남편을 만나 무도회장을 빠져나갈 생각뿐이었다. * * * 바로 그 시각, 연회장 저편.
‘……실비아?’
가면을 쓴 란델은 인파 너머, 다비드로 보이는 인물과 팔짱을 끼고 있는 여인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