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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평화주의 (71/118)

71. 평화주의2021.12.02.

죽음을 직감한 랭이 눈을 질끈 감는 순간.

16558817837765.jpg“란델, 잠시만요.”

흰 인영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1655881783777.jpg“……실비아?”

란델이 제 앞에 선 실비아를 보고는 곧장 움직임을 멈췄다. 그의 얼굴에는 의아함이 한가득 떠올라 있었다. 실비아는 복잡한 시선으로 등 뒤의 랭을 힐긋 일별했다. 입술을 몇 번 달싹이던 그녀가 이윽고 천천히 목소리를 냈다.

16558817837765.jpg“……인간을 죽일 수 없는 마족이래요.”

1655881783777.jpg“예?”

16558817837765.jpg“우선 본인 말로는요. 진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니 확인해봐야겠지만.”

16558817837793.jpg“진짜입니다!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아니, 하긴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거짓말을 하지는 않……!”

랭이 울컥한 목소리로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는 저를 향하는 서늘한 연녹색 눈과 시선이 마주치자 찔끔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여전히 억울함이 남았는지 기어 들어가는 음성으로 랭이 간신히 말을 맺었다.

16558817837793.jpg“않는다고요…….”

랭이 입을 다물자 어색한 침묵이 찾아들었다. 의심이 한가득 어린 눈길로 랭을 살피던 란델이 천천히 검을 내렸다.

1655881783777.jpg“실비아, 우선 이쪽으로.”

검을 집어넣은 그가 실비아를 필리아, 그리고 기사들이 있는 쪽으로 움직이게 했다. 실비아가 안전해졌음을 확인한 후, 그가 발을 떼어 랭의 앞으로 다가갔다. 몸을 굽힌 란델이 한 손으로 랭의 턱을 붙잡고 그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드러내놓고 관찰하는 시선이 이어졌다. 란델이 미간을 찡그렸다.

1655881783777.jpg“내가 북부를 떠나 있던 사이 변종 마족이라도 생긴 건가?”

란델은 중얼거림을 흘리며 랭의 얼굴을 붙잡고 있던 손을 거두었다. 랭은 란델이 손을 거두자마자 그의 발치에 넙죽 머리를 박았다.

16558817837793.jpg“아, 그것이, 그. 사실 죽이지 못하는 건 아니고 죽이지 않는 것에 가까운데 말이죠…….”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던 랭이 힐끔 시선을 들어 란델의 눈치를 살폈다. 여봐라는 듯 아구구, 소리를 낸 그가 불쌍하게 입꼬리를 끌어내리며 청했다.

16558817837793.jpg“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묶은 것을 풀어달라고는 하지 않을 테니 좀 편한 자세로라도 있게 해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안 그래도 허리가 안 좋은 편이라, 헤헤.”

랭이 밧줄 아래로 튀어나온 손을 방정맞게 파닥거렸다. 또 한 번 허리가 아프다는 듯 소리 내어 신음을 흘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1655881783777.jpg“…….”

그러한 일련의 행동들이 인간과 굉장히 흡사하게 보였다. 란델과 랭의 대치를 지켜보던 실비아는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얼마 후. 란델은 고민을 갈무리한 후 미약한 한숨을 내쉬며 입을 뗐다.

1655881783777.jpg“……우선 성으로 귀환한다. 마족을 성에 들였다는 이야기가 나돌아 좋을 게 없으니 다들 입조심 하도록. 특히 필리아.”

16558817858662.jpg“알았어. 내가 무슨 사리 분별도 못 하는 애인 줄 알아?”

1655881783777.jpg“그리고 오스턴. 너는 저 마족에게 밧줄 대신 제대로 된 구속구를 채워라. 혹시라도 마물을 불러내거나 할 수 없도록.”

16558817858678.jpg“알겠습니다.”

란델의 명령에 기사들과 오스턴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오스턴이 랭에게 다가가자 그가 마족답지 않게 쾌활한 태도로 말을 붙였다.

16558817837793.jpg“저기, 마법사시죠? 구속구를 차더라도 기왕이면 양손을 앞으로 하고 싶은데요. 등 뒤로 하면 어깨가 너무 뻐근해서…….”

16558817858678.jpg“시끄럽다.”

16558817837793.jpg“읍, 읍? 으으읍!”

오스턴이 미간을 찡그리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입술이 딱 달라붙어 입이 봉해진 랭이 무어라 마구 항의했다. 실비아는 필리아가 재잘대는 것을 한 귀로 흘리며 그 소란을 지켜보았다. 금색 눈에 심란한 기색이 그득했다.

16558817837765.jpg‘……인간을 죽이지 않는 마족이라니.’

깊은 한숨을 내쉰 실비아가 이내 란델의 손을 잡고 무거운 발길을 떼었다. * * * 랭을 포박한 일행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용히 벨포르 성으로 돌아왔다. 그도 그럴 것이 북부 어디에 왕의 눈과 귀가 숨어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아무리 랭이 말한 ‘인간을 죽이지 않는 마족’에 대해 조사하기 위함이라지만. 멀쩡히 살아 숨 쉬는 마족을 벨포르 성까지 들였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가는 여러모로 곤란했다. 란델은 성에 도착한 후, 우선 델마와 윌콧에게만 은밀히 랭의 존재를 알렸다. 그들의 도움을 받아 랭을 구석진 응접실로 옮기고, 오스턴에게 랭의 모습을 인간처럼 바꿀 마법약을 만들라 지시했다. 오스턴은 정색했다.

16558817858678.jpg“못 합니다.”

1655881783777.jpg“할 수 있다.”

16558817858678.jpg“못 한다고요! 안 그래도 구속구를 강화하느라 마력을 얼마나 털렸는지 아신다면 제게 이러실 수는!”

1655881783777.jpg“보수를 두 배로 올려주지.”

16558817858678.jpg“해내 보이겠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주군.”

오스턴은 한 손을 심장에 올린 채 진지하게 맹세했다. 란델은 혀를 끌끌 차며 그에게 돈주머니를 건넸다. 오스턴이 돈주머니를 들고 희희낙락하며 사라진 사이. 란델과 실비아는 랭이 갇혀 있는 응접실로 조용히 걸어 들어갔다.

16558817837793.jpg“앗! 란델 님, 실비아 님. 오셨군요.”

소파에 앉아 있던 랭이 화색을 띠며 란델과 실비아를 맞았다. 실비아는 그 맞은편에 앉으며 그림 같은 미소로 화답했다.

16558817837765.jpg“은근슬쩍 이름으로 부르지 말아요. 거슬리니까.”

16558817837793.jpg“……옙.”

어조만 부드러웠을 뿐 칼날 같은 말이었다. 랭이 찔끔하며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

1655881783777.jpg“그래서.”

그때 묵직한 목소리가 침묵을 깼다. 란델이 서슬 퍼런 경계심으로 물든 얼굴로 물음을 던졌다.

1655881783777.jpg“인간을 죽이지 ‘않는’ 마족이라는 건가, 네가?”

랭은 난감한 신음을 흘리며 구속구에 묶인 손으로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16558817837793.jpg“음…… 이걸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하나.”

입 안으로 말을 몇 번 고르던 랭이 천천히 혀를 움직였다.

16558817837793.jpg“혹시 ‘대전쟁’ 시대에는 서큐버스가 없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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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쟁. 그 단어에 실비아의 손끝이 움찔 떨렸다. 하지만 워낙 작은 움직임이었던지라 그녀를 제외하고는 그것을 눈치챈 사람이 없었다. 대전쟁. 마족과 인간의 전쟁이 극악으로 치달았을 무렵을 일컫는 말. 대마법사 알리사가 영웅으로 활약하다가 돌연 바람에 지는 낙엽처럼 실종되었고. ……역대 최악의 마왕 알리사가 인간 세상을 핏빛으로 물들이고 다녔던 시기이기도 했다.

16558817837765.jpg“…….”

실비아는 손을 숄 아래로 감추며 애써 평정을 지켰다. 그사이 랭의 말이 이어졌다.

16558817837793.jpg“하지만 지금은 서큐버스라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마족들도 이따금 태어나죠.”

16558817895112.jpg“…….”

16558817837793.jpg“마족은 명백히 진화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보였던 방정맞은 행동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진지한 모습이었다. 눈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두꺼운 안경조차 지금의 그에겐 무섭도록 잘 어울리는 듯 느껴졌다.

16558817837793.jpg“세월이 흐르며 점점 이성이 본능을 앞지르는 마족이 늘어났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굳이 목숨을 걸고 인간을 사냥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 우리는 인간을 사냥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가? 랭은 그리 자문하고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내놓았다.

16558817837793.jpg“답은 ‘아니다.’입니다. 마물과 마족이 살인이라는 행위에서 극상의 쾌락을 얻는 것은 맞지만, 그러한 쾌락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죽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조금 심심하게 목숨을 연명할 뿐이지요.”

실비아는 랭이 말을 잇는 내내 생경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분명 그녀가 알기로 ‘본능’이라는 단어 그 자체를 형상해놓은 것이 마족이었다. 그런데 본능을 이성으로 억누를 수 있는 마족이라니. 물론 지난번 보았던 벨라라는 마족도 살의를 누르고 있긴 했지만. 그녀 또한 결국 인간을 괴롭히고 죽이는 행위에서 기쁨을 찾는다는 점은 다르지 않았다.

16558817837793.jpg“아, 심심하다는 말은 틀린 표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연구하는 일 자체가 굉장히 즐거우니까요. 그중에서도 가장 즐거운 건 인간 세상에 관한 연구입니다.”

랭이 어깨를 으쓱였다. 조금 전의 진지한 표정과 어조는 어디로 간 것인지 다시 방정맞은 모습이었다.

16558817837793.jpg“사실 얼떨결에 넘어온 것이긴 하지만, 조금 신나네요. 인간 세상은 서적으로만 접했었는데, 이렇게 두 눈으로 볼 기회가 생길 줄이야.”

친근하게 인간에 대해서 논하는 모습에 실비아의 속이 점점 불편해졌다. 그녀와 란델이 계속해서 침묵을 지키자 랭은 슬그머니 그들의 눈치를 보고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16558817837793.jpg“큼, 아무튼. 점점 인간 사냥에 대한 회의감을 갖는 마족이 늘어났고, 그들은 켈베티아에서의 삶을 이어가는 쪽에 더욱 무게를 두기 시작했습니다. 저희는 그러한 마족을 ‘비쾌락주의’, 혹은 ‘평화주의’ 파벌에 속한다고 보죠.”

1655881783777.jpg“……비쾌락주의 마족이라니.”

란델이 끝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작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실비아 역시 같은 심정이었다. 랭이 묶인 손으로 흘러내린 안경을 추켜올리며 마저 설명했다.

16558817837793.jpg“이쯤 말씀드렸으니 슬슬 눈치채셨겠지만, 두 분께서 아까 처리한 마족들은 극도의 쾌락주의 파벌이었습니다. 제가 평화주의 파벌이라는 이유만으로 저를 죽이려 들기에 도망쳤고, 그러다가 별안간 비틀림이 나타나서 그만 이곳으로 넘어와 버렸지요.”

16558817895112.jpg“…….”

16558817837793.jpg“이제는 의심이 조금 풀리셨습니까?”

랭이 물었으나 란델과 실비아는 쉽사리 대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랭의 말이 거짓인 것 같지는 않았으나, 결국 그 또한 ‘말’뿐이다. 북부의 주인, 왕국의 방패인 그들의 입장에서는 선뜻 랭의 말을 믿을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랭은 그들의 의심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엷게 웃었다.

16558817837793.jpg“서적으로만 접하던 인간 세상을 볼 수 있게 된 건 좋지만, 어차피 제가 이곳에 있는 게 알려지면 피차 귀찮아지지 않겠습니까?”

그는 생각보다 예리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란델과 실비아가 침묵으로 동의했다.

16558817837793.jpg“저도 괜히 인간들과 함께 지냈다는 사실을 들켜 쾌락주의 마족들과 시비가 붙기는 싫으니까요. 이곳에는 마법사도 있으니, 근처에 비틀림이 생기면 저를 켈베티아로 돌려 보내주시지 않겠습니까? 부탁드립니다.”

랭이 말을 마치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켈베티아로 돌아가고 싶다는 그의 말은 진실인 듯싶었다. 란델과 실비아는 우선 의논이 필요하다는 말을 남기고 응접실을 나왔다. 부부 침실로 돌아온 란델이 복잡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1655881783777.jpg“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16558817837765.jpg“……잘 모르겠어요.”

실비아의 말은 진실이었다. 그녀는 자꾸만 술렁이는 마음을 다스리려는 듯 가슴께를 손으로 꾹 눌렀다. ‘켈베티아로 돌려보내 달라’는 랭의 말에 일순 눈앞에 마법진이 떠오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자신을 켈베티아와 이어진 마법진으로 밀어 넣던, 목숨을 맡길 정도로 신뢰했던 동료들의 얼굴도. 그 기억을 잊을 수는 없었다. 실비아의 뇌리에는 아직도 켈베티아와 이어지는 특수 이동 마법식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실비아를 나락으로 떨어트리는 데 일조한 마법진이었다. 그러한 마법진을 제 손으로 재현해내기는 싫었다. 하물며 그것이 마족을 위한 일이라면 더더욱.

16558817837765.jpg‘게다가 지금의 랭은 란델의 포로나 마찬가지이니…… 내 마음대로 돌려보내기에도 애매해.’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랭을 보내고 싶었다. 한때 전장의 가장 앞에서 마족을 막아냈던 실비아로서는 마족과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썩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랭이 사라진다면 어떤 식으로든 소란이 일 것이 분명했다. 란델 또한 어떻게 된 일인지 조사하려 들 테고, 자칫 오스턴이 의심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우선은…….

16558817837765.jpg“……어차피 오스턴이 모습을 바꾸는 약을 만들고 있으니까, 오스턴의 옛 지인이 조수로 왔다고 설명하고 당분간은 성에 두죠. 그러면 비틀림이 발생했을 때 오스턴이 랭을 곧장 그쪽으로 이동시킬 수 있을 테니까요.”

1655881783777.jpg“제가 생각해도 그 방법이 최선일 것 같습니다. 이유가 어찌 되었건 성에 마족을 들였다는 사실 자체가 논란이 될 수 있으니.”

16558817837765.jpg“특히나 국왕 폐하께 말이죠.”

실비아의 덧붙임에 란델이 잠잠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생각을 정리한 그가 실비아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을 남기고 웃었다.

1655881783777.jpg“그럼 저는 델마와 윌콧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고 오겠습니다. 많이 놀라셨을 텐데, 이만 쉬십시오.”

16558817837765.jpg“……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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