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핏빛 희망2021.12.23.
“……!”
실비아의 고개가 가까이에 있는 골목 쪽으로 휙 돌아갔다. 골목 안쪽으로부터 마족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녀가 목소리를 높였다.
“시더스 경! 이쪽이네!”
앞서 달려가던 제프리가 멈칫하며 뒤돌았다. 실비아는 그사이 다급하게 골목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랭……!”
푹-! 실비아가 골목에 발을 들이는 순간. 무언가 살을 뚫는 소리와 함께 골목 바닥에 피가 후드득 떨어졌다. 심장이 철렁 떨어져 내렸다. 실비아는 경악으로 눈을 부릅뜬 채 골목 안쪽을 바라보았다.
“……랭?”
그녀는 눈앞의 광경을 믿지 못한 채 멍하니 중얼거렸다. 금빛 눈에 비친 것은, 스스로 제 복부에 손톱을 박아 넣은 랭의 뒷모습이었다.
“아, 흐…….”
점점 핏자국이 번져가는 랭의 등 너머로 가느다란 울음소리가 들렸다. 무의식중에 그쪽으로 시선을 옮긴 실비아는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의 소년이 덜덜 떨며 제 입을 틀어막는 것을 보았다.
“흐, 흡, 흐으…….”
“쉬이, 괜찮……아.”
그때 보랏빛 손이 어쩔 줄 모르고 눈물을 흘리는 소년, 제이미의 눈가를 살짝 덮었다. 제이미는 손이 다가오는 순간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하지만 그 손이 제 눈을 가려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조금 전보다 더욱 큰 소리로 울음을 뱉었다. 랭은 차마 복부에 박힌 제 손을 빼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반대쪽 손으로 제이미의 눈을 가려주었다. 그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에 애써 미소를 띠었다.
“잊어버려.”
“흑…….”
“그냥, 너는 그냥…… 아주 못된 마족을 만나서 용감하게 싸웠고, 승리해서 도망친 거야.”
“…….”
“알겠지?”
제이미는 끕끕거리며 도리질 쳤다. 그런 소년의 눈에서 손을 떼지 않으려 노력하던 랭이 문득 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고통을 참느라 식은땀으로 뒤덮인 얼굴로 애써 웃었다.
“아…… 오셨, 습니까.”
랭은 그 말을 내뱉은 후 신음을 삼키며 바닥으로 휘청 무너져 내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실비아가 황급히 랭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그의 옷자락을 찢어내며 말했다.
“시더스 경. 저 아이를 데리고 란델에게 돌아가요.”
“하지만…….”
“란델에게 돌아가서 아이를 맡기고, 오스턴을 불러와요. 오스턴부터 불러야 해요. 지금 당장!”
실비아가 전에 없이 강한 어조로 명령했다. 그에 망설이던 제프리가 “금방 돌아오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기며 아이를 들쳐 안고 뒤돌아 달려 나갔다. 실비아는 랭의 옷자락을 길게 찢어 붕대처럼 만들었다. 그녀가 그중 하나를 돌돌 말아 랭의 입에 물려주며 말했다.
“셋 하면 손을 빼낼 거예요. 그래야 상처를 치료할 수 있어요.”
“읍…….”
“하나, 둘, 셋.”
랭이 천을 입에 문 채 무어라 웅얼거렸으나 실비아는 무시했다. 그녀가 셋을 세는 것과 동시에 랭의 복부를 관통한 손을 빼내자 그가 움찔하며 천을 세게 물었다.
‘지혈해봐야 소용없을, 텐데…….’
랭은 의식이 흐릿해져 가는 와중 그런 생각을 하며 실소를 흘렸다. 그것은 직감이었다. 오스턴이 이곳까지 오는 데에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테고, 그와 실험해 보았을 때 치유 마법은 마족의 몸에 듣지 않았다. 만약 상처를 메꿀 정도로 어둠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마족이라도 있으면 모르겠지만……. 화악-
“……어?”
랭은 순간 제 몸을 감싸는 익숙한 기운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부옇던 시야가 조금 맑아지며 실비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 동공, 검은 연기에 휘감긴 상처 부위. 랭은 어찌나 놀랐는지 순간적으로 통증조차 잊힐 지경이었다.
“어, 어……?”
“대체 어쩌자고 이리 무모해. 죽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실비아는 어둠으로 랭의 상처를 메꾸며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어둠으로 상처를 메꾸는 것은 치유 마법과 효과가 거의 같았다. 외상은 단숨에 아물게 해주지만, 피로나 병, 출혈로 빠져나간 피는 메꿀 수 없다. 실비아는 랭의 몸 아래에 고인 피 웅덩이를 초조하게 힐긋거렸다. 랭 역시 그것을 눈치채고는 애써 웃었다.
“그래도…….”
벨포르 공작 부인이 어째서 어둠을 다룰 수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물론 그 이유가 궁금했고, 어둠을 다룰 수 있는 인간을 연구해보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았지만. 그는 자신에게 끝이 머지않았음을 직감했으므로 그런 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 의문을 묻어두기를 택하고 아이처럼 웃었다.
“제 손으로, 누군가를 해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
“그것이 설령 인간이라고 해도요.”
랭은 이제껏 살아오며 누군가의 피를 손에 묻혀본 적이 없었다. 늘 겁쟁이라 불릴 만큼 다툼을 피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여 제이미를 붙잡으려다가 제 손톱이 소년의 볼을 스치고, 그 끝에 피가 묻었을 때. 난생처음 겪는 본능적인 살의에 랭은 당황하고 또 절망했다.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란델과 실비아의 앞에서 ‘마족은 변했다’라고 주장해놓고. 결국 우리는 여전히 본능의 노예에 불과한 ‘마족’인 것인가.
-……아니.
랭은 제이미의 코앞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었다.
-나는 그런 존재가 아니야.
더 정확히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남을 해치고, 피를 묻히는 삶을 원하지 않았다. 하여 랭은 제 손톱으로 제이미를 내리긋는 대신 자신의 복부를 찔렀다. 본능을 거스르는 것은 무척이나 고통스럽고 힘들었지만, 다른 존재를 해칠 바에는 차라리 저를 해하겠다는 마음이었다. 랭은 실비아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부인.”
“…….”
“덕분에 아프지는 않네요.”
랭의 얼굴은 해맑은 미소와는 어울리지 않게 창백했다.
“대체 뭘 그리 잘했다고……!”
실비아는 일순 울컥한 마음에 그를 질책하려 했으나, 끝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예?”
“미안, 해…….”
그녀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비처럼 뚝뚝 떨어졌다. 실비아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탓에 랭은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피 웅덩이 위로 눈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만은 선명히 들을 수 있었다. 랭은 갑작스러운 사과에 놀랐다가, 곧 아무 말 없이 실비아의 손을 찾아 쥐었다. 그 움직임에 실비아가 고개를 들었다. 계속해서 몸에서 힘이 빠지는 탓에 그녀의 손을 붙든 보랏빛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감사합니다, 부인.”
“…….”
“부인 덕분에…… 저는 인간과 마족 사이의 평화가 그리 먼 이야기만은 아닐 거라는.”
“…….”
“……희망을 보았습니다.”
랭이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한 웃음으로 말을 맺었다. 실비아는 그의 얼굴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지고, 마침내 눈에서 생기가 사라지자 끝내 무너져 내렸다.
“……!”
랭의 옷에 얼굴을 파묻은 실비아가 소리 없이 오열했다. 채 비명이 되지 못한 소리만이 쇳소리처럼 새어 나왔다. 한참이나 눈물을 쏟아내던 실비아는 란델의 경악한 부름을 마지막으로 툭, 실 끊어진 인형처럼 의식을 잃었다. * * * 며칠 후. 벨포르 영지 외곽의 한 묘지에서 조용한 장례식이 열렸다.
“……그러니 부디 이 가엾은 생명을 축복하시고…….”
관 옆에 선 사제가 담담한 음성으로 죽은 자를 위한 기도문을 읊조렸다. 사제의 앞에는 연신 훌쩍거리는 작은 소년, 그리고 몇 명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앞에 서 있던 실비아는 무감한 얼굴로 관을 바라보았다.
“…….”
검은 베일 너머로 희끄무레한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관 안의 시신은 불투명한 흰 천에 감겨 모습을 알아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보살피소서.”
이윽고 기도를 끝마친 사제가 실비아의 손짓에 따라 저 멀리 물러났다. 실비아는 양손으로 검은 드레스 자락을 붙잡은 채 천천히 관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관 앞에 멈춰 서서 손을 뻗었다. 흰 손끝이 시신을 가린 천을 살짝 걷어냈다.
“…….”
실비아는 잠든 것처럼 평온히 눈을 감고 있는 보랏빛 면면을 물끄러미 눈에 담았다. 이윽고 시선을 내리깐 그녀가 손에 쥐고 있던 꽃을 랭의 시신 위에 올렸다. 고인을 추모하는 흰 꽃이 아닌, 옅은 노란색의 꽃.
-앗, 부인! 이것 좀 보십시오! 부인의 눈 색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랭은 늘 사소한 것 하나 지나치지 않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아내곤 했다. 웃는 얼굴이 마족답지 않게 시원하고 맑았다. 그래서 실비아는 랭을 피하고 싶었다. 그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생각, 분노, 이런 것들을 모조리 지워내고 부서트릴 미래가 눈에 선해서. 하지만 랭은 끝내 실비아가 가지고 있던 마지막 아집마저 꺾어놓았다.
“그대에게…….”
실비아는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목이 메어 잠시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등 뒤에서 제이미가 울음을 터트리는 소리가 들렸다. 랭이 목숨을 바쳐 살린 아이.
“……평온이 깃들기를.”
실비아는 눈을 감으며 조용히 랭의 이마에 제 이마를 기대었다.
“…….”
실비아의 등 뒤에서 복잡한 표정으로 그녀를 지켜보던 란델이 걸음을 떼었다. 실비아의 옆에 선 그가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이만 들어갈까요.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날씨인데, 탈진했다가 깨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습니까.”
란델이 조심스레 권했다. 그의 말에 고개를 들자 하늘은 온통 잿빛이었다. 실비아는 한숨을 삼키며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오스턴. 마무리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두 분께서는 돌아가 쉬십시오. 내내 곁을 지키셨으니…….”
오스턴은 발갛게 충혈된 눈으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란델과 실비아가 관 앞에서 물러나자마자 제이미가 달려왔다. 제이미는 관에 매달리듯 몸을 기댄 채 서럽게 울었다.
“왜 그랬어…… 대체, 대체 왜 그런 거야…….”
그 울음소리가 발걸음을 붙들었다. 란델의 팔짱을 낀 채 제자리에 멈춘 실비아가 차마 발을 떼지 못하고 그 자리에 붙박인 듯 섰다.
“……실비아.”
란델이 안타까운 음성을 냈다. 그녀를 보는 그의 눈에는 기묘한 불안감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실비아는 눈을 감은 채 필사적으로 마음을 다스리느라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결국 란델의 눈에 깃들어 있던 불안이 얼굴 전체까지 번졌다. 그가 미간을 일그러트리며 실비아를 부르려던 차였다.
“주인님!”
저 멀리서 벨포르 성의 사용인 하나가 란델과 실비아를 부르며 달려왔다. 다급한 기색이 역력한 사용인의 음성에 두 사람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슨 일이야.”
“그것이, 지금, 성에 국왕 폐하의 칙서가…….”
사용인의 말에 란델과 실비아가 곧장 성으로 향했다. 그들은 성의 정문 앞에 도달해 있는 왕의 신하를 발견하고는 그 앞으로 다가가 몸을 숙였다. 란델이 몸을 숙이자 왕의 칙서를 전하러 온 신하가 무표정한 얼굴로 들고 있던 서신을 펼쳤다.
“란델 벨포르는 들으라.”
갑작스러운 왕의 칙서라니. 왕가와 북부가 얽혀 좋은 일은 없었으므로 모두가 긴장했다. 하물며 ‘랭’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은 더욱 그러했다.
‘……설마 그때 눈치챈 건가?’
실비아가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일전에 다비드가 제게 대답을 듣겠다며 성에 찾아온 날. 오스턴은 분명 랭이 연구실에서 나가지 않았다고 했지만, 그녀는 다비드가 얼마나 감이 좋은지 알기에 쉽사리 안심할 수가 없었다. 실비아는 속으로 자책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 랭이 비틀림을 넘어왔을 때, 란델의 앞을 막아선 것은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인간을 죽일 수 없는 마족’이라는 말에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던 자신. 랭을 알게 된 것 자체를 후회하는 것은 아니었다. 외려 실비아는 그로 인해 그간 내내 지니고 있던 아집을 일정 부분 내려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일이 행여 란델에게 해가 된다면……. 실비아는 초조한 눈길로 제 곁의 란델을 일별했다. 그사이 신하가 무겁게 선언했다.
“북부에 첫눈이 내리는 날.”
“…….”
“우리 인간은 삿된 존재를 처단하고 켈베티아를 정벌하러 떠날 것이다.”
쿵. 그 말을 듣는 순간, 실비아의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