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죽음을 희망하지 않는2021.12.13.
“‘죽음’ 말인가?”
그 말을 듣는 순간. 실비아의 호흡이 그대로 멈추고, 다비드의 눈이 찰나 응접실 문 쪽을 향했다. 그러나 실비아는 충격으로 굳어져 그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어떻게?’
극도의 혼란과 충격으로 외려 머리가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실비아는 사고가 정지한 와중에도 다비드가 어떻게, 자신이 한 번도 입 밖으로 내본 적 없는 ‘죽음’이라는 소망을 눈치챈 것인지 알아내려 애썼다. 그사이 다비드의 시선이 실비아에게로 돌아왔다. 그는 실비아의 동요가 기꺼운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그렇게까지 놀란 얼굴이라니. 설마 내가 그 정도도 예상 못 했을까 봐.”
다비드는 손끝까지 굳어진 실비아와 대조되는 모습으로 여유롭게 몸을 일으켰다. 테이블을 돌아 실비아의 옆쪽으로 다가온 그가 상체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속살거림을 흘려 넣었다.
“그대와 나는 같아.”
“…….”
“처음 인간으로 환생했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나 또한 이렇듯 비참하게 생을 이어갈 바에는 차라리 죽고 싶다고 수백, 수천 번 생각했거든.”
다비드, 그러니까 ‘바시스’는 태어난 그 순간부터 마족이었고, 동시에 마족의 정점이었다. 그런 그에게 ‘인간으로 환생했다’라는 사실은 길가의 벌레로 환생했다는 것보다 모욕적이고 비참한 일이었다. 다비드는 어느 정도 현실을 인지한 후, 자신이 하잘것없는 인간 따위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여러 번 죽음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는 ‘왕세자’였고, 귀찮게도 인간들은 왕세자가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가 불구덩이에 뛰어들어도 기어코 건져서 살려두었다. 하여 차선이라고 하기에는 우스우나 패악을 부렸다. 란델과 대면하고, 그로 인해서 다시금 어둠을 다룰 수 있게 되기 전까지. 지금의 다비드는 실비아가 신에게 정확히 어떤 벌을 받은 것인지 알지 못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하물며 먼저 배신당했음에도 신에게 벌을 받고, 그 모든 사실을 고스란히 기억한 채 ‘강제로’ 환생하게 된 그대라면 더 말할 것도 없겠지.”
“…….”
다비드 데 켈마르 로클렌이 실비아 플로레트 벨포르의 유일한 이해자라는 것.
“…….”
실비아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다비드는 거기까지 이야기하고는 다시 상체를 일으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가 조금 전보다 한결 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말이야, 그대가 애초에 벨포르 공작과의 결혼을 결심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 아닌가?”
“…….”
“켈베티아와 맞닿아 있는 땅이라니. 어찌 보면 ‘자연스럽게’ 죽을 수 있는 최적의 땅이로군.”
“아니.”
실비아는 다비드의 회유를 떨쳐내기 위해 애써 입을 움직여 그의 말을 잘랐다. 그에 다비드가 말을 멈췄다. 실비아는 가만히 호흡을 가다듬고는 또렷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제가 공작님과 결혼한 것은 부모님과 폐하의 뜻이었고, 지금의 제가 바라는 건…….”
“…….”
“제 남편과의 안락하고 평온한 여생입니다. 그것이 전부예요.”
그래, 분명 처음에는 란델을 이용해 영원한 안식을 얻어내려 했으나 지금은 달랐다. 지금은, 다르다. 실비아는 그 말을 내뱉으며 란델에 대한 스스로의 마음을 되새겼다. 그러자 다비드로 인해 느꼈던 충격과 분노 등의 감정이 차츰 사그라들었다.
“……뭐?”
한편, 실비아의 대답을 들은 다비드는 어째서인지 굉장히 충격 받은 얼굴이었다. 저도 모르게 반문했던 그가 이내 서서히 얼굴을 굳혔다. 이곳에 온 뒤 처음으로 여유를 잃은 얼굴의 다비드가 낮게 웃었다.
“설마 그 얼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는 말을…… 지껄인 건 아니겠지, 그대.”
미소 띤 얼굴과 다르게 일견 으르렁대는 것처럼도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하지만 실비아는 흔들림 없이 같은 답을 반복했다.
“몇 번을 물어보셔도 제 답은 같습니다. 제가 바라는 건 오직 남편과의 평온한 삶입니다.”
“하…….”
다비드가 낮게 조소하며 한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흐트러지는 머리카락 사이로 이마의 핏줄이 도드라졌다. 다비드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던 자세 그대로 헛웃음을 흘리다가 돌연 표정을 지웠다.
“생각보다 훨씬 기분 더러운데, 이거.”
섬뜩한 중얼거림이 그의 잇새로 흘러나왔다. 형형한 보랏빛 시선이 실비아의 목을 조를 것처럼 그녀의 목 부근을 맴돌았다. 이윽고 다비드가 머리를 쓸어 올리던 손을 거두며 몸을 일으켰다.
“하필이면 내게 이따위…… 감정을 알게 해준 두 사람이 부부라니. 어찌 보면 신께서 손수 맺어주신 운명이 아닌가.”
다비드가 매섭게 비아냥댔다. 문가를 한 번 더 힐긋 바라본 그가 소름 끼칠 만큼 다정한 얼굴로 말했다.
“부디 동화 속의 구절처럼 자네들이 오래오래 행복하기를 바라.”
축복이었으나 저주였다. 다비드는 그 말을 남긴 채 성큼성큼 문가로 다가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리고 그 너머에.
“……란델?”
굳은 얼굴의 란델이 문고리를 돌리려던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란델을 발견한 순간 심장이 쿵 떨어졌다. 실비아는 찬물을 뒤집어쓴 듯한 기분에 얼어 있다가, 다비드가 거칠게 란델의 어깨를 밀치며 사라지자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 달려갔다.
“란델.”
“……실비아.”
란델의 음성은 낮게 잠겨 있었다. 실비아는 맹수를 맞닥뜨린 사람처럼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귓가를 울리는 심장 소리가 북소리처럼 불길했다.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설마.’
설마 들은 건 아니겠지. 설마…… 다비드와의 대화를 들은 건, 아니겠지. 실비아는 양손을 등 뒤로 감추며 애써 태연을 가장했다.
“언제…… 왔어요?”
그 물음 하나를 뱉어내는 것이 피를 쏟는 것처럼 힘들었다. 실비아는 초조한 심정으로 란델의 입술만 바라보았다. 1초가 억겁처럼 느껴졌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란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허공에 어정쩡하게 두었던 손을 내린 그가 익숙한 미소를 띠었다.
“미안합니다. 막 도착해 문을 열려던 차에 왕세자 전하께서 나오시는 바람에 조금…… 놀라서.”
“어디 다친 곳은 없고요? 조금 전에 세게 부딪힌 것 같던데.”
“저는 괜찮습니다. 그보다, 부인이야말로 전하와의 대담 중 별일 없으셨습니까?”
란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실비아를 살폈다. 그 온기 어린 표정에 안도한 실비아가 작게 한숨을 삼켰다. 그녀가 란델을 따라 엷게 웃었다.
“별 말씀은 없으셨어요. 그저 근처를 지나시던 중에 인사차 들르셨다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책임질 테니 다음부터는 그냥 내쫓으셔도 됩니다.”
“그랬다가는 문책을 피하기 어려울 텐데요.”
“부인을 그런 자와 마주하게 하는 것보다 제가 문책당하는 것이 낫습니다.”
란델이 정색하며 불만을 드러냈다. 실비아는 끝내 풋 웃음을 흘리며 그의 어깨를 도닥였다.
“다음부터는 그렇게 할게요. 당신도 급하게 귀환하느라 고생 많았어요. 다시 나갈 거예요?”
“아무래도…….”
“그래요? 일찍 들어온 김에 같이 씻자고 할까 했는데.”
실비아가 대수롭지 않게 던진 말에 란델이 말을 우뚝 멈췄다. 그녀는 그와 시선을 맞춘 채 작정하고 사르르 눈매를 휘었다. 고개를 갸웃 기울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안 되나?”
“…….”
“응?”
“……정말이지.”
란델이 헛웃음을 흘렸다. 직후 예고 없이 실비아를 번쩍 안아 든 그가 고통스럽게 웃었다.
“안 될 리가 없지 않습니까.”
란델은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내려 실비아에게 짙게 입을 맞추었다. 실비아 또한 기꺼운 마음으로 그의 목에 양팔을 감고 입맞춤에 호응했다. 익숙한 열기, 익숙한 몸. 비로소 평안이었다. * * * 한편, 다비드가 벨포르 성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오스턴은 성을 돌아다니던 랭을 제 연구실에 잡아넣었다. 랭은 다친 토끼를 보러 가다가 말고 별안간 오스턴에게 귀를 붙잡혀 끌려오게 되자 목소리를 높이며 반항했다.
“아야! 아프다니까요!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왕세자가 왔어. 그가 떠날 때까지 여기서 절대, 한 발자국도 움직이면 안 돼. 알았어?”
“왕세자요? 왕세자라면…… 인간 왕의 후계자 아닙니까?”
“맞아. 그러니까 나가지 말라는 거야.”
“왜요? 어차피 지금 제 모습은 인간인데, 구경하러 가면 안 됩니까?”
“또 묶이고 싶나?”
“……윽.”
요 며칠 자유를 맛봤다고 다시 구속구를 차는 것은 꺼려졌다. 랭은 오스턴의 협박에 침음을 흘리고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연구실 구석에 몸을 웅크려 앉았다. 오스턴은 간신히 랭을 연구실에 붙들어 놓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혹 랭이 성을 싸돌아다니다가 왕세자와 맞닥뜨리고, 정체를 의심받게 되어서는 안 되니까.
“그나저나 그 자식은 대체 왜 갑자기 여기에 온 거야? 어쩐지 불길한데…….”
오스턴은 정원 쪽으로 난 창문에 찰싹 붙어 바깥의 동태를 살폈다. 눈을 가늘게 뜨자 정문 쪽에 서 있는 왕세자, 그런 그에게 다가가는 실비아의 뒷모습이 보였다.
“저놈 설마 또 마님에게 손을 대는 건…… 헉!”
오스턴은 왕의 탄신연에서 있었던 일을 상기하고 미간을 찌푸리다가 말고 창문에 코를 박았다. 거리가 있는 탓에 자세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왕세자가 실비아에게 제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것은 어렴풋이 보였다. 오스턴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저게 감히 어디서 내 스승님께! 되도 않는 수작질을! 그가 보기 드물게 분노한 얼굴로 연구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뛰어나가기 전에 랭에게 신신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너! 여기서 한 발자국이라도 나가기만 해봐! 그땐 손목이 아니라 발목까지 구속구를 채워버릴 테니까!”
오스턴은 그 말만 남기고 급하게 사라졌다. 랭은 심술이 돋아 일부러 활짝 열려 있던 연구실의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아버렸다.
“마족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문을 이렇게 활짝 열어두고 가면서 나가지 말라니.”
하지만 불퉁한 마음도 잠시. 연구실에 혼자 남게 된 랭의 마음속에서 호기심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창문 너머로 몰래 보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나? 여기서 나가지 말라고 했지, 보지 말라는 말은 없었잖아. 응응, 괜찮겠지.”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는 곧장 ‘괜찮다’라는 답을 내려버리고는 창가로 다가갔다. 반쯤 젖혀진 커튼 뒤에 숨어서 바깥을 내다보니, 건물을 벗어난 오스턴이 왕세자를 향해 돌진하려다가 윌콧의 손에 붙잡혀 발광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쯧쯧.”
혀를 끌끌 찬 랭이 정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곧 일행이 성 쪽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하자 누가 누구인지 구별하기가 어려워졌다.
“으음. 대체 누가 왕세자인 거지?”
하필 다비드가 잠행을 가장해 호위들과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기에 구별은 더욱 어려웠다. 랭이 고민하는 동안 일행은 성 안으로 들어가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에잇.”
왕세자를 알아보는 데 실패한 랭이 슬퍼하며 창틀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지만 절망도 잠시. 금세 의욕을 되찾은 그가 주먹을 불끈 쥐며 의지를 다졌다.
“아니지. 어차피 성 밖으로 다시 나올 거 아니야? 이동 마법진을 쓰려면 성을 벗어나야 한다고 했으니까……. 그때까지 기다리면 알 수 있을지도 몰라.”
랭은 왕세자 일행이 다시 성 밖으로 나오길 기다리며 오스턴의 자료를 뒤적거렸다. 혹시 왕세자의 외양에 대해 적힌 종이라도 찾을 수 있나 했으나 소용없었다.
“앗, 나왔다!”
란델이 다급하게 성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본 지 얼마나 되었을까. 랭은 성 밖으로 나온 세 인영을 발견하고는 후다닥 창문에 얼굴을 붙였다.
“저 사람은 검을 차고 있으니까 호위가 확실한 것 같고. 인간의 왕세자가…… 몇 살이지? 청년인지, 노인인지 모르겠네.”
배웅하는 인원이 없어서인지 아까보다는 왕세자 일행을 세세하게 뜯어볼 수 있었다. 랭이 노인과 청년, 두 사람을 두고 누가 왕세자인지 고심하던 차였다.
“헉……!”
청년 쪽이 돌연 랭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졸지에 청년과 시선을 마주하게 된 랭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