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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희망에 눈먼 자들 (78/118)

78. 희망에 눈먼 자들2021.12.27.

랭의 숨이 끊어지던 당일, 수도. 귀족들은 정기적으로 열리는 국무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하나둘 왕성으로 모여들었다. 개중에는 안면이 있는 이와 두런두런 한담을 나누며 걷는 이들도 있었다.

16558819148257.jpg“벨포르 공작님께서는 이번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으시는 건가?”

16558819148257.jpg“아무래도 그렇겠지. 이번에는 북부와 직결된 안건도 없고, 특별히 안내된 사항도 없었으니.”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노귀족이 묻자 상대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요즘이야 수도에서 북부로 이어진 길이 많이 안전해졌다지만, 불과 1년 전까지 해도 그 길에서 목숨을 잃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하여 북부의 귀족들은 국무회의가 열릴 때마다 참석하지는 않았다. 다만 북부와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안건이 있는 날이나, 특수한 안건에 대해 논하는 날. 혹은 당사자가 원할 때만 왕가로부터 사전에 안건 내용에 대한 안내를 받고 회의에 참석하곤 했다. 이번 국무회의는 북부와 관련된 안건도, 특수한 안건이라는 안내도 없었기에 란델을 비롯한 북부의 귀족들이 참석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16558819148257.jpg“아이고, 안녕하십니까.”

16558819148257.jpg“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지난번에 선물로 보내주신 술이 아주 기가 막히더군요.”

이윽고 회의장에 다다른 귀족들이 인사를 나누며 하나둘 자리에 착석하기 시작했다. 개중에서도 플로레트 백작은 인파에 파묻혔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많은 사람의 인사를 받고 있었다. 젊은 나이부터 여러 가지 국가 주도의 사업을 성공시킨 능력자이자, 더없이 훌륭한 인품과 성격까지. 왕마저 퍽 기껍게 여긴다는 그와 가깝게 지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았다.

16558819148278.jpg“반가운 마음이야 알겠지만, 다들 이만 자리에 앉는 것이 어떻습니까. 곧 폐하께서 오실 듯하여.”

16558819148257.jpg“아,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16558819148257.jpg“옳으신 말씀입니다. 다들 앉으시죠.”

플로레트 백작이 웃으며 던진 말에 다른 이들이 맞장구치며 자리를 찾아갔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시종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왕이 회의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요즘 들어 유난히 피곤한 안색의 그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턱짓했다.

16558819148257.jpg“다 모였나? 그럼 시작하지.”

그의 말에 귀족들이 작게 웅성거렸다. 플로레트 백작이 그들의 대표하여 손을 들고 물었다.

16558819148278.jpg“왕세자 전하께서는 오늘 회의에 참석하지 않으십니까?”

16558819148257.jpg“따로 조사할 것이 생겨 오늘 회의에는 부득이하게 불참하게 되었네.”

16558819173137.jpg“아아.”

귀족들은 그제야 고개를 주억거렸다. 남부 정벌이 끝나고 왕성으로 귀환한 이후, 국무회의마다 꼬박꼬박 얼굴을 비추던 다비드가 자리를 비울 만한 일이면 중요한 것이겠거니 납득한 것이었다. 이후의 회의는 사전에 달리 안내된 바도 없었던 만큼 무난하게 흘러갔다.

16558819148257.jpg“오늘 처리해야 할 안건은 이게 전부인가?”

16558819148257.jpg“예, 폐하.”

16558819148257.jpg“그럼 이만 회의를 파하도록…….”

그렇게 회의가 거의 마무리되어갈 즈음.

16558819148257.jpg“폐하, 잠시.”

바깥에서 무언가를 전해 들은 시종장이 급하게 왕에게 다가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 말을 들은 왕이 놀란 얼굴을 하더니 말했다.

16558819148257.jpg“다들 잠시 멈춰 보게. 들라 하라.”

왕이 갑자기 회의를 중단시키자 귀족들이 어리둥절하게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들도 왕과 다를 바 없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문가를 바라보게 되었다.

16558819173158.jpg“갑작스럽게 끼어들어 죄송합니다.”

회의장에 나타난 사람은 조사할 것이 있다며 자리를 비웠던 왕세자 다비드였다. 그가 반듯한 미소를 입가에 건 채 성큼성큼 회의장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귀족들은 오늘 회의에 불참한다던 그가 갑작스레 나타난 이유를 궁금해했다. 이윽고 왕의 앞에 선 다비드가 고개를 숙였다.

16558819173158.jpg“급한 사안이라 회의 중 끼어드는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용서하십시오, 폐하.”

16558819148257.jpg“분명 지난번 수도를 어지럽혔던 어둠 벌레들의 꼬리를 잡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들을 체포한 것이냐?”

왕의 말에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다비드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16558819173158.jpg“그들을 체포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의 뒤를 쫓다가 발견한 것이 있습니다.”

16558819148257.jpg“무엇이냐.”

16558819173158.jpg“대마법사 ‘알리사’의 동료들이 남긴, 켈베티아와 이어지는 마법진에 관한 자료입니다.”

16558819148257.jpg“……뭐?”

일순 경악으로 인한 침묵이 회의장 전체를 덮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폭발하듯이 말들이 터져나왔다.

16558819148257.jpg“뭐라고 하셨습니까, 전하? 지금 대마법사 알리사의 동료가 남긴 자료라 하셨습니까?”

16558819148257.jpg“대전쟁 때의 자료는 대부분 소실되어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16558819173158.jpg“맞습니다. 그러나 어둠 벌레들이 이 자료를 입수한 후 비밀리에 보관하고 있던 모양입니다. 안타깝게도 이 마법진을 구현해낼 만한 능력자는 없었던 모양이지만.”

매끄럽게 답한 다비드가 손짓했다. 그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나이 지긋한 왕성 마법사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 단언했다.

16558819173158.jpg“특정한 좌표는 없지만 마법진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저를 비롯한 왕성 마법사 3인이 이미 확인을 마쳤습니다. 틀림없이 켈베티아로 이어지는 마법진입니다.”

16558819173137.jpg“헉……!”

왕성 마법사들의 확언에 소란이 한층 더 커졌다. 다비드는 남들의 눈을 피해 비릿한 웃음을 흘리고는 표정을 갈무리했다.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돌아온 그가 빛바랜 종이 한 장을 높게 들어 올렸다.

16558819173158.jpg“더불어 이 또한 켈베티아로 이어지는 마법진 자료와 함께 발견한 것입니다.”

다비드가 엄숙하게 종이에 적힌 글을 따라 읽었다.

16558819173158.jpg“긴 연구 끝에 얻게 된 결론은 하나. 마왕의 심장을 여덟 조각으로 쪼개어 죽이면 마족을 ‘말살’할 수 있다. 인간을 위협하는 존재들을 완전히 없앨 수 있다.”

16558819173137.jpg“…….”

16558819173158.jpg“……대마법사 알리사의 연구 일지에서 발견한 글입니다.”

어떤 이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긴 세월, 그림자처럼 당연하게 존재하며 인간을 해치던 마족. 그들을 완벽하게 이 세상에서 지워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반응한 심장이 조금씩 빠르게 뛰었다. 그것은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는, 조건 반사적인 열망이었다. 그들은 긴 세월, 마족으로 인해 많은 것을 잃은 이들이었으므로. 다비드 역시 그 점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16558819173158.jpg“마법진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으로 보아 이 연구 일지의 진위 또한 분명하다고 보아야겠죠.”

16558819173137.jpg“…….”

16558819173158.jpg“하여 여러분께 간곡히 말씀드립니다.”

다비드가 종이를 테이블 위로 내려두며 침통한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16558819173158.jpg“우리는 더 이상 저 사특한 존재들에게 소중한 것들을 잃지 않아도 됩니다.”

16558819173137.jpg“…….”

16558819173158.jpg“더 이상 무고한 생명을 잃지 않아도 됩니다. 이 땅에 더는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됩니다.”

그의 말에서 느껴지는 절절한 분노, 비통함에 몇몇 귀족이 침음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다비드는 회의장의 귀족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맞추며 진지하게 말했다.

16558819173158.jpg“단 한 번.”

16558819173137.jpg“…….”

16558819173158.jpg“단 한 번의 전쟁이면, 이 모든 비극을 끝낼 수 있습니다.”

쿵, 쿵, 쿵. 심장이 뛰는 소리가 옆 사람의 귀에 들릴 것처럼 고조되었다. 다비드가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거세게 외쳤다.

16558819173158.jpg“저와 벨포르 공작이 선두에 서겠습니다. 우리들이 이 지독한 악연을 끊어내는 겁니다!”

16558819148257.jpg“옳소!”

16558819148257.jpg“왕세자 전하 만세!”

16558819148257.jpg“맞아! 장송곡은 이제 지긋지긋하다고!”

16558819148257.jpg“엘바레스여, 영원하라!”

귀족들은 끝내 벅차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환호했다. 몇몇은 감격으로 눈물을 터트리며 옆사람을 끌어안기까지 했다. 다비드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들을 둘러보다가, 귀족들 중 유일하게 침착한 태도로 저를 바라보는 플로레트 백작을 발견하고 어깨를 움찔했다. 하지만 그것은 워낙 작은 움직임이었던 데다가, 재빨리 평정을 회복한 다비드가 웃음 가득한 얼굴로 귀족들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탓에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왕이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나 크게 선언했다.

16558819148257.jpg“켈베티아 정벌을 준비하라! 우리의 손으로 기나긴 전쟁을 끝낼 때가 왔다!”

다비드와 닮은 보랏빛 눈은 묘하게 초점이 어긋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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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시 현재, 북부. 팍! 왕의 사절이 돌아간 후. 정벌군을 이끌고 켈베티아로 출정하라는 칙서를 집무실 한편에 아무렇게나 내던진 란델이 흉흉하게 이를 갈았다.

16558819237208.jpg“감히…….”

사절을 추궁해 들은 바로는 다비드가 회의 중간에 급박하게 끼어들어 란델을 부를 시간이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 말이 사실일 리가. 다비드는 의도적으로 출정 결정에서 그를 배제하기 위해 회의 중간에 제가 발견한 자료를 들고 끼어든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마족 랭의 일과 랭이 알려준 ‘평화주의 마족’의 존재를 알게 된 지금. 무턱대고 켈베티아로 쳐들어가는 건 무고한 희생만 늘리는 일일 뿐이었다. 만약 평화주의 마족들과 접촉해 협정이라도 맺을 수 있다면. 단순히 마족 전체를 적대하고 처단하는 것보다 훨씬 적은 피를 흘리면서도 평화를 이룩할 수 있을 테니까.

16558819237208.jpg‘평화주의 마족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확실한 증거를 손에 넣은 후 이야기를 꺼내 보려 했는데. 이렇게 선수를 칠 줄이야.’

란델은 애써 머리를 차게 식히며 집무실 책상 앞에 앉았다. 그는 펜을 들어 자신이 이번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점을 들어, 란델을 선두로 하는 이 출정 명령이 일방적이라는 항의 서신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서신의 말미까지 작성을 끝마쳤을 즈음 그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연녹색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16558819237208.jpg‘……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출정을 반대하는 이가 과연 존재할까? 인간과 마족은 오랜 시간 대립했고, 양측 모두 서로로 인해 잃은 것이 너무도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다비드는 그들을 완벽히 몰아낼 수 있다는 ‘희망’과 ‘가능성’을 제시했다. 차마 뿌리칠 수도 없을 만큼 달콤한 가능성. 마족은 인간의 공적이었다. 그런 그들을 몰아낼 방법이 있다는데, 이를 마다할 사람이 과연 존재할 것인가? 다른 귀족들이 란델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언급하지 않는 이유도 같을 것이었다. 인간을 위한 일이니까. 인간의 희생을 줄일 수 있는 일이라는데, 마다할 ‘인간’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

16558819237208.jpg“젠장, 왜 하필이면 지금……!”

란델은 결국 작게 욕지거리를 짓씹으며 서신을 구겨 버렸다. 평화주의 마족의 존재에 대해 입증하려 해도, 하필이면 최근 들어 비틀림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드물게 비틀림이 발생한다고 해도, 비틀림을 통해 넘어오는 것은 온통 대화가 통하지 않는 마물들이었다. 게다가 만약 천운이 따라 평화주의 마족을 사람들 앞에 내보이게 된다고 해도, 협정에 대한 제안이 받아들여질지가 의문이었다. 마족에 대한 인간의 불신은 뿌리 깊었다. 그들이 인간 아이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한 마족 랭의 이야기를 들은들, 그것을 믿으려 할까? 지금까지 인간이 보아온 것은 모두 소름끼치게 웃으며 소중한 이들을 해치는 쾌락주의 마족뿐이었다.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거칠게 헝클어트린 란델이 몸을 일으켰다. 그가 차게 굳은 얼굴로 예복 망토를 찾아 두르며 윌콧을 불렀다.

16558819237208.jpg“오스턴을 데려와. 수도로 가서 국왕 폐하를 만나 뵙겠다. 서신을 보내도 순순히 답을 주실지 알 수 없으니, 이편이 더 확실하겠지.”

16558819148257.jpg“알겠습니다.”

  *** 한편, 란델이 수도로 떠나는 그 시각. 실비아는 침실로 먼저 돌아가 초조하게 서성대고 있었다. 그녀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1655881925761.jpg‘설마 하니 그 자료를 찾아냈을 줄이야.’

‘알리사’를 켈베티아로 떨어트렸던 마법진. 실비아는 켈베티아에 떨어지는 그 순간까지도 제 동료들이 그런 마법진을 연구하고, 또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여러 번의 환생을 거치는 동안 그들의 연구 자료를 찾으려 애쓰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마왕이 되자마자 동료들을 찾아가 그들을 죽이고, 주변을 죄 불태워버린 탓에 거의 모든 자료가 소실되었다. 그래, 분명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1655881925761.jpg‘하필이면 그 자료가 어둠 벌레들의 손을 통해 남아 있었을 줄이야.’

실비아는 이제야 다비드가 그렇게 자신만만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인간들을 장기말처럼 쓰려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1655881925761.jpg‘……마족을 이 세상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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