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또 찢어졌어요?2021.12.06.
랭은 겉모습이 인간처럼 바뀌는 마법약을 마셨다. 그러곤 오스턴과 어떠한 방식으로든 벨포르에 관한 사실을 일절 발설하지 않는다는 맹약까지 맺고 나서야 벨포르 성에 머무르는 것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랭이 오스턴의 마법약을 마시자 그의 피부가 살구색으로 변하고 눈에 흰자위가 생겨났다. 랭은 변한 모습이 신기한지 복도를 지날 때마다 여기저기에 얼굴을 비춰보며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역시 마법이란 신기하단 말이지……. 앗,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이에요, 랭 씨.”
랭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도 사용인이 보이면 후다닥 달려가 인사를 건넸다. 며칠 새 그에게 익숙해진 성의 사람들이 웃으며 그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랭은 마법약으로 모습을 바꾼 후, 행여 다른 이들과 대화를 하다가 정체를 들킬까 염려스러울 정도로 성을 열심히 쏘다녔다. 그는 사용인에게 부엌 뒤쪽의 텃밭에서 기르는 허브에 대해 양껏 물은 후 정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원을 구경하던 그가 누군가를 발견하고 활짝 웃으며 손을 붕붕 흔들었다.
“부인-!”
“…….”
델마와 주치의의 잔소리에 못 이겨 산책하러 나왔던 실비아가 움찔했다. 그녀는 랭을 발견하자마자 몸을 돌려 그와 반대 방향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부인! 어디 가십니까? 부인!”
하지만 랭은 눈치라는 게 아예 소멸한 것처럼 폴짝폴짝 뛰며 실비아를 따라왔다. 실비아는 그로부터 도망치며 양산 아래로 얼굴을 사정없이 구겼다.
‘이래서 나오지 않으려고 했는데.’
랭이 성에 머물기 시작한 후. 실비아는 가급적 방 안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으며 그와 마주치는 일을 피하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랭의 얼굴을 볼 때마다 기분이 저조해졌다.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스스로도 갈피를 잡지 못한 상황에서 그와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마님. 계속 이렇게만 계시면 건강이…….
-물론 신혼이신 건 알지만, 그래도 산책 정도는…….
하지만 그것이 사람들의 눈에는 다른 의미로 비추어진 것인지 델마와 주치의가 눈을 질끈 감고 실비아를 바깥으로 떠밀었다. 그녀는 민망한 오해 탓에 그들을 말릴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정원으로 나와야 했다. 최근 랭이 성 이곳저곳을 꽁지에 불붙은 마물처럼 뛰어다닌다는 소식에, 정원을 한 바퀴만 돌고 얼른 다시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하필이면 여기서 딱 마주칠 게 뭐람.
“허억, 헉! 부인! 걸음이 무척 빠르시네요. 제가 부르는 걸 듣지 못하신 모양입니다.”
실비아는 곧 랭에게 따라잡혔다. 그는 해맑은 얼굴로 후, 하고 숨을 내쉬며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실비아는 하는 수 없이 발걸음을 멈추고 미간을 미미하게 찡그린 채 그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목소리를 낮춰 그를 질책했다.
“그렇게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 말을 걸다가 사람들에게 마족이라는 걸 들키면 어쩌려고 그러나.”
“아직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던데요? 웬만한 인간들이야 어둠을 느낄 만큼 예민하진 못할 테고, 제가 또 켈베티아에서도 인간의 화술로는 달인이라 불릴 정도의 실력자였거든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니, 걱정이 아니야.”
“예?”
실비아는 지나치다시피 빠르게 랭의 말에 반박했다. 랭 또한 실비아의 말에 날이 서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인지 멈칫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아차.’
반사적으로 랭의 말에 반박해버린 실비아가 티 나지 않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수런거리는 속을 다스린 후 애써 고저 없는 목소리를 냈다.
“……걱정이 아니라 염려라고.”
“둘 다 같은 의미 아닙니까?”
“그래도 어감의 차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설마 달인이라는 자가 그조차 모르지는 않을 테고.”
“다, 당연하죠.”
실비아가 일부러 그를 도발하자 랭은 홀랑 넘어갔다. 그녀는 랭의 입을 막은 후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정원을 마저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걸음을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실비아가 이번엔 확실하게 얼굴을 찌푸리며 랭을 홱 돌아보았다.
“왜 자꾸 따라오나? 자네 갈 길 가게.”
“아, 그게. 어쩐지 부인에게선 친숙한 느낌이 나서요. 다른 인간과 있는 것보다는 마음이 편하다고 해야 할까……. 아! 이건 수작질이 아닙니다! 정말이에요! 부인께서는 절대! 제 취향이 아니십니다!”
랭은 란델이 무서운지 펄쩍 뛰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실비아는 저를 친숙하게 느낀다는 그의 말이 불편해 한숨을 삼켰다. 랭이 실비아를 친숙하게 느끼는 이유는 보나마나 그녀가 지닌 어둠 때문일 것이다. 평소에는 란델조차 잘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갈무리하고 다니는 편이나, 아무래도 랭은 태생이 마족인 만큼 어둠을 더 민감하게 느끼는 듯했다.
“그런데 부인. 부인의 고향이 남쪽이라면서요? 남쪽은 북부와 어떻게 다릅니까? 아무래도 제가 겪어본 인간 세상은 북쪽뿐이니까요. 기회가 되면 남쪽도 가보고 싶습니다만.”
랭은 실비아를 쫄래쫄래 따라다니며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하지만 실비아는 행여나 랭이 제가 지닌 어둠을 눈치챌까 싶은 마음 반, 이미 몸에 익어버린, 마족을 경계하는 마음 반으로 그의 말을 무시하고 걷는 데 집중했다. 그때 근처의 풀숲에서 바스락대는 소리가 났다. 랭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리가 난 수풀을 들여다보았다.
“방금 여기서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그가 양손으로 이리저리 엉킨 수풀을 하나둘 젖혔다. 그러자 수풀 아래로 새하얀 토끼 한 마리가 다리를 끙끙거리는 것이 보였다. 토끼가 앉아 있는 잔디에 언뜻 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뒷다리에 나 있는 생채기가 눈에 들어왔다.
“이런. 아무래도 다리를 다친 모양입니다.”
랭이 안타깝다는 듯 혀를 끌끌 차더니 토끼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잠깐……!”
실비아는 반사적으로 랭의 손목을 붙잡으려 했다. 그녀가 보아온 마족은 모두 인간 세상의 생명체를 괴롭히고 해치는 데에서 희열을 느꼈다. 랭이 아무리 평화주의 파벌이라지만 그것은 결국 본인의 의지일 뿐. 하물며 토끼가 피까지 흘리고 있으니 본능이 이성을 이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실비아가 저도 모르게 그를 막아서려던 차였다.
“쉬이, 착하지.”
작은 속삭임을 흘린 랭은 양손으로 토끼의 목을 비트는 것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감싸 올렸다. 양 손바닥 위에 토끼를 올려놓은 그가 상처를 이리저리 들여다보았다.
“생김새로 보아 부엌에서 기르던 토끼 같은데. 어쩌다가 이렇게 다친 거니? 으음, 인간 세상의 생명체를 마물과 같은 방식으로 치료하면 아무래도 곤란하려나…….”
랭은 지극히 학자 같은 모습으로 토끼를 관찰하고, 곰곰이 생각을 이어갔다. 정말 그뿐이었다. 실비아는 랭을 멈춰 세우려던 자세 그대로 굳어졌다. 눈앞의 광경이 어쩐지 현실감 없이 느껴졌다. 피를 흘리는 생명을 앞에 두고도 차분한 마족이라니. 생명의 목을 비틀지 않는 마족이라니. 지금껏 랭에게 말로 설명을 들은 것과 직접 눈으로 그 광경을 목격하는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실비아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얼어 있는 사이. 부엌 쪽에서 사용인 하나가 급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달려왔다.
“토끼야! 토끼…… 아! 마님을 뵙습니다!”
토끼를 찾던 사용인이 실비아를 보고 얼른 허리를 굽혔다. 랭은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사용인에게 다가가 토끼를 내보였다.
“이 녀석을 찾으시는 겁니까?”
“아! 네, 네. 맞아요. 세상에, 다쳤구나.”
“여기 쓰러져 있던 것을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데려가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소란을 일으켜서 죄송하고요.”
사용인은 랭에게서 건네받은 토끼를 소중히 품에 안고 서둘러 돌아갔다. 랭은 멀어지는 사용인의 뒷모습을 보며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어떻게 치료하는지 구경하게 해 달라고 하는 건 역시 부자연스러울까요? 부인,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부인?”
여전히 충격으로 굳어 있던 실비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랭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은 채 몸을 홱 돌려 성안으로 들어갔다.
“부인? 부인! 어디 가십니까!”
등 뒤로 랭이 실비아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실비아는 도망치듯 방으로 돌아와 방문까지 걸어 닫은 후에야 조급한 움직임을 멈출 수 있었다.
‘방금 대체…….’
조금 전 실비아가 본 광경은 지금껏 그녀가 알던 것, 살아온 세월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었으니까. * * * 실비아는 낮에 본 광경으로 인해 밤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몸을 씻은 후 부부 침실로 들어온 란델이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 움직임에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똑 떨어지자 그가 손에 든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탈탈 털어냈다.
“웬일로 잠들어 있지 않으시군요. 요즘 들어 제가 돌아올 때쯤이면 늘 주무시고 계셨는데.”
그에 실비아는 조금 어이가 없어졌다.
“……그게 다 당신 때문이라는 건 알고 말하는 거죠? 그건 그렇고, 머리에 물기도 덜 말리고 온 거예요?”
“시간이 늦어 부탁하기가 멋쩍었습니다. 이런 일 정도는 제 손으로 해도 되니까요.”
란델이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하고는 머리를 마저 말리기 시작했다. 한쪽 팔로 머리를 괸 채 옆으로 누운 자세의 실비아가 그런 란델을 빤히 관찰했다. 란델은 검은 실크 가운을 걸친 채 양손을 들어 올려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그 탓에 벌어진 가운 틈으로 구릿빛 피부와 탄탄한 근육들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실비아는 굳이 감추려고도 하지 않은 채 느긋하게 란델의 몸을 감상했다. 이윽고 란델이 수건을 내려놓고 침대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던 중 무언가를 발견한 실비아가 불만스럽게 미간을 좁혔다. 그녀는 손을 뻗어 제 옆으로 다가온 란델의 가운을 슬쩍 들춰보더니 말했다.
“자국, 다 없어졌네요?”
“예?”
“여기요.”
실비아가 손끝으로 란델의 가슴팍을 쿡 찔렀다. 그에 귓가를 확 붉힌 란델이 서둘러 뒷걸음질 치며 얼른 가운 앞섶을 여몄다.
“실비아. 아무리 그래도 그런, 그런 말은 좀…….”
“……? 당신이야말로 나한테 한 짓을 생각하면 부끄러워하면 안 되죠.”
실비아가 헛웃음을 흘렸다. 란델은 못 들은 체하며 침대를 빙 돌아 실비아의 옆자리로 올라왔다. 실비아는 그때까지도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양 란델의 가슴팍을 째려보고 있었다. 그녀가 결국 란델의 손목을 덥석 붙잡고 그의 몸 위로 올라탔다.
“안 되겠어요. 역시 다시 남겨야겠어.”
“실비아, 잠깐!”
삽시간에 점령당한 란델이 다급하게 외쳤으나 실비아는 그의 저항을 무시한 채 고개를 숙였다.
“읏…….”
보기 좋게 그을린 살결 위로 말랑한 입술이 나비처럼 내려앉았다. 란델은 황급히 한 손으로 제 입가를 틀어막았다. 그 모습을 본 실비아가 일부러 짓궂게 란델의 피부 위에 이를 세웠다. 실비아의 움직임을 따라 란델의 가슴팍에 하나둘 붉은 꽃잎이 피어났다. 그의 가슴이 꽃밭처럼 보일 지경이 되었을 때 즈음. 부욱. 무언가 찢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멈칫한 실비아가 고개를 들자 란델이 신음을 참으며 움켜쥐고 있던 시트가 찢어져 있었다.
“……또 찢어졌어요?”
“……시트가 너무 약한 겁니다.”
란델 또한 당황한 얼굴로 찢어진 시트를 바라보다가 변명했다. 실비아가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번이 벌써 몇 번째인지. 우리 이러다가 성안 살림을 다 해 먹겠어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이만 자요.”
“……예?”
란델은 제 몸 위에서 내려가 착실히 이불을 파고드는 실비아를 망연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실비아는 무구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안 누워요?”
“……하.”
란델이 한 손으로 눈가를 가린 채 고개를 젖혀 헛숨을 뱉었다. 이윽고 손을 떼어낸 그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실비아를 덮쳤다.
“저를 이렇게 만들어놓고 그만두시겠다니요,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