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침범2021.11.11.
‘아…….’
실비아는 색색의 불꽃이 피어나는 밤하늘을 배경으로 울고 있는 란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져 산산이 조각나는 기분이 꼭 이러할까. 실비아는 끝내 우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인정했다. 나는 결코 저 사람의 마음을 외면할 수 없노라고.
“……란델.”
낮게 입을 연 실비아가 걸음을 떼어 란델에게 다가갔다. 란델은 이제 피할 의지조차 사라졌는지 제자리에 가만히 선 채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실비아는 잠시간 그런 그의 얼굴을 가만히 눈에 담다가 손을 뻗었다. 흰 손이 란델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자 그가 반사적으로 눈물을 떨치기 위해 눈을 깜박였다.
“……!”
다음 순간, 고개를 기울인 실비아가 란델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입술로 닦아냈다. 더없이 조심스럽고도 깃털 같은 움직임. 놀라 굳어진 란델은 실수로라도 신음을 흘리지 않기 위해 주먹을 움켜쥐어야 했다. 그는 실비아의 행동에서 묻어나오는 애정이 분명 제 망상에서 비롯된 착각이라 애써 치부했다.
“란델.”
이윽고 란델의 얼굴에서 눈물을 전부 거두어낸 실비아가 고개를 뒤로 물렸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감싼 손은 거두어들이지 않은 채였다. 실비아는 양손으로 란델의 얼굴을 소중히 감싼 채 나지막이 입술을 달싹였다.
“……나는 당신의 질투가 기분 좋아요.”
그 말에 란델이 눈을 크게 떴다. 의식적이라기보다는 본능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그 모습을 본 실비아는 어쩐지 홀가분하기까지 한 기분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당신의 시선이 늘 내게 머물렀으면 좋겠고.”
“…….”
“당신의 신경이 온통 나 하나만을 향했으면 좋겠고…….”
“…….”
“당신이 나를 욕심내고, 내 행동 하나하나에 웃음 짓고 눈물 흘렸으면 좋겠어요.”
란델은 별안간 귓가로 쏟아지는 고백들을 미처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숨만 멈추었다. 아, 이건 내 그리움과 추악함이 빚어낸 허상이구나. 갈 곳을 잃은 마음이 결국 나를 온통 집어삼켜 이와 같은 환상에 빠트렸구나. 란델은 필사적으로 그리 생각하려 했으나 제 볼을 감싼 온기, 머리 위의 하늘에서 불꽃이 터지는 소리. 나뭇잎이 밤바람에 저들끼리 몸을 스치는 소리조차 너무도 선명했다. 꿈이, 아니다. 란델이 벼락같은 깨달음을 얻는 순간 실비아가 자조적인 미소를 띠며 중얼거렸다.
“이런 나야말로 당신에게 미안해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실비아의 고백을 차마 진실로 받아들이지 못해 굳어 있던 란델이 뒤늦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처연히 일그러지는 얼굴을 눈에 담던 실비아의 눈에서도 빗물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조금 전의 란델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는 동시에 웃으며 자그맣게 속삭였다. 흰 손끝이 란델의 볼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우리, 아무래도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네요.”
“…….”
“그렇죠?”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실비아의 속삭임이 끝나는 순간,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절박한 손길로 서로를 끌어당겼다. 펑-! 갈급한 입술이 맞닿는 순간, 거짓말처럼 또다시 형형색색의 불꽃이 하늘을 수놓았다. 그 아래서 한 몸처럼 엉킨 란델과 실비아가 정신없이 입을 맞추었다. 숨을 섞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기꺼이, 남김없이 침범당하기를 택했다. 사랑이었다.
* * *
“으…….”
다음 날 아침. 실비아는 오래간만에 극심한 피로를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온몸이 자갈밭에서 구르기라도 한 양 욱신거렸다. 목 안쪽이 누군가 긁어낸 것처럼 따끔했다.
‘물이 어디 있지…….’
실비아는 침대에 팔꿈치를 대고 힘겹게 상체를 일으켰다. 이불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리는 감각이 어쩐지 평소보다 간지러웠다. 그 간단한 동작에도 온몸을 짓누르는 뻐근함에 질식할 것 같았다. 그녀가 물잔을 찾아 협탁 쪽을 돌아보는 찰나, 기다렸다는 듯 손안에 차가운 유리잔의 감촉이 느껴졌다.
“여기 있습니다.”
“아, 고맙…….”
까끌까끌해진 목소리로 대답하던 실비아가 멈칫 움직임을 멈췄다. 시선을 돌리자 탄탄한 상체를 고스란히 드러낸 채 개운하게 웃고 있는 란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실비아.”
“…….”
“실비아?”
란델은 실비아가 정지한 채 미동도 하지 않자 말간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 움직임을 보자 퍼뜩 이성이 돌아옴과 동시에 간밤의 기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니까…….’
란델이 그녀에게 고백했고. 그녀 또한 거기에 휩쓸려 마음을 고백……했고. 그렇게 정신을 놓고 입을 맞추다가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 보니 두 사람은 침대에서 나신으로 얽혀 있었다.
‘……어쩐지 이불이 간지럽더라니.’
그녀는 뒤늦게 자신이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자각하고 물잔을 쥐지 않은 손으로 이불을 끌어 올려 상체를 가렸다.
‘음. 배우는 게 빨랐지…….’
실비아는 모든 기억을 떠올린 후에야 지금의 이 상황을 납득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란델이 건네준 물잔을 기울여 물을 넘기자 목 안쪽이 텁텁하던 것이 나아졌다. 하지만 그것과 근육통은 별개였던지라, 실비아가 허리를 짚으며 끙 소리를 내자 란델이 그녀에게서 잔을 빼앗고 그녀를 도로 눕혔다.
“많이 아프십니까?”
“조금요. 그건 그렇고…….”
실비아는 자연스럽게 베개를 베고 이불 속으로 파고든 채로 란델을 빤히 응시했다. 그녀가 조금 불만스럽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괜찮아요?”
“크게 불편한 곳은 없습니다.”
“왜지?”
“예?”
“왜 혼자 멀쩡한 거죠? 분명 나보다 몇 배는 많이 움직였을 텐데?”
“…….”
실비아는 진심으로 억울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밤. 처음에는 실비아가 란델을 이끌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본능적으로 제가 해야 할 일을 깨달은 란델이 폭주하듯 날뛰었기에 실비아의 온몸은 지금도 비명을 지르는 중이었다. 그런데 정작 날뛴 사람이 저리 멀쩡해 보이니 괜스레 심술이 솟았다. 실비아의 말에 란델은 귀엽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고 몸을 숙였다. 그가 그녀의 얼굴 곳곳에 자잘하게 입을 맞추기 시작하자 실비아가 어깨를 움츠렸다.
“간지러워요.”
“그러십니까?”
“……당신 뻔뻔해졌네요. 원래는 간지럽다고 했으면 바로 미안하다고 하고 물러났을 사람이.”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부인께서도 어제 제 몸에…….”
“그만.”
실비아는 란델의 말로 인해 어젯밤 제가 했던 짓을 떠올리고는 급하게 손을 뻗어 그의 입을 막았다. 하지만 란델은 생각해보니 억울했는지 자꾸만 고개를 피해 말을 이으려 했다.
“부인께서야말로 제가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읍.”
“그만하라니까.”
두 사람은 잠시간 엎치락뒤치락 실랑이를 벌였다. 실비아는 필사적으로 란델의 입을 막으려다가 일순 허리에 힘이 풀려 그의 몸 위로 풀썩 엎어졌다.
“실비아, 괜찮으십니까?”
란델은 그제야 장난을 멈추고 황급히 그녀를 살폈다. 하지만 실비아는 묘한 얼굴로 그의 몸에 닿아 있는 제 손을 꼼지락거렸다.
“…….”
“……실비아?”
“전에도 몇 번 느꼈던 건데, 당신 몸이 정말 좋네요. 무슨 돌이라도 깎아놓은 것처럼.”
“잠깐…… 읏.”
란델은 한발 늦게 이상함을 감지하고 실비아를 말리려 했으나 그녀가 그의 복부 한가운데를 손가락으로 쿡 찌르자 급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실비아.”
란델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신음을 참느라 애썼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실비아는 더없이 심각한 얼굴로 그의 몸, 특히 가슴 부근을 매만질 뿐이었다.
‘……나보다 큰 거 아냐?’
실비아가 상당히 합리적인 의문에 잠겨 있을 무렵. 결국 참다가 못한 란델이 실비아의 손목을 아프지 않게 잡아챘다. 그의 목소리는 가뭄 든 땅처럼 잔뜩 갈라져 있었다.
“……아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그만…… 하십시오.”
“왜요?”
“정말 몰라서 물으십니까.”
실비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란델은 금방이라도 상대를 집어삼킬 듯 짙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잠시간 란델과 시선을 마주하던 실비아가 불현듯 흠, 하고 웃었다. 직후, 보란 듯 손끝으로 그의 가슴팍을 간질인 그녀가 여우처럼 눈을 사르르 휘었다.
“알고 이러는 건데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과 웃음에, 순식간에 속에서 불길이 훅 이는 기분이었다. 찰나 굳어 있던 란델이 눈 깜짝할 새에 실비아의 허리를 낚아채 그녀를 덮치듯 몸을 겹치고는 사납게 웃었다.
“……지금 본인이 무슨 말을 한 건지는 알고 계십니까, 부인.”
실비아는 란델의 기세가 심상치 않자 당황해 눈을 깜박였다. 그녀가 뒤늦게 ‘장난이었다’라고 말하려 입술을 달싹였으나 란델의 말이 먼저였다.
“설마 이제 와 장난이었다는 말을 하지는 않을 거라 믿습니다.”
“…….”
경고와도 같은 말에 막 벌어지려던 실비아의 입술이 딱 달라붙었다. 금색 눈이 드물게도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장난이 너무…… 심했나?’
결국 실비아는 아침부터 느지막한 오후가 될 때까지 침대를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채. 란델을 함부로 도발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톡톡히 깨달아야 했다. * * * 시간은 눈 깜짝할 새 흘렀다. 건국제 무도회의 피로를 풀던 귀족들이 하나둘 짐을 챙겨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며칠간 방 안에 틀어박혀 있던 란델과 실비아도 뒤늦게 북부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오스턴은 짐마차 끄트머리에 삐딱하게 걸터앉은 채 기지개를 켰다.
“아이고, 이 징글징글한 수도도 드디어 안녕이네요. 혹시라도 여기에 뼈를 묻게 되는 건 아닐까 싶어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아십니까?”
“오스턴. 쓸데없는 소리 할 기운 있으면 이동 마법진에나 집중하도록.”
“제가 기운이 있기는 어디에 있다고 그러십니까? 오히려 주군께서는 건국제 이후로 방에 틀어박혀 쉬시더니 얼굴이 이상하게 좋아지셨습니다?”
“크흠.”
오스턴이 수상하다는 듯 란델을 이리저리 관찰했다. 란델은 애써 표정을 갈무리하며 헛기침을 했고, 실비아는 란델의 등 뒤로 슬그머니 몸을 숨겼다. 체력이 없어 기진맥진한 것과 별개로 얼굴빛이 좋아진 것은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때 저 멀리에서 소란이 번져왔다. 실비아가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란델과 함께 몸을 돌려 소란이 이는 방향을 확인한 그녀의 얼굴이 굳어졌다. 왕세자 다비드가 새하얀 망토를 보란 듯 펄럭이며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윽고 두 사람의 앞에 멈춰 선 다비드가 입을 열었다.
“벨포르 공작. 그리고…… 공작 부인.”
“……왕세자 전하를 뵙습니다.”
란델과 실비아는 내키지 않았으나 다른 귀족들의 눈도 있고 하여 공손히 예를 갖췄다. 란델도 함께 부르긴 했으나, 다비드의 시선은 멀리서부터 실비아 하나에 오롯이 고정되어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도 그 진득한 시선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기분이라 란델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얼굴을 찌푸렸다. 등 뒤로 감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왜 온 거지?’
실비아는 반사적으로 긴장했다. 다비드의 정체가 마왕 바시스의 환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긴장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실비아는 다비드가 ‘바시스’라는 진실을 손에 쥐고 있었으나, 그것은 실비아가 ‘알리사’라는 것을 아는 다비드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모두 서로의 약점을 쥐고 있는 셈이니 다비드가 그녀의 정체를 함부로 폭로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원체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인지라 불안감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다비드는 실비아가 긴장했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인지 눈을 가늘게 접으며 입꼬리를 길게 늘였다.
“아직 떠나지 않아 다행이군. 그대들에게 신세 진 것이 많은데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보내게 되면 어쩌나 걱정했거든.”
성큼 거리를 좁힌 그가 그녀의 손을 들어 올려 손등에 짙게 입을 맞추었다. 미처 막을 새도 없이 벌어진 일에 벨포르 소속 사용인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움찔했다. 실비아의 손등에 입술을 묻은 다비드가 은근슬쩍 그녀의 살갗을 깨물어 흔적을 남기려던 순간. 실비아가 그의 손안에서 제 손을 휙 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