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소나기가 내릴 때2021.11.18.
그때 란델이 외투를 벗어 실비아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그녀가 의아하게 눈을 깜빡이자 그가 말했다.
“감기에라도 걸리면 어쩌나 싶어서. 처음에 비해 당신 체력이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부족합니다.”
“……내 체력이 좋아지는 건 결국 당신 좋은 일 아니에요?”
“아닙니다.”
“…….”
“그렇게 노려보셔도, 아닙니다.”
실비아는 눈을 치켜뜨고 란델을 노려보았으나 그는 꿋꿋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실비아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두지 않자 란델은 조금 억울했는지 진지하게 말을 더했다.
“처음 당신을 본 날에, 당신이 정말 건드리기만 해도 쓰러질 듯이 보여 얼마나 걱정했는지 압니까?”
“그러니까 그때부터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그걸 걱정했다는 거죠? 변태…….”
“아니라니까요.”
거듭된 모함에 억울해하던 란델은 무언가를 말할까 말까 고민하는가 싶더니, 곧 한숨을 푹 내쉬고는 속내를 털어놓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난번 당신과 함께 솔리스 언덕에 갔던 그날, 양손을 배 위로 모으고 누운 당신의 모습이 꼭…….”
란델은 잠시 망설이며 말을 고른 후 잠잠히 웃었다.
“관에 눕혀진 시신처럼 보였던 탓에 마음이 철렁했던 적도 있습니다.”
“…….”
“그런 터무니없는 망상을 하다니, 저도 참 중증이지요.”
하지만 실비아는 웃을 수 없었다. 그녀의 심장이 란델이 말했던 것처럼 철렁 떨어져 내렸다.
‘……원래도 촉이 좋은 사람인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심장이 불안하게 쿵쿵 뛰었다. 실비아가 당황해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란델이 문득 떠올랐다는 듯 물었다.
“실비아.”
“……네?”
“그러고 보니 당신은 왜…… 나와 결혼하기로 했던 겁니까? 나야 왕명으로부터 북부를 지키기 위해서는 달리 선택권이 없었다지만, 사실 당신은 원한다면 얼마든지 거절할 수 있었을 텐데.”
연녹색 눈은 순수한 호기심, 그리고 약간의 기대로 물들어 있었다. 그는 결혼 전에도 알 수 없는 끌림을 느꼈다, 혹은 그에 대한 소문을 듣고 호감을 느꼈다. 그러한 종류의 대답을 기대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야.’
실비아가 품은 답은 그렇듯 곱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너무도 질척하고 추한 것이었다. 죽음. 나 자신의 온전한 죽음. 그녀는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혈안이었고, 그래서 란델을 이용하기 위해 결혼을 수락했다.
“아, 사실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고 말씀하셔도 됩니다. 저는 정말 괜찮으니까요.”
란델은 실비아의 대답이 늦어지자 그녀가 곤란해한다고 생각했는지 그리 덧붙이며 일부러 부드러이 웃어 보였다. 란델이 말한 대로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왕명에 따랐을 뿐이다, 그렇게 대답하는 것이 이 상황을 넘기기 위한 최선임이 명백했다. 실비아는 앵무새처럼 그 말을 고스란히 읊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지만, 어째서인지 목이 꽉 막힌 것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그 이유를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거짓말하고 싶지 않아.’
란델에게 거짓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란델로 인해서 그와 함께하는 여생을 기대하게 된 지금. 더는 그에게 거짓으로 점철된 말을 내뱉고 싶지 않았다. 이전까지 기름칠이라도 한 것처럼 매끄럽게 굴러가던 혀가 뻣뻣해져 움직이지 않는 이유는 아마 그 때문이리라.
‘하지만…….’
내가 과연 진실을 털어놓을 수 있을까? 만약 란델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기로 한다면, 그녀는 그에게 자신이 죽음을 바라는 이유와 전생의 기억까지 모두 이야기해야 했다. 마족에 맞서는 가장 견고한 방패인 그가, 마왕이었던 자신을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까?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후. 그가 과연 그녀를 경멸스럽게 바라보지 않을 수 있을까?
“…….”
그런 불안들 탓에 털어놓지 말까, 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든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란델을 사랑하게 되었고, 더 이상 그를 기만하는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제대로 된 관계의 정립을 위해서는 제 비밀을 털어놓는 것이 옳은 처신이었으나. 그가 그로 인해 자신을 혐오하게 될까 두려워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실비아는 목이 졸리는 사람처럼 가까스로 짧은 부름을 내뱉었다.
“란델.”
“예, 말씀하십시오.”
“조금 엉뚱한 물음일 수도 있다는 건 알지만…….”
그녀는 란델의 눈을 피해 호수의 수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작게 물었다.
“혹시 당신은 전생이 있다는 걸 믿어요?”
“전생…… 말입니까?”
란델은 생각보다도 더 멀리 튀어 나간 주제에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는 이러한 것을 묻는 연유를 묻고 싶었으나, 어째서인지 실비아가 상당히 불안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말을 아끼기로 했다.
“전생이라…… 원래는 믿지 않는 편입니다만.”
말을 잇던 란델이 멈칫했다. 그는 일전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을 때 꾸었던, ‘알리사’와 ‘레오’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미간을 미미하게 찌푸렸다.
“……지금은 믿는 것도 같습니다.”
실비아의 심장이 조금씩 빠르게 뛰었다. 그녀는 조금 전보다 한결 긴장하며 입술을 뗐다.
“그럼 혹시…….”
마왕이 전생인 인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요? 그 사람은 마왕인 건지, 인간인 건지. 당신의 생각은…… 어때요? 그리 물어보려는 순간. 쏴아아- 돌연 하늘에서 굵은 소나기가 쏟아져 내렸다. 채 끝맺지도 못한 물음은 금세 빗소리에 묻혀 쓸려갔다. 란델이 당황하며 실비아를 일으켜 세웠다. 주위를 두리번거린 그가 호숫가 저편에 있는 작은 오두막을 발견하고 외쳤다.
“저기서 잠시 비를 피해야겠습니다. 뛰십시오!”
란델과 실비아는 서둘러 오두막까지 달려갔다. 하지만 창고인 듯 보이는 오두막 내부로 들어와 문을 닫아걸 때쯤 그들은 모두 물에 빠진 생쥐 같은 모습이 되어 있었다. 란델은 문이 잠겼음을 확인하자마자 황급히 실비아를 살폈다.
“실비아. 괜찮습니까?”
“난 괘, 괜찮, 괜찮아요.”
실비아는 여상히 대답하려 했으나 온몸이 비에 푹 젖어버려 입술을 덜덜 떨었다. 양팔로 상체를 감싸 보아도 체온이 순식간에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때 창 밖에서 꽈르릉, 하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천둥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란델이 난처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래도 쉽게 그칠 비가 아닌 듯싶습니다. 이곳에도 벽난로가 있을 텐데…….”
란델은 오두막 안의 잡동사니들을 치워 벽난로를 찾아냈다. 그가 빠르게 불을 피우고 그 앞에 실비아를 앉혔으나 이제 그녀는 입술까지 새파랗게 되어갈 지경이었다. 란델이 심각한 태도로 말했다.
“실비아. 젖은 옷을 계속 입고 있으면 상태가 더 안 좋아질 겁니다. 옷을 벗어 말려두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가 실비아에게 벽난로를 찾다가 발견한 담요를 건네고 몸을 돌렸다. 실비아는 조금 망설이다가 젖은 옷을 벗기 시작했다. 란델은 등을 돌리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눈까지 감고 실비아의 모습을 보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눈을 감으니 외려 옷을 벗는 소리가 귓가를 가득 메우고, 머릿속은 음험한 상상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결국 그가 속으로 마물과의 싸움터를 전전하는 상상을 하며 자신을 다스리길 얼마. 실비아가 맨몸 위에 담요를 두르고 그를 불렀다.
“다 됐어요. 이제 돌아봐도 돼요. 그런데 란델, 당신은요? 당신도 옷을 벗고 있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저는 괜찮습니다.”
“당신이 아무리 강건한 사람이라지만 자만하지는 말아요. 그러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요.”
실비아가 밉지 않게 그를 흘겨보았다. 그에 굴복한 란델이 제가 두를 담요를 찾아 오두막을 이리저리 뒤져보았으나 담요는 실비아가 두른 것 한 장뿐이었다. 란델은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부인께서라도 담요를 두르고 있을 수 있어 다행입니다. 저는 그냥 이대로…….”
“그럼.”
작은 음성이 란델의 말 사이로 끼어들었다. 실비아가 제 몸을 감싸고 있던 담요를 슬쩍 풀어 보이며 물었다.
“같이 덮을까요?”
“……예?”
란델의 사고가 그대로 정지했다. 그의 시선이 막을 새도 없이 벌어진 담요 틈으로 향했다. 어둑한 오두막 안, 따스한 색감의 불빛 앞에서 실비아가 나지막이 웃었다.
“들어와요.”
“…….”
이윽고 가만히 멈춰 서 있던 란델이 탄식 같은 숨을 내뱉고 발을 뗐다. 실비아에게 가까워질수록 연녹색 눈에 차츰 탁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오두막 안을 가득 메운 달뜬 신음은 빗소리에 흔적도 없이 쓸려 내려갔다. 한낮의 소나기는 드물게도 길고 거세게 쏟아졌다.
* * * 한편, 건국제 당일. 필리아는 가면 아래로 지루한 얼굴을 한 채 무도회장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루베아 그건 대체 어디로 들어온 거야? 가발이라도 썼나?’
그녀는 인파 속에서 쉽사리 루베아를 찾을 수 없자 미간을 찡그리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필리아와 루베아는 결코 사이가 좋다고 할 수 없었지만. 지금 이곳에서 필리아가 귀찮은 일을 만들지 않으면서 함께 있을 법한 상대가 애석하게도 루베아뿐이었다. 실비아는 아무래도 남편인 란델과 함께 다닐 테니까.
‘……제프리라도 있었으면 덜 지루했을 텐데.’
필리아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왕궁에서 열리는 가면무도회에는 명실공히 귀족 계보에 이름이 올라와 있는 자만이 초대된다. 평민의 신분으로 기사가 된 제프리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제프리가 없는 무도회라니. 이 무슨 마물 없는 북부 같은 소리인지. 하여 필리아는 성가시기만 한 무도회에 참석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인 후작 부인이 ‘도망쳤다간 정말 다리를 부러트릴 줄 알아라’라며 눈을 부라린 탓에 어쩔 수 없었다.
‘발코니에라도 나가 있을까……?’
필리아는 어떻게든 후작 부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며 이 장소를 벗어나기 위해 머리를 굴리다가 퍼뜩 발코니의 존재를 떠올렸다. 후작 부인은 분명 ‘반드시 무도회에 참석해 자리를 지켜라’라고만 했지. 무도회장의 어느 곳에서 시간을 보내야 할지까지는 지정해주지 않았다. 구석진 발코니에서 커튼을 치고 무도회가 끝날 때까지 숨어 있는다면 잔소리도 피하고, 귀찮고 지루한 인간들과 말을 섞지 않아도 되고.
‘일석이조네. 좋아.’
그리 판단한 필리아가 눈을 반짝이며 사람들을 헤치고 발코니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녀는 발을 뗀 지 얼마 되지 않아 웬 우스꽝스러운 깃털 가면의 남자에게 붙들렸다.
“실례합니다, 숙녀분.”
남자는 별안간 인파 속에서 튀어나와 필리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뭐야, 이 자식은? 그에 필리아가 가면 아래로 미간을 찌푸리는데, 그는 능글능글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을 붙였다.
“아까부터 지켜봤습니다. 아무래도 달리 눈에 차는 신사가 없으셨던 듯한데, 저랑 한 곡 어떠실까요?”
그는 말을 하며 진득한 시선으로 필리아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 시선이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 기분 나빠 그녀가 날카롭게 대꾸했다.
“……달리 눈에 차지 않는 신사, 중에 그쪽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모르시는 건가요, 아니면 모르는 척하시는 건가요?”
“하하, 그럴 리가요. 제가 지금까지 어디 가서 부족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없는 사람인지라.”
남자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는 정말로 자신이 필리아의 눈에 차지 않을 리 없다고 생각하는 듯이 보였다.
‘미친놈이네.’
필리아는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저렇게 머리에 꽃만 든 놈들은 대개 말과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상대하지 않고 떠나는 것이 최선이었다. 필리아는 입술을 조개처럼 다문 채 그를 지나쳐 원래의 목적지를 향해 걸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앞을 막아섰던 남자가 이번엔 막무가내로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아니, 어딜 가십니까. 이제 곧 곡이 시작할 텐데요.”
“이거 놔요.”
“그나저나 손도 참 작으시군요. 마침 제가 손이 작은 여자가 이상형입니다.”
“뭐 어쩌라…….”
계속된 치근거림에, 결국 분노를 이기지 못한 필리아는 그를 걷어차려다가 멈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