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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그날의 기억 (79/118)

79. 그날의 기억2021.12.30.

예전, 실비아가 ‘알리사’였을 적. 어둠과 마족, 마물을 이 땅에서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는가? 알리사의 ‘어둠’에 대한 연구는 그러한 의문에서부터 출발했다. 어둠이란 마족과 마물들이 다루는 ‘마력’과 흡사한 능력이자 그들의 근원과도 같은 힘. 그러니 혹 ‘어둠’을 없앤다면, 마족과 마물도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알리사는 그러한 희망에 여러 실험을 통해 어둠이 생성되는 원인과 어둠을 다루는 법을 알아내려 애썼다. 하지만 연구는 쉽지 않았다. 어둠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또 어떠한 원리로 움직이는 것인지 파악하기가 너무도 막연했다.

16558819331284.jpg-……그나저나, 연구는 잘되어 가? 요즘 그것 때문에 바쁘다고 잘 만나주지도 않았잖아.

1655881933129.jpg-글쎄? 아마 지금까지 해온 정도만 더 하면 되지 않을까?

16558819331284.jpg-뭐야, 아직도 절반이나 남았다는 소리잖아.

1655881933129.jpg-절반밖에 안 남은 거지. 내가 뭐 못하는 거 봤어?

  레오의 말에 그렇게 자신 있게 대답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알리사는 나머지 절반을 알아내지 못한 채 지지부진하게 제자리를 맴도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밤마다 관자놀이를 꾹꾹 짓누르던 어느 날.

1655881933129.jpg“어? 너는…….”

이제는 일상과도 다름없어진 전투에서, 알리사는 제 양부모를 죽였던 마족을 다시 만났다. 알리사가 그 마족을 한눈에 알아보았듯, 마족 또한 알리사를 알아보았다. 그는 야살스럽게 혓바닥을 내밀어 입술을 핥으며 눈을 휘었다.

16558819331308.jpg“내가 유일하게 놓쳤던 그 사냥감이로군. 네 부모를 찢어놓을 때의 그 감각은 가히 최고라고 할 법한…….”

1655881933129.jpg“입 닥쳐.”

알리사는 그날 제 마법이 그리 잔인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본디 그녀는 대규모 마법을 시용하는 것이 아닌 이상, 전투에서 상대의 시신을 일부러 훼손하지는 않는 성격이었다. 오히려 마족이나 마물은 이래도 싸다며, 틈만 나면 그들의 시신으로 장난질을 치는 동료들에게 잔소리하는 위치였는데. 그날만큼은 그녀가 인간으로서 지켜오던 기본적인 도의, 그런 것들이 전부 머릿속에서 지워진 듯했다. 이 자식이 먼저 내 부모님을 죽였는데. 이 자식이 먼저 돌아가신 내 부모님을 모욕하고 조롱했는데. 나는 왜…… 저놈처럼 굴면 안 되는 거지? 새빨간 살의만이 머릿속을 지배했고, 정신을 차려보니 알리사는 피를 흠뻑 뒤집어쓴 채 숨을 작게 몰아쉬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스태프에서 진득한 피가 뚝뚝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발밑에는 차마 시선을 두기도 끔찍할 정도로 난도질당한 마족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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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동료들이 뒤늦게 맹수를 경계하듯이 주춤대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16558819331308.jpg“아, 알리사. 괜찮아……?”

1655881933129.jpg“……아.”

동료인 해럴드의 목소리에 뒤늦게 이성이 돌아왔다. 알리사는 황급히 미소를 띠며 얼굴에 묻은 피를 소매로 문질러 닦아냈다.

1655881933129.jpg“당연히 괜찮지. 전투도 끝난 것 같은데, 이만 돌아갈까?”

16558819331308.jpg“으, 응…….”

동료들은 저들끼리 알 수 없는 시선을 주고받으며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알리사는 자신이 저지른 짓에 당황하느라 그들의 반응을 미처 살피지 못하고 서둘러 진영으로 돌아왔다. 낮에 있던 그 전투의 여파인지, 알리사는 그날 밤 유례없이 핏빛으로 가득한 악몽을 꾸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1655881933129.jpg“……어?”

잠에서 깨어난 알리사는 제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낯선 힘에 당황한 음성을 흘렸다.

1655881933129.jpg“이건 분명…….”

어둠? 알리사는 제 손을 타고 도는 검은 그림자를 발견하고 반색했다. 어제 있었던 일은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씻겨져 나갔다. 갑작스럽게 어둠을 다룰 수 있게 된 이유를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그저 전날 마족과의 전투로 인해 무언가 변화의 기회가 있었던 건가, 짐작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유가 어찌 되었건 알리사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녀는 드디어 마족과의 지긋지긋한 악연을 끊어낼 초석을 마련했다는 사실을 알리려고 해럴드의 막사로 달려갔다.

1655881933129.jpg“해럴드! 이거……!”

알리사는 만면 가득 미소를 띤 채 해럴드의 막사로 뛰어들었다가 멈칫했다. 그녀가 막사 안의 광경을 보고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1655881933129.jpg“다들 모여 있었네? 안색이 별로인데 다 같이 포커라도 치며 밤을 지새운 거야?”

분명 알리사가 찾아온 곳은 해럴드의 개인 막사였다. 그러나 지금 해럴드의 막사 안에는 그녀의 동료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알리사가 이른 아침부터 막사를 방문하자 당황한 눈치였다. 알리사가 막사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기묘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깬 것은 어색하게 웃는 얼굴을 한 해럴드였다.

16558819331308.jpg“아…… 그냥, 어쩌다가 보니. 그보다 무슨 일이야, 알리사?”

해럴드가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를 은근슬쩍 제 몸으로 가리며 티 나게 말을 돌렸다. 그러나 어둠을 다루는 법을 터득했다는 사실에 정신이 팔린 알리사는 그것을 크게 의심하지 않고 해맑게 웃었다.

1655881933129.jpg“마침 다들 모여 있다니, 더 잘됐네. 할 이야기가 있었거든.”

16558819331308.jpg“할 이야기라니, 무슨…….”

1655881933129.jpg“축하해줘! 드디어 어둠을 다루는 방법을 터득한 것 같아.”

알리사는 그 말을 뱉으며 직접 어둠을 다루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손 안에서 뱅뱅 맴도는 그림자를 본 동료들의 얼굴이 한층 더 창백해졌다. 그들은 소리 없이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16558819331308.jpg“그, 그래. 정말 축하해.”

16558819331308.jpg“대단하다, 알리사.”

1655881933129.jpg“그러고 보니 레오는? 레오한테도 말해줘야 하는데.”

알리사는 들뜬 어조로 빠르게 말을 내뱉으며 주변을 살폈다. 그런 그녀를 해럴드가 막아섰다.

16558819331308.jpg“그 녀석, 며칠 후면 네 생일이라고 생일 선물을 구해 오겠다면서 자리를 비운 지 좀 됐는데.”

1655881933129.jpg“아, 그래? 혼자 다니면 위험하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16558819331308.jpg“너는 걔가 언제까지 어린애인 줄 아냐? 그 자식, 검 다루는 솜씨도 꽤 많이 나아졌잖아.”

1655881933129.jpg“오오, 해럴드 씨. 매일 투덕거리면서도 결국 레오를 걱정하고 있었던 건가요?”

알리사가 쿡쿡 웃으며 해럴드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는 그에 대한 답을 하지 않은 채 과장되게 웃더니 알리사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16558819331308.jpg“그보다 이렇게 말로만 축하할 게 아니라 제대로 축하해야지! 이렇게 기쁜 날 술이 빠지는 게 말이 되나?”

16558819331308.jpg“맞아, 맞아!”

16558819331308.jpg“이봐! 거기 술 남은 거 좀 있지? 한 잔 가져와 보라고!”

해럴드는 몇몇 동료와 알리사를 둘러싸며 축하의 말을 건네는 척 그녀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등 뒤의 이들에게 눈짓했다. 그의 신호를 알아들은 이들이 굳은 얼굴로 재빨리 술잔에 무언가를 섞어 건네주었다. 해럴드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그것을 알리사에게 건네고, 본인은 다른 잔을 집어 들었다. 그가 일부러 소란스럽게 목소리를 높였다.

16558819331308.jpg“자자, 건배하자고! 우리의 천재 대마법사를 위해!”

16558819331308.jpg“인류에게 도래할 평화의 시대를 기념하며!”

16558819331308.jpg“건배!”

해럴드가 먼저 입을 열자 나머지 동료들도 왁자지껄하게 그에게 맞장구치며 건배를 외쳤다. 알리사는 갑작스럽게 건네진 잔에 조금 어리둥절했으나, 이렇듯 소란스러운 축하가 싫지 않아 웃으며 술을 들이켰다. 그 동작이 그녀가 켈베티아에 떨어지기 전까지, 스스로의 의지로 행할 수 있던 마지막 행동이었다. ***

1655881933129.jpg“……왜?”

더러워진 볼 위를 눈물 한줄기가 가로질렀다. 알리사는 켈베티아의 새빨간 하늘 아래 열없이 주저앉은 채, 넋 놓은 눈으로 멍하니 중얼거렸다.

1655881933129.jpg“어째서, 왜……?”

내가 뭘 잘못했지?

1655881933129.jpg“내가…….”

잘못을, 했나? 알리사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정지한 뇌를 억지로 움직여 기억을 짜냈다.

16558819331308.jpg-……죄송합니다, 알리사 님.

  동료 중 가장 막내였던, 자신을 늘 깍듯이 ‘알리사 님’이라고 부르며 스승처럼 따르던 마법사가 일그러진 얼굴로 저를 마법진에 밀어 넣던 모습이 칼로 새겨진 듯 선명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등 뒤에서 차갑게 자신을 외면하던 다른 동료들의 모습 또한.

1655881933129.jpg“아…….”

알리사는 양손에 얼굴을 파묻고 짐승처럼 신음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여유롭게 곱씹고 되짚어볼 여유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16558819331308.jpg“인간?”

16558819331308.jpg“저놈이 어떻게 여기에?”

16558819331308.jpg“죽이자. 죽여.”

16558819331308.jpg“복수를!”

알리사는 제 냄새를 맡고 몰려드는 마족들을 필사적으로 도륙했고, 그 과정을 반복하며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1655881933129.jpg‘아.’

어둠이라는 힘은, 인간의 살의와 악의로부터 비롯되는 힘이라는 걸. 알리사가 마족을 죽일 때마다, 마물의 발을 잘라낼 때마다. 그녀가 지닌 어둠은 더욱 크고, 정교해졌다. 특히나 힘겨운 싸움에서, 그녀가 격앙되어 상대를 공격할 때면 그러한 경향이 더욱 강해졌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는 순간, 알리사는 절망했다.

1655881933129.jpg‘없앨 수 없어.’

이 세상에 인간이 존재하는 한, 그들이 지닌 악의와 살의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악의와 살의가 모조리 사라지지 않는 한 마물과 마족의 탄생을 막을 수는 없었다.

1655881933129.jpg“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켈베티아를 이 세상에서 지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알리사는 필사적으로 어둠의 연구에 매달렸던 시간이. 그로 인해 끝내는 동료들에게 버림받은 제 인생이 비참해 목놓아 울었다. 그날 이후 알리사는 한층 더 빠르게 어둠에 물들었고, 결국에는 바시스의 목을 베어내고 마왕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린 여파로 실비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눈을 꾹 감은 채 호흡을 고르려 애썼다.

16558819414776.jpg‘다 지난 일이야. 괜찮아.’

그래, 이 모든 것은 결국 벽지에 말라붙은 핏자국 같은 옛 기억일 뿐이었다. 지금 그녀가 생각해야 할 것은 어떻게 하면 다비드로부터 란델을 지킬 수 있을지였다.

16558819414776.jpg‘어둠도, 마족도 말살할 수 없다는 걸 알려야 하는데.’

인간이 멸족하지 않는 이상 마족 또한 멸족할 수 없다. 게다가 켈베티아에서는 마력이 극히 불안정했다. 란델과 정벌군이 출정한다 해도 평소처럼 잘 단련된 마법이나 검기를 사용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알리사의 동료들이 만들어냈던 이동 마법진도, 인간 세상에서 켈베티아로 이동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반대로 넘어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켈베티아를 정벌한 뒤 비틀림을 통해 넘어오려고 한다 한들, 그 정도의 대군이 짧고 유동적인 비틀림을 통해 이동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입구만 있고 출구는 없는 상황인 것이다. 하나 다비드는 제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얼마가 희생되든 상관없다는 듯했다. 정확한 사실을 감춘 채 사람들에게 ‘켈베티아와 이어진 이동 마법진을 발견했다’라고만 알린 상태였다. 하여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란델을 앞장세워 켈베티아를 정복하자 주장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할 일이지만, 문제는…….

16558819414776.jpg“……그걸 증명할 자료도, 설명할 방도도 없어.”

실비아가 무력감에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결국 ‘대마법사 알리사’의 기억이자, 그간 반복된 환생으로 인해 얻게 된 지식이었다. 현재 켈베티아의 불안정함에 대해 명확히 밝혀진 자료는 없고, 이동 마법진과 관련된 자료는 다비드가 쥐고 있다. 실비아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본인의 말뿐. 그러나 그녀는 ‘말’이라는 게 얼마나 힘없는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16558819414776.jpg‘미친 사람 취급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사람들 앞에서 마법 실력을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자신이 한때 마왕 ‘알리사’였다는 것을 확실히 증명해낼 수 없었다. 만약 사람들이 그녀가 ‘알리사’의 환생인 것을 믿어준다 해도, 외려 언제 마족처럼 변할지 모르지 않냐며 그녀를 해하려 할 가능성이 컸다.

16558819414776.jpg‘게다가 사람들이 다비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을 바꾸기도 쉽지 않을 테고.’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다비드의 존재였다. 그는 실비아를 만나기 전까지 사람들에게 ‘무난한 왕세자’의 이미지를 쌓아왔다. 거기에 최근에는 남부 정벌에서 승리까지 하고 돌아왔으니. 지금의 그가 왕국의 위상을 드높이고 인간에게 평화를 되찾아주겠다며 승산 가득한 전쟁을 주장한들 말릴 사람이 없……. 그때 실비아의 머릿속에 퍼뜩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16558819414776.jpg‘……아니.’

한 사람이 있다. 그녀는 급하게 책상으로 다가가 앉아 종이를 펼쳤다. 깃펜을 든 그녀가 바르게 글자를 휘갈겨 썼다. <아버지, 저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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