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돌연변이2021.11.29.
-그 남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이라도 그 마음, 접어라.
필리아는 그 말에 혼란스럽게 되물었다.
-그 남자……? 엄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국제 무도회에서 너와 함께 있던 남자 말이다.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지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싶었다. 필리아는 순간적으로 심장이 크게 철렁함을 느꼈다. 그녀는 그에 항의하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는 걔가 아니면 싫…….
-필리아 세이크린.
냉정한 부름에 필리아가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후작 부인은 지금껏 그녀에게 보인 적 없던 차디찬 얼굴로 말을 이었다.
-너는 북부의 영민들을, 네가 귀족으로서 누리고 자라온 것들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내팽개칠 생각이냐?
-…….
-네가 먹는 것, 입는 것, 하다못해 발 디디는 것 전부가 영민들의 땀과 노력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영민들을 위한 삶을 살아야 옳아.
후작 부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무거웠다. 너무도 무거워서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필리아는 무의식중에 치맛자락을 꾹 말아 쥐었다. 손바닥에 닿아오는 옷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이 옷조차 영민들을 위한 삶을 살겠노라 다짐한 대가일 테지. 후작 부인이 단순히 제프리의 신분, 출신, 이런 것들을 이유로 그를 반대했다면 필리아는 그녀의 말을 듣지조차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북부의 귀족이었고, 세이크린의 딸이었다. 후작 부인이 지적한 부분도 바로 그것이었다.
-림버트 백작가는 괜찮은 결혼 상대다. 벨포르 공작가에 대한 충심도 의심할 여지가 없고, 너와 오스몬드 림버트 간의 결혼이 성사되면 영민들을 위한 사업을 한층 더 큰 규모로 진행할 수 있겠지.
-…….
-그러니 이제라도 그 마음은 그만두어라.
후작 부인은 말을 맺으며 쓰라린 미소를 지었다. 그녀 자신도 딸에게 이런 모진 말을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엿보이는 미소였다. 그 얼굴을 보자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눈물만 나왔다. 하여 필리아는 후작과 후작 부인이 림버트 백작가에 방문한 틈을 타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정처 없이 떠도는 마음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실비아에게 대략적인 이야기를 털어놓은 필리아의 눈에 또다시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이제야 겨우……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건국제에서 보았던 제프리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저와 춤을 추다가 발을 삐끗할 때면 작게 앓는 소리를 흘리며 민망해하던 모습도. 발갛게 달아올라 있던 귀도. 끝내는 웃음기가 묻어나오던 목소리도. 아직도 이렇게 모든 게 선명한데.
“…….”
실비아는 말없이 필리아를 도닥이며 그녀에게 따듯한 차가 든 찻잔을 쥐여 주었다.
“감사합니다, 부인.”
그 배려에 울듯이 웃은 필리아가 차를 한 모금 넘겼다. 따듯한 차, 그리고 염려가 깃든 손길로 인해 마음이 많이 가라앉았다. 이윽고 완전히 평정을 되찾은 필리아가 복잡한 얼굴로 물었다.
“부인.”
“네.”
“조금 무례한 질문일 수도 있기는 한데, 부인께서도…… 공작님과 정략결혼을 하신 거잖아요.”
거기서 말을 멈춘 필리아가 실비아의 눈치를 살폈다. 실비아는 괜찮다는 의미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고개를 살살 저었다. 그러자 필리아의 말이 이어졌다.
“처음에…… 공작님과의 결혼을 제안받았을 때, 어떤 기분이셨어요?”
“으음.”
실비아는 난감한 신음을 흘렸다.
‘사실대로 말해줘야 하나, 아니면 마음이 편해질 만한 말을 해줘야 하나.’
눈가가 발갛게 달아오른 앳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실비아는 결국 솔직하게 대답했다.
“사실 별생각 없었어요.”
“그래요?”
“네. 나는…… 딱히 결혼하고 싶은 상대가 있는 것도 아니었어서.”
무미건조한 답을 들은 필리아는 잠시간 무언가를 고민하더니 재차 물었다.
“그러면 부인께서는 연애나 결혼에 대한 환상, 뭐 그런 게 아예 없으셨던 건가요?”
“환상이라, 원래는 없었는데…….”
실비아는 생각에 잠겨 말꼬리를 늘였다. 머릿속에 반사적으로 두 번째 삶의 기억이 스쳐 지나가자 문득 얼굴이 흐려졌다. 하지만 이제는 두 번째 삶의 기억보다 누군가의 얼굴이 더욱 강렬하게 떠올랐다. 마음이 간질거리는 것을 느낀 실비아가 설핏 웃었다.
“지금은 란델 덕분에 조금씩 생기는 기분이에요.”
란델은 실비아 본인조차 잊고 있던, 혹은 모르고 있던 감각들을 하나둘 일깨워주고 있었다.
‘아, 보고 싶네.’
그 감각에 중독된 것처럼, 고작 몇 시간 전에 헤어진 것뿐인데도 금세 란델이 그리워질 지경이었다. 필리아는 창밖을 돌아보는 실비아를 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팔을 쿡 찔렀다.
“오오, 설마 방금 자랑하신 거예요? 내 남편이 나를 이만큼 행복하게 해준다, 뭐 이렇게?”
“영애.”
“어떻게 행복하게 해주는데요?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공작 부부께서 침실에서 통 나오질 않으신다던데.”
“필리아. 그만.”
어느 정도 기운을 되찾은 필리아는 그 뒤로도 한참 동안 실비아를 놀렸고, 결국 실비아의 얼굴에 떠오른 홍조를 보고서야 장난을 그만뒀다. * * * 그로부터 얼마 후. 실비아는 기분 환기를 위해 숲으로의 산책을 제안했다. 필리아 또한 갑갑했다며 흔쾌히 승낙했다. 실비아는 사용인들에게 나갈 채비를 지시하고, 필리아를 배려해 제프리가 아닌 다른 세 사람을 호위로 하여 성 근처의 숲으로 향했다. 다행히도 날이 좋았다. 실비아와 필리아는 각각 양산을 쥔 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숲을 거닐었다. 그러던 중 필리아가 문득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최근에 결계를 개량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정말 괜찮은 거겠죠?”
“네. 오스턴의 실력은 믿을 만하니까요.”
실비아가 차분히 답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법사인 그녀의 눈에는 주변을 감싸고 있는 마력의 흐름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마력의 흐름을 가늠해보던 실비아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 결계라면 비틀림이 생겨 마물이 튀어나와도 곧장 경보가 울릴 테니, 얼마 지나지 않아 란델과 기사들이 달려올 것이었다. 자신과 필리아는 경보가 울리면 호위들과 함께 재빨리 숲을 빠져나가기만 하면 되었다. 실비아의 말에 필리아 또한 다시 밝은 얼굴을 했다. 그녀가 새가 지저귀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그럼 조금 전에 하던 얘기나 마저 할까요? 그래서 어렸을 적에 제프리가…….”
그 순간. 딸랑- 나뭇잎 사이로 방울이 흔들리는 듯한 소리가 숲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그 소리를 들은 호위들의 낯빛이 순식간에 변했다.
“비틀림입니다!”
“마님, 영애. 이쪽으로!”
호위들이 다급하게 실비아와 필리아를 이끌고 숲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수가 꽤 많은 것 같은데.’
실비아는 호위들을 따라 달리면서 등 뒤를 흘긋 돌아보았다. 저 멀리, 숲 깊은 곳에서부터 차츰 가까워지는 어둠이 심상치 않았다. 란델과 기사들이 제때 도착하지 않으면 호위 셋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듯했다.
‘……?’
그때 문득 가까운 곳에서 이질감이 느껴졌다. 실비아가 미간을 찌푸리는 것과 동시에 일행의 앞쪽 풀숲이 바스락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멈춰요!”
실비아가 반사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필리아의 팔을 잡아챘다. 호위들이 놀라 우뚝 걸음을 멈췄다. 직후 풀숲에서 튀어나온 무언가가 일행의 발치까지 데굴데굴 굴러왔다.
“아이고, 아이고! 나 죽네! 랭 죽네!”
먼지 묻은 공 같은 무언가가 소란스럽게 앓는 소리를 흘렸다. 곱슬곱슬한 머리카락 사이로 보랏빛 귀가 언뜻 보였다.
“마족……!”
그것을 본 호위들이 살의 어린 눈으로 검을 뽑아 들었고, 실비아 또한 필리아를 제 등 뒤로 끌어당겼다. 하지만 다음 순간.
“아이고! 살려주십시오!”
제게 겨누어진 검들을 발견한 마족이 기겁하며 항복하듯 양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실비아는 그제야 상대의 외양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낡은 로브를 두른 마족은 ‘꼬질꼬질하다’라는 말 외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을 정도로 너저분한 몰골이었다. 밀짚 같은 머리카락은 온통 산발인 채 마구잡이로 뒤엉켜 있었고, 불투명하고 두꺼운 안경 탓에 눈조차 보이지 않았다. 정체 모를 마족이 무릎을 꿇은 채 양손을 더욱 높이 들어 올리며 외쳤다.
“오해십니다! 저는 인간을 죽이지 못하는 마족이에요!”
“……뭐?”
실비아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그녀뿐만 아니라 호위들과 필리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이 그 말의 진위 여부를 미처 판단하기도 전, 등 뒤로 어둠이 성큼 가까워졌다.
“이 새끼, 잡았……!”
일행의 등 뒤에서 몇 명의 마족과 그들의 권속으로 보이는 마물들이 우르르 몰려오다가 걸음을 멈췄다. 자신을 ‘랭’이라고 지칭했던 마족이 그들을 보고 일행의 등 뒤로 몸을 감췄다. 그 움직임을 목격한 마족들이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인간……?”
“이 배신자 놈, 하다하다 결국엔 인간들에게 빌붙는 거냐?”
‘배신자?’
실비아는 혼란을 가중하는 그들의 말에 미간을 찡그렸다. 호위들의 뒤로 몸을 숨기고 있던 랭이 울컥하며 외쳤다.
“몇 번을 말해! 나는 배신자가 아니라……!”
“시끄러워! 배신자의 말 따위는 듣고 싶지 않아!”
“잔말 말고 죽어!”
하지만 랭의 말을 일축한 마족들이 일행에게 달려들었다. 호위들이 재빠르게 그들과 맞섰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랭을 습격한 마족들은 하급 마족이었던지라 호위 세 사람이 시간을 들여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정도였다. 거기에 실비아가 몰래 마법을 사용해 그들을 도왔으니 제압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윽고 호위들이 랭을 제외한 마족과 마물을 모두 처리했다. 내내 풀숲 쪽에 몸을 숨기고 그들을 지켜보던 랭이 몸을 벌떡 일으켜 박수를 쳤다.
“아주 훌륭합니다! 인간들은 어둠도 다룰 수 없을 텐데 그 정도의 실력이라니……!”
호위들이 조금 어리둥절한 얼굴로 랭을 바라보았다. 저기, 우리 방금 네 앞에서 네 동족을 죽였는데……? 실비아 또한 돌연변이를 바라보는 듯한 눈으로 랭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경들.”
“예, 마님.”
“우선 묶어요.”
“예!”
“아, 아니, 저기! 저는 인간을 해치지 못한다니까요!”
실비아의 명에 호위들이 밧줄을 꺼내 랭의 몸을 꽁꽁 묶었다. 졸지에 도롱이 벌레 신세가 된 랭이 발버둥 쳤으나 실비아의 눈은 차가웠다.
“마족 중에 돌연변이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어. 그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당장 네 목을 베지 않는 것도 대단한 자비라는 것을 알아둬라.”
가녀린 외양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묘한 위압감에 랭이 겁먹은 얼굴로 입을 합 다물었다. 그들이 밧줄에 묶인 랭을 이끌고 숲을 빠져나왔을 때 즈음 란델과 기사들이 다급한 얼굴로 달려왔다.
“실비아!”
란델은 저 멀리서부터 실비아를 발견하자마자 안도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순식간에 그녀의 앞까지 다가온 그가 그녀를 이리저리 살폈다.
“괜찮습니까, 실비아? 순찰 중에 비틀림이 두어 번 발생해서 처리하느라…….”
“네. 괜찮아요.”
“얼굴이 너무 창백한데.”
“괜찮다니까요.”
“역시 안 되겠습니다. 당장 성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안기십시오.”
“괜찮다고.”
안절부절못하던 란델이 급기야 실비아를 안아 들고 성으로 내달리려 하자 실비아가 단호히 그를 만류했다. 옆에서 황당한 얼굴로 그 광경을 보던 필리아가 란델의 발을 툭 찼다.
“야, 나는 안 보이냐?”
“……아. 필리아, 너도 있었나?”
“얘 진짜 미쳤나 봐…….”
필리아는 이전보다 심해진 란델의 팔불출을 보고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실비아를 살피는 데 여념이 없던 란델이 뒤늦게 그녀 등 뒤의 랭을 발견했다.
“……마족?”
랭을 시야에 담은 그의 얼굴이 조금 전과 달리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지체 없이 검을 뽑아 든 란델이 성큼성큼 랭에게 다가갔다. 랭이 어, 어 하며 뒷걸음질 쳤으나 기사들은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저기, 아무도 안 말립니까? 저기요?”
랭이 사색이 되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사이 랭의 앞에 다다른 란델이 무감정한 얼굴로 검을 치켜들었다. 죽음을 직감한 랭이 눈을 질끈 감는 순간.
“란델, 잠시만요.”
흰 인영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