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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다가가면 멀어지는 (69/118)

69. 다가가면 멀어지는2021.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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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베아는 충동에 따라 불쑥 입을 열었다.

16558817446019.jpg“왜…… 나를 도와줬어요?”

그녀의 이성은 지금이라도 입을 다물고 제 갈 길 가는 것이 현명하다고 충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입은 이성을 무시한 채 제멋대로 말을 이어갔다.

16558817446019.jpg“나를 피해서 도망가고 있었잖아요. 그리고 당신이 만들어줬던 호신용 마법석이 있으니 적어도 한 번은 무사했을 텐데.”

루베아는 무의식중에 오른손으로 왼쪽 팔목을 감싸 쥐며 말을 맺었다. 그녀의 팔목에는 일전에 오스턴이 만들어주었던 호신용 마법석이 엮인 팔찌가 걸려 있었다. 오스턴은 루베아의 팔찌에 담긴 마력을 느끼지 못할 만큼 둔감한 이가 아니었다. 조금 전, 그녀가 발코니에서 그대로 떨어졌더라도 오스턴이 직접 만든 호신용 마법석을 몸에 지니고 있었으니 다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왜……. 루베아는 어쩐지 초조한 기분으로 오스턴의 대답을 기다렸다.

16558817446033.jpg“그…….”

오스턴은 루베아가 제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자 당황해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입 안에서 맴도는 변명은 많았다. 그 호신용 마법석이 얼마인 줄 아는가, 고작 이런 일에 쓰라고 만들어준 마법석이 아니다. 혹은 눈앞에서 사람이 떨어지는데 그걸 보고만 있으라는 소리인가, 나는 그렇게까지 돈에 미친놈은 아니다. 하지만 끝내 어떠한 말도 나오지 않자 오스턴은 앓는 소리를 흘리며 한 손으로 제 얼굴을 쓸었다. 루베아의 추측은 사실이었다. 그는 그녀의 팔찌에서 느껴지는 마력이 제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루베아를 피해 다니느라 외려 그녀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 벌써 며칠째인데, 설마 모를 리가. 그렇다면 자신은 도대체 왜 나섰던 것일까. 줄기차게 루베아를 피해 도망 다녔던 것이 우스워질 정도로.

16558817446033.jpg‘젠장.’

결국 오스턴은 당장 입 밖으로 나오는 대답만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16558817446033.jpg“그, 제가 백작을 피했던 건 당연히…… 제가 저번에 그런 불쾌한 짓을 했으니까, 저를 보는 것이 불편하시리라, 생각되어서…….”

오스턴은 더듬더듬 변명을 늘어놓는 제 모습이 수치스러워 얼굴을 붉혔다. 이런 머저리 같은 꼴을 보이게 될까 봐 루베아를 마주하지 않으려 했던 것인데. 하여간 다 망했…….

16558817446019.jpg“불쾌하지 않아요.”

16558817446033.jpg“……예?”

오스턴은 환청을 들은 줄로 착각하고 얼빠진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러나 루베아는 그런 그를 정면으로 마주 본 채 부드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잠깐, 웃어?

16558817446019.jpg“나는 당신을 보는 게 불쾌하지 않아요.”

16558817446033.jpg“어…….”

16558817446019.jpg“그리고 지난번의 일은 고마웠어요. 오해였다고는 해도, 큐비드 백작 영식이 하도 귀찮게 구는 통에 피곤했거든요.”

루베아가 말을 맺으며 설핏 미소했다. 발코니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미미하게 달아오른 그녀의 볼을 비췄다.

16558817446019.jpg“감사합니다.”

그 순간, 루베아의 얼굴을 정면에서 목격한 오스턴의 심장이 철렁 떨어졌다. 그 느낌이 뜻하는 바를 깨달은 그가 속으로 탄식했다.

16558817446033.jpg‘아, X 됐다.’

아무래도 시작해서는 안 될 감정을 시작해버린 모양이다. * * * 부스럭.

16558817463463.jpg“으…….”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던 실비아는 가까이서 들린 인기척에 옅은 신음을 흘렸다. 그러자 인기척은 우뚝 멎었지만, 한 번 수면 위로 빠져나온 의식은 다시 가라앉지 않았다.

16558817463463.jpg“란델……?”

16558817463471.jpg“……깼습니까? 미안합니다.”

버석한 목소리로 비몽사몽 란델을 부르자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대답이 돌아왔다. 실비아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란델의 손이 다가와 그녀의 허리 뒤로 베개를 받쳐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는 것을 도와주었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실비아가 눈을 깜박였다. 그녀는 침대 위에 놓인 작은 상을 한 번, 그 위에 놓인 음식들을 한 번 번갈아 바라보다가 얼굴을 찡그렸다.

16558817463463.jpg“란델.”

16558817463471.jpg“예, 말씀하십시오.”

16558817463463.jpg“……어쩐지 데자뷔가 느껴진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실비아는 그리 말하며 슬쩍 몸을 뒤로 물렸다. 그도 그럴 것이, 작은 상을 그득히 채운…… 기괴한 보양식은 있던 식욕마저 뚝 떨어지게 했다. 실비아가 란델을 원망스럽게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16558817463463.jpg“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16558817463471.jpg“…….”

16558817463463.jpg“어젯밤에도 딱 한 번만 더 하자더니, 아침이 될 때까지 괴롭힌 주제에.”

16558817463471.jpg“…….”

란델은 양심이 찔리는지 슬그머니 실비아의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실비아를 설득하는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고기를 썰어 한 점을 포크에 꽂아 그녀에게 내밀었다.

16558817463471.jpg“이건 주방장이 요즘 당신이 피로해 보인다며 꼭두새벽부터 푹 고아 만든 보양식입니다.”

16558817463463.jpg“윽.”

16558817463471.jpg“저건 델마가 영양분이 풍부하다며 직접 갈아준 주스이고…….”

16558817463463.jpg“윽…….”

란델이 벨포르 성의 사용인들을 언급하자 실비아는 괴로운 신음을 흘리면서도 그가 주는 보양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 보양식은 싫은데, 저를 생각하는 사용인들의 마음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실비아는 그런 마음에 오만상을 찌푸린 채 음식을 씹으면서도 애써 엄지를 추켜올렸다. 그 모습을 보던 란델이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리자 분노의 주먹질이 날아오긴 했지만. 어쨌거나 나름대로 평화로운 아침 식사가 이어졌고, 두 사람은 침대 위에서 배를 채우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실비아는 그나마 덜 역한 과일을 오물거리다가 물었다.

16558817463463.jpg“그러고 보니 오스턴은요? 기분이 조금 나아진 것처럼 보여요?”

16558817463471.jpg“여전히 심기가 불편한 모양입니다. 원래도 뒤끝이 긴 녀석이긴 했습니다만.”

란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며칠 전, 수도를 떠나 벨포르 영지로 돌아왔던 날. 소나기인 줄 알았던 비는 밤새 그치지 않았고, 란델과 실비아는 결국 밤을 꼴딱 새운 후에야 일행에게로 돌아갈 수 있었다. 건국제 이후 유달리 퀭한 얼굴의 오스턴이 두 사람을 형형한 눈길로 노려보며 말했다.

16558817446033.jpg-말도 없이 사라지신 어느 대단한 분들 덕에 결국 편하고 안락한 성을 코앞에 두고도 노숙을 하게 되었군요. 그것도 비까지 맞으면서 말입니다.

16558817494166.jpg-크흠.

  성으로 돌아온 후에도 오스턴은 먹구름이 우중충하게 낀 얼굴로 복도를 활보했다. 그와 루베아 사이에 있었던 일을 모르는 부부는 자연히 그것을 본인들의 탓이라 여기고 눈치를 보는 중이었다. 란델은 한숨을 쉬며 어깨를 으쓱였다.

16558817463471.jpg“그나마 저희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별일이 없어서 다행입니다. 아니었으면 오스턴이 처리해야 할 일들이 배는 늘어났을 테니까요.”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란델과 실비아가 북부를 떠나 있던 동안은 평화 그 자체였다고 했다. 어둠 벌레의 테러도, 비틀림에서 마족과 마물이 대거 넘어와 사람들을 해치는 일도 없었다고. 그저 일상적인 비틀림과 마물 퇴치만 있었다고 하니 어찌 보면 다행이지만…….

16558817463471.jpg“그래도 괜히 불안하군요. 수도에서의 일을 생각하면 포기한 것은 아닐 텐데. 끝내 우두머리를 잡지 못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란델은 개운치 않은 얼굴로 고민에 잠겼다. 실비아 또한 저만의 생각에 잠겼다. 란델과 달리 그녀는 어둠 벌레들의 우두머리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1655881749418.jpg-나는 마왕의 자리를 되찾을 거다.

  왕세자 다비드이자 전 마왕 바시스. 하지만 실비아는 그 사실을 란델에게 선뜻 알릴 수 없었다. 그녀가 다비드의 정체를 쥐고 있듯, 그 또한 실비아의 정체를 손에 쥐고 있으니까. 실비아는 아직 란델에게 제 과거를 이야기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16558817463463.jpg‘……아마 받아들이지 못하겠지.’

마왕이 전생인 인간이라니. 왕국의 북부, 최전방에서 일평생 마족과 마물을 막아내고, 그로 인해 가족까지 잃은 남자에게는 너무 잔인한 진실이었다. 하여 그녀는 물끄러미 란델의 얼굴을 눈에 담다가, 불현듯 떠오른 의문에 눈매를 살짝 구겼다.

16558817463463.jpg‘그건 그렇고 대체 어떻게 마왕의 자리를 되찾겠다는 거지?’

실비아는 다비드의 제안에 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의문조차 품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생각을 이어가자 의문이 드는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다비드는 현재 인간이지만 어둠을 다룰 수 있다. 그러나 그조차 전성기 시절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고, 마왕의 자리를 넘보기에도 마찬가지였다.

16558817463463.jpg‘어둠 벌레들을 이용하려는 건가? 그래 봤자 밀려드는 마족과 마물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일 텐데…….’

생각을 이어갈수록 물음표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겨났다.

16558817463463.jpg‘대체 뭘 믿고 그렇게 자신만만한 거지?’

그녀가 그 답을 알게 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 * *

16558817463463.jpg‘허리 아파…….’

란델이 정기 순찰을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실비아는 간밤의 여파로 인해 침대에 늘어져 있었다. 물론 좋았다. 사실 그냥 좋은 정도도 아니고 끝내주게 좋았다.

16558817463463.jpg‘시트가 찢어졌으니 말 다 했지…….’

그러나 그것과 육체의 피로는 별개였다. 실비아는 적어도 오늘 하루, 밤에 란델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침대에서 움직이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눈을 감았다. 그녀가 눈을 감은 지 정확히 3초가 지난 후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16558817509439.jpg“마님, 마님! 혹시 깨어계십니까?”

16558817463463.jpg“델마?”

평소 차분하던 델마답지 않은 목소리에 실비아가 의아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부름을 들은 델마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델마는 실비아의 방까지 뛰어온 것인지 작게 숨을 몰아쉬고는 말했다.

16558817509439.jpg“마님, 지금 1층에…… 세이크린 후작 영애께서…….”

16558817463463.jpg“아, 영애가 왔나 보지. 그런데 그걸 왜 그렇게 다급하게 전하나?”

일전에 필리아와의 오해를 푼 후, 실비아는 필리아가 자신을 찾아오면 언제든 편하게 맞이하라 일러두었기 때문에 델마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16558817509439.jpg“세이크린 후작 영애께서…… 울고 계십니다.”

16558817463463.jpg“뭐?”

대경한 실비아가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1층으로 내려갔다. 응접실로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울고 있던 필리아가 눈물범벅인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16558817509465.jpg“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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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8817463463.jpg“영애, 무슨 일이에요?”

실비아는 맹세코 필리아가 저런 얼굴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실비아가 빠른 걸음으로 필리아에게 다가가 그녀를 살폈다. 필리아는 실비아의 목을 양팔로 끌어안고 서럽게 울며 횡설수설했다.

16558817509465.jpg“저, 어, 어머니, 가…….”

16558817463463.jpg“영애, 우선 진정해요. 델마, 물 좀 가져다주겠나?”

16558817509439.jpg“예, 마님.”

실비아가 필리아의 등을 두드리며 한 말에 델마가 황급히 달려 나갔다. 필리아는 실비아에게 끌어 안겨 한참을 운 후, 델마가 가져다준 물을 세 잔이나 비우고 나서야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실비아는 필리아의 옆자리에 앉아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걱정스럽게 물었다.

16558817463463.jpg“영애의 어머니라면…… 세이크린 후작 부인의 이야기인가요?”

16558817509465.jpg“네…… 그게…….”

필리아는 당혹스러워하는 실비아에게 기억을 되살려 설명을 늘어놓으려다가 말고 또다시 울컥했다. 머릿속에서 아직도 제 어머니의 냉정한 음성이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16558817509439.jpg-그 남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이라도 그 마음, 접어라.

  며칠 전. 세이크린 후작가 일행은 벨포르 일행과 길을 따로 해 후작저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 내내 어두운 얼굴이던 후작 부인은 후작저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필리아를 불러냈다. 필리아는 후작과 후작 부인의 맞은편에 앉으며 걱정스레 물었다.

16558817509465.jpg-아빠도 있었네. 엄마, 혹시 속이 안 좋은 거야? 약 가져다 달라고 할까?

  후작 부인은 그런 필리아를 물끄러미 눈에 담다가 무겁게 입술을 뗐다.

16558817509439.jpg-필리아.

16558817509465.jpg-……무섭게 왜 이래. 나 혹시 또 뭐 잘못했어?

16558817509439.jpg-오스몬드 림버트 경과 혼인하거라.

16558817509465.jpg-뭐?

  별안간 떨어진 말에 필리아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그녀는 당황해 되물었다.

16558817509465.jpg-그 혼담이라면 분명…… 거절하지 않았어? 아빠도 내가 원하지 않으면 결혼시키지 않겠다고 했잖아.

16558817509439.jpg-…….

16558817509465.jpg-아빠…….

  필리아가 불안하게 후작을 불렀으나 그는 잠잠히 시선을 내리깐 채 침묵했다. 그 모습이 마치 후작 부인에게 설득당한 듯 느껴져 필리아의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그때 후작 부인이 쐐기를 박았다.

16558817509439.jpg-그 남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이라도 그 마음, 접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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