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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함락 (64/118)

64. 함락2021.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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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랑- 흰빛의 긴 머리카락이 밤바람에 하늘하늘 흩날렸다. 실비아는 정원 구석의 분수대에 걸터앉은 채 불이 환하게 밝혀진 황궁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16558816396012.jpg‘……사실 이건 다 꿈이 아닐까.’

그러나 그렇다기에는 무릎 위로 내려앉는 온기 어린 숨이 선명하고, 또 따뜻했다.

16558816396012.jpg“…….”

분수대에 걸터앉은 실비아는 제 무릎 위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는 란델을 복잡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을 눈에 담자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이 다시금 머릿속을 잠식했다.

16558816396012.jpg-……바시스?

  왕세자 다비드가 자신이 경매장에서 마주했던 41번 참가자였다는 것. 그리고 동시에 그가 제 손으로 목을 날렸던 ‘마왕 바시스’의 기억과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 둘 중 어떤 것이 더 충격적이었는지는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다비드는 실비아가 ‘바시스’의 이름으로 그를 부르는 순간 길게 입꼬리를 늘였다.

16558816396026.jpg-오랜만이야, ……알리사.

  그는 기묘한 만족과 깨달음이 묻어나는 얼굴로 실비아의 머리카락을 쥐고 그 끝에 짙게 입을 맞췄다. 화답하듯 흘러나온 ‘알리사’라는 부름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실비아는 본능적으로 주춤 물러났다. 그도 그럴 것이 바시스는 자신을 죽인 알리사를 증오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특별한 이의 유품이라며 자신의 스태프를 탐내던 모습이나, 지금처럼 연인을 바라보듯 저를 보는 시선은 결코 정상적이지 않았다. 다비드는 실비아가 그에게서 물러서자 선선히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 틈새로 흘려보내며 웃었다.

16558816396026.jpg-조금 섭섭한데. 그대는 내가 반갑지 않나 보지?

16558816396012.jpg-……반가워해야 할 상대가 있고 아닌 상대가 있는 법이지.

  서로를 알아본 두 사람의 어투가 달라졌다. 실비아는 경계심 서린 눈으로 그에게서 한 발 더 거리를 벌렸다.

16558816396012.jpg-대체 어떻게 당신이…….

16558816396026.jpg-어떻게 기억을 유지한 채 인간으로 환생했냐고? 글쎄. 그 부분은 신께서 실수라도 하신 것인지…… 나조차도 이유를 모르겠어서 말이야.

  ‘신’이라는 단어에 실비아의 어깨가 반사적으로 움찔 떨렸다. 그 작은 움직임을 눈치챈 다비드가 눈을 한번 깜박이더니, 이내 무언가를 깨달은 듯 비릿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16558816396026.jpg-……그러는 그대야말로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것을 보면, 그때의 일로 신께 벌이라도 받은 것인가?

16558816396012.jpg-그 입 닥쳐.

16558816396026.jpg-맞나 보군.

  실비아가 입술을 깨물며 경고했다. 하지만 그를 무시한 다비드가 다시 거리를 좁히더니 엄지로 그녀의 입술을 지그시 누르며 미간을 찡그렸다.

16558816396026.jpg-그러다가 피라도 보면 어쩌려고.

  서걱- 스스럼없이 제게 손을 대는 그의 태도가 거슬렸던 실비아가 마법으로 그의 손에 상처를 냈다.

16558816396026.jpg-…….

  다비드는 잠시 피가 뚝뚝 흐르는 제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돌연 혀를 내밀어 제 피를 핥았다. 그 행동을 하는 도중에도 진득한 보랏빛 눈은 실비아에게 꼼짝없이 고정된 채였다.

16558816396012.jpg-……미친놈.

  실비아는 질린다는 듯 중얼거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다비드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16558816396026.jpg-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보면 상처받아. 내가 꽤나 연약하고 섬세한 사람이라서.

16558816396012.jpg-헛소리하지 마. 지금 당신의 태도를 미쳤다는 말 외에 다른 말로 설명할 수 있기는 해?

16558816396026.jpg-하긴, 그렇지. 나조차도 그대를 죽여버리고 싶은 건지, 아닌지…… 잘 알 수 없으니.

  그 말에 실비아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긴장시켰다. 하지만 다비드는 직후 언제 살벌한 말을 내뱉었냐는 듯 산뜻하게 웃었다.

16558816396026.jpg-그렇지만 그대가 반가운 건 진심이야. 나는 우리의 뜻이 잘 맞을 것 같거든.

16558816396012.jpg-뜻이라고?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실비아의 미간이 좁아졌다. 다비드는 그런 그녀를 향해 더없이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16558816396026.jpg-그대.

16558816396012.jpg-…….

16558816396026.jpg-나와 손을 잡는 것은 어때?

  실비아는 순간 어이가 없는 나머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그녀가 입을 열어 대답을 내뱉는 것보다 다비드가 말을 잇는 것이 빨랐다.

16558816396026.jpg-우연일지 운명일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이렇듯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버렸고, 이 몸뚱이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거든. 인간은 나약해 빠졌으니.

  다비드는 실비아로 인해 상처가 생긴 손을 내려다보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리 큰 상처가 아니었음에도 아직 상처에서는 피가 멎지 않고 있었다. 혀를 한번 쯧, 하고 찬 그가 어둠으로 상처를 지혈하듯 눌러두고는 선언했다.

16558816396026.jpg-나는 마왕의 자리를 되찾을 거다.

16558816396012.jpg-……뭐?

16558816396026.jpg-그러니 그대도 나와 함께 가는 것이 어때? 그대를 그렇게 만들었던 인간들을 남김없이 죽이고, 부수고, 취해서 복수하는 거야.

  다비드가 달큼한 미소를 머금은 채 유혹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의 눈에는 실비아가 당연히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확신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바시스’는 알리사가 켈베티아에 떨어진 이유가 무엇인지, 그녀가 어떻게 망가졌는지 가장 속속들이 알고 있는 존재였다. 자신을 패배시켰던 알리사가 결국 신인지 누구인지 모를 이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은 썩 불쾌했으나. 그것과 별개로 그녀가 자신과 같은 시대에, 제 눈앞에 살아 있다는 것은 여러모로 달가웠다. 모든 것을 바쳤던 인간에게 배신당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신에게 벌을 받은 사람.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전력이자 동료가 아닌가.

16558816396012.jpg-……하.

  한편, 실비아는 다비드의 제안을 듣자마자 그의 등 뒤에 있는 란델에게 시선이 갔음을 한발 늦게 깨닫고 탄식 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다비드의 제안은 명백히 신을 거스르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런 제안을 들었다는 것만으로도 또다시 신의 노여움을 사진 않을까 걱정해야 할진대.

16558816428351.jpg-실비아.

  그보다는 저를 부르며 웃던 란델의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그다음으로는 항상 제게 뭔가를 해주고 싶어 안달하던 플로레트 백작 부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외에도 루베아, 필리아, 벨포르 성의 사용인 등. 이번 생에서 란델과 함께 여러 번 저를 놀라게 했던 사람들의 선택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갔다.

16558816396012.jpg-…….

  목구멍이 온통 진득한 무언가로 틀어 막힌 기분이었다. 실비아는 차마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다비드는 그 행동을 망설임이라 해석했는지 어깨를 으쓱했다.

16558816396026.jpg-뭐, 그대에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답은 다음에 듣겠어.

  이어서 그가 턱짓으로 제 어깨 너머의 란델을 가리켰다.

16558816396026.jpg-저 녀석도 이제 곧 깨어날 것 같으니, 데려가. 어차피 저 녀석은 그대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였을 뿐이니까.

  란델을 힐긋 돌아보는 그의 눈에 한순간 진한 불쾌감이 서렸다. 그러나 다비드는 이윽고 실비아를 돌아보며 숨이 막힐 만큼 다정하게 웃었다.

16558816396026.jpg-그래도 나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말아줘, 그대. 곧 만나러 갈게.

  이후의 기억은 드문드문 이어졌다. 실비아는 자신이 무슨 정신으로 그곳에서 란델을 데리고 나왔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다비드, 아니, 바시스의 존재도, 그가 한 제안도. 온통 현실감 없는 것들뿐이라 도통 이성을 되찾기가 힘들었다. 그때 자그마한 신음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16558816428351.jpg“으음.”

16558816396012.jpg“……란델? 정신이 들어요?”

실비아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제 무릎을 베고 누워 있는 란델을 살폈다. 닫혀 있던 란델의 눈꺼풀이 움찔 떨리는가 싶더니 이내 혼몽한 연녹색 눈이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가 아픈지 미간을 찡그린 채 눈을 깜박이던 그가 이내 실비아를 알아보고는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16558816428351.jpg“실비아?”

16558816396012.jpg“갑자기 움직이지 말아요. 그랬다간…….”

16558816428351.jpg“윽…….”

실비아는 다급히 란델을 붙잡았다. 그녀가 란델을 붙잡는 것과 동시에 그가 어마어마한 현기증에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크게 휘청였다. 란델은 실비아 덕에 간신히 넘어지는 걸 모면하고 그녀의 곁에 주저앉았다. 그는 지금의 상황이 혼란스러운지 고개를 좌우로 내저으며 물었다.

16558816428351.jpg“당신이 왜 여기에…… 난 분명…….”

란델은 두통 탓에 잘 떠오르지 않는 기억을 애써 더듬었다. 분명 무도회장에서 다비드와 함께 사라지는 실비아를 보고, 그들을 따라서 정원으로 나왔다가…….

16558816428351.jpg“……!”

다비드가 제게 했던 짓을 떠올린 란델의 얼굴이 급격히 창백해졌다. 다비드가 굳이 자신을 노린 이유가, 설마 실비아에게 무언가 해를 끼치려던 의도가 아닌가 싶어서였다. 그는 황급히 몸을 돌려 실비아를 샅샅이 살폈다.

16558816428351.jpg“괜찮습니까, 실비아? 어디 다친 곳은?”

16558816396012.jpg“저는 괜찮아요. 무도회장에서 당신이 보이지 않아서 찾으러 나왔는데…… 정원 구석진 곳에 쓰러져 있더군요. 단순히 잠든 것처럼 보여서 우선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16558816428351.jpg“제가 그곳에 그냥…… 쓰러져 있었단 말입니까?”

16558816396012.jpg“네. 너무 과로했던 거 아니에요?”

실비아는 란델이 정신을 잃은 동안 미리 준비해두었던 말들을 늘어놓으며 필사적으로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녀는 란델에게 자신에 대해서도, 바시스에 대해서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 그러니 결국 입 밖으로 내뱉는 것은 또다시 이러한 거짓투성이의 말뿐.

16558816428351.jpg‘왜 나를 그 자리에 굳이 그대로 두고 간 거지? 분명 좋지 않은 일을 저지를 것 같은 태세였는데.’

왕궁 마법사들까지 동원해서 그를 속박했으면서, 그를 그대로 내버려 두고 떠났다니. 묘하게 아귀가 맞지 않는 말인지라 란델은 반신반의하는 눈으로 실비아를 응시했다.

16558816428351.jpg‘그럼 그때 다비드와 함께 나갔던 게.’

실비아가 아니었나? 그러한 생각이 드는 순간. 마음 한구석에서 퍼지는 묘한 안도감을 발견한 그가 충격으로 굳어졌다.

16558816428351.jpg‘나는…….’

란델은 헛웃음을 흘리면서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실비아는 갑작스럽게 제게서 멀어지려 하는 그의 모습에 당황해 그를 따라서 일어났다.

16558816396012.jpg“란델?”

16558816428351.jpg“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16558816396012.jpg“왜 그러는 거예요. 지금 당신 상태가…….”

16558816428351.jpg“실비아, 제발.”

애원 같은 말이 흘러나오자 실비아가 흠칫하며 움직임을 멈췄다. 란델은 끝내 자신의 힘만으로 불이 환히 밝혀진 황궁을 뒤로하고 섰다. 빛을 등지고 선 그의 얼굴에서 짙게 묻어나는 것은 차마 씻을 수도 없는 자괴감이었다.

16558816428351.jpg‘자칫하면 실비아에게 위험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다비드가 란델을 노렸다. 그는 곧 란델 때문에 실비아 또한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다비드가 란델을 자극할 목적으로 실비아에게 접근하는 지금. 그가 란델을 미끼삼아 실비아에게 위해를 끼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데…….

16558816428351.jpg‘짐승만도 못한 놈.’

란델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실비아가 다비드와 함께 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가장 먼저 ‘염려’가 아닌 ‘안도’를 느낀 스스로에 지독한 혐오감이 일었다. 결국 란델은 엉망이 된 얼굴로 웃어버렸다. 괴롭게 일그러진 눈매를 타고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16558816428351.jpg“미안합니다.”

16558816396012.jpg“……란델?”

16558816428351.jpg“나는 죄 없는 당신을 위험하게 하는, 너무도 모자란 사람인데…….”

이성적으로는 지금이라도 실비아와 거리를 두어야 했다. 거리를 두고, 상상하기조차 싫지만 이혼이라는 강수를 두어서라도 다비드의 손에서 실비아를 지켜야 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추악한 소유욕과 집착이 이성적인 판단을 막았다. 그녀를 내 곁에서 떠나보내고 싶지 않다. 그녀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녀가 나를…… 나만을 봐줬으면 좋겠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욕망들이 속속들이 머리를 쳐들었고, 란델은 끝내 고해하듯 제 마음을 털어놓았다.

16558816428351.jpg“사실 안도했습니다.”

16558816396012.jpg“…….”

16558816428351.jpg“당신이 무도회장에서, 왕세자를 따라가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습니다.”

눈물 탓에 시야가 흐린 것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란델은 흐린 시야 너머로 보이는 새하얀 인영에 시선을 고정한 채 울며 웃었다.

16558816428351.jpg“……미안합니다, 실비아.”

16558816396012.jpg“…….”

16558816428351.jpg“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펑-! 그 순간, 불이 환히 밝혀진 황궁 위로 색색의 불꽃이 꽃처럼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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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제의 빛이 어둑한 정원을 환히 밝히고, 울고 있는 란델의 얼굴에도 빛을 드리웠다. 그리고 그 모습을 눈에 담고, 그 고백을 귀에 담은 실비아는 무언가 무너지는 환청이 들리는 듯해 나지막이 신음했다.

16558816396012.jpg‘아.’

그것은 그녀가 필사적으로 두르고 있던 마음의 벽이 모조리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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