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내 취향은 온통 당신2021.11.15.
실비아의 손등에 입술을 묻은 다비드가 은근슬쩍 그녀의 살갗을 깨물어 흔적을 남기려던 순간. 실비아가 그의 손안에서 제 손을 휙 빼냈다. 실비아는 방어하듯 양손을 아래로 모아 쥔 채 말문이 막히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배웅에 이만하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전하. 감사합니다.”
“…….”
다비드는 순식간에 텅 비어버린 제 손을 묘한 낯으로 내려다보다가, 곧 픽 웃음을 흘리고는 그녀에게만 들리게 속삭였다.
“곧 대답을 들으러 가지.”
“…….”
“그대가 긍정적인 대답을 돌려주길 기대하지.”
그 말에 다비드의 제안을 상기한 실비아가 굳어졌다. 심장이 작게 쿵쿵 울렸다. 그녀는 분명 란델을 사랑하며, 그와 벨포르의 사람들로 말미암아 인간의 선의라는 것을 조금은 믿게 되었다. 하지만 과연 ‘모든 인간’이 그러한가? ‘인간’에게 가치가 있는가? 그리 묻는다면 실비아는 아직 선뜻 ‘그렇다’라는 대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부디 북부까지 돌아가는 길이 평안하길 진심으로 기원하지. 그럼.”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다비드는 그 속삭임을 끝으로 말끔한 ‘왕세자’의 태도로 돌아갔다. 고개를 가볍게 까딱한 그가 시종들을 이끌고 멀어졌다. 그제야 가늘게 숨을 내뱉은 실비아가 란델을 돌아보았다. 란델은 다비드가 상당히 멀어졌음에도 여전히 그의 등 뒤에 시선을 고정한 채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실비아는 행여 란델의 마음이 상했을까 봐 걱정되어 그의 손을 살짝 잡았다.
“란델.”
그 부름에 란델이 황급히 표정을 풀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부인.”
그녀는 제게 애써 웃어 보이려는 그를 안쓰러운 기색으로 눈에 담다가 아, 하며 입을 열었다.
“그 왜, 건국제 전날 밤에 내가 하려던 말이요.”
“건국제 전날 밤이라면…….”
란델은 실비아의 말을 듣고 기억을 더듬다가 흠칫했다. 건국제 전날 밤이라면.
-굳이 이야기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건 그렇고 밤이 늦었는데, 괜히 저 때문에 부인께서도 잠들지 못하고 계셨던 것이 아닌지……. 저는 괜찮으니 이만 쉬러 가십시오.
그가 실비아가 왕세자와 우연한 만남을 가졌다는 소식에 마음이 상해 그녀를 밀어낸 날이 아닌가.
‘내가 미쳤지.’
뒤늦게 그 추태 아닌 추태를 기억해낸 란델은 사색이 되었다. 그가 사과를 위해 입술을 움직이려 했으나 실비아의 말이 먼저였다.
“그때 왕세자 전하께서 제게 이상형이 무엇인지 물어보셨다고 했었죠.”
“실비아, 그, 그때는 제가…….”
“당신이라고 했어요.”
“……예?”
란델은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그가 하려던 말조차 잊고 멍하니 되묻는 사이, 실비아는 홀로 마차에 올라타며 샐쭉 웃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못을 박았다.
“내 취향은 온통 당신이라고요.”
“그, 예?”
“안 탈 거예요?”
란델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버벅거리며 되물었다. 그러나 실비아는 금세 시침을 뚝 떼고 태연히 마차의 문을 노크하듯 두드렸다. 뒤늦게 실비아의 말을 제대로 받아들인 란델이 주르륵 흘러내리듯 주저앉았다. 그는 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쪼그려 앉은 채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머리카락 아래로 살짝 튀어나온 귀는 터질 것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직후 실비아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허공을 울린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 * * 란델과 실비아를 비롯한 북부 일행은 오스턴의 마법진을 타고 북부 근처에 도착했다. 그대로 성까지 직행할 수 있었다면 좋았으련만, 기사 한 명이 이동 마법에 익숙하지 않은 관계로 심한 토악질을 하며 앓아눕는 상황이 벌어졌다. 결국 일행은 무리해서 이동하지 않고 기사의 상태가 호전될 때까지 이곳에서 머물기로 했다.
“기사들이 정리를 끝낼 때까지 산책이라도 하고 올까요.”
“좋아요.”
란델의 제안에 실비아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란델이 먼저 마차에서 내려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 여긴…… 그때 그곳이네요?”
실비아는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리다가 이곳이 결혼식 날 습격을 받았던 장소임을 상기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란델은 그녀가 그때와 비슷한 일이 벌어질까 두려워한다고 여겼는지 그녀를 안심시키듯이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그때의 사건 이후로 이곳에도 결계석을 설치했고, 이틀에 한 번씩 결계석이 훼손되지는 않았는지 기사들이 확인하니까요.”
“그렇군요.”
사실 오스턴의 마력이 느껴졌던지라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실비아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란델과 실비아는 나란히 숲속을 거닐었다. 등 뒤로 부산스러운 소음이 점차 멀어지고, 작은 동물이나 새소리가 그 빈자리를 대신해 주위를 메웠다. 란델은 잠깐의 산책이었음에도 실비아를 살뜰히 챙겼다.
“발이 아프지는 않으십니까?”
“아직은 괜찮아요.”
“근육통은…….”
“출발 직전까지 괴롭혔던 사람이 물을 말은 아니지 않을까요? 물론 괜찮아졌지만.”
“크흠.”
실비아의 지적에 란델이 부자연스럽게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던 중 실비아는 문득 위화감을 느끼고 걸음을 멈췄다. 그녀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미간을 옅게 찡그렸다.
“란델, 그런데 혹시 다리를 다친 건 아니죠? 걸음이 유독 느린 것 같아서요.”
“예, 예? 아닙니다. 그저…… 그저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느라.”
실비아의 말을 들은 란델이 드물게 횡설수설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설마 들켰나?’
사실 란델은 상태가 좋지 않은 기사를 위해 이곳에 잠시 머물러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조금 기뻤다. 그도 그럴 것이 벨포르 성에 다시 발을 디디게 되면 지금보다 더 바빠질 테고, 그로 인해 실비아와 함께 있을 시간을 빼앗길 것이 자명했으니까. 왕궁에 있을 때도 북부에서 보내온 서류를 처리하는 일은 늘 해왔다지만. 성을 떠나 있을 때와 아닐 때 그가 느끼는 책임감의 무게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실비아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적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돌아가야겠지.’
란델은 실비아와 떨어져 있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우울해지는 기분인지라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궜다. 여러 생을 거치며 산전수전을 다 겪었던 실비아의 눈에는 그것이 고스란히 읽혔다.
‘귀엽네, 정말.’
그녀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그에게 불쑥 손을 내밀었다.
“란델, 손.”
“손이요?”
란델은 의아해하면서도 실비아가 손을 내미는 즉시 그녀의 손에 제 손을 포갰다. 그것이 무척이나 귀여워 보여 작게 웃은 실비아가 다음 순간 몸을 돌리며 외쳤다.
“뛰어요!”
* * * 약 10분 후.
“하…….”
“정작 뛰자고 말한 사람이 저보다 체력이 약하면 어떻게 합니까.”
“시끄, 러워요…… 숨차니까 웃기지 말고…….”
실비아는 한적한 마을의 어귀에 주저앉아 정신없이 숨을 몰아쉬었다. 란델은 웃음기 어린 얼굴로 그 곁에 함께 쪼그려 앉아 그녀의 등을 일정한 박자로 두드려주었다. 그의 염려 덕분인지 실비아는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안정을 되찾았다. 그녀는 길게 숨을 뱉어낸 후에야 자신이 그를 이끌고 달린 이유를 이야기했다.
“어차피 오스몬드 경께서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하실 테니까요. 잠깐의 일탈 정도는 나쁘지 않겠죠.”
말은 저렇게 했으나 란델이 시무룩한 것을 눈치챈 것이 분명해 보였기에, 그는 난처함과 사랑스러움이 뒤섞인 시선으로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실비아는 후, 하고 짧게 숨을 내뱉은 후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란델은 저도 모르게 멀어지는 실비아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실비아가 의아한 눈길로 그를 돌아보았다.
“란델?”
“아…… 그게.”
란델은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도 전에 행동부터 저지른 제 모습에 당황했다가, 곧 머뭇거리며 작게 물었다.
“계속 잡고 있으면…… 안 되겠습니까?”
그렇게 묻는 란델의 등 뒤로 꼬리가 축 늘어지는 환영이 보이는 것 같았다. 실비아는 내심 감탄했다.
‘강아지치고는 꽤 사람 같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지금 란델의 모습은 사랑스러웠다. 실비아는 픽 웃음을 흘리고는 그의 손을 단단히 맞잡아 그를 일으켜 세웠다. 정확히는 그가 실비아의 의도에 따라 일어서주었다는 것이 맞을 테지만, 아무튼.
“뭘 그런 걸 물어봐요. 더한 것도 했으면서?”
실비아가 짓궂은 미소를 띤 채 도발하듯 말을 던졌다. 그러자 장난기가 발동한 란델이 그녀와 꼭 닮은 미소를 띠고는 불시에 고개를 숙였다. 쪽. 실비아가 미처 인지할 새도 없이 입술 위로 말캉한 감촉이 닿았다가 사라졌다. 드물게 당황해 눈만 깜박이는 그녀를 보며 란델이 개구지게 웃었다.
“그럼 이 정도도 괜찮습니까?”
뒤늦게 정신을 차린 실비아는 란델의 눈에 선연한 장난기를 읽고는 가소롭다는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괜찮은 게 아니라 좋아요.”
“…….”
졸지에 되로 주고 말로 받게 된 란델이 쩡 굳어졌다. 잠시간 석상처럼 굳어 있던 그가 이내 말없이 쪼그려 앉아 한 손에 얼굴을 감췄다. 나머지 한 손은 여전히 실비아의 손을 붙잡은 채였다.
“란델?”
실비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에게 잡힌 제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란델은 주저앉아 얼굴을 가린 채로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좋은데…… 정말 좋은데.’
계속 이러다가는 심장이 남아나질 않을 것 같다……. 부인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죽고 싶다고 하면 분명 몰매를 맞겠지…….
“란델, 얼굴 좀 보여줘요.”
필사적으로 얼굴을 가리는 란델과 그의 얼굴을 확인하려는 실비아가 잠시 실랑이를 벌였다. 끝끝내 란델의 얼굴을 확인한 실비아가 자지러지듯 웃음을 터트리는 소리가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 본격적인 일탈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 * * 이후 란델과 실비아는 소소하게 마을 구경을 하며 잠깐의 일탈을 만끽했다. 북부의 외곽에 있는 한적한 마을이었던지라 거리에 사람이 많지 않았고, 그래서 오히려 마음은 편안했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은 채 마을을 돌아다니다가 마을 어귀에 볼만한 호수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마을 주민이 호언장담했던 대로 호수는 아름다웠다. 실비아는 수면의 반짝임에 홀려 신발을 벗고 슬쩍 물가에 발을 들였다. 맨발에 차가운 물이 닿자 발목을 타고 소름이 올라왔으나 기분만은 상쾌했다.
“당신도 들어와요.”
치마를 걷어 올려 새하얀 종아리를 드러낸 실비아가 팔랑팔랑 손짓했다. 사람이라면 그 모습을 눈에 담고도 감히 거부의 말을 내뱉지는 못할 것이었다.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은 란델 또한 그녀를 따라 신발을 벗어두고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결국 두 사람은 한바탕 물놀이를 즐기고 젖은 발과 종아리를 말리기 위해 양지바른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평화롭네.’
실비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가만히 무릎에 고개를 기댔다. 온통 평화롭고 나른했다. 앞에는 푸르게 빛나는 호수, 등 뒤로는 바람 소리 가득한 숲. 머리 위로는 햇빛이 잔잔히 쏟아지고, 곁에는 란델이 함께하는 삶.
‘행복하네.’
무의식중에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던 실비아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이런 생각을 한 게 얼마 만이지?’
행복하다니. 실비아는 제 생각에 스스로 큰 충격을 받아 굳어졌다. ‘행복하다’라는 상태를 자각하자마자 본능과도 같은 불안이 찾아들었다. 내가 이런 행복을 누려도 되는가? 내가 이렇게까지…… 행복해도 되는 건가? 이미 신의 벌은 끝났다지만 계속해서 불행을 겪고 환생했던 기억은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불안해진 실비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란델을 찾았다. 바지 끄트머리의 물기를 짜내던 그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당연하다는 듯 눈을 접어 웃어주었다. 눈이 마주치면 어떠한 대가도 없이 그저 웃어주는 사람. 그 웃음으로 나에게 안도감을 주는 사람.
‘아.’
실비아는 새삼스레 찾아든 깨달음에 열없이 미소했다.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는구나. 사랑, 하고 있구나. 그 사실에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