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멈추지 말고2021.12.16.
랭이 노인과 청년, 두 사람을 두고 누가 왕세자인지 고심하던 차.
“헉……!”
청년 쪽이 돌연 랭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졸지에 청년과 시선을 마주하게 된 랭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어, 어어!”
허둥지둥하던 랭이 한발 늦게 몸을 휙 낮췄다. 황급히 쪼그려 앉아 모습을 감춘 그가 제 머리를 잡아 뜯었다.
“봐, 봤나? 분명 눈이…… 마주쳤는데…….”
심장이 불안하게 쿵쾅댔다. 랭은 몸을 낮춘 자세 그대로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갑자기 앉는 게 더 수상해 보였으려나? 아니, 그렇지만 지금 나는 인간의 모습인데, 딱히 문제 될 건 없지…… 않나? 문제인가?”
랭이 횡설수설하며 울상을 지었다. 절대 눈에 띄지 말라는 오스턴의 말에 따라, 호기심을 꾹 참고 연구실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인간 하나가 고개를 돌려 저를 발견할 게 뭐람.
“눈이 잠깐 마주친 것 정도로는 들킬 일 없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저 인간들이 사라질 때까지 이대로 있어야겠다…….”
랭은 아예 창문 아래에 등을 기댄 채 쪼그려 앉아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는 간헐적으로 “어휴, 이 멍청이”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제 머리를 콩콩 내리쳤다. 한편, 그사이.
“전하? 어딜 보시는 겁니까?”
“…….”
벨포르 성을 벗어나던 다비드가 돌연 건물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한 채 움직이지 않자 그와 동행하던 마법사가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다비드는 말없이 성 구석진 곳의 창문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조금 전, 웬 갈색 머리카락의 청년이 그와 눈이 마주치자 기겁하며 숨어버린 곳이었다. 한동안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창문을 빤히 바라보던 다비드가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벨포르 성에서 재밌는 걸 기르고 있군.”
“예?”
“아무것도 아니다. 이만 가지.”
다비드는 마법사의 물음을 무시한 채로 벨포르 성의 정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의 얼굴은 언제 미소가 깃들었었냐는 듯이 다시금 싸늘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인간의 모습을 한 마족이라…….’
흥미롭긴 했다. 설마하니 ‘그’ 란델 벨포르가 마족을 인간의 모습으로 둔갑까지 시켜가며 성에 들일 줄이야. 어떠한 이유건, 이 사실이 바깥에 알려지면 란델은 굉장히 곤란해질 것이다. 하지만 다비드는 이 일을 묻기로 결정했다.
‘지금은 아니야.’
적어도 아직은 벨포르 공작가를 무너뜨릴 때가 아니다. 다비드는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성을 한번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와 일행들의 모습은 이내 빛에 휩싸여 사라졌다. * * * 다비드가 벨포르 성에 급작스럽게 방문했던 날 이후. 실비아는 티가 나지 않게 란델의 눈치를 보았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는 크게 변함이 없었다. 굳이 변화라고 할 만한 것을 꼽자면…… 잠자리에서 조금 더 거세졌다는 것 정도일까. 그 여파로 실비아는 오늘도 정오가 가까워져서야 비몽사몽 눈을 떴다. 커튼 틈으로 비치는 햇빛을 확인한 그녀가 몸을 뒤척이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다시금 잠에 빠져들려던 찰나, 단단하고 두꺼운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았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홧홧한 열기에 놀란 실비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뒤를 돌아보았다.
“란델?”
“좋은 아침입니다, 실비아.”
“왜 아직도 안 나갔어요? 없을 줄 알았는데.”
“수도에서도, 수도에서 돌아온 이후로도 내내 바쁘게 일했으니 하루 정도는 농땡이를 피워도 되지 않을까요.”
짓궂은 소년처럼 웃은 란델이 실비아를 등 뒤에서 끌어안은 채 그녀의 얼굴 이곳저곳에 자잘하게 입을 맞추었다. 실비아가 간지럽다며 작게 웃음을 터트리자 그도 따라 웃었다. 그렇게 키득거리며 엎치락뒤치락 장난을 치다가 자연스럽게 입술이 맞닿았다.
“음…….”
맞닿은 입술 새로 가느다란 신음이 샜다. 처음에는 장난스럽고 가볍던 입맞춤이 점차 진득하게 변해갔다. 란델의 맨손이 실비아의 등허리를 훑어 내리고, 실비아의 맨손이 그의 머리카락을 파고들었다. 어느새 덩굴이 뒤얽히듯 얽힌 두 사람의 숨이 가빴다. 그러던 중, 실비아는 숨이 부족해 머리가 어질어질해진 탓에 어쩔 수 없이 손을 뻗어 란델의 얼굴을 밀어냈다.
“잠시, 만…… 숨이 너무…….”
실비아는 란델과 입술을 떨어트린 사이 재빨리 호흡을 가다듬었다. 란델은 침대에 등을 대고 누운 실비아를 제 팔 사이에 가두듯 몸을 지탱한 채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숨을 고르던 실비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렇게 봐요?”
“……그냥.”
나지막이 입술을 달싹인 란델이 푸스스 신기루 같은 웃음을 흘렸다.
“당신이 이렇게 내 곁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이 너무도…… 신기하고, 또 감사해서 그럽니다.”
“…….”
실비아는 일순 할 말을 찾지 못해 멈칫했다. 금색 눈이 반사적으로 란델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녀를 사랑스러운 것 보듯이 보며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냥 내가 너무 예민한가.’
실비아는 조금 심란한 얼굴로 란델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자 그가 그녀의 이마 위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겨주더니 쪽 소리 나게 입맞춤을 남겼다.
“혹시 많이 피곤하십니까? 표정이 좋지 않아 보여서요. 그러면 그냥…….”
“아, 아니에요.”
란델이 걱정스럽게 몸을 일으키려 하자 실비아가 다급하게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에 두 사람의 거리가 순식간에 다시 좁혀졌다. 숨결이 섞일 만큼, 입술이 금방이라도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실비아가 조용히 속삭였다.
“……멈추지 말고.”
“…….”
“계속해요.”
도발과도 같은 말에 연녹색 눈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그는 목 안으로 긁는 듯한 신음을 삼키고는 다급히 실비아의 입술을 찾았다. 불길은 언제 잠잠해졌냐는 듯 금세 다시 피어올랐다. * * * 이후 며칠이 지나도록 비틀림은 발생하지 않았다. 결국 참다못한 오스턴이 실비아를 찾아와 외쳤다.
“제발 저 녀석 좀 어떻게 켈베티아로 보내버리면 안 됩니까? 종일 옆에서 밖에 나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대니 미쳐버리겠습니다…….”
오스턴이 좌절하며 소파에 앉은 실비아의 곁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실비아는 혀를 쯧쯧 차며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랭을 말하는 건가?”
“그럼 달리 누가 있겠습니까.”
오스턴이 며칠 새 눈에 띄게 퀭해진 얼굴로 답했다. 실비아가 퍽 안쓰럽다는 얼굴로 말했다.
“고단하겠군. 하지만 어쩌겠나, 비틀림이 발생하지 않는걸.”
“마님께서는 마법을 잘 다루시지 않습니까. 켈베티아와 이어지는 이동 마법진, 뭐 그런 건 없습니까?”
“…….”
오스턴의 물음에 실비아의 손끝이 움찔 떨렸다.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던 그녀는 이내 태연한 미소를 띠며 답했다.
“……그런 게 어디 있겠나.”
“역시 그렇겠죠……? 그렇다면 저는 저 수다쟁이를, 기한도 없이 계속 옆에 끼고 있어야 하는 겁니까……?”
오스턴이 반쯤 눈물 고인 눈으로 울먹거렸다. 결국 그가 “허어엉” 소리를 내며 바닥에 엎어지자 실비아의 등 뒤로 식은땀이 삐질 흘렀다. 켈베티아로 이어지는 마법진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하자니, 다 닳아 없어질 지경인 양심이 드물게도 콕콕 찔렸다.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던 실비아가 머리를 굴렸다. 그녀는 머릿속을 퍼뜩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양손을 짝 소리 나게 맞부딪쳤다.
“오스턴.”
“흐흑. 예?”
오스턴이 훌쩍이다가 말고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실비아가 그를 보며 빙긋 웃었다.
“그러지 말고 나가지. 랭도 함께.”
“예에?”
오스턴이 당황한 음성을 냈다. 실비아가 말을 이었다.
“바깥이 궁금하다며 계속 시끄럽게 군다고 하지 않았나. 차라리 자네와 나, 란델의 감시하에 잠시 바깥 구경을 시켜주면 좀 잠잠해지지 않을까?”
“그, 그래 주실 겁니까?”
“자네가 그렇게 힘들어하니, 원한다면.”
“감사합니다, 마님!”
오스턴은 란델과 실비아가 함께라면 안심이라며 뛸 듯이 기뻐했다. 그는 랭을 데려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희희낙락 방을 떠났다. 실비아 또한 오늘은 성 안에서 근무하는 란델을 불러달라 지시했다.
‘우연히 떠오른 생각치고는 괜찮네.’
랭에게 바깥 구경을 시켜주어 그를 얌전하게 만들고, 랭을 얌전하게 만들어 오스턴을 살린다. 그러는 김에 란델과 그녀도 오랜만에 나들이를 즐긴다. 일석이조, 아니, 일석삼조의 계획이었다.
‘생각해보면 늘 나가자고 제안했던 건 란델이었으니까. 조금은 기뻐했으면 좋겠네.’
실비아는 채신머리없이 간질거리는 마음을 애써 추스르며 나갈 채비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명을 들은 사용인이 란델을 불러왔다.
“부인.”
란델은 실비아를 보자마자 녹아내릴 듯 웃으며 그녀의 볼에 가볍게 입 맞추었다. 그에 실비아는 조금 어이없는 눈길로 란델을 보았다.
“……이제 이 정도는 그냥 습관이 됐나 보죠? 역시 뻔뻔해졌어.”
“뭐가 말입니까?”
“바로 이런 부분이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란델은 모르쇠로 일관하며 다시금 실비아의 손끝에 입술을 내렸다. 말과 상반되는 행동에 실비아가 끝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란델 또한 화답하듯 장난스럽게 씨익 미소 지었다. 그런 란델을 바라보는 실비아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애정이 묻어났다.
“그래서, 어쩐 일이십니까, 부인?”
“데이트 신청하려고요.”
“……예?”
“혹시 잠시 시간 괜찮아요?”
* * * 그로부터 약 한 시간 후.
“……분명 데이트라고 하지 않으셨는지.”
란델은 후드를 눌러쓴 채로 부루퉁한 얼굴을 했다. 실비아는 그의 목소리 가득 느껴지는 불만에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그의 손을 잡았다.
“데이트는 맞죠. 요즘 말로는 더블데이트라고 하던가?”
“그런 끔찍한 소리 하지 마십시오.”
란델과 실비아의 앞에서 걷던 오스턴이 질색했다. 그의 곁에는 일행과 마찬가지로 후드를 깊이 눌러쓴, 인간의 모습을 한 랭이 있었다.
“우와! 여기가 바로 인간들의……!”
“멍청아, ‘인간’이라는 단어 쓰지 말라고 했지.”
“아, 맞다.”
오스턴은 눈만 떼면 이리저리 튀어 나가는 랭을 붙들기 위해 한 손으로 그의 클로크 자락을 단단히 붙들었다. 실비아가 앞서 걷는 한 마족과 한 인간을 구경하며 란델에게 말을 붙였다.
“둘이 1분 간격으로 다투는 걸 빼면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네요. 그렇지 않아요?”
“…….”
“란델?”
“…….”
“란델, 삐졌어요?”
“아닙니다.”
란델은 삐졌냐는 물음에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툴툴거렸다. 실비아는 여기서 웃음을 터트렸다가는 란델이 정말 토라질 것만 같아 애써 입술을 앙다물었다.
‘이 남자는 어떻게 가면 갈수록 귀여워 보이는 거지.’
그녀는 꽤 심각한 고민에 잠겼다. 이따금 사랑에 미쳐 왕국을 말아먹을 뻔했던 몇몇 왕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실비아 역시 란델이 산을 옮겨달라 해도 기꺼이 옮겨주고픈 마음이었으니까.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실비아는 제게 산을 옮겨달라 조르는 란델의 모습을 상상했다가 풋 웃음을 흘렸다. 그녀가 예상했던 대로 란델이 곧장 물어왔다.
“지금 웃으신 겁니까?”
“아, 미안해요. 놀리려던 건 아니었는데.”
“지금 누가 봐도 저를 놀리고 싶어 안달 난 표정입니다만.”
“내가 왜 그런 거에 굳이 안달을 내요? 침대 위에서라면 모를까.”
“실비아.”
실비아가 아무렇지 않게 은근한 말을 내뱉자 란델이 귓가를 붉히며 그녀를 질책했다. 그때 오스턴이 돌연 걸음을 우뚝 멈췄다. 란델은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추다가 휘청거리는 실비아를 다급하게 붙잡았다.
“오스턴? 왜 그러는…….”
어리둥절하게 오스턴을 부르던 실비아가 무언가를 깨닫고 움찔 말을 멈추었다. ……어쩐지 눈앞에 비치는 광경이 조금 전과 다른 것 같은데? 그리 생각하는 순간. 오스턴이 창백한 얼굴로 천천히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마, 마님.”
“…….”
“랭이, 없어…… 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