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 바시스 (63/118)

63. 바시스2021.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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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8816257804.jpg‘……실비아?’

가면을 쓴 란델은 인파 너머, 다비드로 보이는 인물과 팔짱을 끼고 있는 여인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란델은 본래 실비아와 함께 무도회에 참석하려 했으나, 혹시나 길이 엇갈릴까 걱정이 되기도 했고, 다른 귀족들이 그를 붙잡는 통에 빠져나오기가 어려워 바로 이곳으로 온 참이었다. 그래서 그는 실비아가 어떤 차림인지, 어떤 분장을 했는지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16558816257804.jpg‘설마 가발을…… 쓴 건가?’

다비드와 함께 있는 여인은 갈색 머리카락을 낮게 틀어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가면 사이로 보이는 황금색 눈만은 멀리서도 선명했다. 란델의 본능은 ‘저 여자는 실비아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다비드가 가면 너머로 묘한 미소를 입가에 건 채 자꾸만 이쪽을 흘긋거리는 것이 신경 쓰였다.

16558816257804.jpg‘아니겠지.’

란델은 다비드에게서 애써 시선을 거두려 했으나 누적된 피로, 실비아로 인해 복잡한 속내 때문에 쉽지 않았다. 한편, 다비드는 란델과 눈이 마주치더니 입꼬리를 비틀며 보란 듯 여인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들이밀고 무어라 속삭였다. 마치 연인들이 밀어를 나누는 듯한 행동에 란델이 반사적으로 주먹을 움켜쥐던 때. 다비드가 도발하듯 그를 힐끔 돌아보고는 여인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바깥으로 모습을 감췄다.

16558816257804.jpg“잠깐……!”

혼란스러운 와중에 다비드와 여인이 사라지자 덜컥 불안감이 엄습했다. 결국 란델은 두 사람을 따라 정원으로 나왔다. 자꾸만 시야에서 아슬아슬하게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뒷모습이 꼭 제 불안을 닮아 있어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돌연 다비드와 여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16558816257804.jpg“……!”

란델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걷다가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제자리에 멈춰 섰다. 조그맣게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둘러보자 사방이 고요했다. 자신이 인기척 하나 없는 어둠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음을 뒤늦게 깨달은 그가 위험을 감지했다.

16558816257804.jpg‘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 판단을 내리며 몸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허공에서 거대한 파도가 쏟아지듯 무형의 압력이 그를 덮쳤다. 반사적으로 무릎이 꺾이며 다리가 휘청였다. 파삭! 오스턴이 만들어주었던 방어용 마법석이 품 안에서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란델은 가물가물한 시야 속, 서서히 제게 다가오는 마법사들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16558816257804.jpg‘다비드……!’

그 순간 강한 충격이 그의 뒷덜미를 강타했다. 란델의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 * *

16558816257884.jpg‘방금 란델을 본 것 같은데.’

실비아는 조금 전, 바깥으로 사라지는 금갈색 머리카락을 본 것도 같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무의식중에 금갈색 머리카락이 사라진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다가 말고 멈칫했다. 문득 심장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16558816257884.jpg‘란델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할까?’

실비아는 스스로의 생각에 잠시 충격 비슷한 것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지금껏 이러한 종류의 고민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란델이 제게 가진 애정을 알고 있기에, 은연중 그가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가정 자체를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 그녀는 얼마나 오만하고 이기적인 사람인가.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애정이라는 확신을 준 란델은 얼마나 강한 사람인가.

16558816257884.jpg“…….”

실비아는 자신이 란델을 찾아 나서는 것이 몰염치한 짓은 아닐까 싶어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바로 그때. 가면을 쓴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16558816276271.jpg“아, 죄송합니다.”

16558816257884.jpg“괜찮…….”

실비아는 상대의 사과에 괜찮다고 답하려다가 제 손에 무언가를 쥐여 주는 느낌에 움찔 말을 멈췄다. 그녀가 미처 붙잡을 새도 없이 정체불명의 인영은 인파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16558816257884.jpg‘뭐지?’

실비아는 제 손안에 들어와 있는 쪽지를 경계심 서린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달리 위험해 보이지 않는다는 확신이 든 후에야 쪽지를 펼쳐 보았다. 그리고 직후.

16558816257884.jpg“……!”

쪽지의 안을 확인한 실비아가 그대로 굳어졌다.

16558816257884.jpg“이게 무슨…….”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황망한 중얼거림을 내뱉었다. 「디아볼로스 거리 44번지. 조용히, 혼자서.」 쪽지의 안에 담긴 것은 문장이라고 하기에도 어려운 짤막한 글귀, 그리고……. 사락. 떨리는 손끝이 쪽지 안에 든 것을 건드리자 사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짧게 잘린 금갈색 머리카락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그것이 누구의 머리카락인지는 자명했다.

16558816257884.jpg‘란델.’

그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굳어 있던 몸이 마법처럼 풀렸다. 실비아는 곧장 몸을 돌려 무도회장 바깥을 향해 뛰었다. 그녀가 막 문을 벗어나 계단에 한 발을 내딛는 순간. 누군가 그녀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16558816276297.jpg“마님!”

막 이동 마법을 사용하려던 실비아가 움직임을 멈췄다.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가면을 벗고 있는 오스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16558816257884.jpg“……오스턴?”

16558816276297.jpg“허락도 없이 마님의 몸에 손을 대서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조금 전에 제가 공작님께 드렸던 보호 마법석이 파괴되는 느낌이 들어서……. 혹시 공작님이 어디 계신지 아십니까?”

실비아의 팔을 놓아주는 오스턴은 드물게도 불안한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만들어낸 보호 마법석을 파괴하려면 적어도 상당한 실력의 마법사가 서넛은 있어야 했다. 란델 또한 검기를 다룰 줄 안다고는 하나, 공격에만 특화된 검기로 마법을 막아내는 데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그의 말에 실비아의 얼굴에 그나마 남아 있던 혈색마저 모조리 빠져나갔다. 그녀는 최대한 이성을 차리려 노력하며 가까스로 대답했다.

16558816257884.jpg“……그래.”

16558816276297.jpg“다행입니다. 그럼 저도 같이…….”

16558816257884.jpg“아니, 자넨 여기 있어.”

16558816276297.jpg“예? 그게 무슨!”

오스턴은 대경해 소리쳤으나 실비아가 한 발 더 빨랐다. 그녀는 오스턴의 말을 듣는 시늉조차 하지 않고 이동 마법을 사용했다.

16558816276297.jpg“마님, 잠깐……!”

오스턴의 당혹한 얼굴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다가 뜨자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실비아는 고개를 들어 낯설지 않은 건물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일전에 스태프를 손에 넣기 위해 찾았던 경매장. 실비아가 아는, 디아볼로스 거리 44번지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바로 이 경매장이었다.

16558816257884.jpg‘44번지…….’

실비아는 건물의 수를 헤아리며 천천히 골목 안쪽으로 발을 옮겼다. 건국제의 밤이니 흥에 겨워 경매에 참가하는 사람이 보일 법도 한데, 주위는 오싹하리만치 조용했다. 빠르게 발을 움직이던 실비아가 무언가를 감지하고는 움찔 걸음을 멈췄다. 황금색 눈이 차게 식어 내리며 걸음이 느려지더니, 이윽고 그녀가 완전히 제자리에 멈춰 섰다. 실비아는 골목 저편을 싸늘히 노려보며 입술을 비틀었다.

16558816257884.jpg“마중이라도 나온 건가?”

44번지로 이어지는 길목. 새카만 망토로 온몸을 가린 자들이 저마다 무기를 들고 서 있었다. 실비아가 던진 말에 공기가 한층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복면인들은 침묵을 유지한 채로 무기를 고쳐 쥐었다. 그 광경을 매섭게 응시하던 실비아는 문득 찾아든 위화감에 미간을 구겼다.

16558816257884.jpg‘……그런데 왜 나를 경계하는 거지?’

복면인들은 분명 ‘실비아 플로레트 벨포르’를 이곳으로 불러냈다. 그 목적이 무엇이건 간에 실비아는 대외적으로 연약하기 짝이 없는, 평범한 귀부인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 저들의 태도는 마치……. 거대한 재앙을 앞에 두고 긴장하는 사람들과 같지 않은가.

16558816257884.jpg“아.”

그 사실을 깨달은 실비아의 입에서 탄성 비슷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녀가 헛웃음을 지으며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16558816257884.jpg“그래.”

그 움직임과 말소리에 복면인들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들의 반응이 실비아의 추측에 확신을 더해주었다. 희고 가는 손 틈으로 황금색 눈이 맹수처럼 번뜩였다.

16558816257884.jpg“굳이 확인을 해야겠다면 못 해줄 것도 없지.”

저들은 실비아가 마법사, 그것도 대단한 실력의 마법사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어디서 그 사실이 새어나간 것인지는 모르나, 저들은 도를 넘었다. 더는 거리낄 게 없어진 실비아가 마력을 움직였다. 허공에 나타난, 새로이 마법석을 끼워 넣은 스태프를 그러쥔 그녀가 조용히 입술을 뗐다.

16558816257884.jpg“다만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손바닥에 닿는 익숙한 감촉조차 달갑지 않았다. 이만큼 분노한 건 지난번 벨라가 란델을 건드렸던 사건 이후 처음이었다.

16558816257884.jpg“감히 나를 시험하고 내 남편을 위협한 값은…….”

짙은 안개와도 같은 살기가 스멀스멀 복면인들을 덮쳤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숨을 죽이며 제각기 검기와 마법을 사용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조차도 자연재해와도 같은 마법 능력 앞에서는 모조리 의미를 잃었다.

16558816257884.jpg“목숨으로만 받아낼 테니까.”

실비아는 친절히 죽음을 예고해준 후, 망설임 없이 스태프를 휘둘렀다. * * * 콰지직, 우득. 난폭한 소음이 골목을 가로질렀다. 비명조차 지를 새 없이 일격에 숨을 끊어놓는 손속이 외려 더욱 공포스러웠다.

16558816257884.jpg‘34번지.’

복면인들은 최선을 다해 실비아에게 덤벼들었으나 의미는 없었다.

16558816257884.jpg‘40번지.’

그녀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마력으로 제게 달려드는 복면인들을 밀쳤고, 그들은 그대로 벽 혹은 바닥에 처박혀 목뼈가 부러져 즉사했다. 실비아가 지나간 자리에 생명이라곤 남지 않았다. 그녀는 팔다리가 꺾인 인형처럼 널브러진 복면인들의 시신을 뒤로한 채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16558816257884.jpg‘……44번지.’

쪽지에 적혀 있던 장소 앞에서 실비아가 걸음을 멈췄다. 44번지는 굉장히 외진 곳에 있는, 작은 창고와도 같은 건물이었다. 실비아는 잠시 숨을 고르며 건물 안의 기척을 살폈다. 하지만 오던 길과 대조되게 건물 안에는 두 사람의 기척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아마도 하나는 란델의 기척. 다른 하나는…….

16558816257884.jpg‘이 일을 꾸민 사람.’

실비아가 무감정한 얼굴로 스태프를 고쳐 쥐었다. 이 일을 꾸민 것이 누구건 간에, 그녀가 치우고 온 자들처럼 숨을 거두게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그녀가 가진 능력이 새어나갈 걱정도 없으니까. 생각을 정리한 실비아는 문고리로 손을 뻗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뱀의 비늘 같아 어쩐지 소름이 돋았다. 문고리는 삐걱거리는 소리조차 없이 부드럽게 돌아갔다. 문이 열리자 건물 안의 광경이 드러났다. 소박한 1층 건물 안에는 가구라고 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저편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란델과.

16558816309171.jpg“……하하.”

그의 몸 위에 앉은 채 웃음을 터트리는 인영뿐이었다. 실비아는 건물 안에 발을 들이자마자 란델이 제대로 숨을 쉬고 있는지 확인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란델은 머리 쪽에서 약간의 피가 흐르는 것을 빼면 별다른 상처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정도로도 실비아의 이성을 날리기에는 충분했다. 그녀는 이를 갈며 주모자의 얼굴을 확인한 즉시 그를 죽일 생각으로 시선을 들었다. 하지만 눈을 들어 올리는 순간.

16558816257884.jpg“……당신.”

전혀 예상치 못한 얼굴을 발견한 실비아가 눈을 크게 떴다. 란델의 위에 올라앉은 이 일의 주모자. 그는 분명 경매장에서 실비아와 스태프를 두고 다투었던 41번 참가자였다. 그때와 똑같은 옷차림에, 모양새는 조금 다르지만 동물의 머리뼈 가면까지 그대로였다. 실비아는 지나치게 놀란 나머지 란델의 몸 위에서 그를 끌어내려야 한다는 것조차 일순 잊었다. 그사이, 남자는 한 손에 얼굴을 파묻은 채 미친 사람처럼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16558816309171.jpg“아아, 역시 당신이…….”

손 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음성에는 광기 어린 희열이 담겨 있었다.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웃던 남자가 별안간 몸을 일으키더니 실비아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16558816257884.jpg“오지 마.”

실비아는 반사적으로 마법을 사용해 남자에게 칼날과도 같은 바람을 날렸다. 하지만 남자는 바람에 어깨와 다리가 찢어져 피가 흐르는 데도 그녀에게 다가오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에 당황할 새도 없이 남자가 실비아의 코앞에 섰다. 그녀에게 키스할 것처럼 가까이 얼굴을 들이민 그가 은근히 속삭였다.

16558816309171.jpg“정말 날 알아보지 못하겠어?”

16558816257884.jpg“그게 무슨 소리…….”

실비아는 남자가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하고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남자에게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진다 싶더니, 그의 발밑에서 솟아난 그림자가 그의 등 뒤로 검은 날개가 되어 펼쳐졌다. 그것을 본 실비아가 충격으로 눈을 부릅떴다.

16558816257884.jpg‘어떻게.’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야. 하지만 그녀의 입은 주인의 의지를 배반하고 멋대로 멍한 부름을 흘려보냈다.

16558816257884.jpg“……바시스?”

그에 탄식 같은 숨을 내뱉은 남자가 손을 들어 가면을 이마 뒤로 넘겼다. 왕세자 다비드의 얼굴이 실비아를 보며 다정히 웃고 있었다.

1655881632497.jpg“오랜만이야, ……알리사.”

지나치게 다정해서 목이 졸릴 것처럼 느껴질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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