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본능에 따르라2021.12.20.
몇 분 전.
“가만히 좀 있으라니까!”
“켁.”
오스턴은 또다시 제 눈을 피해 튀어 나가려는 랭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도주에 실패한 랭이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밀어서 그런 거라니까요. 그보다 이 손 좀 놔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상당히 불쾌한 자세로군요.”
“그 변명만 벌써 다섯 번째거든. 제발 가만히 좀 있으라고. 너 이렇게 여기저기 쏘다니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바로 목 떨어진다?”
오스턴이 목소리를 낮추어 빠르게 속삭였다. ‘목 떨어진다’라는 말에 랭이 어깨를 움찔했다.
‘맞는 말이긴 하지…….’
딱히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오스턴의 말은 사실이었다. 랭은 현재 그가 만들어주는 마법 약으로 인간 행세를 하며 인간 세상에 머무는 ‘마족’이니까. 그 사실을 상기하자 문득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듯했다. 랭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결국 항복하듯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알았다고요.”
“……진짜야?”
“예, 이번엔 진짜입니다. 가만히 있을 테니 이 손 좀 놓아주시죠.”
랭이 제 뒷덜미를 부여잡은 오스턴의 손을 툭툭 건드렸다. 그를 의심스럽게 보던 오스턴은 이내 한숨을 삼키며 천천히 손을 놓아주었다. 겨우 자유로워진 랭은 구겨진 옷을 탁탁 털며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아쉽긴 하지만…….’
랭은 미련 서린 눈으로 가판대와 사람들을 바라보긴 했지만, 전처럼 당장이라도 달려 나갈 것처럼 굴지는 않았다.
“이번엔 진짜인가 보네?”
“마족을 뭐로 보시고……. 처음 만났을 때도 말씀드렸잖습니까. 목숨이 달린 일에서는 거짓말하지 않는다니까요.”
“그래, 그래. 이대로 쭉 얌전히 있어라, 제발.”
그에 안도한 오스턴이 픽 웃음을 흘리며 랭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여유를 찾은 그가 랭에게서 시선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어라?”
행인 하나가 랭의 어깨를 세게 치고 지나갔다. 예기치 못한 충돌에 당황한 랭이 크게 휘청였다. 그가 급하게 뒷걸음질을 치며 간신히 중심을 되찾았을 때.
“거, 지나갑시다.”
“비켜요, 비켜!”
제각각 짐을 등에 메고, 수레에 실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걸음을 옮겼다. 졸지에 그들에게 휩쓸려 함께 걸음을 옮기게 된 랭이 당황해 허우적댔다.
“자, 잠깐! 비켜……!”
하지만 랭은 오스턴에게로 돌아가려다가 사람들의 가방에 얼굴을 얻어맞고, 수레바퀴에 발등이 끼이는 사고를 겪어야 했다. 한껏 너덜너덜해진 그는 결국 오스턴 일행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곳에 도달해서야 무리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랭은 처음 인간 세상에 발을 들였을 때처럼 추레한 몰골로 주변을 두리번댔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자신이 어느 길을 지나왔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짐과 사람 사이에 끼어 제정신이 아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으음. 오스턴이 되도록 사람들의 눈에 띄지 말라고 했는데…….’
란델, 실비아, 오스턴과 함께 거닐었던 거리와 다르게 이곳은 을씨년스럽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한산했다. 그런 거리 한복판에 덩그러니 서 있자니 유달리 눈에 띄는 듯 느껴졌다. 난감하게 볼을 긁적이던 랭이 골목을 발견하고 화색을 띠었다.
“대충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으면 알아서 찾으러 오겠지? 저쪽에 가 있어야겠다.”
랭이 골목을 향해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골목 안을 들여다보자 어두컴컴한 것이 굉장히 아늑해 보였다.
“좋아, 아주 좋아.”
랭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골목 안을 굴러다니는 종이와 천 조각들을 모아 한쪽에 쌓았다. 그가 그렇게 만든 임시 방석에 막 엉덩이를 내리려던 차였다.
“야.”
“……음?”
앙칼진 목소리가 귓가에 날아와 꽂혔다. 랭이 의아하게 눈을 깜박이며 골목 안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모르겠을 소년 하나가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사나운 눈매의 소년이 눈을 부릅뜨며 랭을 향해 턱짓했다.
“여긴 내 구역이야. 좋은 말로 할 때 나가.”
“구역? 인간 세상에는 이런 골목 하나에도 구역이라는 게 존재하는 건가? 마물도 그 정도로 영역 본능이 뛰어나진 않을 텐데, 참 대단하군.”
“……뭔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내 말 못 들었어? 저리 가라고!”
소년은 랭이 무어라 작게 중얼중얼하기만 할 뿐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이자 심기가 불편함을 여실히 드러냈다.
‘으음, 어떡하지.’
랭은 절대, 무슨 일이 일어나도 사람들의 눈에 띄지 말고, 소란을 일으키지도 말라는 오스턴의 말을 떠올렸다. 랭은 애써 빙긋 웃어 보이며 소년을 달래려 애썼다.
“어차피 일행이 나를 곧 찾으러 올 텐데, 그때까지만 여기 앉아 있으면 안 될까? 갈 때는 깨끗이 치워놓을게.”
“……하, 그러셔?”
일행이 찾으러 올 거라는 말에 소년의 눈썹이 꿈틀했다.
‘지금 누구 약 올리나.’
소년, 제이미는 날카로운 눈으로 랭을 노려보았다. 처음 그가 골목에 발을 들였을 때는 어디서 저와 같은 처지의 거지가 겁도 없이 제 영역에 발을 들이나 했다. 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니 랭이 입고 있는 옷은 꾀죄죄할지언정 굉장히 고급 원단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 사실이 일차적으로 제이미의 심기를 거슬렀다. 만약 그가 ‘진짜’ 거지라면 저렇게 좋은 옷을 살 수 있을 리가 없고. 설령 우연히 저런 옷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도 곧장 돈으로 바꾸어 먹을 걸 사기에도 급급할 테니.
-……저런 놈이 대체 이런 곳까지는 왜 오는 거야?
멀쩡히 돌아갈 곳이 있어 보이는데도 굳이 골목으로 들어와 제 영역에 자리를 잡는 모습이 심히 거슬렸다. 하여 제이미는 랭을 쫓아내기 위해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랭은 오히려 그런 제이미를 조롱하듯 해맑게 웃으며 데리러 올 사람이 있다는 말을 입에 올렸다. 먹을 것도, 잘 곳도, 함께 있을 가족도 없는 거지 앞에서, 뭐? 데리러 올 사람이 있어? 제이미는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리며 위협적으로 랭을 향해 다가갔다.
“그럴 거면 눈에 잘 띄는 곳에 가서 앉아 있어야지, 왜 이런 더러운 곳에 있는 거야? 저리 가!”
“그게, 사실 내겐 말 못 할 사정이…….”
“쫑알쫑알 진짜, 시끄럽게!”
제이미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들을 가진 랭에 대한 질투에 사로잡혀 거칠게 그의 어깨를 밀쳤다.
“사람 말이 말 같지 않아? 꺼지라고 했잖아! 가! 꺼지라고!”
“아니, 잠깐. 그래도 폭력은…….”
랭은 제이미가 계속해서 제 어깨를 밀치자 난감하게 그를 말리려 했다. 하지만 말을 뱉던 도중 급작스럽게 찾아온 통증에 그럴 수 없었다.
“허억……!”
랭은 돌연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에 가슴께를 부여잡고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가 바닥에 엎드려 몸을 웅크린 채 헐떡거리자 제이미가 주춤대며 골목 안쪽으로 물러났다.
“뭐, 뭐야? 별로 세게 밀지도 않았는데 무슨 쇼를……!”
“큭…….”
하지만 랭의 귀에는 제이미의 말조차 들리지 않았다. 랭은 가슴께를 부여잡은 채 거세게 헐떡였다. 지독한 통증에 의식이 가물가물할 지경이었다.
‘설마, 약의 부작용…… 인가?’
랭은 의식이 흐려진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통증의 원인을 찾으려 애썼다.
-마족이 마법 약을 복용해도 인간과 동일한 효과를 받을 수 있다니…… 놀랍군요. 그런데 이런 사실은 어떻게 아신 겁니까?
-……나도 몰라. 그보다 동일한 효과가 적용된다고는 하지만, 부작용이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어. 마족에게는 ‘마력’을 다루거나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전무하니까. 그러니 혹시라도 뭔가 문제가 생겼다 싶으면 바로 말해야 해.
-뭐라고요? 설마 지금 검증도 되지 않은, 독약이나 다름없는 걸 제게 먹였다는 말을 하는 겁니까?
-아 그럼 죽든가!
인간 세상에 넘어온 다음 날. 오스턴과 마법 약을 두고 투닥거리던 기억, 그리고 그와 나누었던 대화도 함께 떠올랐다. 그리고 랭의 추측은 옳았다.
“으윽!”
순간적으로 심장이 강하게 욱신거려 랭이 크게 신음을 뱉었다. 직후, 그의 외양이 차츰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살굿빛 피부가 어둠을 닮은 보라색으로 변하고, 흰자위는 새까맣게 물들었다. 잘 다듬어진 손톱이 날카롭게 자라나 바닥을 긁었다. 심장을 쥐어짜던 통증은 마법 약의 효과가 사라지자 거짓말처럼 물러갔다.
“무, 무슨…….”
그 광경을 고스란히 목격한 제이미가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숨을 몰아쉬던 랭은 제이미의 중얼거림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켜 제이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사람 살……! 읍!”
“잠깐만. 나는 널 해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잠깐만 가만히 있어 주라. 응? 부탁할게.”
랭이 손을 뻗는 것과 거의 동시에 제이미가 소리를 지르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소년의 입은 간발의 차를 두고 랭의 손에 막혔다. 랭은 겁에 질려 발버둥 치는 제이미를 진정시키려 애썼으나 조금 전의 랭처럼, 그의 귀에는 랭의 목소리가 닿지 않았다.
“……비키라니까!”
퍽-! 제이미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랭의 손을 떨쳐냈다. 그 반동으로 제이미가 크게 휘청이며 골목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밀려난 랭은 제 손톱에 묻어난 피를 발견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이것 봐. 자꾸 그렇게 움직이면 위험하다니……!”
쿵. 바로 그때. 별안간 주위의 모든 소음이 아득하게 멀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랭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멍하니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정확히는, 손톱 끝에 묻어난 붉은 피를.
-죽여.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귓가에 스산한 속살거림이 들려왔다.
-죽여.
-죽이고, 취해!
-죽이고, 찢고, 파괴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본능.
-주어진 길을 거부하는 자는 반드시 해를 입게 되리니.
-그저 본능에 따라 쾌락을 탐하거라.
저주 같은 속삭임들이 계속해서 귀를 간질였다. 온몸의 감각이 극대화되며 희미한 피 냄새가 달콤하게 느껴졌다.
“흐, 흐윽…….”
한편, 제이미는 랭의 손을 떨쳐낸 후에야 그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마족을 이렇듯 가까이, 눈앞에서 보는 것이 처음이었다. 본능적인 공포에 잠식된 그는 골목에 주저앉은 채 필사적으로 랭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사냥당하는 짐승처럼 작고 연약한 움직임. 그것이 랭의 주의를 잡아끌었다.
“…….”
랭은 초점이 사라진 눈으로 제이미를 응시하다가, 서서히 그를 향해 발을 떼었다.
* * *
‘젠장.’
실비아는 후드를 깊이 눌러쓴 채 호위인 제프리와 함께 거리를 내달리고 있었다. 그녀가 입속으로 작게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만일을 위해 란델까지 불러 랭을 감시하러 나왔는데, 이렇게 한순간에 어이없이 놓쳐버릴 줄이야.
-랭이, 없어…… 졌습니다…….
-더불어 마법 약에 사용되었던 제 마력의 기운이 더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약의 효과가…….
오스턴은 아무래도 랭에게 사용했던 마법 약의 효과가 사라진 것 같다며 창백한 얼굴을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즉시 란델은 대기하고 있던 기사단과 오스턴에게 거리를 수색해 랭을 찾아내라 일렀고. 실비아 또한 호위인 제프리와 함께 랭을 찾아 나섰다. 그녀가 초조한 눈길로 등 뒤를 힐긋 일별했다.
‘보는 눈이 있으니 망령들을 불러내기도 애매하고…….’
지금은 발로 뛰는 수밖에는 없었다. 실비아는 욱신거리는 발을 애써 움직이며 랭을 찾았다.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불안감이 점차 커졌다. 불안감과 더불어 심장 뛰는 소리도 조금씩 몸집을 키웠다.
-아가, 얼른…….
사람들의 비명. 너라도 도망가라던 양부모의 목소리. 그런 것들이 자꾸만 귓가를 맴돌았다. 실비아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설마.’
설마 벌써 누군가를 해친 건 아니겠지. 랭은 분명 본인을 평화주의 파벌이라 했지만, 그것은 결국 랭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었다. 만약 랭이 길을 잃고 헤매다가 무력한 인간이라도 맞닥뜨린다면. 마족은 피를 보면 더욱 흥분하는 습성이 있으니, 행여 피라도 보게 된다면. 과연 그는 그 순간에조차 살의를 참을 수 있을 것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그리 단정 지은 실비아가 제프리를 따라 모퉁이를 돌려다가 말고 걸음을 우뚝 멈춰 세웠다. 그녀의 고개가 가까이에 있는 골목 쪽으로 휙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