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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먹고 자고 하는 짐승 (73/118)

73. 먹고 자고 하는 짐승2021.12.09.

16558818162921.jpg“……하.”

란델이 한 손으로 눈가를 가린 채 고개를 젖혀 헛숨을 뱉었다. 이윽고 손을 떼어낸 그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실비아를 덮쳤다.

16558818162921.jpg“저를 이렇게 만들어놓고 그만두시겠다니요, 부인.”

실비아는 눈 깜짝할 새에 란델의 몸 아래서 양 손목이 붙들려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양 손목은 어느새 란델의 한 손에 붙잡힌 채 머리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지난번에 침대에서만큼은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했더니, 드문드문 란델이 그녀를 이기려 들 때가 있었다. 예를 들면 지금 같은.

16558818162921.jpg“부인의 욕심만 채우고 그만두는 건 너무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란델은 그 말을 하며 보란 듯 실비아의 몸을 찬찬히 시선으로 훑었다. 그 시선이 참으로 노골적이고 적나라해 그녀까지 덩달아 몸이 달아올랐다.

16558818162932.jpg“……흠.”

실비아는 양 손목이 붙잡힌 채로도 여유롭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란델이 종종 ‘야하다’라고 지칭하는 묘한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떠올랐다. 실비아는 묶인 손 대신 발을 들어 발끝으로 란델의 복부를 스치듯 훑어 내렸다. 살짝 닿자마자 복부에 가득 들어찬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하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제 자그마한 접촉 하나에도 금세 반응하는 몸이 사랑스러웠다.

16558818162932.jpg“그래서, 싫어요?”

실비아가 눈매를 사르르 휘며 물었다. 그 질문 하나에 란델의 이성이 무너져 내렸다. 란델은 끝내 앓는 듯한 신음을 흘리며 항복하듯 웃었다.

16558818162921.jpg“……너무 좋아서 문제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란델의 입술이 다급하게 실비아를 찾았다. 실비아는 기꺼이 입술을 벌려 그를 맞이했다. 모든 근심과 걱정은 기분 좋은 열기에 휩쓸려 사라진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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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그로부터 며칠 후.

16558818162932.jpg“……먹고, 자고, 하고, 먹고, 자고, 하는 짐승이 된 기분이야.”

실비아는 쉰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침대에서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돌리며 손으로 침대를 더듬어 보니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잠결에 란델이 이마에 입맞춤을 남기며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속삭인 기억이 있긴 했다. 실비아는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커튼을 젖히자 정오의 햇살이 와르르 쏟아져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렸다.

16558818162932.jpg“오늘도 아침에 일어나는 건 실패했네.”

실비아가 가볍게 혀를 찼다. 란델과 밤을 보내고 나면 체력이란 체력은 모두 동나 다음 날 오후까지 기절하듯 잠드는 것이 어느덧 일상이 되어 놀랍지는 않았다. 그녀는 욱신거리는 몸을 욕조에 담근 다음 옷을 갈아입고 소파에 축 늘어졌다. 분명 꽤 오랜 시간을 잠들어 있었음에도 몸이 물 먹은 솜처럼 축축 늘어졌다. 요즘 실비아가 낮이면 늘 꾸벅꾸벅 졸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용인들은 조용히 방에서 물러났다. 그렇게 실비아가 창가에서 햇살을 받으며 평화롭게 졸고 있던 때.

16558818162952.jpg“……니까?”

16558818179259.jpg“그만 좀 물어…….”

창밖에서 대화 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미간을 움찔한 실비아가 가느다랗게 눈을 뜨고 창밖을 내다보자 오스턴을 귀찮게 하는 랭, 그런 랭을 질색하는 오스턴의 모습이 보였다.

16558818162932.jpg“…….”

랭의 얼굴을 보자 지난 며칠간 란델 덕분에 잊고 있었던 심란함이 다시 쓴물처럼 올라왔다. 복잡한 시선으로 랭을 바라보던 실비아는 결국 커튼을 쳐 시야에서 그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제야 수선하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16558818162932.jpg“하…….”

실비아는 아직 랭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확실하게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를 척살해야 할 ‘마족’으로 대할지, 아니면 ‘동족’처럼 대해야 할지. ‘알리사’였을 적부터 지금까지. 긴 세월이 흐르며 세상이 변했다는 점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세상은 분명 변화했다. 다만 실비아의 시간은 아직도 동료들에게 배신당하고, 켈베티아에서 생사를 오가던 시기에 반쯤 멈춰 있었다. 마음이 심란해져서인지 드물게도 아주 오래된 기억이 자꾸만 떠올랐다. ‘알리사’는 대전쟁 시기, 부모조차 없던 고아였다. 그녀는 기억하는 순간부터 혼자였고, 간신히 마족과 마물을 피해 살아남다가 한 부부에게 거두어졌다.

16558818162952.jpg-아가, 우리랑 같이 가련?

  알리사를 거둔 부부는 좋은 이들이었다. 그들은 없는 살림임에도 거리를 떠도는 알리사가 눈에 밟혔다며 그녀를 친딸처럼 키웠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마물의 발톱에 목숨을 잃었다. 알리사는 부모의 시신만이라도 거두어 양지바른 곳에 묻으려 했으나 마물에 이어 나타난 마족들로 인해 무력하게 도망쳐야 했다. 그렇게 그녀는 다시 거리를 떠돌게 되었다. 아마도 그 이후부터였을 것이다. 본능적으로 마력을 다루는 법을 터득하고. 마족, 그리고 마물로부터 소중한 이들을 지켜내야겠다고 결심한 것이. 알리사에게 마족과 마물은 언제나 빼앗는 자였다. 가족을 빼앗고, 동료를 빼앗고, 희망을 빼앗는 파괴자들이었다. 그것은 알리사에게 해가 동쪽에서 뜨고 서쪽에서 지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진리였다. 하여 실비아는 갑자기 나타난 랭의 존재가 달갑지 않았다. 그녀가 지금껏 살아왔던 방식, 알고 있던 모든 것을 뒤집는 존재였기 때문에. 어찌 보면 본능에 가까운 거부감이었다.

16558818162932.jpg‘어차피 곧 비틀림이 발생할 테니까. 하필이면 지금 시기에 잠잠해질 건 뭐람.’

북부는 원래 일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크고 작은 비틀림이 많이 생겨나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따금 비틀림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 시기도 있는데, 하필 랭이 성에 머무는 지금이 바로 그 시기였다. 실비아는 하루빨리 비틀림이 발생해 랭을 돌려보낼 수 있기를 소망하며 소파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그때였다. 돌연 방문 바깥이 소란스러워지는가 싶더니 문이 벌컥 열리며 델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16558818162952.jpg“마님!”

16558818162932.jpg“무슨 일인가?”

필리아가 울며 찾아왔을 때조차 노크를 하고 허락의 말을 들은 후에 방 안으로 들어왔던 델마였다. 그런 그녀가 다짜고짜 주인의 방문을 열어젖혔다면 필히 심상찮은 일일 터다. 실비아가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둘러 실비아의 곁으로 다가온 델마가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녀가 죄책감이 그득 서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16558818162952.jpg“죄송합니다. 예의가 아닌 것은 알고 있으나…… 지금 성 앞에 왕세자 전하께서 와 계십니다.”

실비아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16558818162932.jpg“……뭐? 동행은?”

16558818162952.jpg“호위를 맡은 기사와 마법사를 제외하고는…….”

16558818162932.jpg“안내하게.”

16558818162952.jpg“예, 마님.”

델마는 즉시 실비아를 1층으로 안내했다. 정원을 가로지르자 저 멀리 정문에 서 있는 다비드와 그 호위, 그리고 난감한 기색으로 그를 가로막고 있는 벨포르 기사들이 보였다.

16558818199643.jpg“아, 공작 부인. 나왔군.”

다비드는 실비아를 보자마자 사르르 눈을 휘어 웃고는 기사들에게 눈짓했다. 벨포르 기사들은 실비아가 나타나자 주저하다가 다비드의 앞에서 물러나 옆에 섰다.

16558818162932.jpg“……전하께서 방문 전에 집주인에게 연락을 넣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예의조차 모르는 한 살배기 어린아이는 아니실 테고. 설령 잠행을 나오신 것이었다고 해도 그렇다면 이곳에 찾아와서는 안 되었을 텐데요.”

실비아는 못마땅한 기색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하지만 다비드는 개의치 않고 실비아의 손등을 멋대로 잡아채고는 또다시 진득하게 입을 맞췄다.

16558818199704.jpg“……!”

그 노골적인 입맞춤에 사용인들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미처 다비드를 막지 못한 실비아가 진저리를 치며 곧장 손을 빼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비드는 만족스러운 기색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16558818199643.jpg“일전의 제안에 대한 답을 들으러 왔네만, 부인.”

16558818162932.jpg“…….”

다비드가 드러내놓고 ‘제안’이라는 표현을 쓰자 실비아가 반사적으로 사용인들의 눈치를 살폈다.

16558818162932.jpg‘일부러 목소리도 줄이지 않은 게 분명하군.’

실비아는 다비드를 매섭게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16558818162932.jpg“……우선 들어오시죠. 응접실로 안내하겠습니다.”

16558818199643.jpg“기꺼이.”

실비아는 다비드가 내민 손을 무시한 채 몸을 돌려 걸었다. 등 뒤로 따라붙는 웃음과 발걸음 소리가 미치도록 거슬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왕세자인 그를 내쫓을 수도 없었기에 실비아는 그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다비드를 먼저 응접실로 들여보낸 그녀가 델마를 돌아보며 작게 속삭였다.

16558818162932.jpg“공작님께 귀환을 요청하고, 돌아오시면 곧장 이곳으로 안내하게. 주변의 사용인들을 물리고.”

16558818162952.jpg“연락은 진즉 드렸습니다. 다만 사용인들은…….”

16558818162932.jpg“괜찮아. 목격자가 이렇게 많은데 내게 손대지는 못할 걸세. 그거야말로 왕실의 망신이니까.”

계속해서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치던 델마는 결국 명령에 복종해 허리를 숙여 보이고 사라졌다. 사실 사용인들을 물리라는 건 다비드와 자신의 대화 내용이 애먼 사람에게 새어나갈까 싶어 지시한 것이었다. 오스턴은 성에 있고, 란델은 기사들과 함께 시찰을 나갔으니 아무리 빠르게 돌아온다고 해도 30분은 넘게 걸리겠지. 그사이에 다비드와의 대화를 마무리 지으면 문제없을 것이다. 실비아는 그리 생각을 정리하며 응접실로 들어갔다.

16558818199643.jpg“확실히 남부나 수도와는 분위기가 다르군. 여기까지 들어와 본 적은 없어서 말이야.”

실비아가 소파에 앉는 사이, 다비드는 응접실을 한 바퀴 빙 둘러보며 응접실에 놓인 도자기나 장식 등을 감상했다.

16558818162932.jpg“미리 연락을 주신 것도 아닌지라 제가 오래 상대해드릴 수 없으니 이만 자리에 앉으시지요, 전하.”

다비드는 결국 응접실 문고리까지 살펴본 후에야 실비아의 지청구를 듣고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사용인들이 급하게 준비한 다과상이 차려져 있었다. 실비아는 다비드를 오래 마주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기에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16558818162932.jpg“무슨 일이지? 용건만 간단히 하고 떠나 줬으면 좋겠는데.”

그 말에 막 찻잔을 집어 들려던 다비드가 멈칫했다. 그가 능글맞은 웃음을 띠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16558818199643.jpg“차 한잔 마실 시간도 주지 않는 건가?”

16558818162932.jpg“차라는 건 손님에게 내어주는 거지, 갑작스레 들이닥친 불청객에게 내어줄만한 건 아니라서.”

16558818199643.jpg“매정하군.”

다비드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실비아는 무표정하게 질문만 던졌다.

16558818162932.jpg“폐하께서는 당신이 여기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요컨대 왕세자가 단신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북부에 발을 들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국왕이 날뛸 거라는 경고였다. 하지만 다비드는 이상할 정도로 여유로웠다.

16558818199643.jpg“그래. 아마 돌아가면 꽤나 혼이 날 테지. 그건 그렇고.”

다비드가 입도 대지 않은 찻잔 손잡이를 툭 놓았다. 무릎에 팔꿈치를 기댄 채 턱을 괸 그가 매혹적으로 웃었다.

16558818199643.jpg“답을 들으러 왔어, 그대.”

16558818162932.jpg“…….”

16558818199643.jpg“일전에 디아볼로스 거리에서 그대에게 제안했던 일, 말이야.”

역시 저것 때문이었나. 실비아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저 제안에 대한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녀는 자칫 다비드를 도왔다가 또다시 신의 분노를 사는 것도 원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늘 앞장서 왕국을 수호하는 란델에게 해가 되고 싶지 않았다. 실비아는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녀가 막 거절의 답을 뱉으려는 찰나. 다비드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불쑥 물었다.

16558818199643.jpg“혹 그대가 대답을 망설이는 이유는 신 때문인가?”

실비아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반사적으로 움직임을 멈췄다. 두려움이 떠오른 금색 눈만이 습관적으로 응접실의 천장을 향했다. 실비아는 그 일련의 행동을 한발 늦게 깨달았다.

16558818162932.jpg‘아차.’

그녀가 낭패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다비드가 질문을 던진 바로 그 순간 아니라고 대답하며 거절을 내뱉었어야 했는데. 이래서야 그녀가 무얼 두려워하는지 상대에게 전부 내보인 셈이었다.

16558818199643.jpg“역시.”

다비드가 자문자답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실비아는 잠자코 그를 노려보았다. 다음 순간. 다비드가 상냥한 어조로 그녀를 회유했다.

16558818199643.jpg“그 점은 걱정할 필요 없어. 어차피 그대를 만났건 만나지 않았건 내 계획에는 변함이 없었을 테고, 내가 그대에게 바라는 건 그저…… 윤활유 역할 정도니까.”

실비아는 그 말에 정신을 차렸다. 호흡을 가다듬은 그녀가 차갑게 반박했다.

16558818162932.jpg“그 윤활유가 모든 것을 불태울 불꽃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

그리고 신은 불티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자신을 짓밟을 수 있는 존재였다. 실비아는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16558818162932.jpg“내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뿐이야. 나는…….”

란델의 얼굴이 떠오르자 울컥 목이 멨다. 그녀가 이내 감정을 추스르고 란델과의 평화로운 여생을 바란다고 말하려던 차였다.

16558818199643.jpg“‘죽음’ 말인가?”

그 말을 듣는 순간. 실비아의 호흡이 그대로 멈추고, 다비드의 눈이 힐긋 응접실 문 쪽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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