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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넘어지는 여자와 도망치는 남자 (68/118)

68. 넘어지는 여자와 도망치는 남자2021.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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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속된 치근거림에, 결국 분노를 이기지 못한 필리아는 그를 걷어차려다가 멈칫했다.

16558817039232.jpg‘그런데…… 여기서 목소리를 높였다가는 바로 이목을 끌게 될 텐데.’

남자를 걷어차기 직전 얄팍하게나마 이성이 돌아온 필리아가 갈등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무도회장 어딘가에서 후작 부인이 눈에 불을 켜고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조용히, 후작 부인의 눈에 띄지 않게 발코니로 탈출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좋은 말로 남자를 타일러 제게서 떨어트리는 편이 현명할 것이다.

16558817039232.jpg‘그래, 참자. 내가 제리를 쫓아다닐 때 걔도 이랬을 거라는 마음으로…… 아, 제리 보고 싶다.’

필리아는 심호흡을 하며 필사적으로 마음을 다스렸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틈만 나면 제프리에 관한 것으로 튀어가기 일쑤였다.

16558817039241.jpg“그럼 가실까요?”

그러는 사이, 남자는 필리아가 말을 멈추자 은근슬쩍 그녀의 손을 잡아당겨 플로어 쪽으로 향하려 했다. 그 바람에 제프리의 생각을 하느라 몸에 힘을 빼고 있던 필리아가 어어, 하며 크게 휘청였다. 그녀는 남자의 가슴팍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반사적으로 질색했다.

16558817039232.jpg‘하필이면 이 방향으로……!’

바로 그때.

1655881703925.jpg“조심해.”

16558817039232.jpg“어?”

단단한 팔이 뒤에서 뻗어 나와 그녀의 허리를 붙잡아 당겼다. 그 덕에 치근덕대던 남자의 품에 코를 박을 뻔한 것을 면한 필리아는 등 뒤에서 풍기는 익숙한 체향에 고개를 홱 돌렸다.

16558817039232.jpg“너……!”

푸른 눈이 놀람으로 커졌다. 그녀를 붙잡은 남자는 얼굴을 대부분 가리는 가면을 쓰고 있었고, 금발이었다. 하지만 필리아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를 붙잡아준 이 남자는 바로 제프리였다.

16558817039232.jpg“내가 꿈을 꾸고 있나?”

그녀는 믿기지 않는 듯 중얼거렸다. 한편, 필리아에게 치근덕대던 남자가 불편한 목소리를 냈다.

16558817039241.jpg“당신은 누구십니까? 이 숙녀분께서는 저와 함께 춤을 추기로 약속하셨으니 자리를 비켜주시죠.”

그 말에 제프리가 차게 비소했다. 그는 남자를 깡그리 무시한 채 필리아를 보며 물었다.

16558817060721.jpg“숙녀분, 이곳에서 눈에 차는 신사가 없다고 하셨지요. 저는 어떠십니까.”

16558817039232.jpg“어, 어?”

16558817060721.jpg“제 모습, 마음에 드십니까? 키와 목소리는?”

제프리가 빠르게 질문을 던졌다. 당황하던 필리아는 뒤늦게나마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16558817039232.jpg“어…… 아니, 네. 엄청나게요.”

16558817060721.jpg“그럼 저 남자가 아니라 저와 춤을 추시는 것이 어떠신지.”

16558817039232.jpg“좋아요!”

필리아는 남자에게서 빠져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냉큼 제프리의 손을 잡았다. 만족스러운 웃음을 입가에 건 제프리가 부드럽게 필리아를 이끌어 플로어로 향했다. 그들의 등 뒤로 남자의 황망한 중얼거림이 들려 왔다.

16558817039241.jpg“아니, 이, 이게 무슨…….”

하지만 그 중얼거림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필리아와 제프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플로어 위에서 마주 보고 섰다. 필리아가 제프리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속삭였다.

16558817039232.jpg“뭐야? 너 대체 어떻게 왔어?”

그에 제프리가 필리아의 허리에 손을 올리며 끙, 하는 소리를 냈다.

16558817060721.jpg-오스몬드 선배님, 저와 대련해주십시오. 소원을 걸고요.

  약 반나절 전. 제프리는 함께 호위들의 숙소에 머무는 벨포르 기사, 오스몬드에게 매달렸다. 물론 필리아의 가문과 혼담이 오가는 그에게 매달리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가 아는 사람 중 가면무도회의 초대장을 받을 만큼 명망 있는 귀족가 출신은 오스몬드 하나뿐이었다. 오스몬드는 가면무도회에 참석할 준비를 하다가 다짜고짜 저를 찾아와 대련하자는 제프리의 모습에 황당한 얼굴을 했다.

16558817039241.jpg-소원을 걸고 대련을 하자고? 이렇게 갑자기?

16558817060721.jpg-예.

16558817039241.jpg-나는 싫은데…… 무도회 시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굳이 땀을 빼고 싶지는…….

16558817060721.jpg-선배니임! 선후배 간의 의리로 한 번만 부탁드립니다!

16558817039241.jpg-야야, 잡아당기지 마! 바지 내려간다고!

  제프리는 문자 그대로 오스몬드의 바짓단을 붙잡고 늘어져서 승낙을 얻어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가면무도회에서 다른 귀족들이 필리아에게 치근덕거리는 것을 막아야 한다!

16558817060721.jpg‘……가면으로 가리면 뭐 해. 이렇게 티가 나는데.’

제프리는 그와 마주 보고 서 있는 필리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16558817039232.jpg“……?”

필리아는 제프리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꽃장식이 달린 가면을 쓴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움직임에 따라 살랑이는 머리카락은 노을 같았고, 가면에 난 눈구멍 너머로 보이는 푸른 눈은 꼭 바다 같았다. 그의 눈에 비치는 필리아는 하늘이자 바다였다. 그런 사람에게 시선이 가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라며 제프리는 다분히 팔불출인 추측을 했고, 그로 인해 기를 쓰고 이 무도회에 참석했다. 본래는 멀리서 필리아에게 치근덕거리는 놈이 있는지 감시하고, 그런 놈이 보인다면 몰래 처리할 생각이었는데. 필리아가 북부에서와 달리 웬 놈팡이를 곧장 걷어차지 않고 가만히 있기에 참지 못하고 끼어들어 버렸다. 그리하여 이 상황. 필리아는 괜스레 올라오는 민망함을 감추려 발끝으로 그를 툭 건드렸다.

16558817039232.jpg“여긴 어떻게 왔냐니까, 왜 대답을 안 해?”

하지만 제프리는 묵묵부답이었다. 필리아는 잠시 그의 대답을 기다리다가, 곧 설핏 웃어 보였다.

16558817039232.jpg“하긴,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 이렇게 된 거 춤이나 추자.”

필리아의 얼굴에 설렘과 기쁨이 깃들었다. 그 얼굴을 본 제프리가 ‘이제라도 멀리서 지켜보기만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 갈등하는 찰나. 필리아가 그의 손을 힘주어 잡으며 속삭였다.

16558817039232.jpg“도망가지 말고.”

16558817060721.jpg“…….”

16558817039232.jpg“나랑 있어, 여기.”

정곡을 찔린 제프리가 손을 움찔 떨었다. 그때 악단마저 그를 붙잡아두려 작정한 마냥 음악이 시작되었다. 결국 제프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필리아와 함께 춤을 추기 시작했다. 평민 출신이었지만, 어렸을 적 필리아가 춤을 배울 때 제게 그것을 가르쳐주었던 적이 있었다. 제프리는 여전히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는 필리아의 목소리에 따라 조심스럽게 발을 움직였다. 그에 필리아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 그가 자신과의 일을 기억한다는 사실이 기뻐 사랑스러운 미소를 흘렸다. 그녀의 미소를 눈에 담은 제프리의 입가에도 엷은 웃음이 걸렸다.

16558817039241.jpg“……필리아?”

멀리서 그들을 발견한 세이크린 후작 부인의 입에서 놀란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후작 부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필리아와 춤을 추고 있는 상대에게로 옮겨갔다. 그녀의 얼굴은 딸과 대조되게 차츰 먹구름이 끼듯이 흐려졌다. * * * 그와 비슷한 시각.

16558817097561.jpg“좋아 죽네, 좋아 죽어.”

루베아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교묘히 비껴 난 테이블 앞에 서서 작게 중얼거렸다. 그녀가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 와인을 홀짝였다.

16558817097561.jpg‘……저렇게 좋을까?’

사실 그다지 알고 싶지 않았지만, 루베아는 지난번 정원에서의 티타임으로 인해 필리아가 제프리라는 기사를 마음에 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발과 가면으로 가려져 있다지만, 루베아의 눈썰미에는 필리아의 춤 상대가 제프리라는 것이 고스란히 보였다. 그녀는 허파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연신 웃음을 흘리는 필리아를 물끄러미 눈에 담았다. 연애 감정……이라는 게 저렇게 행복한 일일까? 루베아는 일평생 가문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갈고닦고, 그것을 최상으로 발휘할 수 있는 가문과 혼인할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행복에 겨워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의 필리아가 조금, 아니 많이 낯설고 신기해 보였다. 그러던 중 머릿속에 불쑥 오스턴의 모습이 떠올랐다. 루베아가 반사적으로 얼굴을 팩 구겼다.

16558817097561.jpg‘왜 하필 지금 그 인간이 생각나는 건지.’

오스턴은 지난번, 루베아와 그 사촌의 관계를 오해한 이후 대놓고 그녀를 피해 다녔다. 오스턴은 나름 몰래 피해 다니려 한 것 같지만, 그만한 마법사가 어디 흔하던가. 루베아의 사촌처럼 어떻게든 그와 연줄을 쌓으려는 인간들로 인해 그는 도망치다가 붙잡혀 그녀의 눈에 띄기 일쑤였다. 루베아는 바로 그 점이 불만이었다. 도망을 갈 거면 눈에 띄지나 말던가. 그렇게 대놓고 ‘나는 당신을 피하고 있습니다’라는 티를 내니 괜히 기분이 나빠지는 것 아닌가.

16558817097561.jpg‘……제멋대로 만질 때는 언제고.’

루베아가 못마땅하게 입매를 비틀었다. 오스턴이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손등에 입을 맞추었던 일은 꺼졌나 싶으면 다시 살아나는 불티처럼 드문드문 떠올라 그녀를 괴롭혔다. 루베아는 의외로 지금껏 춤을 출 때를 제외하고 누군가에게 그렇듯 바짝 허리를 끌어 안겨 본 적도, 손등에 짙게 입 맞춰져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정작 그 당사자는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피해 다니려 안달이니. 루베아가 저조한 기분을 털어내기 위해 와인을 홀짝이던 때였다.

16558817097576.jpg“내가 진짜…… 내년부터는 그냥 아프다고 드러누워서라도 수도에 오지 말든가 해야지…….”

익숙한 목소리가 불쑥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누가 보아도 오스턴인 남자가 짜증스럽게 가면을 매만지며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루베아는 당황해 눈만 깜박였다. 뒤늦게 루베아를 발견한 오스턴 또한 그녀를 알아보았는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16558817097576.jpg“헉.”

16558817097561.jpg“…….”

그래, 바로 저런 점이 짜증난다는 거다. 오스턴이 드러내놓고 기겁하자 루베아의 이마에 빠직 힘줄이 솟아났다.

16558817097561.jpg“이봐요, 도슬러 님…….”

루베아가 잔을 내려놓고 오스턴에게 그 부분을 지적하려던 찰나. 대뜸 몸을 돌린 오스턴이 사람들 사이로 줄행랑쳤다.

16558817097561.jpg“……허.”

루베아는 멀어지는 잿빛 뒤통수를 보며 황당한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곧 날카롭게 눈을 치켜뜬 채 오스턴을 쫓기 시작했다. 반쯤은 울컥해서 나온 행동이었다.

16558817097561.jpg“거기 안 서요?”

루베아는 물고기처럼 이리저리 도망 다니는 오스턴을 끈질기게 쫓았다. 그러다 보니 한쪽에 있는 발코니에까지 다다랐다. 루베아는 숨바꼭질의 술래라도 된 것처럼 발코니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16558817097561.jpg“이제 도망 못 가겠…….”

자신만만하게 말을 잇던 루베아가 멈칫했다. 그녀는 텅 빈 발코니를 보다가 엉망으로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아, 이 새끼 마법사였지.

16558817097561.jpg‘……이렇게까지 내 얼굴을 보기가 싫은 건가?’

루베아는 새삼 허탈하고 분한 마음에 문을 짚고 있던 손을 떨어트렸다. 발코니 안쪽으로 걸어가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녀가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16558817097561.jpg“지금 보고 있는 거 다 알아요.”

16558817097576.jpg“…….”

16558817097561.jpg“안 나오면 여기서 떨어질 겁니다.”

루베아는 난간 아래의 정원을 눈에 담으며 협박을 입에 담았다. 그러나 협박까지 입에 담았음에도 여전히 오스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16558817097561.jpg‘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그에 마침내 오스턴을 붙잡는 것을 포기한 루베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조적으로 고개를 젓던 그녀가 무도회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오스턴을 찾아다니느라 혹사당한 발목이 크게 욱신거렸다.

16558817097561.jpg“……!”

루베아의 몸이 난간 바깥쪽을 향해 기울어지고, 그녀가 반사적으로 눈을 감는 찰나였다.

16558817097576.jpg“지금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잔뜩 화가 난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누군가 허공으로 추락하는 그녀를 받쳐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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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베아는 뒤늦게 헉, 하며 참았던 숨을 터트렸다. 추락의 충격에서 벗어나자마자 눈이 반짝 뜨였다. 오스턴은 제 품에 안긴 그녀를 보며 일그러진 얼굴로 화를 냈다.

16558817097576.jpg“제가 정말로 거기 없었다면 어떻게 하려고 그렇게 무모합니까! 사람이 아무리 화가 났다지만……!”

지금까지 주고받았던, 날 서고 비웃음 가득했던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16558817097561.jpg‘……설마 걱정하는 건가?’

그 간극에 적응하지 못한 루베아는 사고가 정지한 것처럼 눈만 깜박였다.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의 몸이 지면과 가까워졌다. 오스턴은 루베아를 안은 채 사뿐히 정원에 발을 디딘 후 마법을 해제했다.

16558817097576.jpg“내가 정말 이러다가 제 명에 못 살지, 못 살아.”

오스턴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루베아를 내려주었다. 자세를 바로 하고 선 루베아가 멍하니 오스턴을 눈에 담았다. 쿵, 쿵. 하마터면 발코니에서 떨어질 뻔한 충격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귓가를 크게 울렸다. 루베아는 충동에 따라 불쑥 입을 열었다.

16558817097561.jpg“왜…… 나를 도와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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